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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38)화 (38/74)

038.

색? 무슨 색?

성주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백은후를 봤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제 가슴에 박혀 있었다. ……이런, 미친! 성주안은 잽싸게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이 와중에도 백은후의 눈빛이 점점 탁해지고 있었다.

아니, 백은후 설마 게이였나? 왜 남자 몸을 저런 눈으로 봐. 그러고 보니 키스에 경악하던 주지찬과는 다르게 백은후는 처음부터 거부반응이 적긴 했다.

“……변탭니까? 거긴 왜 쳐다보고 있어요?”

가슴을 향해 있던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몰랐어? 난 예쁘면 안 가려.”

“뭘 말입니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고.”

기가 막혔다.

“저는 가립니다. 아무리 예뻐도 남자는 싫습니다.”

그의 시선이 입술에 닿았다. 아직 깨물린 자리가 홧홧해서 주안은 괜스레 입술을 핥았다. 기다란 손끝이 입술을 쓱 훑고 지나갔다.

“그런 것 치곤 잘 물던데?”

“뭘 물어요!”

버럭 성질을 부리고는 그의 손에서 셔츠를 낚아챘다. 다시 뺏길 거 같은 불안감에 몇 걸음 물러나서 셔츠를 입고는 그가 가져온 슈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엔 딱 맞는 슈트를 잘 차려입은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아까도 지금 입은 것과 비슷한 색의 슈트를 입었는데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 사이즈 때문인 것 같았다.

백은후 눈썰미가 좋긴 한가 보네.

백은후도 제가 고른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주안의 목에 푸른색 넥타이를 걸었다.

“좋아하는 매듭법은?”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대충 매시죠?”

“그럴 수야 있나.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여야지.”

오른쪽 손에 잡은 넥타이를 한 바퀴 휙 둘러 매듭을 짓는 손길에서 품위가 느껴졌다. 생긴 게 저래서 그런가. 별것 아닌 것에도 어른 남자의 섹시함이 느껴진달까? 참 쓸데없는 생각이다.

성주안은 빠르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우곤 거울을 봤다. 넥타이 하나 맸을 뿐인데 뭔가 더 분위기가 있어 보이는 복장이 완성되었다.

백은후가 어깨를 툭툭 털며 말했다.

“자, 지금쯤이면 마석을 판 돈이 계좌로 들어왔을 테니 가볼까?”

“까짓거, 그럽시다.”

성주안은 힘차게 답하며 백은후의 뒤를 따랐다.

길드 밖으로 나온 성주안은 눈앞에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저를 비추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사진을 찍을 거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일부러 모았다고 하기엔 많은 수였다.

“성주안 버퍼, 첫 임무를 수행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S급 버퍼로서 각오가 있다면요.”

“파티에 성좌를 제외한 이유는 뭡니까?”

“기부금은 얼마나 모인 거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성주안은 정치인들이 기자들을 부른 게 아니라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 이슈화되어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성주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백은후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백은후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성주안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내가 길을 열어 줄 테니 평소 하던 것처럼 해.”

백은후가 힘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곤 기자들을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자님들께서 S급 각성자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는 익히 알고 있으나…….”

백은후가 운을 떼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공적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닙니다. 이번 게릴라 던전 사태로 인해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그 중엔 중상자도 많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사고 현장을 직접 수습한 우리에게 소감이나 각오를 묻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와……. 표정 봐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진심인 줄 알겠다. 성주안은 입을 딱 벌린 채 백은후를 쳐다봤다. 사람들의 목숨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백은후의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오다니.

“아무리 사람 목숨이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는 겁니다. 취재도 분위기를 봐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은후가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백은후의 진심에 대해 알고 있는 성주안마저도 그의 말에 죄책감이 밀려들 지경이었다.

“사고 수습이 끝난 지금, 각성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친 분들을 위해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자 여러분들께서 하셔야 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바쁜 저희를 방해하실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백은후의 일갈에 기자들이 카메라를 내렸다. 백은후는 성주안의 어깨를 감싸고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됩니까? 기자들이 앙심품고 기사를 나쁘게 쓰면 어떡합니까?”

“내가 틀린 말 한 게 없는데 뭐가 문제야?”

“……그렇긴 하죠.”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한 모습을 보니, 희생자를 도와주는 일을 백은후에게 부탁한 건 정말 옳은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주차장에 선 백은후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스킬 쓰면 금방일 테지만 지금 사람들 이목이 쏠려 있어서 튀는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아.”

“네.”

냉큼 올라타자 자동차 문을 닫은 백은후가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갔다. 차가 출발했다.

“얼마쯤 걸립니까?”

“지금부터 한 시간. 밥 먹어서 졸리면 자도 좋아.”

그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졸리는 것 같기도 해서 눈을 스르륵 감았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갑자기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건 백은후의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단체] 공세윤 : 짜잔!

[단체] 주지찬 : 뭐야? 바빠죽겠는데.

[단체] 모준영 : ?

[단체] 공세윤 : 우리도 이런 거 하나 있어야 할 거 같아서요.

[단체] 모준영 : 공세윤 씨, 지금 우울한 상태 아닙니까? 이번엔 잊지 말고 약을 받아 가도록 하세요. 의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체] 공세윤 : 우울한 상태…… 맞아.

[단체] 주지찬 : 우울한데 이런 일에 먼저 나섰다고? 이상한데? 진짜 어디 크게 아픈 거 아닌가?

단체 메시지를 보던 성주안은 너무나도 모준영 같은 메시지에 저도 모르게 웃다가 주지찬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우울한 상태의 공세윤이 먼저 나서서 단체 메시지창을 만들다니?

의문은 금세 풀렸다.

[단체] 공세윤 : 우울함 맞는데에…… 개인적으로 연락하면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단체창 만들었어. 너무너무 연락하고 싶은데 내 차례가 아니잖아.

[단체] 성주안 : 좋은 아이디어예요. 안 그래도 단체 대화방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성주안이 나타나자 공세윤이 갑자기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단체] 공세윤 : 형, 형. 어디예요? 밥은 먹었어요? 나는 안 보고 싶어요? 저는 형 생각 엄청 많이 했어요. 조금 우울하긴 한데 형 생각하면서 꾹 참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햇빛이랑 바람이랑 같이 있어요.

그 뒤로도 공세윤의 폭풍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다. 한꺼번에 쏟아내는 질문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름 우울함 상태를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광대가 올라갔다.

우리 세윤이 다 컸네. 다 컸어!

[단체] 성주안 : (만세 하는 토끼 이모티콘) 세윤 씨, 멋지네요! 밥도 꼭 챙겨 드세요. 굶으면 더 우울한 법입니다.

[단체] 공세윤 : 네! 많이 먹을게요!

[단체] 성주안 : 그리고 여러분, 마석 팔아서 민간인들을 위한 기금에 사용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체] 주지찬 : 당연한 걸 가지고 고마워하지 마. 뭐, 아이디어는 좋았어.

[단체] 성주안 : 제가 아니고 백은후 씨 아이디어입니다.

[단체] 공세윤 : ?

[단체] 주지찬 : 뭐?

[단체] 모준영 : 조금 더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성주안 씨 정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군요.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있도록 하세요.

성주안은 나머지 셋의 반응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백은후가 그런 착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아무도 못 믿는 눈치였다.

“아까부터 왜 자꾸 웃는 거지?”

“백은후 씨 때문에요.”

“나?”

“네. 하하하.”

때마침 차가 빨간 불에 멈춰 섰다. 신호가 꽤 길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백은후가 옆으로 고개를 뻗어 성주안의 핸드폰을 잠시 확인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나 참…… 별 싱거운 사람들 다 보겠네.”

“그러니 평소에도 이미지 관리를 좀 하시지 그랬어요.”

백은후는 성주안에게 신호가 바뀌면 말하라고 하고는 제 핸드폰을 꺼냈다.

[단체] 백은후 : 오해들 하지 마. S급 버퍼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거니까. 다들 성주안이 희생…….

“바뀌었습니다.”

“알겠어.”

백은후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단체] 공세윤 : 치, 뭐. 그런다고 우리 형이 좋아해 줄 줄 알고!

[단체] 주지찬 : 민간인 구제를 그런 사특한 마음으로 하다니.

[단체] 모준영 : 공세윤 씨 그럼 약은 필요 없는 겁니까?

[단체] 공세윤 : 지금 그게 중요해? 백은후가 우리 형한테 찝쩍거리고 있는데. ㅂㄷㅂㄷ

다들 자기 할 말만 하기 바빴다. 글을 읽는 것뿐인데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모준영이 생산적인 말을 꺼냈다.

[단체] 모준영 : 다음 던전 공략은 언제 합니까? 이번 일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일이 밀렸습니다. 스케줄을 잘 짜야 할 것 같은데.

[단체] 주지찬 : 나도 봉사활동 스케줄 조절해야 해.

[단체] 공세윤 : 저는 조금이라도 빨리하면 좋겠어요. 제 턴 돌아오기 전에 형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까요.

마음 같아선 하루라도 빨리 스테이지 1부터 던전을 깨고 싶었지만 다들 나름의 스케줄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성좌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전략을 세울 시간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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