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
“그거 스탯도 같이 올라가는 것 같던데?”
하,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이런 와중에도 키스 스킬에 집착하다니.
백은후를 한심하게 쳐다보자 그가 오른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표정이 왜 그런 거야? 네 입으로 말했잖아. 지능캐라고. 지능 스탯을 올려서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를 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못마땅한 건가?”
“……아아! 그런 거였군요. 아니, 근데 키스 스킬은 쿨타임이…….”
“계속 자고 있어서 시간개념이 없네. 스킬 쿨타임 다 찼어.”
그렇게나 깊게 잤다고? 그렇다면 지금 백은후에게 키스 스킬을 쓴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름이 돋지?
고개를 들었더니 백은후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데 푸른 눈에 주술이라도 걸려 있는지 고개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턱이 붙잡혔다. 턱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그가 있었다.
“스킬이라도 키스는 키스지.”
그가 음험하게 속삭이고는 곧장 입술을 깨물었다. 항상 제가 먼저 덮쳐버린 주지찬과는 다르게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고개가 저절로 뒤로 젖혀지고 등이 침대 헤드에 부딪쳤다. 온몸이 감전되는 듯한 느낌에 너무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그 틈에 들어온 뜨거운 살덩이가 온 입 안을 헤집었다. 장난스레 해봤던 여사친과의 키스 이후 이렇게 뜨거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건 키스가 아니라 그냥 잡아먹히는 거 같은데.
위협적으로 입술을 눌러오는 백은후 앞에서 성주안은 순순히 입을 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급하고 난폭한 행동에 입술이 찢어진 듯 입속에 찝찔하게 피 맛이 올라왔다. 피 맛을 느낄 새도 없이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였다. 숨이 가빠 쌕쌕거리자 백은후는 숨마저 모조리 삼켜버렸다.
성주안은 미친 듯이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안달했다. 이미 스킬은 충분히 발동된 것 같은데 그는 입을 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처음과는 달리 부드러워진 혀가 찢긴 입가를 핥았다. 츄, 츱. 듣기 민망한 소리가 연이어서 들렸다. 떨어졌다 싶으면 다시 붙고 숨이 가쁘면 살짝 입술을 떼는 행위가 한참 이어졌다. 떨어진 입술 사이에서 은빛 타액이 늘어졌다.
눈을 뜨자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저를 향하고 있었다.
“…….”
“…….”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온몸을 타고 흘렀던 전류가 아직도 버거웠다. 잠시 후, 뒤로 물러난 백은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느낌이군.”
“……뭐,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올랐나요?”
“확실히 머리가 빙글 도는 느낌이긴 했어.”
사람을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해놓고 키득키득 웃는 얼굴이 얄미웠다. 성주안은 뺨에 손을 대고 붉은 피부를 식혔다.
이거 왜인지 속은 느낌인데?
눈을 가늘게 뜨자 백은후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사실은 말이야.”
백은후의 말을 정리하면 이랬다. 키스 스킬이 어떤지 한번 경험해 보고 싶어서 말을 돌렸던 것이고. 사실 해결책은 미리 다 마련해 놓았다고.
속은 것 같아서 분했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하는 거 예행연습을 했다고 치면 그리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마석을 판 돈으로는 백은후의 한백 길드에 호의적인 정치인들 몇 명과 함께 구호 재단을 마련하기로 이야기가 되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에 앞장선 국회의원이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성주안과 사진을 남기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졸지에 언론을 타게 된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적당히 회복된 것 같으니까 간단히 요기하고 빨리 움직이자고.”
그는 넘치는 힘을 주체하기 힘든 듯 아직 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성주안을 두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느라 바빴다.
사람들을 돕게 되었으니 다행이긴 한데 어째 전개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연락을 끝낸 백은후와 함께 식당으로 갔더니 그곳엔 미리 온 길드원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했다. 사방에서 두 사람을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단장님?”
“옆에는 누구지?”
“그 왜 있잖아. 얼마 전에 각성했다는 S급 버퍼.”
“단장이 계약했다던 그…….”
“계약만 하면 다행이게? 저놈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만 해도…….”
수군거리려면 좀 안 들리게 하든가!
성주안이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자 백은후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모두 신경 쓰지 말고 먹던 거나 먹어. S급 버퍼한테 구경시켜 주고 싶어서 같이 온 거니까.”
성주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식당과 깔끔한 식탁 그리고 호화로운 반찬에 입이 딱 벌어졌다. 간단히 요기하자고 한 거 아닌가? 도대체 백은후는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뭐 해? 어서 앉아. 오늘 밤을 넘기지 않아야 내 턴에서 일을 다 끝내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내일은 모준영과 함께해야 하니 시간은 하루밖에 없었다. 성주안은 백은후의 맞은편에 앉아 식탁을 쳐다봤다. 불고기, 갈비, 고등어구이, 갈치조림……. 눈에 보이는 메인급 요리만 해도 여러 개였다.
성주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젓가락을 들었다. 백은후가 피식 웃으며 성주안의 접시에 이것저것 잔뜩 얹어서 건넸다.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챙겨줄 때 든든히 먹어 둬. 오늘 안에 다 끝내려면 숨 쉴 틈도 없을 거야.”
성주안은 신나게 음식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실력 있는 셰프를 고용했는지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게임 속 세계에 와서 본래 세계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약간 아이러니이긴 했지만, 뭐 맛있으면 됐지! 한참 음식을 씹어 삼키다 보니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정치인들 말입니다. 이미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돈 아닙니까?”
핵심을 찔렀는지 백은후가 씩 웃었다.
“맞는 말이야. 그들은 돈이라면 환장을 하지.”
“그런데 우리 돈에 손을 안 댈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뒤에서 몰래 빼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걱정 마. 이미 뇌물은 먹일 만큼 먹여놓았으니까.”
“…….”
할 말이 없었다. 시커먼 놈의 마음은 시커먼 놈이 잘 안다더니 미리 뇌물까지 먹여놓았다니.
“성주안, 뇌물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글쎄, 돈보다 더 무서운 게 있나?
“바로 약점이야.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한백 길드에 호의적인 게 아니라고. 길드를 세우는 것과 동시에 약점 파악부터 먼저 했지. 그러니 날 배신한다는 것은 제 약점을 퍼뜨리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야.”
그렇다면 확실히 안심이었다. 백은후의 배신자 속성이 이렇게 든든한 일이 될 줄이야. 뭐든 양면성이 있다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뭐, 그렇다면 걱정할 거 없겠군요.”
밥을 다 먹고 백은후의 뒤를 따랐다. 바쁘다고 해서 당장 길드를 벗어날 줄 알았는데 그가 데려간 곳은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드레스 룸이었다.
그곳에서 성주안은 몇 벌의 정장을 입었다 벗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재미있었는데 똑같은 행동을 계속하다 보니 점점 지쳤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합니까? 무슨 배우 오디션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대충 입죠.”
그런데 이것도 영 아니었는지 백은후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벌써 입은 재킷만 해도 여러 벌이었다. 아니 본인은 워낙 피지컬이 받쳐주니까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옆에서 제 시중을 들며 고생하는 하급 각성자들의 피곤에 찌든 얼굴을 보니 불평이 쏙 들어갔다.
백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옷걸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옷 갈아입는 데 지쳐서 따라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백은후가 회색빛 도는 슈트를 손에 들고나왔다.
“이걸로 입어 봐.”
진작에 직접 골라 줄 것이지. 성주안은 한숨을 쉬며 옷을 받아들었다. 탈의실로 들어가려 하자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바쁜데 그냥 여기서 갈아입어. 옷도 제대로 입을 줄 모르는 것 같은데.”
같은 남자끼리 뭐가 어떠냐는 말이 덧붙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상하게 그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는 게 부끄러웠다. 셔츠까지 벗는 건 좀 그런데…….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가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어서.”
할 수 없이 팔을 빼자 재킷을 벗겨 낸 백은후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씁, 하는 소리를 냈다.
괜히 성질이야.
기다란 손가락이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에 성주안은 급히 백은후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기, 제가 벗을게요.”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왜? 이 와중에 느껴?”
“아니! 누가 그렇답니까? 애도 아니고 옷 벗는 거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내가 벗겨도 상관없겠네.”
백은후는 킬킬 웃으며 단추를 차례차례 풀어 내렸다. 급하다고 했으면서 단추를 푸는 손은 느리기만 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성주안은 애써 말을 돌렸다.
“옷 입고 경매장부터 갑니까? 마석 팔러요?”
“거기 갔다간 오늘 내로 일 못 끝내지. 비서한테 다녀오라고 했어. 아마 지금쯤 얼추 다 팔렸을걸?”
역시 다 가진 남자답게 그런 자잘한 일들은 사람을 시키는구나 싶었다.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 스륵, 셔츠가 벗겨지고 상체가 드러났다.
“……너, 색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