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안 가세요?”
“……형은 나랑 그렇게 빨리 헤어지고 싶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백은후한테 할 말이 있다니까. 좀 가라 가.
“뭐, 됐어요. 형이 무심하고 차가웠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흐읍.”
공세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둘만 남은 상황이 된 것을 확인한 성주안이 백은후에게 물었다.
“저기 백은후 씨, 이 세계에서 제가 어느 정도 강합니까?”
“네 힘? 상태창 열어보면 다 나오는 걸 왜 내게 묻는 거지?”
“아니……. 그런 힘 말고요. 권력에 관해서 묻는 겁니다. 제가 정부나 지자체를 움직일 힘이 있습니까?”
성주안은 제가 물어놓고도 어이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각성자라고 해서 정치인들을 움직이려 하다니. 원래 세계에선 팀장 하나도 못 이겨서 절절매던 놈이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여긴 게임 세계니까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던 백은후가 턱을 매만지며 입을 뗐다.
“기어이 그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건가?”
“……네?”
“S급 각성자로서 권력자들을 움직이겠다는 건 정치에 개입하겠다는 뜻인데 괜찮겠어? 그거 생각보다 골치 아플 텐데. 설마 모르고 말한 건 아니겠지?”
몰랐다.
전에 백은후가 이 세계에서 S급 버퍼의 가치가 높다는 말을 들어서 말했을 뿐 복잡한 정치에 개입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뭐야?”
“그냥……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요. 먹고 살기도 어려운 때에 다치기까지 했으니까 생활이 얼마나 곤란해졌겠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게 모두 제 책임 같습니다.”
“그게 왜 네 책임이야? 미쳐 날뛰는 성좌놈들 때문이지.”
일차적인 책임은 나오지 말아야 할 시기와 장소에 게릴라 던전을 터뜨린 성좌놈들의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성좌놈들이 그런 짓을 벌인 이유는 모두 희생의 창조자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러니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는 거다.
성주안이 계속 시무룩하게 있자 백은후가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구하고 싶은 게 뭐야?”
“말하면 들어주시는 겁니까? 백은후 씨도 복잡한 건 싫을 거 아니에요.”
백은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복잡해도 괜찮아.”
성주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백은후를 바라보았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라니.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네가 나를 원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겠지.
그때 파티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희생의 창조자라는 것을 대놓고 티를 냈으니 말은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희생의 창조자라는 것을.
백은후의 커다란 손이 이마 위에 내려왔다. 식은땀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 몇 개가 떨어졌다.
“진심이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정의감 같은 거 없어. 구급차를 가져온 것도 다 네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지.”
“…….”
성주안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백은후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가 제공한 구급차 덕분에 희생자의 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말해봐. 뭘 원해? 내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하면 움직일 수 있어.”
“……민간인 희생자들을 위한 보상이 지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금액이 문제겠군. 얼마 정도를 원해?”
“인명피해에 충분한 금액이 어디 있겠어요? 할 수 있는 한 최대 금액이었으면 좋겠어요.”
백은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러면 나 혼자 감당하긴 무리겠군. 인맥을 좀 동원해서 관련법을 살핀 다음에 처리하도록 하는 편이 좋겠어.”
백은후가 무슨 목적으로 도우려고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멋있어 보였다. 뭐, 외모만 놓고 보면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가 멋있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백은후의 얼굴을 보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중에 문득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맞다! S급 무기강화 마석이요!”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S급 보조 아이템은 물약도 비싸잖아요. 혹시 S급 무기강화 마석은 개당 얼마씩 하나요?”
“그건 왜 묻지? 못해도 하나에 1억씩은 줘야 살 수 있지. 무기강화 마석은 특수 던전에서만 구할 수 있으니까.”
마석이 하나에 1억씩이면 5,000개가 있으니까 이것만 다 모아도 오, 오천억?
성주안이 입을 딱 벌린 채 숨을 들이켜자 그제야 주안의 의도를 알아챈 백은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필요한 마석 몇 개만 가지고 나머지는 팔아서 거기서 나온 돈을 부상자들에게 주면 되겠군.”
백은후가 쿨하게 동의했다.
5,000억, 너무 많은 돈이었다. 사람이라 욕심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욕심이 죄책감보다 앞서는 건 아니었다.
일단 백은후가 동의했으니 나머지 세 명도 동의해 줬으면 좋겠는데…….
‘다들 동의해 주겠지?’
백은후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말했다.
“일단 희생자 현황 파악부터 하고. 마석은 각자의 인벤토리에 들어 있을 테니까 결정 나면 모으면 될 테고……. 그나저나 성주안, 배는 안 고파?”
팔에 꽂혀 있는 수액 덕분인지 크게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개를 젓자 메시지를 다 보낸 백은후의 시선이 주안에게로 향했다.
“사흘이나 누워 있었으니 먹고 싶은 게 있을 거야. 생각나면 말해.”
“네.”
나름 중요한 일을 끝내자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바로 움직이는 건 무리인 듯싶었다.
몇 시간쯤 잤을까?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처음 눈을 뜬 병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각성자 전용 주거시설도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깼어?”
백은후의 목소리를 들으니 처음 계약할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각성자 주거시설이 불결하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던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자고 있을 때 옮길 건 또 뭐람?
성주안은 불만을 가득 담아 백은후를 노려보았다. 백은후가 검지로 주안의 이마를 콕 누르며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깨우지 그랬어요. 보쌈하는 것도 아니고…….”
“보쌈이라니. 나는 계약을 이행했을 뿐이야.”
백은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몸을 일으켜 보았다. 아직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아까보단 훨씬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마석은 다 모았으려나?
“저, 백은후 씨. 다른 파티원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제 의견에 동의했습니까?”
백은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좋아하더군. 특히 주지찬이 널 천재라고 추켜세웠어.”
“다행이네요.”
“마석을 모았다고 다행인 건 아니지.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야.”
백은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표정만 봐서는 모략을 꾸미는지 아니면 진짜 문제가 생긴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백은후와 같은 편이니까 이제 그를 신뢰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요? 돈으로 바꿔서 기관에 전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백은후가 입매를 비틀며 비웃었다. 뭐지?
“너를 데려오는 동안 부상자를 파악하고 이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을 물색했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군요.”
구조할 때 봤던 공무원들의 태도가 생각났다. 사람들을 구하는 것보다 백은후가 던지는 떡밥에 더 관심이 많던 사람들. 하급 공무원들이 그러는데 위에 놈들이 어떨지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
하긴 정치인들이 잘했으면 이 세계가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진 않았겠지.
“저, 그런데…… 모준영 씨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와 같은 각성자이자 정의감 넘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요.”
“허어!”
백은후가 기가 막힌다는 듯 목을 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 해. 모준영은 정치에 개입 안 한 지가 꽤 오래됐어. 전에 한 번 주지찬 때문에 구호에 나섰다가 견제만 잔뜩 당했지.”
상급 공무원인 모준영도 나설 수가 없다니. 그럼 진짜 부상자들을 그냥 두고 봐야 한다는 건가? 5,000억이라는 돈을 쥐고서도?
성주안은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백은후 씨도 안 되는 게 있었네요. 항상 히어로처럼 나타나기에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인 줄 알았는데…….”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은후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실망했다는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든 것 같았다. 성주안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불난 가슴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백은후 씨가 어떤 분입니까? 전뢰 스킬로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세계 최강 헌터이자 우리 파티 최고의 두뇌, 지능캐 아닙니까? 그런 사람도 불가능한 게 있다니. 저는 이제 앞으로 누구를 믿고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 겁니까. 하아…….”
성주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백은후의 눈치를 살폈다. 꽉 다물린 백은후의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마치 다 알면서 속아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 어떠랴? 사람이 죽어가는 걸 눈앞에서 지켜봤고 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기회가 생겼는데…….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제가 우스워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은후 씨, 웃지 마십시오.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충분히 하실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머리 좀 굴려보세요.”
이 말은 정말 진심이었다. 이 세계에 갑자기 떨어진 성주안보다야 세계를 손에 쥐고 뒤흔들면서 착실히 야망을 실현해가는 백은후가 세계에 대해 빠삭할 테니까.
침묵하던 백은후가 드디어 입을 뗐다.
“키스 스킬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