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그 시각,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성좌들은 길드 회의를 소집하고 있었다. 티페레트인 희생의 창조자를 투표로 쫓아냈던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성좌모임’이었다.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갑자기 버퍼 각성은 왜 한 건데요? 게다가 주지찬은 시1발, 왜 갑자기 부작용이…….
[길드] 전차를 타는 전사(게부라) : 조1ㅈ같은 놈이야. 공세윤 하는 말 못 들었어? 죽어도 좋다잖아. 미쳐도 어느 정도껏 미쳐야지. 시1발.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다들 진정하세요. 아니다. 사실 진정이 안 되긴 해요. 저는 백은후가 자기 돈 써서 사람들 구하는 거 처음 봤잖아요. 너무 열받아요.
[길드] 로브를 벗은 마법사(예소드) : 모준영은 그나마 좀 낫긴 한데……. 그나저나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보니까 공략법도 다 아는 눈치예요. 성좌인 기간도 짧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사실 성좌들의 계획은 원래 이러했다.
던전에 트릭을 심어 각성자들을 단체로 위험에 빠뜨린다. 그때 성좌들이 나서서 각자 마음에 드는 각성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성주안과의 계약을 파기하게 하고 저와 계약하게 만드는 거다. 물론 성주안은 던전 안에서 죽어주면 가장 좋고.
그런데 성주안이 트릭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그 탓에 애써 세운 계획이 실패하게 된 것이다.
성좌들은 한숨만 푹푹 내쉬며 그 누구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게부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길드] 전차를 타는 전사(게부라) : 뭐, 이번 던전은 운 좋게 얻어걸렸다 치고 다음 던전에도 트릭을 만들면 괜찮겠지. 다들 너무 고민하지 말자고.
[길드] 로브를 벗은 마법사(예소드) : ㅁㅊ. 게부라는 진짜 생각이 없어요. 지금 보면 모르겠어요? 몬스터 특징까지 줄줄 말하잖아요. 그게 뭐겠어요. 성주안이 다 알고 있단 뜻이잖아요. 전투로는 방해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예소드 말 맞아. 이미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파티를 방해하는 게 더 낫겠는데?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파티를 방해한다고?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드디어 해결책을 찾은 성좌들은 ‘ㅋㅋㅋ’를 남발하며 서로 똑똑하다 치켜세우기 바빴다.
그러나 다들 속으로는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속마음] 지혜의 관찰자(비나) : 덜떨어진 성좌들만 믿고 있어선 안 되겠어. 상황을 지켜보다가 성주안을 매수하든가 해야지.
[속마음]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목적만 생각하자. 백은후만 살려서 데려오면 되는 거지. 방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백은후를 데려오는 게 중요해.
[속마음] 전차를 타는 전차(게부라) : 화난다. 화나! 내가 S급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성주안 저 새끼는 죽이고야 만다.
[속마음] 로브를 벗은 마법사(예소드) : 아니, 성주안 얘도 이제는 일단 각성자잖아? 게다가 버퍼니까 특수능력이 있다는 거고, 그럼 나머지 파티를 A급으로 채우더라도 얘만 데려오면 되는 거 아냐? 난 방해 안 해야겠다.
성좌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서 성주안의 던전 공략을 방해할 계략을 꾸몄다. 계략의 실행은 당장 지금 공략 중인 이벤트 던전부터였다.
* * *
“그럼 이제 게이트 열고 들어가면 되는 건가?”
성주안은 침착하게 손잡이 위에 올려진 주지찬의 팔을 끌어내렸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 다 말하지 못했다.
“성질 급한 건 알겠는데 잠시만 참아봐요.”
“…….”
“다들 파티 전투는 처음이잖아요. 솔플과는 달라요. 게다가 우리는 성좌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요. 쉽게 접근했다가 잘못되면 전멸이에요.”
다들 미심쩍은 얼굴로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만 성주안은 진지했다. S급 캐릭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이 시점에 캐릭의 목숨을 담보로 실험하고 싶지 않았다.
“게릴라 던전의 늑대군단은 등급이 높고 힘이 세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포식자인 데다가 대장 늑대가 무리 전원을 먹여 살려야 하므로 전략적으로 행동하죠. 서열을 철저하게 따르…….”
“그래서? 본론만 말해.”
이런, 회사에서 브리핑하던 습관이 나와버렸다. 회사원은 이래서 안 돼.
성주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놈들의 가장 큰 약점은 무조건 대장의 명령을 따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의 부하들은 생각 없이 움직인다는 거죠.”
백은후가 말을 보탰다.
“대장을 찾아 죽이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키스 스킬은 공세윤이나 주지찬에게 쓸 생각이라는 건가?”
이 던전에 있는 늑대는 주로 추운 지역에 서식하는 늑대였으므로 불에 더 약했다. 그러니 키스 스킬은 당연히 주지찬에게 쓸 생각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최후의 일격은 주지찬 씨가 하게 될 테니까요. 백은후 씨는 모준영 씨가 몰아오는 늑대들만 잘 감전시켜 주시면 돼요.”
“파티 플레이가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쉽게 수락하지 않았을 거야.”
괜히 하는 말이었다. 백은후 같이 음흉한 놈이 모를 리가 있나? 입구만 지키라고 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거지.
“이미 사인한 거 어쩌겠습니까? 보상만 생각하세요. 보상만! 그리고 네 분 한 줄로 쭉 서세요. 버프 넣어야 하니까.”
가만히 있던 모준영이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우리가 줄을 서 있으면 주안 씨가 와서 각자 손잡고 안아주고 하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말이 그렇게 됐다. 뭔가 굉장히 수치스러운 그림이긴 한데……. 어쩌겠는가? 스킬이 이 모양인데.
성주안은 이를 꽉 깨물었다. 사람 목숨 앞에서 부끄러운 게 어디 있나. 하면 하는 거지.
“공세윤 씨가 저와 계속 붙어 있을 거니까 세윤 씨한테 먼저 할게요. 세윤 씨는 버프 받으면 바로 게이트 문부터 여세요.”
“네에! 열심히 할게요.”
공세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성주안은 그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하고 몸을 끌어안았다. 악수의 지속시간은 1시간, 포옹의 지속시간은 고작 1분 30초였지만 공세윤은 계속 옆에 따라다닐 테니까 짧아도 상관없었다. 주지찬에게도 똑같이 하고, 문제는 떨어져서 임무를 수행해야 할 백은후와 모준영이었다.
포옹의 지속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백은후의 손을 잡고 흔들자 그가 그대로 당겨 품으로 이끌었다. 단단한 가슴에 뺨이 닿은 순간 주안은 진심으로 백은후의 안전을 빌었다.
“다치지 마세요. 백은후 씨가 실패하면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알아, 걱정하지 마.”
단단하고 힘 있는 목소리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다음은 모준영.
먼저 다가와서 손을 붙잡을 줄 알았는데 모준영은 먼 산만 보고 있었다.
뭐지? 수줍어하는 건가? 전투를 코앞에 놔둔 와중에 부끄러워할 시간이 어딨어.
“금강불괴 씨, 어서 와서 버프 받으셔야죠?”
주안의 말에 모준영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다.
“그, 그런 이명은 부르지 마십시오.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알겠으니까. 어서.”
주안은 그의 손을 잡아 흔들고 백은후가 제게 했던 것처럼 그의 팔을 당겼다. 당연히 꿈쩍도 안 해서 스스로 가서 안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안은 채로 게이트로 이동합시다. 그래야 1초라도 유리해요.”
“아니 꼭 그렇게까지…….”
모준영의 반발을 무시한 채 그의 몸을 끌고 게이트 앞까지 갔다.
아오오! 우우!
안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긴장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시작이구나. 정신 차리자.
“몸을 떼면 바로 안으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모준영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우, 우우!
던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늑대용병부대가 몰려왔다. 모준영이 함성 스킬을 썼다.
크아아아!
하울링 소리가 모준영의 함성에 덮이는 동안 당장이라도 파티원들을 공격할 것 같았던 늑대들이 모두 모준영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안은 재빨리 세윤에게 업혔다.
“우린 뒤도 돌아보지 말고 깊숙한 곳으로 계속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길잡이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네!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게요.”
공세윤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분 동안은 모든 늑대의 주의가 모준영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안전했으나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함성 스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은신하고 있던 궁수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모조리 다 얼리면 되니까 겁먹지 마세요.”
공세윤은 그렇게 말하며 냉정한 포식자 스킬로 보이는 족족 얼리려고 했다. 그런데 북방계 늑대들은 공세윤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활을 쏘아댔다. 아직 방어 스킬이 남아 있는 상태라 다치진 않았지만 문제는 성주안이었다.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 공세윤의 등에 바짝 붙어 있는데 뒤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지찬이었다.
“뒤는 내가 맡아. 뒤에서 방어하면서 늑대 새끼들 다 태울 테니까 걱정 말고 방향이나 잡아.”
주지찬의 든든한 음성에 마음이 놓였다.
“두 분, 스킬 쓰시면서 제 말 잘 들으세요. 아마 두 분은 환각에는 빠지지 않겠지만 보스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환상이 보이고 이명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까 말한 그 환각 스킬 말하는 거야?”
“네. 그러니까 우리끼리 암호를 정해야 해요. 상대가 평소와 다른 말을 한다거나 하면 정신지배를 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제안에 공세윤이 먼저 아이디어를 냈다.
“그럼 전 사랑해요. 라고 할래요.”
“그런 거 말고요. 진짜 뜬금없는 말이 좋아요.”
주지찬이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금강불괴 어때?”
“하하하, 좋네요.”
웃으며 계속 던전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는데 갈림길이 나왔다. 어두운 오른쪽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약간의 빛이라도 있는 왼쪽 길을 갈 것인가.
성주안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침착하게 정신을 집중했다. 상태창이 떴으니까 잘하면 지도도 있을지도 몰라. 머릿속으로 지도를 떠올리자마자 눈앞에 맵이 그려졌다. 오, 역시.
제발, 보스 표시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지도엔 길만 표시되어 있을 뿐 보스의 위치는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침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