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주안은 침을 꼴깍 삼키며 네 사람을 쭉 둘러보았다. 네 사람 모두 자신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을 설득해 던전을 공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다짐했으나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안이 입을 벙긋거리며 머뭇거리자 주지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백은후도 말을 거들었다.
“던전에 대해 잘 알면 당장 공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모준영이 백은후의 말에 반대 의견을 냈다.
“다 알고 있는 사람 말이니 유심히 들어보죠.”
“맞아! 형 말부터 들어. 모두 쉿!”
네 사람 모두 성격과 행동이 다르니 정체를 밝히는 것도 각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르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희생의 창조자로 대화했던 내용과 모션을 이용하면 되겠지.
주안은 가장 먼저 백은후에게 다가갔다.
“백은후 씨, 누가 코인 달래? 계약하자고 했지, 라고 말했었지만 우린 결국 계약하게 되었네요.”
“아, 아니…….”
두 사람만 알 만한 말을 꺼내자 백은후가 평소답지 않게 동요했다. 커다래진 푸른 눈동자가 주안에게 고정된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주안은 머뭇거리지 않고 셋 모두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그리고 공세윤 씨, 이리 와요. 뺨 한번 쓰다듬어 봅시다.”
공세윤은 “히익.”하고 놀라면서도 주춤주춤 걸어 주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안이 뺨을 쓰다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세윤 씨,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눈을 맞추며 머리를 흩뜨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공세윤이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놀람, 흥분, 그리고 서러움이 가득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는데 던전 게이트가 쾅쾅, 소리를 내며 얼른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주안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모준영 씨, 민간인들을 위해 기부한 돈은 잘 사용되고 있을까요? 그리고 주지찬 씨, 당신이 병원으로 업어 간 그 아이는 지금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겠죠?”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들 놀라신 걸 압니다. 두 사람밖에 모를 만한 사실을 제가 입으로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지금 마음이 급해요. 이왕 던전에 들어가는 거 당연히 사상자는 없어야 하고, 던전도 클리어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겠어요?”
주안의 시선이 파티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한 백은후, 의심을 지우지 못했는지 아직도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모준영,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죽일 것처럼 노려보지만 공격 의지는 보이지 않는 주지찬, 그리고 훌쩍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는 공세윤까지…….
어쩌면 아무도 없는 낯선 세계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신세인 자신과 함께 싸워 줄 소중한 동료들의 얼굴을 눈에 담고 마음에 새겼다.
“저는 공략법을 알아요. 이것만 기억한다면 성좌들이 아무리 방해해도 우리가 이길 겁니다.”
백은후가 물었다.
“정말인가?”
“네, 모두의 단합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믿고 움직인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더 질문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자신을 믿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상한 말만 늘어놓는 저를 한심하게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은…….
“모두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미 페널티가 어마어마한 문서에 사인을 마쳤다. 그러니 곤란해지기 싫으면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겠지!
성주안은 게이트 앞에서 이 던전이 여기서 얼마나 버텨줄지를 가늠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생기는 건 연휴 이벤트로 기획한 것이었다. 특별한 카드 아이템이 나오는 던전을 이벤트성으로 만든 것이기에 제한 시간이 있었다.
그때 기획하기로는 접속하고 다섯 시간 안에 클리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입한 이후의 시간이었고, 연휴 이벤트인 만큼 게릴라 던전은 연휴 기간인 3일 동안은 이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면 아직 시간은 충분해!
생각을 마친 주안은 파티원들에게 아까 시스템창에서 본 몬스터 정보에 대해 말했다. 설명을 들은 파티원들은 다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정도 몬스터 등급은 솔플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안은 엄중하게 경고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특히 보스몹인 늑대인간은 인간형에 환각 관련 스킬을 써서 등급과 상관없이 조심해야 합니다. 게다가 A급과 B급 몬스터도 피통 자체가 솔플 던전과는 달라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전략을 알려드릴 테니 잘 들어주세요.”
다른 파티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역시나 주지찬이 문제였다.
“아니, 그까짓 거 대충 불로 확 태워버리면 되는 거 아냐?”
“네, 태우시면 됩니다. 그런데 주지찬 씨, 궁수는 공격력이 약한 대신 은신술을 가진 몬스터예요. 불 속성 계열 스킬을 쓰려고 해도 공격 대상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쓸 거 아니에요.”
그제야 주지찬은 입을 다물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지금부터 전략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먼저 백은후 씨.”
백은후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했다. 주안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입구에서 모준영 씨와 함께 합동전략을 펼쳐주세요.”
“……뭐? 모준영이랑 뭘 하라고?”
지금까지 감정을 잘 숨기고 있던 백은후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 같은 헌터를 입구에서 보병들과 싸우게 하다니……. 너는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저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모든 계산이 끝난 성주안은 백은후의 말을 무시하고 모준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준영 씨는 입구에서 함성 스킬로 몬스터들을 모아주세요. 여기저기 은신하고 있는 궁수들을 불러내서 입구로 유인해 주셔야 합니다. 이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신한 궁수들을 찾아내는 거니까요.”
모준영은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며 불만을 토해 냈다.
“그런데 왜 하필 백은후 씨와 함께해야 하는 겁니까? 불이나 번개나 거기서 거기일 텐데, 차라리 주지찬 씨와 하겠습니다.”
여기서 대답을 해줘 봐야 말만 길어질 뿐이었다. 주안은 네 마음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모준영을 보고 있다가 공세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세윤 씨와 주지찬 씨는 저와 함께 던전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거예요.”
그 말에 공세윤은 “만세에!”라고 외치며 손을 번쩍 들었고 주지찬 또한 겉으론 툴툴대면서 입꼬리를 쓱 올렸다.
“두 분 다 좋아하실 거 없습니다. 잘못하면 늑대인간의 환각에 빠져서 던전 안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요.”
조용히 있던 백은후가 갑자기 다가와 주안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단단히 미쳤나?”
“저 정상입니다.”
“정상인 녀석이 탱커도 없이 딜러 둘만 데리고 보스에게 가겠다는 게 말이 돼?”
다들 표정을 보아하니 백은후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환각 스킬을 쓰는 보스몹이 있는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나름의 공략법을 따라야 했고, 그 공략법은 개발자인 성주안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던전은 5인 파티로 몬스터를 해치우며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형식이었는데 이벤트 던전은 달랐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클리어 보상인 특별카드를 쉽게 가져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머리를 쓴 트릭이었다.
성주안은 한숨을 쉬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백은후 씨는 원래 영리하죠. 지능이 높은 이들은 환각 스킬에 약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쓴 수에 제가 당한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최대한 보스 몹과 떨어져서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궁수와 맞서는 게 가장 이득이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모준영이 말을 보탰다.
“그래서 신념이 강한 주지찬과 자기 자신의 생각에 빠져 상태 이상이 널을 뛰는 공세윤을 데려가라고 하는 거군요.”
크으, 역시 모준영. 하나를 알려주면 백을 아는구나! 감탄한 성주안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성주안 씨. 그러면 당신도 위험한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갑자기 튀어나온 ‘성주안 버퍼’라는 캐릭터였으니까.
지능캐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스탯도 불분명하며 가지고 있는 스킬이란 전부 보조 스킬뿐인 존재.
하지만 던전 구석구석의 지리를 알고 있는 제가 가지 않으면 트릭을 알지 못하는 나머지 파티원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게임 속에서는 캐릭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지혜의 마을에서 다시 도전할 수 있겠지만 여기선 죽으면 그냥 끝인 거다. 그러니 어쩌랴. 최대한 환각에 빠지지 않게 정신 무장을 하고 던전을 클리어하는 수밖에.
주안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 국내에서 유일한 S급 버퍼 성주안이잖아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각자 자신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시면 되는 거예요.”
백은후가 말했다.
“솔직히 잘 믿기지는 않는다만 우리 주안이 말이니까 믿어볼까?”
거기서 우리 주안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건데요? 라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믿어준다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백은후를 시작으로 나머지 세 사람도 말을 덧붙였다.
“계약서에 사인했으니 어쩔 수 없겠네요.”
“저어는, 우리 희생의 창……. 아니 성주안 형이 하자는 건 다 좋아요. 무조건 형이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그러다가 만약에 제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행복할 것 같아요.”
“그래, 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다들 잘 들어요. 내가 죽으면 내 시체 찾으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든 곧장 던전을 탈출해서 꼭 살아남아요. 살아서 사람들 구해. S급 각성자들이 많이 살아야 사람들을 구하지.”
주안은 제가 만든 캐릭터들을 쭉 훑어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의지를 다지는 그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어떡하겠는가.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게 저인데…….
하지만, 이들은 모두 S급이고 능력도 출중한 데다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끼고 있으니 공략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성주안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외쳤다.
‘기다려라. 성좌놈들. 내가 반드시 복수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