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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28)화 (28/74)

028.

“주지찬 씨,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어, 왜 이렇게 늦어. 어차피 사인도 안 할 건데.”

“…….”

이건 뭐 얼굴 보자마자 거절이라니……. 희망이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갑자기 왜 싫다는 겁니까? 이유라도 한번 들어봅시다.”

주지찬이 짧게 말했다.

“난 각성자가 싫어. 함께 다녀야 한다니 끔찍해.”

“왜요? 던전을 파괴해서 인류를 구원하려면 각성자들간의 연합도 필요한 법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엿 같아!”

“그럼 성좌와 계약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주지찬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시발, 성좌는 더 싫어.”

그럼 뭐 어쩌자는 건지. 이유라도 말해 주고 싫다고 해야지 무작정 우기니까 갑갑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참아야지 뭘 어떡해. 자꾸 밀어붙이면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참자.

성주안은 아무 말 없이 주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검은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성좌가 싫은 이유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각성자가 싫은 이유는요? 제가 듣기론 주지찬 씨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모준영 씨도, 공세윤 씨도, 백은후 씨도 사람들을 도운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주지찬 씨의 목적에 부합하는 거 아닙니까?”

주지찬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봐야 각성자 놈들은 이기적이지.”

“그래서 싫다고요?”

“아니, 내가 각성자를 싫어하는 건…….”

주지찬이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민이 깊은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주지찬에게 각성자를 싫어할 만한 상처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주지찬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예상도 못 한 말이었다.

“힘이 너무 세기 때문이야.”

“……네? 두려워서요?”

“어, 너무 두려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주지찬에게 저런 공포심이 있었나? 웬만한 몬스터들 앞에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백은후 앞에서도 떠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어깨가 축 늘어진 걸 보면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주지찬 그럴 거 없어. 내가 너 만들 때 온갖 센 스킬은 다 넣어서 만들었는데.

친구와의 싸움에서 져서 돌아온 아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주지찬 씨가 얼마나 센데요! 볼폭탄을 펑펑 터뜨리는데, 크으……!”

기를 좀 살려주기 위해서 감탄하자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표정을 굳히고 씁쓸하게 말했다.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지.”

“네? 세면 안 무서워야 정상이죠.”

이상하게 대화가 자꾸 겉도는 기분이었다. 단순한 주지찬이 저렇게 복잡한 생각을 할 리가 없는데?

“센 것들끼리 부딪히면 끝은 죽음뿐이야. 약한 사람들과 시비가 붙으면 적당히 혼내줄 수 있어. 내가 힘 조절을 하면 되니까. 하지만 각성자들은…….”

주안은 귀를 의심했다. 제가 잘 알아들은 게 맞는다면 주지찬은 지금 자신이 각성자들을 해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무 강하니까 사정을 봐줘 가면서 싸울 수가 없어. 그래서 두려워. 내가 그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일까 봐. 살인이 정말 싫거든.”

“아…….”

주지찬 진짜 정말…… 아니, 주지찬 형님, 내가 만들었지만 인성이 진짜 말도 못 하게 훌륭하잖아.

성주안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주지찬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계약서에 사인하게 해야 하는데도 지금은 그냥, 주지찬을 보며 그의 마음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래, 세상엔 언제나 저런 사람이 필요했다. 현실에선 찾기 힘드니까 게임이라는 판타지에서라도 이런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주지찬이었다.

성주안은 저도 모르게 주지찬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주지찬이 질색하며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와.”

“주지찬 형…….”

“갑자기 형은 무슨……. 낯 뜨겁게. 저리 안 비켜?”

주안은 공손하게 주지찬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멋있으면 다 형님이죠. 진짜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형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에요.”

“가, 갑자기 이게 미쳤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주지찬은 가둬진 손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도 모자라 몸에서 열이 나는지 손이 뜨거워졌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지찬 씨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먼저 공격할 리는 없으니까요.”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하지?”

성주안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그러곤 공세윤 덕에 추가해 놓은 조항을 손가락으로 콕 집었다.

“여기 상호불가침 조약이 있습니다.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했단 뜻이에요. 헌터들끼리의 계약도 어길 시엔 페널티가 장난 아닌 거 아시죠?”

운 좋으면 스킬 하락, 운 나쁘면 등급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들었다. 이건 성주안이 만든 설정은 아니었고, 모준영에게 들은 말이었다. 본 게임에서는 헌터들끼리의 계약 자체가 없었으니까.

“확실히 이게 있으면 좀 덜 하겠군.”

기회가 왔다 싶었다. 그래서 성주안은 그의 손을 덥석 잡고 펜을 쥐여주었다.

“자, 이제 사인하시죠? 진짜 저 어떡하냐고요. 아나키스트들이나 외국 헌터들이 납치하면 제 힘을 악의 무리에게 강제로 뺏길 수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다칠지 생각해 보셨어요?”

“……그건 안되지.”

버프 세 배 효과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주지찬에게 가장 잘 먹히는 협박일 것이다. 이 힘을 나쁜 놈들이 써서 인류에 해를 끼친다고 하면 사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예상대로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사인했다. 혹여 주지찬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그에게서 얼른 계약서를 빼앗아 마지막으로 서명을 마쳤다.

주안은 마지막으로 빠진 부분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곤 뿌듯하게 웃었다. 이로써 S급 각성자 다섯 명의 사인이 적힌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 * *

계약이 끝났으니 바로 던전을 클리어하러 가려고 했던 주안은 사냥할 준비는커녕 물약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선 시설에 입주부터 하고 물약도 사고…….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보호를 명목으로 네 명 중 하나와 항상 붙어서 생활해야 하니까 벌써 머리가 아팠다.

공세윤과 함께 전용 쇼핑몰로 가서 물약을 사려고 하자, 공세윤이 지갑을 뺏으며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또 왜요.”

“성주안 씨가 돈을 왜 내요.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요.”

“네네, 고맙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봐야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해서 고맙다고 말하자, 공세윤이 직원에게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우선 생명의 물약 1,000개 주시고요.”

“아니 무슨……. 1,000개까지는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저는 던전 들어가면 버프만 줄 건데…….”

공세윤이 눈을 치켜뜨고 노려봤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얼려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래 봐야 네 돈 나가지, 내 돈 나가냐?

그러자 공세윤이 스킬의 물약과 치료의 물약 등등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물약을 1,000개씩 주문하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야 어차피 개수와 상관없이 종류로 채울 수 있으니까 몇 개가 되든 상관없는 데 굳이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 싶었다.

잠시 후 직원이 물약을 가져왔고, 공세윤이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몇십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결제했다.

“인벤토리에 잘 챙겨 넣어요. 물약 마시는 법은 알죠?”

“네, 압니다.”

“그럼 이제 집에 가요. 아, 맞다! 식료품도 사 가야죠?”

공세윤의 목소리가 어쩐지 엄마가 시장 갈 때 따라온 아이처럼 신나 보였다.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이 걱정되면서도 또 너무 좋아하는 공세윤을 보고 있으니 짠하기도 해서 기분을 맞춰주기로 했다.

저녁거리를 산 후에 공세윤의 차를 타고 거주 시설에 도착하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각성자 전용 거주 시설 총책임을 맡은 이민재라고 합니다. 성주안 버퍼님은 특별 보호 대상자로서 일반 거주 시설이 아닌 특별 거주 시설에 머무르게 됩니다. 따라오시죠.”

그를 따라 긴 복도를 지나니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거기에 올라타자 직원이 제일 꼭대기 층을 눌렀다.

이거, 생각보다 고급인 거 같은데……. 월세가 얼마지? 비싸겠지? 공세윤 덕에 당분간 물약이나 장비값 걱정은 안 해도 돼서 좋은데 그래도 먹고 살려면 여비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할 듯싶었다.

“성주안 님이 이사를 희망하지 않으시면 평생 사용하셔도 되고,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도 지급됩니다.”

“네?”

성주안은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것도 보조해 준다고요?”

“당연합니다. S급 버퍼는 귀하니까요. 센터장님께서 성주안 님이 원하는 건 모두 지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출을 최소화해야 한다고도 하셨죠.”

성주안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본래 세계에서 다달이 나가는 월세에 숨이 막혔던 걸 생각하면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째 감옥에 갇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생각이겠지? 그럴 거야.

그러나 그런 불안감은 가장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를 방불케 하는 집을 보며 싹 가셨다.

“이곳이 성주안 님이 머무실 곳입니다. 호위를 맡은 S급 각성자와 함께 사용하기에 좁지는 않을 겁니다.”

현관을 벗어나자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앞서 걷는 직원을 따르며 집 안을 살폈다. 복층 구조의 집은 한눈에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평수였다.

바닥과 벽은 말로만 듣던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으며 천장은 높았고, 그 안을 채운 가구들은 모두 다 고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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