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성주안은 그제야 성좌들이 채팅 창으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야망실현만이 목적이라면, 코인을 무한대로 쓸 수 있는 희생의 창조자가 눈엣가시였을 거다. 그러니, 온갖 핑계를 대가며 성좌자리에서 쫓아내려고 했겠지.
성주안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은후가 설명을 이었다.
“주지찬이나 모준영은 성좌 자체를 혐오하기도 하고, 나는 내게 득이 된다면 계약할 생각도 있었지만 글쎄, 내가 계약해 주기에는 성좌들이 너무 멍청한 게 문제랄까?”
놀랍게도 백은후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하는 말은 거짓 없는 진실이라는 게 느껴졌다.
“지금 거의 스킬은 S급까지 개발된 상태이고, 남은 건 파티를 구성해서 들어가야 할 던전들뿐인데……. 그 던전은 성좌의 도움이 필요해. 아무리 S급들로만 파티를 구성해도 버프 없인 힘드니까. 그래서 다들 때만 기다리고 있었어.”
“……그럼 제가 그 ‘때’라는 말씀입니까?”
백은후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주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번개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속내가 낱낱이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에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어 시선을 피하자, 그가 나지막이 웃었다.
“글쎄……. 어떨까? 과연 성주안 버퍼는, 멍청한 성좌들이나 코인이 많은 희생의 창조자보다 내게 더 가치 있는 존재일까?”
백은후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질문에 담고 있는 내용은 가치를 증명해 보라는 뜻이었지만, 그가 보여주는 표정이나 눈빛엔 주안을 향한 갈망이 드러나 있었다. 백은후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주안은 그의 의도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떨지 말자. 당당할수록 더 매력을 느낄 거야.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주안은 백은후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는 백은후 씨는 어떻죠? 모든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우리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인가요?”
“하하.”
그가 목을 울려 웃었다. 휘어지는 눈과 떨리는 목울대에 눈이 갔다. 급하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그를 도발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누가 누구에게 더 필요한 존재인지를. 저는 이미 세 명의 각성자를 설득했습니다. 탱커인 모준영 씨, 이미 모든 스킬을 SS급까지 완성한 공세윤 씨, 그리고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주지찬 씨. 버퍼인 저는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어요.”
아니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이 게임 안에 있는 던전의 난이도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았다. 이들로 어느 정도까지 클리어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엔딩을 보는 건 무리였다.
문제는 등급이 아니라 스킬 속성이었다. 화염계와 수빙계로는 한계가 있었다. 꼭 백은후가 아니더라도 전뢰계 스킬을 쓰는 헌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전뢰계라면 S급인 백은후가 제일 낫지.
백은후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인다 싶더니, 불쾌감으로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아씨, 기분이 나빴나? 괜히 성질 건드려서 계약 못 하면 완전히 망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불시에 커다란 손이 명치를 향해 날아왔다. 지금이야말로 한 대 맞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멱살이 잡힌 채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백은후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귓바퀴에 입술이 거의 닿을 정도였다. 훅, 뜨거운 숨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성주안 버퍼,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서 싫다는 말을 하면 안 되지.”
내가 뭐 어떻게 쳐다봤다고…….
“눈에 욕망이 드글드글 끓고 있는데.”
주안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날 만한 상황이 이 정도로 끝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성주안이 서투르게 숨을 삼키는 사이 백은후가 몸을 물렸다. 주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해야 할 말을 했다.
“탐색 그만하고 협조해 주시죠? 어차피 저 탐나시잖아요. 아까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희생의 창조자도 없는 상황이니 버퍼가 필요하다고요.”
백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건 협조라기보단…….”
“견제에 가깝죠.”
냉기가 흐르는 얼굴 위로 가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어후, 섬뜩해라. 이러다 각성자들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 아닌가? 물론, 있는지도 몰랐던 아나키스트나 외국 헌터들에게 잡혀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내 새끼들한테 터지는 게 낫지만……. 글쎄 나은가?
사자 무리 속에 던져진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이거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견제하다가 싸움이라도 나면 제가 다치는 거 아닙니까?”
“그럴 것 없어. 또 다른 S급 버퍼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아니,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주안 버퍼에게 더 호의적일 테니까. 성좌들처럼 우릴 이용하려고 한다면야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예상치 못한 말에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그들을 이용해서 이 세계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엔딩에서 소원을 빌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들킨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차피 서로를 이용하는 것 아닙니까? 서로 필요에 의해 계약된 존재니까요.”
백은후가 피식 웃었다.
“필요에 의해서라……. 맞는 말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성주안 버퍼는 힘을 가지려는 야망도, 재물을 모으려는 야망도 없어 보인단 말이지. 마치 이미 세계를 통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어떻게 알았지? 허구로 구성된 가상세계이니 재물이나 힘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정도면 족했다. 성주안이 진짜 바라는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게임을 끝내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표정을 읽은 백은후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 지금 바로 그런 표정. 각성자들은 예민해서 그런 분위기를 읽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일리 있는 말이긴 했지만 성주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각성자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제게 끌리는 이유는 자신이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캐릭터에 각인된 본능이 저도 모르게 창조자인 개발자를 향해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의 다 왔다. 사인만 받으면 된다.
“사인…… 하시죠?”
백은후가 재킷 안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이제 사인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초조하지? 종이에 펜촉이 닿는 순간 그가 멈칫했다.
“아, 잊을 뻔했군.”
“……네?”
“추가하고 싶은 조항이 있어.”
그래, 어쩐지 너무 쉽게 일이 진행된다 했다.
“말씀해 보세요. 듣고 수용할 수 있으면 추가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백은후가 고개를 끄덕하며 계약서에 한 조항을 짚었다. 돌아가면서 주안을 호위한다는 내용의 조항이었다. 주안은 멈칫했다. 이미 공세윤과 약속한 게 있어서 1순위는 공세윤이어야 하는데……. 설마 백은후도 제일 처음으로 잡아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백은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호위하는 날은 시설이 아니라 내 집으로 오는 게 어때?”
예상치 못한 요구에 성주안이 입을 딱 벌렸다.
“왜죠? 시설이 싫은 겁니까? 아니면 저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으신 겁니까?”
“둘 다야. 안전이 목적이라면 시설보다 내 집이 훨씬 나으니까.”
그가 길드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에 주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난 시설에선 단 하루도 지낼 수가 없어.”
“……네? 왜요?”
“불결해.”
어쩐지 백은후다운 이유에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공용시설을 불결하다고 여기는 건, 그의 성격과 너무 어울리는 일이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괜히 떨었네.
“추가해 드릴게요.”
성주안은 그렇게 말하고 계약서에 조항을 추가했다.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모준영이 보면 잔소리를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청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양보할 사람이 아니니까. 오죽했으면 아까 머리카락 하나 묻은 거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을까. 하여튼 까탈스러워.
조항이 추가된 계약서를 백은후 앞에 놓자, 그가 멋진 필체로 사인을 마쳤다.
제일 까다로운 인간을 설득했으니 이제 정말 한시름 덜었구나. 지금부턴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하고 엔딩을 보는 일만 남았다!
이번에도 성주안은, 그럴 줄로만 알고 있었다.
조항 몇 가지를 추가한 거로 모준영이 잔소리할 줄 알았으나 그는 생각 외로 별말 없이 계약서에 사인해 주었다.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사인을 마친 모준영의 얼굴엔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코 옆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눈으로 훑으며 고맙다고 인사하자 모준영이 말했다.
“주지찬 씨는 제가 불러놓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서렸다.
“왜요? 또 뭐가 문제인 겁니까?”
“공세윤과 백은후가 서명했다는 소리를 듣자, 주지찬이 마음을 바꿨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반대하는 기색은 없었던 사람이 왜? 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뭐가 꼬여버린 걸까?
“어쨌든 잘 설득해 보세요.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래야겠네요.”
센터장실을 나와 회의실로 내려가는 동안 주지찬이 왜 마음을 바꿨는지 생각해 봤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지찬이 인상을 팍 찡그린 채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