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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26)화 (26/74)

026.

“주안 씨!”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공세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와다다 달려왔다. 상기된 표정과 커진 목소리가 야근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온 주인을 반가워하는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자리에 가서 앉자, 공세윤이 바로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눈꼬리를 접어서 사르르 웃는 게, 진짜 귀여웠다.

“아니요. 조금 기다렸어요. 그런데 안 심심했어요.”

“다행이네요. 제가 오늘 보자고 한 건요. 지금 제가 좀 위험한 상황이거든요.”

공세윤은 눈을 깜빡거리며 성주안의 말에 집중했다.

“S급 버퍼니까 다들 탐낼 거라며, 모준영 씨가 이런 계약서를 써서 내밀더라고요.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주안은 인벤토리에 넣어놓은 계약서를 꺼내 공세윤에게 밀어주었다. 혹시나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표정을 살폈다. 눈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입꼬리를 느슨히 풀었다가 바짝 조였다가, 계약서를 읽는 짧은 순간에도 공세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흐음……. 그러니까 우리 네 명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주안 씨랑 같이 지내는 거네요? 파티는 다 같이 하고.”

뭐지? 그런 내용이 있었……. 아, 호위해주는 걸 말하는구나. 애가 외로움을 많이 타서 그런지 파티나 사냥에 관련된 항목보다는 얼마나 함께할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는 것 같았다. 생각 외로 쉽게 설득될 것 같아 다행이었다.

“네네, 맞아요. 각성자 거주 시설에서 둘만 있는 거죠. 밥도 같이 먹고 자, 잠도…… 아무튼!”

여기까지 말했을 때 공세윤이 빠르게 대답했다.

“저는 좋아요! 사인 어디에 하면 되죠?”

“……벌써요? 뭐 조율하고 싶은 내용 없고요?”

공세윤이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며 손깍지를 끼웠다. 얼마나 야무지게 끼는지 손가락이 다 아릴 지경이었다.

“저는요, 어제 주지찬이 주안 씨 데려갔을 때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다고요. 저한테 질린 게 아닌가,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또 만났고, 정기적으로 같이 살 수도 있는데 계약서에 사인 못 할 이유가 없잖아요.”

아, 얘 진짜 어떡하냐? 누가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따라가자고 하면 곧장 따라갈 기세였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순수한 공세윤이 약간 걱정되긴 했으나 그가 S급 헌터라 돈으로 사기를 당할 일만 걱정했지 신체적인 위험은 걱정하지 않았는데 S급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공세윤이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회체제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과 S급을 노리는 외국 헌터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얘 진짜 납치라도 되는 거 아냐?

주안은 침을 꼴깍 삼키며 세윤의 손을 꽉 잡았다. 세윤이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주안을 쳐다봤다.

“세윤 씨, 제 말 잘 들어요. 사람들은 세윤 씨처럼 다 순수하지 않아요. 나쁜 마음을 품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요. 그러니까 계약서 똑바로 침착하게 읽어보세요. 본인한테 손해되는 게 있는지 없는지.”

눈을 깜빡이며 이쪽을 응시하던 공세윤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한참 읽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이 계약서엔 가장 중요한 게 빠졌어요.”

“그게 뭐죠?”

“퀘스트 보상 분배 문제와 상호불가침 조항이 없잖아요.”

정확한 지적에 깜짝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공세윤이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긴, 공세윤이 여러모로 사기캐긴 했지.

그의 말을 듣고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확실히 보상을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한 내용과 안전을 위해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빠져 있었다.

똑똑한 모준영이 그 부분을 빠뜨리다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네.

성주안은 계약서에 그 부분을 추가해서 집어넣고, 다시 공세윤에게 넘겼다. 그러자 그가 방긋 웃으며 사인을 마쳤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가나요?”

“……네?”

“할 일 다 하면 저랑 같이 밥먹어 주는 거 아니었어요?”

아, 어쩐지 사인을 서두르더라니. 어떡하지? 이 계약서를 모준영에게 주면 주지찬 사인은 알아서 받겠지만 백은후는 내가 직접 설득해야 할 것 같은데…….

망설이자, 공세윤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예요? 저 이용만 하고 밥은 다른 사람이랑 먹겠다 이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아, 이러면 되겠네요. 세윤 씨, 계약서 조항 보면 서로 돌아가면서 호위해 주기로 했잖아요.”

공세윤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조항이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순서 지정할 때 세윤 씨를 제일 처음으로 하면 어때요? 제가 지금은 각성한 지 얼마 안 돼서 할 일이 많아서요.”

백은후를 만난다고 하는 것보단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가 무슨 자기 애인도 아닌데.

그래도 그냥 원래 형제 많은 집의 막내는 질투가 많은 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 제 손으로 만든 자식이나 다름없으니까.

공세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쪽을 보다가 결국 수긍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약속은 꼭 지키세요. 제가 1등이에요.”

“그럼요. 그럼요. 그 약속은 제가 보장합니다!”

“그럼 좋아요.”

드디어 공세윤과 안전한 계약이 끝났다. 이제 한 명 끝났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센터에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공세윤을 어르고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바로 백은후를 호출했다. 지금 당장 오겠다더니 진짜 얼마 안 가 1층에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회의실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거렸다. 각성자들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캐릭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가? 괜히 오싹하네.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고 검은색 슈트를 걸친 백은후가 들어왔다.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가 시선을 압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을 넘겨서 드러나는 시원한 이마와, 얼굴 중심에 오뚝하게 서 있는 콧날과 적당히 붉은 입술이 그를 더 성숙한 인상으로 보이게 했다.

홀린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다, 정신 차리자. 저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온 것도 다 작전일 수 있다.

성주안은 그렇게 결심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백은후가 상체를 굽혔다. 그러곤 뺨을 감싸려는 듯 주안의 얼굴 쪽으로 손을 올리는데 너무 놀라서 피하지도 못했다.

이, 무슨…….

뺨이라도 때릴까 봐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뺨을 쓱 쓸고 내려갔다. 긴장으로 참았던 숨을 터뜨리자 그가 손에 붙은 머리카락을 유심히 보다가 씩 웃었다.

“갈색 강아지가 털을 비볐나 봐. 공세윤인가?”

“……그, 잠시 마주쳤을 때 붙었나 봅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나저나 조심하도록 해. 공세윤이 생각보다 세다는 건 알고 있지?”

그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안다. 하지만 조심할 건 또 뭔가? 애가 착해서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거 같던데…….

“그나저나 나를 이렇게 부른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질문만 했을 뿐인데 느껴지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주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쫄면 안 돼. 앞으로 계속 만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정신 차리자. 백은후는 그냥 내가 만든 캐릭 1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도 같았다.

“백은후 씨,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 계약해 주십시오.”

백은후가 흥미롭다는 듯 눈가를 휘었다.

“……이거 의외인걸? 먼저 계약을 의뢰하다니, 나야 S급 버퍼와의 계약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그 성좌가 나타나기 전까진 도움도 필요하고 말이야.”

예상외로 일이 술술 풀려가는 느낌이었지만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물론 백은후 씨와만 계약하는 건 아닙니다.”

백은후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똑똑한 캐릭터라 말을 바로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탐내는 헌터가 한둘이 아닐 테니.”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계약서로 향했다.

“그럼 이것은 성주안 버퍼를 공동으로 소유하자는 계약서겠군.”

“네, 맞습니다. 저로서는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말 다행인 일이긴 한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백은후가 계약서를 눈으로 훑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말을 잘 받아줘서일까? 주안은 지금까지 부정적인 대답을 들을까 봐 참아왔던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각성자들이 멀쩡한 성좌들을 놔두고, 왜 굳이 버퍼인 저와 계약해 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야 다행스럽긴 하지만 조금 이해가 안 돼서요. 성좌들이 많이 까다롭나요?”

백은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성좌들도 다 우리 같은 각성자였다는 건 알 거야. 그들은 각성자로서 인류에 공을 세운 자들이지. 하지만 힘을 가지고 난 뒤에 변하기 시작했어.”

“어떻게 변했단 말씀이신지…….”

“한마디로 욕심이 많아졌지. 우리는 그 욕심을 간파한 거고. 성좌들은 우리를 야망실현을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던전을 공략하고 보상을 받은 후에 성좌대전에서 1등을 하겠다는 심산이지.”

확실히 이 게임의 대미는 모든 던전의 스테이지를 다 공략하고 난 이후에 강한 스킬을 얻고 이어지는 성좌대전이었다. 그러니 성좌들이 다들 우수한 헌터를 갖고 싶어서 안달인 거겠지. 자신과 성좌들의 목표는 달랐다.

“성좌의 손에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서 아직 스킬 개발이 덜 됐다는 이유로 계약을 미뤄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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