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성주안은 남은 밥을 싹싹 긁어먹고 모준영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모준영이 가장 믿을 만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을 것이다.
“각성자들끼리도 계약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성좌들과 하는 계약과는 다르겠지만 저는 일단 버퍼이고, 갑자기 보호가 종료되기라도 하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으니까요. 확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모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군요. 계약서를 작성해서 드리죠. 그 전에 우선…….”
모준영이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재킷에서 손을 뺀 모준영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계약서가 아니라 핸드폰이었다.
“이게 뭐죠?”
“핸드폰도 안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무슨 개인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론 가지고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성좌와 다르게 우리는 서로에게 접속할 수 없으니까요.”
“아아…….”
각성자라고 하더라도 성좌처럼 필요할 때 접속을 요청하고 화면으로 상대의 상황을 볼 수 없으니 핸드폰이 필요할 것이다.
주안은 그가 건넨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검은색에, 매끈한 광택이 나는 것이 딱 봐도 비싸 보였다. 공무원이라 돈도 없을 텐데, 센터장은 많이 버나? 아니 그보다 이거 요금은 뭐 어떻게 내야 하는 거지?
모준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제가 산 거 아니니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특별 보호 대상자에서 국가가 주는 선물입니다.”
“오, 이런 것도 주는군요. 참 고맙네요.”
성주안은 핸드폰을 꾹꾹 눌러보다가 무심코 전화번호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센터 번호에 이어, 모준영부터 시작해서 S급 각성자들의 번호가 쭉 저장되어 있었다. 이건 마치 핸드폰이 아니라 미아방지 목걸이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꼭 가지고 다니세요.”
“……예예.”
핸드폰을 내려놓자 모준영이 갑자기 자신의 인벤토리를 열어 계약서를 꺼내놓았다. 이것까지 다 예상하고 온 모양이었다.
“제가 임의로 써오긴 했지만 계약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모준영의 말에 갑자기 나타난 주지찬이 끼어들었다.
“계약? 무슨 계약?”
그가 허공에 뜬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첫째, 성주안의 버프는 위험한 상황이나 모두가 파티원으로 참가한 던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둘째, 성주안은 주거시설에서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의 호위는 네 명의 S급 각성자가 돌아가면서 맡는다. 셋째, 그 어떤 이유에서든 성주안을 독점하거나 빼돌리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잘 쓰인 계약서였다. 그러나 주지찬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약서를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뗐다.
“백은후가 과연 동의해 줄까?”
모준영이 대답했다.
“그거야 보면 알겠죠. 우선 두 분께서 먼저 서명하시면 나머지 각성자들을 소집하겠습니다.”
지금으로선 모준영의 말대로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변수는 역시 성좌들이었다. 누구 한 명이 다른 성좌와 계약이라도 하게 된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계약서에 추가하면 좋을 텐데…….
성주안의 표정을 보던 모준영이 입을 열었다.
“뭐 조율할 것이 있으면 의견을 내보세요.”
일단 자신들끼리 조율한다고 해도 다른 각성자들이 반대해버리면 소용없으니 서명은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모준영 덕에 착착 계획대로 되어가는 과정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준영 씨, 다 같이 모여서 회의하는 거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왜죠?”
“백은후와 공세윤은 반응을 예상할 수 없으니까요. 이번 일은 저한테 좀 맡겨 주시겠어요? 제가 센터 안에서 둘을 차례로 만나보겠습니다.”
주지찬이 발끈했다.
“안 돼, 너무 위험해.”
“그러니 센터 안에서 만난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 눈도 있으니 별일 없지 않을까요.”
모준영이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곧 의견을 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네 명이 한꺼번에 모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렇게 합시다.”
모준영의 동의에 성주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지찬이 불만이 많은 얼굴로 모준영을 노려봤지만 반대를 할 것 같지 않았다.
치, 믿고 있으면서 괜히 노려보고 있어. 나는 다 안다. 주지찬.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때, 모준영이 몬스터들을 모으면, 같은 파티의 주지찬이 한번에 폭발시키는 그림을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케미가 좋았다.
성주안은 뿌듯한 마음으로 눈앞에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피부가 매끈한데 몸은 짐승 같은 모준영과, 눈썹이 짙고 눈빛이 강한 데다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카리스마를 풍기는 주지찬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꾸는 꿈이 영화라면 느와르나 복수물이 아니라, 한없이 가벼운 코믹일상물이었으면 좋겠다고. 비록 현실이 아니라 꿈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현생처럼 괴롭지만은 않게 가볍고 유쾌하게 지내다가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주지찬의 차를 타고 센터로 가는 길,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공세윤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백은후보단 아무래도 이쪽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제발 우울한 상태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아무리 신호가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옆에 앉아서 지켜보던 모준영이 힌트를 줬다.
“안 받으면 문자부터 먼저 보내세요. 성주안 씨라는 걸 알면 받을 겁니다.”
성주안은 모준영이 시키는 대로 문자부터 먼저 보내봤다.
<성주안 : 공세윤 씨, 저 성주안입니다.>
보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전화가 왔다.
―이거 뭐예요?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뾰족하게 묻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목소리를 들어보니 우울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국가에서 받은 핸드폰입니다. 공세윤 씨 전화번호가 있어서 연락해 봤어요. 몸은 괜찮습니까?”
―…….
“공세윤 씨?”
―왜 전화한 건데요.
삐졌네. 삐졌어. 얘를 또 어떻게 달래.
주안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때, 그렇게 두고 나와서 마음이 안 좋아서요. 잠시 봤으면 하는데 지금 센터로 와주실 수 있으…….”
―지, 진짜요? 저 만나고 싶어서 센터로 오시는 거예요? 근데 왜 센터지? 내 집도 알잖아요. 그때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왜 센터…….
한마디를 내뱉는데도 목소리가 들떴다가 가라앉았다가 여러 가지 감정이 튀어나왔다. 성주안은 차근차근 말했다.
“공세윤 씨가 저를 좀 지켜줬으면 합니다.”
―…….
“싫으세요?”
―원래도 지켜주려고 했는데 왜 센터…….
하, 정말 얘는 한번 꽂히면 끝도 없이 그것만 물고 늘어지는구나. 하지만 이것 역시 내 죄지, 애를 탓하면 안 되지. 성주안은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대답했다.
“저도 세윤 씨와 함께 밥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윤 씨 집에는 도구도 없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센터에 갔다가, 제집으로 가서 먹으면 어떻겠습니까?”
―성주안 씨 집이요? 음……. 어……. 조, 좋아요!
“그럼 몇 시까지 오실 수 있으세요?”
―저 센터예요!
“네?”
―센터라고요.
“왜요?”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센터에서 할 일 많을 것 같아서요.
“저를 기다린 겁니까?”
―……아닌데요? 저는 희생의 창조자님만 기다리는데요?
공세윤의 속내가 물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연기가 자연스러워야 속아주는 척이라도 하지.
주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중에 보자고 말한 후에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세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핸드폰에 몇 번째로 저장되어 있어요?
“…….”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황스러웠지만 친절하게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당연히 첫 번째입니다.”
―……네에. 그럼 빨리 오세요. 저 회의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전화를 끊은 성주안이 말했다.
“주지찬 씨, 빨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공세윤 이미 센터래요.”
“그래? 걱정하지 마.”
주지찬의 말에 모준영이 차 손잡이를 세게 잡는 게 보였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아니고 고작 차에 타서 손잡이를 잡다니…….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던 성주안은 잠시 후, 부아아앙!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달리는 주지찬의 차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나서야, 모준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사람이 참아낼 수 있는 멀미가 아니야. 우웩!
구역질 때문에 현기증이 날 것 같을 때, 다행히 센터 앞에 도착했다. 모준영의 부축을 받아 내리니 주지찬이 쌩하니 주차장을 벗어났다.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어디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성주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자, 모준영이 말했다.
“오늘 봉사활동 가는 날일 겁니다.”
“그런 것도 갑니까?”
“네, 주지찬 씨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곳엔 어디든 가요. 각성자들 중에 그나마 제일 나은 사람이죠.”
문득, 주지찬을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다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겠다고 아이를 안고 뛰고 있었지……. 확실히 사람이 좀 멋있긴 해. 겉으로만 멋있는 척하는 백은후랑 사실 알고 보면 멋있는 주지찬이랑 반반 섞으면 진짜 완벽한 각성자가 나올 것 같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수정해야지!
성주안은 결심하며 모준영과 함께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모준영은 보고해야 할 일이 있다며 중간층에서 먼저 내렸다.
“회의실 주변에 보안요원들도 있고, 공세윤도 센터 안이라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을 테니 괜찮을 겁니다.”
“예. 걱정하지 말고 일 보세요.”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사실 백은후가 제일 문제지 공세윤까지는 제 선에서 충분히 컨트롤이 가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주안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활기찬 상태의 공세윤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