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24)화 (24/74)

024.

“필요할 때만 써먹고 이제 볼일 끝났으니 데려가겠다?”

그나마 멀쩡한 정신이 있는 두 사람이 싸우면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성주안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둘의 협의 관계를 유지시켜야 했다. 어떡한다? 싸우는 애들을 화해시키는데 제일 좋은 방법이…… 아, 그러면 되겠다.

“저기 두 분, 지금 이러실 게 아니에요.”

모준영과 주지찬이 동시에 주안을 쳐다보았다. 주안은 두 사람의 살벌한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백은후가 무섭습니다. 잠시 후면 주지찬 씨 버프 효과도 사라질 텐데 그때도 싸우고만 계실 겁니까?”

둘 중 그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저들도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주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 게임의 엔딩을 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성좌일 때까지만 해도 각성자와 계약을 맺어서 엔딩을 보면 되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버퍼로 각성했으니 그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그래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마저 저버릴 수 없으니 버퍼인 채로 다른 S급들을 잘 구슬리는 수밖엔 없었다.

다행히 이 게임엔 엔딩을 보며 나오는 특별한 보상 시스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좌의 소원을 들어 드립니다.’였다. 게임 내에서는 성좌가 원하는 레어 아이템이나 L급 버프 스킬을 받는 것이지만 여긴 실존하는 세계니까, 엔딩의 보상을 물을 때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면 영 터무니없는 계획은 아닐 것이다.

일단 다른 방법이 없으니 해 보는 수밖에.

그런데 과연 저 미치광이들이 순순히 나와 계약해 줄까?

성좌도 아니고 버퍼인데……. 다행히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설득해 보는 수밖엔.

성좌가 줄 수 있는 버프는 제가 주면 되고, 어떻게든 던전만 클리어한다면 보상 시스템이 가동될 터였다.

정리를 마친 주안이 모준영을 향해 불쑥 말했다.

“모준영 씨, 밥 먹었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침 드셨냐고요. 안 드셨으면 같이 먹으면서 대화 좀 할까 하고요.”

“……지금 이 상황에서요?”

모준영은 미친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주안을 쳐다봤지만 주지찬은 주안의 편을 들어주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너도 와서 밥이나 먹어.”

둘의 대화를 듣다 보니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캐릭터를 만들 때, 주지찬이 28살이었고, 모준영이 31살이었는데……. 주지찬은 왜 모준영에게 반말을 하는 걸까? 게다가 나이가 많은 모준영은 왜 반말을 듣는 걸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거지? 설마 캐릭터들 나이도 바뀌었나?

정말 쓸데없는 궁금증이긴 했지만 너무 궁금해서 주지찬에게 물었다.

“주지찬 씨가 모준영 씨보다 나이가 많아요?”

“아니, 모준영이 더 많을걸?”

“그런데 왜 반말하십니까?”

“난 원래 다 반말해.”

아아, 센 척…….

그러고 보니 공세윤도 까마득히 어린 주제에 형들에게 또박또박 반말로 대꾸했었다.

성주안은 모준영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속으로 사과했다.

모준영, 내가 미안하다. 캐릭터들을 다 이따위로 만들어서. 인성 좋고 착한 네가 참자.

모준영이 대답이라도 하듯 “그럽시다.”라고 하며 식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센 척하는 놈과 덜 미친 놈이라 다행이었다.

식탁에 가서 앉으니 주지찬이 모준영 몫의 밥을 떠 왔다. 모준영은 이 자리가 어색한지 자꾸 헛기침하면서도 결국엔 숟가락을 들고 밥을 한 술 떠먹었다.

주안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모준영의 반응이 궁금해 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주시했다.

어때? 맛있지?

밥을 씹어 삼킨 모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직접 만든 겁니까?”

주지찬이 대답했다.

“그럼, 내가 만들었지. 이 시간에 어디서 사, 이런 걸.”

“아…… 네, 그렇군요.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 속도가 빨라졌다. 모준영도 센터를 운영하느라 바쁘니까 이런 밥을 챙겨 먹기 힘들었을 테고 각성자라 식욕이 왕성하진 않겠지만 저 큰 덩치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긴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애 입에 밥이 들어가는 걸 보는 부모 마음이 이런 걸까?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뿌듯했다.

한참 밥을 먹던 모준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불쑥 물었다.

“성주안 씨, 희생의 창조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성주안 씨 말대로 지금 백은후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 그만하고 본론을 말씀하시죠.”

아니, 지금까지 밥 먹은 게 누군데? 하지만 지금 실랑이를 하는 건 벌이는 건 미련한 짓이지. 일단 성주안은 어른스럽게 대처하기로 했다.

“일단 저는 희생의 창조자와 계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버퍼로 각성했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무슨 오해를 하시는진 모르겠는데, 저도 진짜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요? 앞으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너희와 파티를 구성해서 던전을 부술 생각이라는 말은 아직 하면 안 되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준영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백은후가 문제긴 한데, S급 버퍼가 나타났다는 걸 알면, 스킬 속성이 좋은 A급 헌터들까지 성주안 씨를 노릴 겁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요.”

주지찬도 거들었다.

“거기다 아나키스트들은 또 어떻고. 그들은 각성자 신고도 안 하기 때문에 어떤 등급을 숨겨놓고 있을지 몰라. 백은후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S급 버퍼는 몇 명 안 되니 외국에서 납치하러 올 가능성도 있고요.”

이거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잖아?

백은후에, 아나키스트에, 외국 헌터들에, 질투에 눈이 돌아버린 성좌들까지…….

같은 편은 없고 죄다 적들뿐이었다. 이 상태로는 파티를 구성해 게임을 클리어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이마가 싸늘해지는 느낌을 성주안이 애써 참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센터가 보호해 주는 거로 충분할까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모준영이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오려다가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원랜 시설에 가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주지찬 씨와도 함께 이야기해야겠군요.”

모준영의 말을 정리하면 이랬다.

굳이 희생의 창조자가 아니라도 S급 버퍼는 표적이 되기 쉬우니 네 명의 S급 각성자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외부 침입을 막는 공동의 목표를 세워 성주안을 보호하자는 거다.

내가 무슨 땅덩어리도 아니고, 이 세계가 남북으로 찢어진 세계도 아닌데 공동 경비라니. 게다가 저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 여기까지 생각하던 성주안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만약 모준영의 말대로 되기만 한다면, 다섯 명의 협업이 가능할 것이고, 파티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크……. 누가 최고의 캐릭터 아니랄까 봐 저런 기특한 생각도 다 해오고, 역시 모준영. 성주안이 씩 웃자 주지찬이 미간을 좁혔다.

“너는 지금 웃음이 나오냐? 사태 파악이 안 돼? 잘못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잖아.”

주지찬의 말을 무시하고 모준영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도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안 씨는 지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압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배고픈 사자들 무리에 홀로 떨어진 토끼가 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사자들을 믿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백은후가 협조하려고 할까요? 안 할 것 같은데…….”

주지찬이 끼어들었다.

“안 되면 되게 하면 되지. 그 키스 버프 나한테 주고, 내가 강제로……!”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모준영과 성주안이 동시에 주지찬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백은후가 무슨 수를 써서든 튀겠지, 주지찬 손에 잡혀 줄 리가 없었다. 모준영이 날뛰는 주지찬을 진정시켰다.

“주지찬 씨 위험 상황이 아닐 때, 개인적인 목적으로 스킬을 쓰는 건 위법입니다.”

“그놈의 법!”

주지찬은 열이 받는지 자리를 떴다. 얼굴이 벌게진 게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준영와 성주안은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그럼 지금으로선 협상 외에는 방법이 없겠군요.”

“네, 백은후는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가지지 못한 건 남도 가지지 못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서로 견제하자고 하면 아마 그러자고 할 확률이 높아요.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척하고 싶어 하니까요.”

정확한 판단이었다. 보면 볼수록 역시 모준영이 제일 정상적인 인간이었다. 이즈음에서 성주안은 모준영에게 가장 중요한 걸 물어야 할 때라는 것을 떠올렸다.

“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각성자들은 성좌와 계약을 하지 않습니까? 한 명의 성좌가 몇 명의 각성자와 계약할 수 있는 겁니까?”

성주안을 보는 모준영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건 갑자기 왜 묻죠?”

“아, S급 각성자들이 다른 성좌들과 계약하면, 절 보호하는데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하고요.”

“뭐, 걱정할 만한 지적이긴 하네요.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현재 S급들이 관심 있는 성좌는 희생의 창조자뿐이니까요.”

“하하, 그렇군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과연, 진짜 다행일까?

나중에 무슨 이유로든 자신이 희생의 창조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더 혼파망일 것 같은데. 에라이,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그리고 성좌는 여러 명과 계약할 수 있습니다. 4인에서 5인으로 이루어지는 파티를 구성해야 상위 던전을 깨기 쉬우니까요.”

역시 그랬군. 백은후와 공세윤이 짜고 날 속인 거였어. 그러나 그럼 뭘 하나, 이제 성좌도 아닌데. 지금 중요한 건 모준영의 말대로 S급 헌터 네 명에게 보호받는 버퍼로, 그들을 하나로 엮은 다음 던전을 빠르게 공략해 나가는 거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