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조금 이상하긴 하네. 버퍼로 각성한 건 그렇다 치고, 아까는 왜 날 도와준 거지?”
먼저 구하러 왔으니까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설마, 헌터들한테는 이렇게 도움받지 못한 거야? 이용만 당했어?
주지찬……. 내가 미안하다. 똑똑한 캐릭터로 만들어주지 못해서.
“그야, 절 구하기 위해서 싸우셨으니까요.”
주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상해, 넌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아니면…… 내가 오해를 하고 있거나. 각성자가 그리 착할 리가 없는데 말이야.”
이제 와서 고마워졌나? 역시, 인성 하나는 바른 캐릭터이긴 해. 흐뭇한 마음으로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주지찬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역시, 너도 날 무시하는군. 내가 백은후 따위에게 질 것 같았나?”
아니, 왜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는데요? 하도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쟤는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된 걸까? 지금까지 만난 캐릭터 중에 가장 단순하면서도 이상한 놈이었다.
“아닙니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단지 있는 버프를 같은 편에게 줬을 뿐이에요.”
“같은 편? 누가 너 따위와 같은 편이래?”
“그럼 왜 구하러 오신 건데요?”
“그, 그야…….”
주지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주안의 얼굴에 딱 멈췄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나 참, 이거 어이없는 놈이네. 착각도 유분수지, 누가 널 구하러 갔대? 재수 없는 백은후 놈 손봐주러 간 거지.”
“아, 네네. 그러셨군요. 제가 착각해서 죄송합니다.”
성주안은 그렇게 대답하며 입을 다물었다. 주지찬 캐릭터를 만들 때 ‘언행 불일치’ 항목은 없었던 것 같은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고 백은후처럼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세 보이고 싶어서 착한 속내를 숨기는 것처럼 보였다.
뭐, 얄밉긴 하지만 귀엽게 봐주려면 봐줄 수 있는…….
여기까지 생각하던 주안은 생각을 멈췄다. 주지찬이 갑자기 “더워……!”를 연발하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했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예감이 몸을 감쌌다.
“저, 저기, 주지찬 씨. 진정하세요. 더우면 에어컨을 좀 켜든가, 찬물 샤워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하, 하아…….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거로 될 일이 아니야.”
“그럼 아까부터 진짜 왜 이러시는 건데요.”
주지찬이 괴로운 듯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각성 부작용 때문이지, 내가 변태라서는 아니라고! 시발, 눈앞에 먹잇감이 있는……. 아니지! 그냥 살아 있을 때 꺼져. 죽기 싫으면.”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행동은 변태가 하는 행동이라고 말해주려다가 문득 회의 시간에 각색 작가님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캐릭터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과 잘 어울리는 각성 부작용을 넣으려고 하는데 뭐 없을까요? 뜨겁고 강렬한 이미지였으면 좋겠는데.’
‘뜨겁고 강렬한 거라면 성적 욕망이요?’
‘오…… 그거 좋긴 한데, 심의에 걸리지 않을까요?’
‘일단 구상해 놓고 심의 걸리면 수정하는 방향으로 가죠?’
확정된 사안이 아니었기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성주안은 과거를 떠올리며 주지찬을 응시했다. 주지찬은 혀로 입술을 연신 핥으며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맞네, 맞아. 강렬한 성적 욕망. 하…… 진짜 괴롭겠다.
그럼 이 철문과 자물쇠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건가? 방금 꺼지라고 했던 것도 성질을 내는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사람 참……. 가만히 있으면 멋있을 것 같은데 왜 말을 저따위로 해서 점수를 갉아 먹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그 생각을 하니 주지찬에게 못 할 짓을 한 것만 같아 더욱 미안해졌다. 지금까지 제가 한 짓은 성적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주지찬이 맘껏 해소도 못 하게 방해한 셈이 되니까.
성주안은 곧장 몸을 돌리며 말했다.
“주지찬 씨, 진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집이 넓으니까 저 제일 끝방에 가 있을게요. 그, 끝나고 문 열어야 하면 소리 질러서 저 부르세요.”
“꺼져.”
“예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기 위해 발을 떼었을 때였다. 뒤에서 주지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프면 냉장고 열어서 뭐라도 꺼내 먹어. 우리 집에 먹을 거 많으니까.”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본인이나 걱정할 것이지.
“야, 알아들었냐고! 각성한 첫날엔 많이 먹어야 해. 그래야 나처럼 부작용이 안 생겨. 먹기 싫어도 먹어.”
진짜 츤데레가 따로 없었다. 얄미운 말을 들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본가에 있는 엄마도 생각나고 괜히 코끝이 시큰거려서 얼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 * *
모준영은 핸드폰을 들었다가 도로 책상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주지찬은 센터에 호의적인 헌터이니 굳이 연락해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쇼핑몰 앞에 생긴 던전을 처리하느라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주지찬의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무사히 성주안을 구해갔다고 했으니, 한시름 던 셈이었다.
백은후나 공세윤이 데리고 있는 것보다는 그나마 사회의 법을 잘 지키는 주지찬이 데리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지?
문득 백은후의 말이 떠올랐다.
‘각성자가 아닌 척하면서 성좌를 빼돌린 거잖아.’
성주안이 의심스럽긴 한데…… 또 한편으론 백은후가 머리를 써서 분탕질을 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의 창조자가 저대로 사라졌든, 성주안이 빼돌렸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한대의 코인을 가진 희생의 창조자가 없는 상황에서 헌터가 가장 탐을 낼 존재는 S급 버퍼로 각성한 성주안 자체였으니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만약 백은후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버퍼를 가지기 위해 전략을 짜고 있는 거라면, 더욱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안 되겠다. 백은후가 가기 전에 얼른 가서 성주안을 데려와야지.
그렇게 결심한 모준영이 산재한 보고서를 책상 위에 쌓아둔 채 사무실을 나서려다, 멈칫했다.
* * *
그 시각 백은후와 공세윤은 주지찬의 집 앞에 있었다. 백은후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봐야 소용없어. 주지찬의 버프가 풀리기 전엔 너도 나도 싸워봐야 잿더미가 될 뿐이니까.”
“가고 싶으면 너나 가든가! 나는 반드시 성주안을 데려가야겠어.”
백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공세윤을 쳐다봤다.
“야, 꼬맹이.”
현관을 보고 있던 공세윤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왜? 그리고 꼬맹이라니. 자기는 꼰대면서!”
백은후는 꼰대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지금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나 할 때가 아니었다. 경쟁자를 한 명이라도 없애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백은후로서는 갑자기 버퍼로 각성한 성주안도, 희생의 창조자라는 성좌도 모두 탐이 나는 존재였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능력치 세 배 버프를 가진 성주안과, 희생의 창조자, 둘 다를 갖는 것이겠지만, 안된다면 하나라도 반드시 제 손에 넣어야 했다.
“성주안을 데려가려는 이유가 뭐야? 너는 희생의 창조자한테만 관심이 있다며?”
공세윤이 멈칫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가 마치 숨기고 싶은 마음을 들킨 어린아이 같았다.
“왜, 뭐……. 그러는 너는?”
“나는 둘 다에 관심이 있어서 기다리는데? 넌 왜 성주안에게 집착하지? 나중에 희생의 창조자가 서운해서 계약 안 해주면 어쩌려고?”
“뭐, 뭐라고?”
공세윤이 눈을 크게 뜨고 백은후를 노려봤다. 화염계 헌터도 아니면서 눈에서 불꽃이 튈 것 같았다. 저런 반응을 예상하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공세윤의 반응은 조금 과한 면이 있었다.
백은후는 더 심한 말로 공세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알잖아. 계약은 여러 명과 할 수 있긴 하지만 그것도 성좌의 선택이라는 거.”
“그, 그게 뭐 어떻다고! 아, 그래, 맞아! 나는 성주안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냐. 성주안이 희생의 창조자를 빼돌려서 자기만 계약했다고 하니까 내놓으라고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 말에 백은후는 더 대꾸하지 않고 씩 웃었다.
나름 명분을 만든다고 만든 것 같은데 백은후의 눈엔, 공세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는 분명 성주안에게 관심이 있었다.
하, 이러면 곤란한데……. 도대체 몇 명의 경쟁자를 물리쳐야 해.
백은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고추부터 넣었나? 아니면 마늘? 아니…… 레시피를 알아야 음식을 하지.”
성주안은 싱크대 위에 늘어놓은 재료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된장찌개라도 끓여 먹을 생각으로 식재료를 꺼내놓긴 했는데 그에게 요리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아, 미치겠네.”
그 흔한 라면도 하나 없고, 밀키트도 없고 냉장고엔 온통 날 것의 재료들뿐이었다. 그나마 계란이나 햄 정도는 구워 먹으면 되니까 그거라도 찾기 위해 냉장고를 다시 열었을 때, 뒤에서 주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냐?”
성주안이 멈칫했다. 절대 못 나오게 하라고 했는데 나온 거면, 설마 각성 부작용을 이겨내지 못하고 욕망에 따라 행동하려는 걸까?
성주안이 본능적으로 몸을 감싸 안고 어깨를 덜덜 떠는데, 주지찬이 주안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