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저, 저기, 주지찬 씨. 조금만 천천히 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시끄러워.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까 키스한 걸 말하는 걸까? 아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살려줬더니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화를 내다니.
씩씩거리고 있는데 한참 달리던 주지찬이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주지찬의 집이었다. 뭐, 지금으로선 센터에 가도 문제고 그렇다고 각성자 전용 숙소로 가도 문제가 될 테니 나름 옳은 선택이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주안은 여전히 주지찬에게 들린 채로 집을 둘러보았다. 공세윤의 집과는 달리 넓은 거실과 부엌에 생활감이 가득한 가구들이 많은 데다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이라 그도 다른 각성자들처럼 만만찮게 부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얘는 왜 안전한 곳에 도착해서도 몸을 놔주지 않는 걸까?
슬쩍 고개를 들자 주지찬과 눈이 마주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빛이 꼭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 같았다.
“저, 저기 주지찬 씨?”
“…….”
“안전하게 구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제 내려주시죠?”
깊고 그윽한 시선이 주안의 입술로 이동했다.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눈빛에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버프 주려고 키스하자고 할 땐 싫다고 거부해놓고 인제 와서 왜……. 아, 버프를 더 받고 싶어서 그런가?
주지찬이 반대편 손으로 제 뺨을 쓱쓱 훑었다. 손이 지나간 자리에 생긴 흰 자국을 눈으로 따라가는데 그가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내가 원래 이런 취미는 없는데 좀 급하거든?”
“……네?”
그가 한숨을 푹푹 쉬며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시선을 피하고 고통스럽게 숨을 내뱉은 후, 눈을 질끈 감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꾹 눌러 참는 것 같기도 한 행동에 성주안은 눈만 깜빡였다.
“그러니까 아 시발, 진짜 죽겠네!”
아니,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러세요? 눈을 치켜뜨자 주지찬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가 진짜 못 참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넌 꼼짝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내가 문을 부수려고 해도 버텨야 해. 알겠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장난을 치려는 것 같진 않았다. 주지찬의 시선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시발, 어차피 그런 거 할 마음도 없어. 누가, 잘 모르는 사이에……. 그냥 뒈지고 말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주지찬이 성주안의 몸을 바닥에 던지듯 내팽개치곤 저 혼자 복도 끝에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소리가 났다, 뒤늦게 그를 따라가 보니 웬만한 힘으로는 절대 열 수 없을 것 같은 철문이 나왔다. 그리고 그 철문 가운덴 안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작은 유리창이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안에서 주지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에 쇠 자물쇠 달려 있지?”
“네네, 있어요.”
“단단하게 잠가. 내가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을 정……!”
말을 멈춘 주지찬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너무 괴로워하니까 일단 그가 요구하는 대로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성주안은 재빨리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유리창 안을 쳐다보았다. 주지찬은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방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그러고 있으니 신경이 쓰여서 주안은 조심스레 말을 건네 보았다.
“주지찬 씨, 괜찮아요?”
크게 말한 것도 아닌데 주지찬이 고개를 들었다. 청각도 세 배가 된 걸까? 하고 문을 살펴보니 유리 창문 아래에 촘촘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유리창이 달린 철문과 자물쇠, 그리고 그 아래 뚫린 구멍……. 감옥이랑 다를 바가 없는 구조를 보며 생각했다.
주지찬은 왜 집 안에 이런 방을 만들어 놓은 걸까.
“안 괜찮아. 같잖게 동정하지 말고 꺼져. 네 얼굴 보면 속이 다 울렁거리니까.”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저런 말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성질 같아선 확 돌아서 버리는 건데 괴로운 듯 온몸을 벌벌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쓰였다.
“화만 내지 마시고요. 왜 그러시는지 말씀을 해줘야 도와드리죠.”
이쪽을 보고 있던 주지찬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오는 행동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주지찬이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으르렁거렸다.
“역시, 아니야.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정체 모를 음식을 먹을 순 없지!”
저, 정체 모를 음식……. 사람을 보고 정체 모를 음식이라니. 말본새가 저러니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필요 없으면 됐어요.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약이라도 좀 사줄까 했는데…… 아, 약…….”
말하다 보니까 생각났다. 아까 쇼핑몰에서 공세윤이 강제로 사준 방어구들만 챙겨오느라 정작 사야 할 물약은 하나도 사지 못했다.
“뭐? 약을 사줘? 이게 어디서…….”
어금니를 꽉 깨문 주지찬의 입가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엇에 그리 화가 나는 것일까? 곰곰이 되짚어 봐도 단서가 없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데요? 제가 뭘 어쨌다고.”
온몸으로 열기를 토하던 주지찬이 안전한 집에 도착해서 제 몸을 스스로 가둔 것, 이것 하나만으로 유추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각성 부작용 때문인 걸까? 캐릭터를 만들 때 공통으로 겪는 부작용 외에 특별히 추가한 기억은 없는데……. 특별한 부작용은 1차 업데이트 이후에 차근차근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공세윤의 활기참과 우울함은 디버프라 부작용은 아니었다.
곱씹어 보는 사이 갑자기 주지찬이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재킷을 벗고 셔츠를 벗고 바지까지 벗었는데도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화염계 스킬을 주로 써서 더위를 많이 타나?
생각하려 해도 말이 안 된다. 주지찬은 불 속성 저항 스킬이 가장 높은 헌터였으니까.
“후, 하아…….”
그가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유리창에 김이 서렸다. 안개 속에서 살색의 형체가 왔다 갔다 하는 걸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모준영의 연락을 받고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왜요?”
“넌 왜 멀쩡해? 오늘 각성한 각성자는 부작용을 겪어야 당연한 건데.”
성주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놈들이 알고 있는 걸 주지찬 혼자만 모르는 느낌이었다. 백은후가 말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백은후 씨가 아무 말 안 해요?”
“무슨 말? 하아, 하아…….”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유리창에 서린 입김 때문에 안쪽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괴로운 듯한 신음 소리가 자꾸 새어 나왔다.
“주지찬 씨, 괜찮으세요?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잔말 말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 봐.”
“제가 지금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 중이라서요. 저 진짜 오늘 각성한 거 맞거든요? 근데 백은후 씨가 그러는 거예요. 미리 각성해서 희생의 창조자랑 계약한 거 아니냐고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불평을 늘어놓는 중에 안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흐읍…… 크으읏.”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끔찍한 예감에 철문을 쾅쾅 두드리며 발을 굴렀다.
“주지찬 씨, 주지찬 씨! 괜찮으세요? 죽을 것 같으면 얘기하세요. 센터호……출은 안 되지만 제가 어떻게든.”
“후우…… 헛소리 집어치워! 네가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니니까.”
성주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만든 캐릭터임에도 도무지 정이 붙질 않았다. 모준영도 공세윤도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고 있으면 제작자로서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긴 했다. 그러나 주지찬은 입만 열었다 하면 뿌듯함은커녕 있던 정도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잠시 후, 유리창에 서린 김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투명해진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자 주지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사라지니까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주지찬 씨?”
잠시 후,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희생의 창조자를 네가 빼돌렸다고?”
지금까지 뭘 들은 건지 전혀 다른 얘길 하는 통에 머리가 아팠다. 성주안은 텅 빈 방 안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죠. 저도 오늘 각성해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럼 뭐가 문제야? 안 빼돌렸다고 하면 되지.”
이해력이 부족하나? 맞다. 각성자 중에 제일 무식한 애가 주지찬이었지. 파티엔 머리를 써서 전략을 짜는 캐릭터도 필요하지만 무식하게 스킬을 팡팡 터뜨려야 하는 캐릭터도 필요한 법이었다. 그래서 주지찬을 저런 캐릭터로 만들긴 했지만 실제로 대면해 보니 후회막급이었다. 후, 진정하자 성주안. 다 네가 벌인 일이야.
“백은후가 믿어주지 않아서요. 공세윤도 의심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데?”
“…….”
지금 딱 필요한 질문이었다.
글쎄, 난 어쩌고 싶은 걸까?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건에 빠져 어느 순간부터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주안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주지찬이 대답을 재촉해왔다.
“왜 대답이 없지?”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는 이 게임을 어떻게든 끝내지 않으면 돌아갈 길이 요원해 보였다. 그렇다면 성좌로서든 각성자로서든 게임의 엔딩을 봐야 한단 뜻인데…….
헌터도 아니고 버퍼로 게임을 끝내긴 무리였다.
“왜요? 주지찬 씨도 희생의 창조자한테 관심 있어요?”
“관심은 무슨! 이 세계에 성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도움은커녕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한테 관심이라니. 정말, 지긋지긋해!”
주지찬은 정말 싫다는 듯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만약 성좌였다는 것을 들키면 불 주먹으로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오금이 저렸다.
팔을 감싼 채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데 주지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문과 가까운 벽에 붙었다가 유리창이 보이는 위치로 몸을 옮긴 것 같았다. 주지찬의 시선이 주안의 얼굴을 훑었다. 눈을 가늘게 뜬 것이 뭔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