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보조금으로 받은 돈이 15억이니까 물약을 사기도 전에 다 털릴 만큼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런 돈은 구경해 본 적도 없는데 그 돈을 덥석 내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걸 왜 당신이 결제합니까? 저도 보조금 받은 거 있습니다. 물론 이걸 다 사면 거지가 되겠지만 그래도 민폐를 끼칠 순 없어요. 당장 취소하세요.”
이게 맞는 거다. 아무리 궁해도 내가 만든 캐릭터에게 사기를 칠 순 없으니. 돈이 좀 아깝긴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양심을 선택했다. 그러자 공세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민폐라고 할 만큼 비싼 거예요?”
“……당연히 비싸죠. 아니, 비싸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윤 씨가 왜 제 장빗값을 내줍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공세윤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창백하게 질렸다. 그리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호, 혹시 화나셨어요? 저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을 뿐인데…….”
아, 내가 또 실수했구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공세윤은 저를 피하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면서 애정을 갈구했을 텐데……. 영악한 인간들은 그런 공세윤을 호구로 봤을 테고. 그러니까 공세윤은 제가 먼저 뭔갈 주지 않으면 상대로 하여금 애정이나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주고, 상처받고, 다시 주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집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는 동안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성주안은 공세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을 고쳤다.
“세윤 씨, 우리가 특별한 친구 사이인 건 맞지만요. 아무리 친해도 억이 넘어가는 장비를 함부로 덜컥 사주면 안 돼요.”
“트, 특별한 친구 사이요?”
공세윤이 말을 더듬었다. 또 감동 받아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가늘게 뜬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
당황스럽네, 또 무슨 실수를 한 거야?
“왜요? 제 말이 서운해요?”
“성주안 씨, 희생의 창조자랑 모르는 사이인 거 맞아요?”
전혀 이런 이야기가 나올 타이밍이 아니라 성주안은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다니까요. 근데 그 얘긴 또 왜 꺼내는 거죠?”
“우리 사이…… 특별한 사이에 계약이 필요하지 않다는 그런 말을 희생의 창조자도 했었거든요.”
“그, 그건…….”
때마침 결제를 마친 직원이 공세윤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게 아니었다면 대답할 말을 찾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성주안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공세윤이 뺏기지 않겠다는 듯 카드를 꼭 쥐었다.
“어쨌든 내가 살 거예요. 내 거니까요.”
“네? 버퍼 방어구를 어디 쓰시게요?”
“아니, 내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미 계산했으니까 끝이에요.”
공세윤이 그렇게 말하며 성주안의 팔짱을 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끌어야 겨우 따라오던 녀석이 이제는 안 떨어지겠다는 듯 꼭 붙어 걷기 시작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이상한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될까? 아무리 돈이 썩어나는 S급이라곤 하지만.
“저, 공세윤 씨. 아무에게나 막 다 퍼주고 그러지 마세요. 누가 옥 장판 판다고 하면 따라가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여기도 옥 장판이 있는진 모르지만 어쨌든 공들여 만든 내 새끼가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주안의 말에 공세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성주안 씨한테만…… 어?”
공세윤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화들짝 놀라며 팔짱을 뺐다. 이상하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품속에 있던 고양이가 츄르만 먹고 도망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내가 왜 그랬지? 저는 희생의 창조자님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다가오시면 곤란해요.”
왜 그러나 했더니, 지조를 지키겠다는 거구나. 헛웃음이 났다.
“그래요. 그러면 팔짱 빼고 가면 되죠.”
조금 떨어져서 걷자 공세윤이 또 그건 아니라는 듯 은근슬쩍 거리를 좁혀왔다. S급 전용관에서 나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걸었을 때였다.
쾅, 콰르르, 쾅!
갑자기 쇼핑몰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들려왔다. 각성하고 난 이후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탓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다리에 힘이 빠졌다. 주안이 바닥에 무릎을 댄 채로 머리를 부여잡자, 공세윤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 갑자기 무슨 일이지? 저 지금 우울함 상태라 스탯도 낮은데.”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각성 부작용인가? 버퍼는 개발할 때 만들지도 않은 캐릭터라 알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어서 더 두려웠다.
―아아, 마이크테스트.
이건 무슨 소리지?
사람들이 모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익숙했다.
―각성자 여러분, 저는 S급 탱커이자 각성자 관리센터의 센터장인 모준영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수색 작전이 펼쳐질 예정이니,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모두 쇼핑몰 밖으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수색 작전이라고? 갑자기 무슨…….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던 성주안은 그제야 자신이 기다리라던 모준영의 말을 어기고 공세윤의 뒤를 따랐다는 것을 떠올렸다. 연락이라도 해야 했던 건데.
설마, 나를 찾으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 하나 없어졌다고 수색대를 동원했겠어……?
―찾고 있는 사람은 이십대 남성, 성주안, 성주안입니다.
헉, 내가 맞구나.
“모준영이 성주안 씨를 왜 찾아요?”
“아, 그게…… 버퍼로 등록하고 보조금 받은 뒤에 잠시 기다리라고 했는데 제가 그냥 세윤 씨 따라온 거거든요.”
그 말에 뾰족하게 올라가 있던 공세윤의 눈꼬리가 내려왔다.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게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럼 성주안 씨가 저 따라오는 바람에 모준영 씨가 수색대를 푼 거겠네요?”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둘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데 제복을 입은 수색대원들이 그들이 있는 3층까지 밀려와 각성자들과 직원들을 바깥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곧 잡힐 것 같아서 주안은 얼른 공세윤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뛰었다.
“왜, 왜 도망가요?”
“잡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니…… 지금 제가 약하다고 못 믿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저들은 인원이 많잖아요. 그리고 공세윤 씨는…….”
우울한 상태고요. 라는 말을 하려는데 공세윤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묘하게 활기가 느껴진다 했는데, 웃는 얼굴을 보자 감이 왔다. 활기찬 상태구나! 그렇다면 더는 그가 스스로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한시름 던 셈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안 씨는 제 옆에 꼭 붙어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붙어 있어도 됩니까? 아까는 희생의 창조자님만 있어야 한다면서요?”
“그. 그건!”
공세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할 때마다 반응이 이렇게나 즉각적이니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어쨌든, 옆에 꼭 붙어 있어요.”
수줍은 듯 내뱉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다시 한번 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그리고 의외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쇼핑몰 내부에 계시는 각성자 여러분들 중, A급 이상의 각성자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현재 쇼핑몰 입구에 던전이 열렸습니다. 민간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만 찾는 게 아니라 던전까지 열렸다니. 공세윤이 흠칫했다. 어디에서 던전이 터져도 상관없어 할 줄 알았는데 동요하는 걸 보니, 그래도 헌터로서 기본적인 의무감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되지. 우리 도망 다니는 신세인데…….
주안은 세윤의 어깨를 잡았다.
“못 나가요. 지금 나갔다가 잡히면 어떡해요? 약속 어기고 왔는데, 내가 뭐가 됩니까?”
“아아……. 그렇겠네요.”
그때 화장실 밖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샅샅이 찾아도 없다면, 여기 있겠지.”
이건 백은후의 목소린데? 백은후라면 치를 떠는 모준영이 데려왔을 리가 없을 테니 모준영 몰래 이곳에 온 게 틀림 없었다. 밖엔 화가 난 모준영이 있고 안엔 저를 찾고자 혈안이 된 백은후가 있는 상황이라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백은후가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자 몸이 덜덜 떨리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공세윤이 이쪽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쉬이…….”
성주안은 재빨리 공세윤의 입을 막고 화장실의 가장 마지막 칸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데서 커다란 남자 둘이 붙어 있으려니 백허그를 한 건지 업힌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자세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세윤이 간지러운지 몸을 바르작거렸다.
“싫겠지만 참아요.”
이렇게 숨는다고 해도 얼마 안 가 들킬 것이다. 하지만 들키려면 조금이라도 덜 미친 모준영에게 들키는 게 낫지, 백은후는 절대 사양이었다. 잡혀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공세윤이 “읍읍.”하며 손을 떼려고 했다. 그의 손목을 덥석 잡고는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힘들면 손 떼줄 테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백은후가 날 납치하려고 할지도 몰라요.”
공세윤이 고개를 젖혀 파래진 주안의 얼굴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겠다고 덤비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뚜벅, 뚜벅…….
백은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르륵, 탁!
문을 하나씩 열었다 닫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공세윤이 성주안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주안 씨 심장 소리가 엄청나게 커요.”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배고픈 맹수가 화장실 문을 한 칸씩 열고 있는데!
성주안이 대답하지 않고 닫힌 문만 노려보자 공세윤이 눈을 흘겼다.
“뭐예요? 나 때문에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백은후 때문이었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세윤아, 제발 좀 평범하게 생각할 순 없을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급한 상황에서 말만 길어질 것 같아 침착하게 달래기로 했다.
“세윤 씨 때문인 거 맞으니까, 제발 좀 조용히 합…… 으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백은후가 씩 웃으며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빛내면서 입만 웃으니까 정말 무서웠다. 그의 입에서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