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
디버프였지. 캐릭터야 죽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마을에서 부활할 수 있지만 이 세계의 공세윤은 캐릭터가 아니잖아. 그럼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우울하다고 해도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내던질 리가.
아닐 거라고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우려 해 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공세윤이 만약 진짜 사람이 아니라 캐릭터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만든 디버프 효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본다면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쫓아가야지.”
성주안은 모준영을 기다리겠다는 약속도 까맣게 잊어버리곤 공세윤을 향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는 센터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급히 이름을 부르려는데, 가만히 서서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처연해 보여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툭툭, 땅에 떨어지는 눈물이 마치 빗방울 같았다.
어쩌자고 저 어린애를 저렇게 불쌍하게 설정한 걸까. 하아…….
성주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공세윤에게 다가갔다. 땅을 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공세윤은 곧 체념한 표정으로 발을 돌렸다.
공세윤의 어깨를 붙잡기 위해 들어 올린 성주안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는 벌써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말없이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내내 불안했다.
이따금씩 차도를 멍하게 보는 모습이 언제라도 뛰어들 것만 같아서……. 만약 진짜 차도에 뛰어들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성주안은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바로 말릴 생각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공세윤은 걷고, 또 걷고, 끝도 없이 걷기만 했다.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파서 더는 걸을 수 없을 때쯤 그가 몸을 돌렸다.
“왜 따라와요?”
“……그냥.”
언제부터였을까? 반말을 툭툭 내뱉던 공세윤이 존댓말을 썼던 것은.
이것도 우울함 때문일까?
“혹시 제 외모 보고 그러시는 거라면 애초에 마음을 안 주는 편이 나아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외모라니. 물론 공세윤은 푸르게 눈부신 피부와 처연한 표정을 가진 얼음 미인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세윤이 힘없이 말을 이었다.
“다 똑같아. 활기찰 땐 예쁜 얼굴 보고 좋아하다가, 우울한 상태가 되면 다들 귀신이라도 본 듯 도망가요. 그러지 않는 사람, 아니 존재는 희생의 창조자님밖에 없어요. 하지만 사라지셨죠.”
성주안은 할 말을 잃었다. 캐릭터를 만들 때, 그가 가진 특성이 플레이어에게 미치는 영향만 생각했지 캐릭터의 마음 따위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으니 공세윤이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고 끊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조금만 더 신경 써서 만들걸,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마음이 짠하지도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와 동시에 깨달음이 밀려왔다.
게임이 세상이 된다는 것은, 개발자가 신이 된다는 의미구나.
갑자기 신이 되어버린 소시민 성주안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안쓰러운 눈으로 공세윤을 바라봤다.
“어차피 혼자였어요. 저는.”
그는 그렇게 말하고 힘없이 발을 돌렸다. 더는 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성주안은 저도 모르게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가 어깨를 잡아 돌렸다. 힘을 주고 있지 않은 몸이 쉽게 돌아갔다.
“혼자 아닙니다. 같이 있을게요. 저 어차피 지낼 곳도…….”
아, 모준영. 성주안은 그제야 모준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왔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할 것 같았다.
함께 있어주겠다고 하면 당장 좋아 날뛸 줄 알았지만 그는 의외로 침착하게 반응했다.
“뭐, 그러든지요. 하지만 제게 뭔갈 기대하고 오시는 거라면…….”
성주안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함께 갑시다.”
공세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은 아직 울고 있는데 입은 웃고 있는 모양이 그를 더 슬퍼 보이게 했다. 일단 그가 안정될 때까진 옆에 있어주자. 그러다 보면 무슨 방법이 생기겠지.
성주안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세윤의 손을 꽉 쥐었다.
* * *
그 시각 각성자 관리센터는 발칵 뒤집혔다. 치료 중이던 공세윤이 갑자기 폭주한 데다가 특별 보호 대상자였던 성주안도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세윤의 주치의인 최 박사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모준영에게 말했다.
“큰일입니다. 검사하다가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뛰쳐나가셨는데 우울함이 심각해서 생존 의지가 10%도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어요.”
“주사는 맞았습니까?”
“주사는커녕 약도 받아 가시지 않았습니다. 큰일이에요. 지금 당장 찾아야 합니다.”
골치가 아팠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S급 헌터와, 언제 납치될지 모르는 S급 버퍼가 동시에 사라졌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센터에서 사라질 게 뭐란 말인가.
“일단 상황을 파악했으니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군요.”
당장 수색대를 보내서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건 알겠는데 문제는 어디로 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생존 의지가 10%밖에 남지 않은 공세윤이 어디서 뭘 할 줄 알고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성주안은 주소지도 불분명했다.
설마, 주지찬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백은후가 벌써 성주안을 납치한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자문자답으로 결론을 내린 모준영은 백은후의 집부터 뒤져보기로 하고 센터에 소속된 A급 헌터들을 중심으로 수색대를 꾸렸다.
“지금 당장 적색경보를 발동하고, 공세윤과 성주안, 그리고 백은후를 찾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때 특공대를 이끄는 대장이 의견을 냈다.
“우선순위가 어떻게 됩니까? 세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닌 이상 정보 길드를 풀어서 정보를 얻어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우선순위는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였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역시나 성주안이었다. 공세윤의 목숨도 중요하긴 하지만 성주안이 가지고 있는 능력치 세 배 버프를 백은후가 독점하기라도 한다면, 인류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우선순위는 성주안이다. 정보 길드의 정보도 모아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 백은후의 집부터 뒤져. 거기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으니.”
“네, 알겠습니다.”
수색대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모준영은 인벤토리를 열어 방어구와 무기를 장착한 후 전투 태세를 갖춘 채 수색대의 뒤를 따랐다.
“하여튼 각성자들이 제일 문제지!”
늘 편할 날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했다. 이게 다 성좌와 각성자들의 분탕질 때문이었다.
세계가 안정되기만 해 봐. 모조리 다 없애버릴 테니.
오늘도 모준영의 가슴은 성좌와 각성자들을 향한 혐오로 들끓고 있었다.
* * *
공세윤의 집으로 간 성주안은 우선 불부터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두 개와 거실, 그리고 화장실엔 화려한 욕조까지 있는 고급 오피스텔이었지만 안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거기다 거실 창엔 암막 커튼까지 쳐져 있어 불을 켜지 않으면 낮인지 밤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려웠다.
“방 좀 봐도 되겠습니까?”
“…….”
집에 들어온 직후부터 공세윤은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앉아 천장만 보고 있었다. 성주안은 할 수 없이 허락을 받지 않은 채로 방문을 열었다.
창가에 놓인 슈퍼싱글 침대 하나, 그게 전부였다. 테이블도 침대 옆 서랍도, 옷장도 없이 텅 비어버린 곳이 보여주는 황량한 풍경이 마치 공세윤의 마음 같아서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방을 나온 성주안은 우선 창을 깜깜하게 막아놓은 암막 커튼부터 걷은 후, 창을 열고, 방충망을 내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엉켜져 있는 이불을 가지고 나왔다.
성주안이 제집에서 멋대로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건드리는데도 공세윤은 얼어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공세윤 씨, 나 좀 도와줘요.”
“……네? 저요?”
“그럼 여기에 세윤 씨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아……. 저 뭐 하면 되는데요? 근데 저 지금 우울한 상태라서요. 하급 괴물한테도 져요. 저따위는 그냥 없는 게 나을걸요?”
하, 우울함에 자낮까지. 그래도 누굴 탓할까? 쟤가 저렇게 된 건 전부 자신 탓인데.
“그래서요? 지금 도와주기 싫다는 겁니까?”
“아, 아니요! 도와줄게요.”
“창문에서 털면 안으로 먼지가 다 들어오니까 밖에 나가서 텁시다.”
“이불 털게요? 갑자기 왜요?”
“원래 마음이 우울할 땐 청소부터 하는 겁니다. 제가 주로 쓰는 방법이긴 한데, 세윤 씨한테도 먹혔으면 좋겠네요.”
“……아, 청소부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공세윤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저 근데 청소 엄청 열심히 하는데요? 제 상태는 청소로 나아지는 게 아니에요. 약 먹고 주사 맞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왔어요. 그런데 잘한 것 같아요. 어차피 성좌님도 없는데 약과 주사가 다 무슨 소용이에요.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아니, 말을 해도 꼭……. 네가 죽긴 왜 죽어. 아직 어린 데다가 보고 있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예쁘고, 스킬 능력치도 각성자들 중에 최고인데…….
“그런 청소 말고요. 정리하고 버리는 청소가 아니라, 채우는 청소를 말하는 겁니다.”
“응? 채워요?”
성주안이 손가락으로 창 쪽을 가리켰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바닥에 그림자가 졌다. 창을 가리키던 주안의 손가락이 바닥으로 옮겨가자 공세윤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암막 커튼을 여니까 햇빛이 들어오죠?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 빛도 들어오고 그림자도 들어왔어요.”
“…….”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 세윤 씨와 나 그리고 햇빛과 그림자가 있게 됐네요. 거기에 다른 것 하나도 추가해 볼까요?”
“네? 여기서 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