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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14)화 (14/74)

014.

다시 봐도 크으으…….

성주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다가 흠칫했다. 같은 남자를 보며 자꾸만 입맛을 다시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곧 기가 막힌 이유를 찾아냈다.

이건 성적 매력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만든 완벽한 캐릭터를 향한 뿌듯함과 자부심이다. 그러니, 이상할 건 없어!

합리화를 마친 주안은 모준영이 파일을 정리하고 접어놓은 소매를 내리고, 재킷을 드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의자를 넣고 브리프 케이스까지 챙긴 모준영이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통장은 있겠죠?”

“……그게, 그러니까…….”

“개인 사정이 복잡해서, 말하기가 곤란한 겁니까?”

“예, 뭐, 그렇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각성자 신분으로 새로운 통장을 만들 수밖에.”

“혹시 아까 말한 보조금 때문에 그러세요?”

“S급 버퍼이니 특수한 관리를 하겠다고 보고했고, 방금 위에서 허락이 떨어졌거든요.”

특수한 관리라면 뭘 말하는 거지? 설마 영화에서처럼 이상한 시설에 가둬놓고 실험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게임이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니 새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겁부터 났다.

모준영이 센터장실 문을 열며 말했다.

“다행히 관리센터 1층에 각성자 전용 은행이 있으니 통장부터 만들러 갑시다.”

아니, 굳이 같이 가줄 필요는 없는데?

“뭐합니까? 어서 따라오지 않고.”

모준영의 말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자 민원실 바로 옆에 은행이 보였다. 문이 닫힐까 봐 뛰어 들어가는데, 모준영이 천천히 걸어 VIP 전용 창구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센터장님, 은행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모준영이 서류를 건네자 그것을 확인한 직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자신이 잘못 봤다는 듯 몇 번이나 확인한 직원이 침착한 척 말을 이었다.

“S급 버퍼시군요. VIP 통장으로 개설해 드리면 될까요”

“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부탁드립니다.”

모준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세 통장과 카드가 나왔다.

“보안국에도 동시 등록된 겁니까?”

“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중보고는 필요 없겠군.”

모준영이 성주안에게 통장과 카드를 내밀었다.

“희귀한 스킬을 가진 S급 각성자에게 나오는 정부 보조금입니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에 감이 왔다.

아, 얼마 안 되는구나. 뭐, 정부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아마 필요한 물약이나 무기까지 사려면 그리 넉넉한 돈은 아닐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S급 버퍼라곤 하나, 성좌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이상 코인을 받을 수 없고, 몸이 약하니 혼자 던전에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비싼 물약과 무기까지 사야 한다니……. 그냥 빛 좋은 개살구 아냐, 이거?

손을 덜덜 떨며 통장을 열어 잔액을 확인했다.

<1,500,000,000원>

보자, 일, 십, 백, 천, 만…….

주루룩 이어지는 0에 깜짝 놀라 세는 것을 멈췄다. 많이 줘봐야 천만 원 정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대체 다 얼마야? 완전 꿀인데? 아니지, 물약이나 장비가 비싸면 돈이 많아도 금세 바닥날 게 뻔하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알거지가 될지도 몰랐다.

“저기, 모준영 씨, 피 채우는 물약 하나에 얼마 정도 합니까?”

“천만 원 정도 합니다. 일반 물약은 어차피 효과가 없으니 S급 전용으로 써야 해서 그렇습니다.”

“히익.”

천만 원이면 도대체 몇 달 치 월급이야. 피를 채우지 못하면 목숨 부지도 힘들 텐데…….

“그래서 말했지 않습니까? 결코, 넉넉한 돈은 아닐 거라고.”

모준영이 다시 한번 현실을 알려주는 사이에 갑자기 밖에서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나만 놔두고 감히, 너희들끼리! 다 듣고 왔으니까 발뺌할 생각하지 마! 내 성좌님 내놔! 내놓으라고!”

그 소리를 들은 모준영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예상한 듯했다. 성주안 또한 많이 들어본 목소리에 유리문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언뜻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공세윤? 쟤는 왜 지금 나타났지?

“젠장.”

욕을 짓씹은 모준영이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공세윤이 폭주하는 중이니, 지금 당장 대원들 1층에 집합시켜. 최 박사도 바로 내려오라고 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모준영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책을 마련했다.

“여기 잠시만 숨어 계세요. 일단 제 방에 있는 긴급 회신으로 보고부터 하고,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성주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준영이 빛의 속도로 2층으로 올라갔다.

이런 급한 상황에 날 혼자 두고 보고하러 간다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준영이라면 그럴 것도 같았다. 백은후로부터 성주안을 구한 직후에도, 남은 일을 해야 한다며 다시 센터로 돌아올 정도로 절차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세계에서도 공무원은 힘든 직업이구나. 센터장인데도 선처리 후보고가 힘들다는 건가?

성주안이 은행 입구를 보고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악을 쓰던 공세윤이 은행 문을 부수고 들어와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우울함 상태라 스킬이 하락인 상태일 텐데도 문 하나쯤 간단히 부수는 게 신기했다.

스킬 하락해도 신체 능력이 줄어드는 건 아닌가 보네.

얼떨떨해진 채로 공세윤을 흘긋거렸다. 얼굴 전체가 일그러진 데다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어서 공세윤의 얼굴이 마치 화난 당근 같아 보였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선이 날렵하고,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눈 안 깔아? 너 오늘 버퍼로 각성했다며? 버퍼 주제에 한판 붙어 보자는 거야, 뭐야?”

성주안은 너무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이 성좌가 아니라는 이유로 공세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면에서 본 얼굴과 같지 않았다면 같은 사람인지 의심될 정도였다.

일단 모르는 척하자. 난 지금 성좌가 아니니까.

성주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누구세요?”

“그건 알 거 없고, 너, 듣자 하니까 버퍼 주제에 희생의 창조자를 안다며?”

성주안은 그제야 공세윤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것 같았다. 성좌일 때 미친 듯이 찾아대는 공세윤의 연락을 다 무시하고 없어져 버렸으니 화가 났을 거다. 게다가…….

‘우리 사이에 계약이 꼭 필요할까?’

순간의 수습을 위해 공세윤의 집착을 이용했으니 더 그럴 거다.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할 말이 궁해서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안다고 말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알아도 말 못 하죠.”

“왜지?”

“그 성좌에 대해선 공세윤 씨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궁금해하는데 제가 왜 공세윤 씨께 그걸 말해야 하죠?”

연한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꾹 깨물어 핏기가 없어진 입술이 보는 사람까지 울고 싶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성주안에게는 이 모습이 더 익숙했다. 화면으로 봤던 모습이니까. 하지만 익숙한 모습인 것과는 별개로 우울해 하는 그를 보는 게 힘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공세윤의 아픈 과거와 서사를 다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 따위가 뭐라고,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그런데 버퍼, 있잖아. 내가 아까 화내서 미안해. 아니, 문 부순 것도 미안하고…….”

훌쩍거리며 약한 모습을 보이던 공세윤이 갑자기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나마 화를 낼 땐 괜찮았던 눈동자도 점점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 거참, 되게 신경 쓰이게 하네.

“그런데 버퍼…….”

“성주안. 내 이름이니까 이름 불러요.”

공세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 내가 이름을 불러도 될까?”

“당연하죠.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응응, 고마워. 성주안……. 있잖아. 초면에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한데…….”

눈치를 보고, 입술을 깨물고, 말을 멈추고, 불안한 듯 어깨를 떠는 공세윤을 보자, 뭐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해 보세요. 일단 들어는 드릴게요.”

“그 성좌 말이야. 나는 구체적인 정보 같은 거 필요 없어. 그 성좌가 가진 코인도 필요 없고…….”

“그럼 도대체 뭘 원하시는 건데요?”

“나는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희생의 창조자님과 이야기 나누고, 모션을 나누고 그것만으로도 좋아. 만약에 그게 안 된다면 소식이라도 듣고 싶어. 아주 조그만 거라도……. 진짜 작은 거 하나만 알려주면 안 될까?”

“…….”

간절한 부탁에 성주안은 입을 다물었다. 대충 희생의 창조자도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라, 라는 말로 얼버무리면 만족하고 돌아갈 것 같았지만, 나중에 책임질 일이 막막했다. 아무리 게임 속 캐릭터라도 하나하나 애정을 담아 만들었으니 진심으로 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주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실망한 공세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역시, 안 되는 거지?”

“아니요. 안 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제가 아는 건 희생의 창조자라는 이름밖에 없어요. 먹고 살기 막막해서 우연히 들은 이름을 가지고 센터를 찾아온 거예요. 뭐라도 얻어갈 수 있을까 하고…….”

그 말에 공세윤의 얼굴에 절망감이 서렸다. 마치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의 주인공 같은 표정이었다. 공세윤이 훌쩍거리며 말을 이었다.

“찾을 방법이 없다는 말이네요. 더는…… 만나지 못해? 하아…….”

길게 한숨을 내뱉은 그가 인사 한마디 없이 몸을 돌렸다. 어깨를 흔들며 부서진 문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모든 걸 다 포기한 사람처럼 무거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가 뭔갈 더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거운 죄책감을 떨쳐내려고 눈을 감은 순간, 머릿속에 공세윤의 캐릭터 설정이 떠올랐다.

<심장에 박힌 얼음송곳 ― 상태 이상, 우울함이 심해 생존 의지가 0이 되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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