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깊게 가라앉아 있었던 까만 눈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햇빛을 그대로 흡수할 것만 같았던 눈이, 정신을 차렸다는 듯 제빛을 띠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에 충격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
“…….”
모준영에게 안긴 상태로 그의 눈동자를 살피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건물에선 한참 벗어났고, 이속 능력을 받지 못한 백은후가 여기까지 쫓아 올 리도 없는데 우린 왜 이런 자세로 붙어 있는 걸까? 이제 천천히 가도 될 텐데…….
마침 모준영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팍 찌푸린 후에 팔을 풀었다. 그가 흠흠,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각성자마다 각성하는 시기가 다르다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각성이라니…….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그러니 저는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성주안은 일부러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불쌍한 척했다. 모준영은 배가 고프고 잘 곳이 없는 일반인을 위해 제 것을 내어주던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으니, 일부러 불쌍한 척하는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모준영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에서 적의가 느껴져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준영이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하필 버퍼라니.”
젠장, 말끝에 약하게 욕이 섞여 나왔다.
“버퍼로 각성한 게 무슨 문젭니까?”
사실, 성주안도 자신이 공격 스킬을 가진 헌터가 아니라 버퍼로 각성한 것에 불만이 있긴 했다. 자신을 지키는 데는 쓸모도 없는 보조 스킬만 잔뜩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준영이 골치 아플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엄청난 이속을 경험해 보니 알겠더군요. 당신, S급이잖아요?”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하급인 것보단 낫지.”
모준영이 한심하게 성주안을 내려다봤다.
“진짜 몰라서 물어요? 그러잖아도 골칫덩이 백은후가 당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데, S급 버퍼로 각성까지 했으니, 앞으로 더하겠죠.”
아, 백은후…….
성주안은 그제야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모준영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게 꼭 제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각성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백은후가 사고를 친다면 그건 모두 성주안 씨 탓입니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니 좋게 넘어가려고 했던 성주안은 속이 부글거리는 걸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은 하자.
“모준영 씨,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일반인이었던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헌터가 되어 몬스터와 싸우는 것보단 그래도 버퍼라서 낫다고 생각했을 뿐인데요.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왜 화를 내세요?”
“…….”
모준영이 말없이 성주안을 쳐다봤다. 착각이었을까? 눈빛에 동정심이 언뜻 비췄다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뭐, 하긴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모준영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일단 등록부터 하죠. 버퍼든 헌터든 등록이 되어 있어야 센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백은후가 쫓아오기 전에 얼른 가야겠습니다.”
아직 이속 스킬의 지속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모준영이 다시 성주안을 안아 들었다.
“빠르게 가야 하니, 이편이 좋겠습니다.”
각성자 관리센터로 가는 동안 몇 번의 현기증과 구토 그리고 멀미가 났다. 물론 모준영은 주안이 아무리 발악해도 절대 속력을 늦춰주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얼마나 더 생길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성주안은 점점 지쳐갔다.
각성자 관리센터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F급도 안 되는 하급 각성자라 던전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등록은 하는 모양이었다.
성주안은 처음 왔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민원처리반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가 모준영에게 손목이 잡혔다.
“왜 그리로 갑니까?”
“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
아, 등록하러 왔으니 각성자 등록실로 가야 하는구나.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으며 발을 돌리니 모준영이 혀를 끌끌 찼다. 성주안은 모준영의 뒤통수를 한번 노려봐주곤 그의 뒤를 따랐다. 등록실에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센터장님이 여길 왜 오셨지?”
“그러게…… 등록실엔 통 안 오시던 분인데.”
직원들이 몸도 약해 보이는 일반인을 데리고 온 센터장을 알아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준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직원에게 가서 말했다.
“S급 버퍼로 각성한 각성자가 나왔습니다. 빠르게 등록해 주세요. 지금부터 성주안 씨는 특별 보호 대상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모준영이 아닌 성주안을 향했다. 모준영의 지시를 받은 직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 S급 버퍼라고요?”
“믿기 힘들겠지만 능력은 제가 직접 검증했습니다.”
“……세상에. 그러면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특별실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직원은 놀라긴 했지만 ‘버퍼’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이상했다. 이 게임은 처음 만들 때부터 유저인 성좌가 코인을 이용해 버프도 주고, 물약도 주는 설정이라 버퍼나 힐러는 파티에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버퍼를 어떻게 아는 거지?
그렇다면 이곳은 원래부터 버퍼가 존재하는 세상인 건가? 그럼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등급이 높은 버퍼라서?
모준영이 직원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특별실은 능력을 검증하러 가는 곳 아닙니까? 제가 직접 검증했다는데 굳이 측정기 위에 세울 필요가 있을까요? 측정하는 데 세금이 얼마나 낭비되는지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힐난하는 듯한 말에 직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귀찮은 절차를 생략해 준 건 고마운 일이었으나,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준영의 태도에 잊고 있었던 KA 소프트의 상사가 생각나 속이 다 쓰렸다.
별로 잘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성주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모준영을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뭡니까?”
속으로 욕하는 게 들켰나? 성주안은 바로 표정을 고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좀 어색해서요.”
“오늘 할 일이 많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계셔야 합니다.”
모준영은 그렇게 말하며 자꾸만 로비 쪽을 흘긋거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백은후가 갑자기 쳐들어와 미친 짓을 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때, 직원이 신청서를 내밀었다. 직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간단한 인적 사항을 작성했다.
<이름 : 성주안
나이 : 25세(만 23세)>
여기까지 썼을 뿐인데 당장 다음 문항부터가 문제였다. 주소를 쓰라니…….
이 세계의 행정구역은 대한민국과 똑같은 것 같았지만, 원래 세계의 주소가 여기도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썼다가 괜히 의심을 받는 것 보단 차라리 안 쓰는 게 낫겠지.
“뭐합니까? 주소 몰라요?”
지혜의 마을 성좌 집 주소라면 물약 상점 옆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또 미친놈 취급을 받을 터였다. 그래서 주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또 그런 걸 묻지 못하게 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집이 있긴 했는데…… 아니, 각성자 등록하러 와서 복잡한 가정사까지 말해야 합니까? 제가 집이 있었다면 오늘 잠자리를 구걸하지 않았겠죠.”
눈을 가늘게 뜨고 성주안을 보던 모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요. 어차피 집으로 못 돌아갈 테니.”
성주안은 상태창에서 본 능력치와 스킬을 적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를 받은 직원이 키보드를 빠르게 누르자 스피커에서 ‘S급 버퍼 성주안님의 각성자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다.
“보조금은 바로 지급될 예정이고요. 각성자 전용 거주 시설의 안내는 원래라면 같은 계열 상급 각성자가 안내해 줘야 하는데 S급 버퍼는 처음이라…….”
직원이 모준영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내자 그가 말했다.
“내가 직접 합니다. 오늘 시설에 다녀와서 나머지 필요한 행정절차를 밟도록 하죠”
“그럼 헌터…… 아니, 버퍼 자격증을 전하는 것도 센터장님께서 직접 하시겠습니까?”
“그래요. 자격증 나오면 센터장실로 가져다주세요.”
직원의 당황한 듯한 표정과 이쪽을 향하는 다른 각성자들의 시샘 가득한 시선을 받으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S급 각성자는 어디를 가나 최고의 대우를 받는 존재라는 것을.
그러면 뭘 하나. 정작 본인은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인데다가 백은후에게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신세인데……. 정말 왜 이렇게 됐지? 나는 그저 지옥 같은 회사에서 벗어나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등록실을 나오니 모준영이 간단히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해서 다시 센터장실로 이동했다. 성주안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사무실 소파에 앉아 바쁘게 일하는 모준영을 관찰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다 멋있어서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주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세 번 접어 있은 셔츠 안으로 보이는 울룩불룩한 팔 근육이었다. 자세히 보니 가슴에 있는 단추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런 몸을 하고서 고작 하는 일이 만년필로 결재 파일에 사인하고, 서류를 정리하는 거라니……. 그 사실이 우스워 성주안은 저도 모르게 킬킬거리다가 고개를 든 모준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
훔쳐보다 걸렸으니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 밖의 것을 물었다.
“배고픕니까?”
“아니요. 아까 밥 먹었잖아요.”
“배도 안 고픈데 왜 사람을 보고 입맛을 다십니까?”
“네? 제가 언제 그랬다고…….”
마뜩잖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모준영을 보며 주안 역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얼마 못 가 금세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