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접속을 희망합니다.>
‘성좌인가?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계약하자고 들러붙는 성좌를 이용하면 그만이었는데.’
백은후는 곧바로 접속 요청을 받아들였다. 앞에 있는 주지찬을 의식해 소리 내지 않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성좌님, 잘 지냈어?
음흉을 떠는 백은후의 말투에 성좌가 모션을 보내왔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부끄러워합니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뭐 필요한 게 있냐고 묻습니다.>
하여튼, 쉽단 말이지.
―보다시피, 순간이동이 필요해. 도와주겠어?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계약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바빠죽겠는데 계약이라니, 성좌놈들은 참 귀찮은 존재군.
간신히 방어막을 만들어 주지찬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데 그것도 더는 한계였다. 주지찬이 다리 한쪽을 들고 방어막을 부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 그의 발바닥이 보였다. 그렇나 아무리 급해도 계약을 함부로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계약은 생각해 보도록 하지.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코인 1개를 후원합니다.>
<코인 효과로 백은후의 몸이 집으로 이동합니다. 이동시간 20초, 19초, 18초…….>
느리게 지나는 시간에 조바심이 났다. 힘들게 만들어 놓은 방어막이 주지찬의 공격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지찬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백은후의 몸이 사라졌다.
“뭐야? 또 무슨 수를 쓴 거지?”
주지찬은 백은후가 사라진 곳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방어벽은 부서졌으나 안에 있어야 할 그가 보이지 않았다.
공격할 대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니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발끝에서부터 차오른 열이 몸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마치 막 각성했을 때와 비슷한 생체 반응이었다.
주지찬은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욕망이 들끓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미치겠네! 망할 각성 부작용.”
화염계 일인자인 주지찬은 올바른 인성과 불같은 전투력을 소유한 각성자이긴 했으나, 각성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감당할 수 없는 성적 욕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곱상하게 생긴 녀석과 갑자기 키스했으니 지금 그의 몸은 발정기가 온 한 마리의 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숨을 내쉬고, 애국가를 부르고, 제 손으로 뺨을 때리고, 대리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부서도 도저히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게 다, 그 수상한 성주안 녀석 때문이었다.
* * *
“만나기만 해 봐, 이 값은 톡톡히 치르게 할 테니!”
집으로 이동안 백은후는 숨을 헐떡이며 소매로 식은땀을 닦았다. 직접적인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닌데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백은후가 누군가에게 쫓기듯 도망 온 것은 각성한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몬스터가 아닌 각성자를 상대로! 녀석이 버프만 주지 않았더라도 주지찬 따위 그냥 날려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희생의 창조자인가 뭔가 하는 성좌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 성좌와 계약만 했어도 오늘과 같은 치욕은 없었을 텐데…….
백은후가 이를 갈며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때 잊고 있었던 성좌가 모션을 보내왔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수줍게 웃습니다.>
백은후는 성좌의 모션을 깨끗이 무시했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어깨에 손을 올립니다.>
“지금, 어디다 손을 대는 거지?”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황당해 합니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우리 이제 계약한 사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계약? 참, 꿈도 크군.
백은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우리 아직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거로 아는데.”
그 말에 성좌는 충격을 받은 듯 상태창엔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해 준다면 좋을 텐데,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저 거지 성좌는 틈만 나면 계약하자고 졸랐으니까.
그동안 백은후는 성좌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성좌에게 저의 본색을 숨기고 꽤 괜찮은 사람인 척 해왔다. 그러나 코인 부자인 희생의 창조자에다가 S급 버퍼도 나타났으니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고작 코인 하나 줬다고 희생의 창조자를 놔두고 저 성좌와 계약을 맺을 순 없지 않은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백은후에겐 마음을 바꾸는 일 따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쉬웠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불안해 합니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설마 마음이 바뀐 거냐고 묻습니다.>
백은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음이 바뀐 거라니, 이거 좀 서운하군. 나는 한 번도 계약할 마음을 품은 적이 없는데.”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계약하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백은후가 눈을 접어 웃다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나와 계약하고 싶어?”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거, 어떡하지? 나는 욕심이 조금 많은 편인데…….”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뭘 원하냐고 묻습니다.>
“1억 개의 코인.”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화가 나서 펄쩍펄쩍 뜁니다.>
백은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계약을 볼모로 하지 않고도 1,000개 이상의 코인을 쓸 수 있는 대범함을 가진 성좌가 내 이상형이야.”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희생의 창조자를 말하는 거냐고 묻습니다.>
백은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희생의 창조자는 더 이상 성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좌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저 성좌의 말은 거짓이다. 각성한 후로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하면서 성좌가 다시 각성자가 되었다는 얘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으니까.
판단을 마친 백은후가 씩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 믿어주지. 한번 성좌가 된 이가 더 이상 성좌가 아니라니. 성좌,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야비한데?”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답답해 합니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후회할 거라고 말합니다.>
백은후는 성좌가 사기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다. 만약 저 성좌의 말이 사실이라면, 희생의 창조자와는 계약할 수 없게 되니까.
그렇다면 큰일인데?
백은후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성좌를 낚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 봐. 들어보고 믿을 만하면 계약해 줄지도 모르지.”
희생의 창조자가 없다고 해도 수단을 입은 왕과 계약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정보를 알려면 적당히 미끼를 던져야 했다. 만약, 저 성좌를 통해 희생의 창조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그에게 침 흘리는 다른 각성자들보다 유리해질 테니까.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그건 세계의 비밀이라 말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성좌, 수단을 입은 왕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협박합니다.>
말을 들으니 더 확신이 생겼다. 저 성좌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다. 코인이 없는 성좌일수록 고등급 각성자와 파티를 짜기 힘들 테니, 몇 안 되는 S급 각성자를, 심지어 여태 군침 흘리던 자신을 일부러 다치게 할 리가 없다.
백은후가 혀를 쯧쯧 차며 접속을 종료했다. 성좌들이 세계의 비밀이라고 지정해 놓은 사안에 대해선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대화를 나눠봐야 시간 낭비였다.
그나저나, 녀석은 모준영이 데리고 있는 건가?
처음엔 녀석이 희생의 창조자를 빼돌렸다는 사실이 가장 거슬렸으나, 지금은 그 녀석의 버프가 더 신경 쓰였다.
“S급 버퍼라…….”
그런 버프를 소유한 녀석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가지게 된다면?
“절대 그렇게 둬선 안 돼.”
백은후는 인벤토리를 열어 물약을 차례대로 꺼냈다. 기력을 보충하고 상처를 회복해 주는 물약을 꺼내 마시며 결심했다.
반드시 희생의 창조자를 찾아 계약하거나, 성주안을 자신의 전용 버퍼로 만들겠다고.
백은후의 눈이 야망으로 번뜩였다.
* * *
그 시각 성주안은 모준영에게 들린 채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악수 스킬의 지속시간은 한 시간이라, 이 속도로 계속 달리면 지역을 벗어날 텐데…….
모준영은 멈추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처음 맛본 스킬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작용인가? 그렇다면 막아야 하는데…….
각성자들이 겪는 부작용은 다양했다. 일부는 매우 특이한 증상을 겪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탐닉과 중독, 집착 증세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각성자를 혐오하고, 자신이 각성자인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준영도 이런 부작용을 겪는 것 같았다.
성주안은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 냈다.
“모준영 씨.”
뛰는데 영혼을 팔아버렸는지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모준영 씨!”
“……왜 부르십니까?”
“정신 차리세요. 누가 각성자 아니랄까 봐 버프에 미쳐버리기라도 하신 겁니까?”
끼이이이익.
모준영이 바닥을 긁으며 속도를 줄였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흙먼지에 콜록콜록 기침이 났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각성자라고 부작용 티 내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나 참…….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듣기 싫으면 정신 차리시라고요. 이속 스킬에 눈멀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 달리셨잖아요. 우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