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하, 키스?”
한참 성주안을 비웃고 있던 백은후가 얼굴을 찡그렸다. 성주안은 본능적으로 그가 스킬을 쓰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백은후가 손가락을 드는 걸 보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제 더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스킬명을 외치는 것으로 스킬을 발동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모션이다. 판단을 마친 성주안이 주지찬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그의 뺨을 잡았다. 깜짝 놀란 주지찬이 눈을 홉뜨며 화염방사기를 들이댔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은 절 피할 때가 아니에요. 시간이 없다고요!”
“뭐, 뭐라는 거야. 통구이 되고 싶지 않으면 비켜!”
그 와중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백은후 쪽을 힐긋거렸다. 당장이라도 스킬을 쓸 것 같았던 그가 웬일인지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미친놈이 언제 또 스킬을 쓸지 모르니까 방심은 금물이었다.
“주지찬 씨, 이해가 안 되겠지만 제가 지금부터 키스할 겁니다. 그러니까 피하지 마세요.”
“제정신이야?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아니라, 저 지금 막 버퍼로 각성했다고요! 버프를 드리려면 어쩔 수 없이 키스해야 해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성주안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성좌라고 했다가 하루도 안 되어 버퍼로 각성했다고 하면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차라리 덮치자! 그런데 무슨 수로? 저따위가 물리적인 힘으로 주지찬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성주안은 손가락으로 주지찬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화염방사기를 가리켰다.
“어, 주지찬 씨, 화염방사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주지찬이 화염방사기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잽싸게 입술을 들이댔다. 스치기만 해도 스킬이 발동되는 거면 좋겠는데.
주지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안은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술을 물었다. 서늘했던 몸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더니 닿은 입술이 훅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이상한데……. 왜 이렇게 뜨겁지? 화염계 헌터라 그런가?
“읍, 으읏.”
이상한 느낌에 입술을 떼려는 순간, 느닷없이 주지찬이 힘주어 뒷머리를 눌렀다. 그러곤 그대로 몸을 벽까지 밀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몸을 덮쳐왔다. 정신없이 잡아먹히는 듯한 키스가 이어졌다.
이 정도면 이미 스킬은 발동되고도 남았을 텐데, 그는 주안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숨을 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짝 입술을 떨어뜨렸을 때, 주지찬은 그 순간조차 아쉽다는 듯이 다시 성급하게 입을 맞췄다. 입 안으로 들어 온 혀가 끈적하게 얽혔다. 온몸이 타는 듯 지글지글 끓는 감각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을 때, 혼란스러운 듯한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아……, 저, 정신 차려요. 지금 싸움 중이라고요. 뭐, 느껴지는 거 없어요?”
숨을 몰아쉬며 채근하자 눈동자가 느리게 흔들리더니, 그가 욕을 짓씹었다.
“젠장, 이게 뭐지? 하아…….”
주지찬이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몸을 돌리자 백은후가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사랑을 나누는 것도 좋지, 그런데 꼭 여기서 이래야겠어?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조롱 섞인 백은후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것도 잠시, 주지찬의 어깨에서 화염방사기가 사라졌다. 백은후를 상대로 자신의 주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아 버프 효과가 발동된 듯했다. 성주안은 재빨리 주지찬의 뒤에 숨어 상황을 주시했다.
주지찬이 책상 모서리를 지지대 삼아 풀쩍 뛰어오르자 우지끈, 하며 책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헉, 저거 돌로 만든 거 아닌가? 어떻게 저렇게 쉽게 부서져?
대리석으로 만든 책상이 발길질 한 번에 반파되다니……. 과연 키스의 세 배 버프는 SSS급 스킬다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백은후와 모준영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주지찬을 쳐다봤다. 주지찬이 화마의 탄식을 쓰기 위해 손을 둥글게 말았다.
“저 녀석의 말이 사실인 것 같은데, 어쩌지? 내 능력치가 세 배 정도 늘어난 거 같은데.”
“……그럴 리가.”
백은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주지찬의 얼굴과 부서져 버린 책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눈에 힘을 줬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그러니 믿지 않으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지찬의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스킬을 쓰기 전에 보이는 현상이었다. 멀리 물러나 있던 모준영이 잽싸게 뛰어와 성주안의 허리를 감았다.
“여기 더 있어 봐야 다칠 것 같으니까 가죠.”
그 말에 주안은 모준영의 허리에 매달린 상태로 주지찬을 쳐다봤다. 주지찬은 불꽃처럼 화르르 타는 눈길로 백은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아무리 백은후라도 능력치가 세 배나 오른 주지찬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순 없을 테니 모준영의 말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주지찬의 정의로운 성격이었다. 민간인의 피해를 걱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미친놈이 싸우면 후자가 더 유리한 법인데 괜찮을까? 그대로 두고 가도 되겠지? 여기에 있어 봐야 뭘 더 해줄 것도 없고…….
고민하고 있는데 모준영이 재촉해왔다.
“뭐 하고 있어요? 내 허리 꽉 잡으세요.”
“주지찬 씨는…….”
“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합니까? 각성자들 싸움에서 민간인이 다치면 골치 아파지니까 빨리 잡기나 해요.”
“아, 네……. 가죠.”
“그럼 들겠습니다.”
허리를 감아올리는 힘이 엄청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더니 몸이 공중에 붕 뜬 상태로 모준영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었다.
펑, 펑.
뒤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저를 들고 달리는 모준영에게 신경 써야 할 때였다.
도망치는 상황이니까 이속 스킬을 사용하는 게 좋겠지.
“모준영 씨, 저와 악수하죠?”
그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사람 들고 뛰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이속 높여 드릴 테니 손잡자고요.”
“참나, 영문을 모르겠네.”
모준영이 계단을 타고 아래층까지 내려왔을 때, 속도를 줄였다. 끼이익, 발걸음을 멈춘 것뿐인데 바닥과 발이 닿는 곳에 엄청난 먼지가 일었다.
“와…… 역시, 금강불괴!”
그 말에 모준영이 미간을 좁히며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 금강 뭐요?”
“금강불괴요. 그거 모준영 씨 별명 아니에요?”
착각일까? 모준영의 몸에서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봤더니 그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겁니까?”
“희생의 창조자가 그러던데요? 모준영 씨는 금강불괴라고.”
설마, 쑥스러워하나?
늘 굳은 얼굴에다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모준영이 별것도 아닌 거로 쑥스러워하니 신선했다.
“……됐습니다. 이상한 별명으로 사람 놀리지 말고 악수나 합시다.”
모준영이 손을 잡아왔다. 남자치고 손이 작은 편도 아닌데 그의 손안에 주안의 손이 쏙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잡은 손바닥에서 열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모준영의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진짜였군.”
그렇게 중얼거린 모준영이 다리에 힘을 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였다.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사물이 인식되지 않을 정도였다.
와…… 스킬 엄청난데?
감탄하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악수 스킬은 상대의 이속 스킬을 높여 줄 뿐 버퍼에게 속도에 대한 저항감을 주진 않는 것 같았다.
젠장. 이왕 각성자로 각성시켜 줄 거면 신체 능력도 비슷하게 맞춰주지, 체력은 그대로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시스템이었다.
* * *
백은후는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주지찬을 보며 내심 놀라고 있었다.
버프를 받은 주지찬은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만 공격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스킬은 쓰지도 않았는데 집기와 건물이 알아서 부서졌다. 신체 능력으로는 각성자 중 최고인 모준영보다 더 센 것 같았다.
“젠장!”
백은후는 욕을 짓씹으며 주지찬의 공격을 피해 다녔다.
주지찬이 입매를 비틀며 약을 바짝 올리기 시작했다.
“왜? 붙어 보니까 답이 안 나와?”
“건방 떨지 마.”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 자신의 능력으론 주지찬과 게임이 되지 않았다. 희생의 창조자라고 주장하는 그 녀석도 모준영이 데리고 튀었으니 주지찬과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게다가 단순한 주지찬은 자신에게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싸움에서 물러선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상대가 강했을 때도 끝까지 덤벼드는데, 지금은 제가 더 강하다는 걸 인지한 상태니 앞으로 더 날뛸 게 뻔했다.
어떡한다? 이대로 도망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데…….
백은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주지찬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정신을 잃고 날뛰던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백은후를 쳐다보았다.
“뭐지? 그 웃음은.”
“주지찬, 목표도 사라졌는데 꼭 이렇게 싸울 필요가 있나?”
“헛소리 집어치워! 내가 널 한두 번 겪어? 내가 사라지면 녀석을 따라가서 모준영과 싸울 생각이면서.”
오호? 단순한 녀석이 거기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말로 잘 달래서 싸움을 멈추고 성주안을 따라잡으려던 계획이 실패했으니 이제 어떡한다?
그때 백은후의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