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다행히 백은후는 헛소리를 내뱉었다는 것을 인지한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화면으로 봤을 때처럼 소파에 느른히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사람을 납치해 와 놓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건 분명 사이코 같은 짓인데, 영화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생겨서 현실감이 없었다.
“왜 납치했냐라……. 그건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모준영이 왜 일반인인 너에게 사비까지 써가면서 거처를 마련해 주는 거지?”
“그, 그야…….”
다시 말문이 막혔다. 백은후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말을 당사자 앞에서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말을 바꿨다.
“모준영 씨는 공무원이니까요. 일반인이 불쌍해서 그러실 수도 있죠.”
백은후가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 모준영이 일반인이 불쌍해서 사비를 들인다고? 뭐, 그렇다고 치지.”
“그런데…… 지금 단순히 모준영 씨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절 데려오신 거예요?”
아무리 둘이 앙숙이라곤 하지만 백은후가 이렇게까지 미쳐 있는지는 몰랐다. 아니면 혹시, 설마?
“설마. 네가 사람들 앞에서 희생의 창조자라는 말을 꺼냈다던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미 들었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성좌에 대한 건 모준영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후, 어쩔 수 없네요. 말해 드리죠. 제가 성좌, 희생의 창조자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러자 백은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으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지막 순간까지 접속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계속해서 거절했으니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에 얼굴이 뚫릴 것 같아서 주안은 급하게 말을 보탰다.
“그렇다고 모준영 씨에게 말해 준 건 아니에요.”
다행히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개인적으로 일이 생겨서 거처를 마련해 주면 한 달 뒤에 얘기해 드리기로 했죠.”
“모준영도 모른다는 말이군.”
“네, 그 성좌, 갑자기 사라졌죠?”
백은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대뜸 낮은 목소리로 욕을 짓씹었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졌지. 그런데…….”
그가 테이블을 돌아 주안의 앞에 섰다. 도망가고 싶은데 온몸이 묶인 상태라 도망도 가지 못하고 심장만 쿵쿵 뛰었다.
“일반인이 성좌에 대해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걸 알면 제가 이러고 있겠어요? 저도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몰라서 돌아버릴 것 같은데…….”
반쯤은 진심이었다.
계속되는 야근 탓에 피곤한 상태라고 해도, 꿈을 이렇게 오래 꾸다니.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백은후 앞에서 계속 이렇게 모른다고 잡아떼기만 해도 되는 걸까? 저 성격에 아무 일 없이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은데…….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주안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모준영이 구하러 오는 것이다. 둘이 앙숙이니만큼 범인이야 쉽게 눈치챌 것이고, 민간인이 희생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그냥 넘길 사람도 아니니 시간만 잘 끌면 구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알아요. 제 말을 믿기가 쉽지 않다는 거. 하지만 사실이라고요.”
백은후가 입을 다문 채 주안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럼 알고 있는 걸 말해 주면 편하겠네. 나도 굳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싶진 않아. 더구나 너처럼…….”
아래위로 훑는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끈적했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때? 나한테 희생의 창조자에 대해서 말해 주는 건.”
이 정도면 신사적으로 물은 거긴 한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거절하면 발작 버튼이 눌릴지도 모르니까 대답하되,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말을 돌려야 했다. 주안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성좌가 되어라, 라는 게임이 있어요.”
“……게임?”
“그러니까 성좌가 되어 화신을 키우는 RPG로…….”
게임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히 길게 늘어놓는 동안 백은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시간을 끄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주안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게 문제였을까? 얼마 안 있어 백은후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주먹이 얼굴을 강타할 걸 생각하자 소름이 쫙 돋았다. 주안은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쾅! 쾅!
그때였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백은후, 또 너냐?”
문을 부수고 들어 온 사람은 모준영과 주지찬이었다.
모준영이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만약의 사태를 위해 주지찬까지 데려온 듯했다. 주지찬은 정식 공무원은 아니었지만 센터에 소속된 상태로 민간인을 구하는 일을 담당하는 데다 그 일에 진심이었으니 나서 줬겠지. 변명거리도 점점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구원자가 따로 없었다.
백은후가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러자 주지찬의 손에 갑자기 화염방사기가 나타났다.
“미, 미친…….”
아니 지금 저걸 여기서 쓴다고? 다 태워버릴 일 있나.
백은후는 전기계열이라 둘이 스킬 공격을 주고받다가는 건물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걱정돼 죽겠는데 모준영은 자주 봐서 익숙하다는 듯 이쪽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다치면 안 되니까 피해 있는 게 좋겠습니다.”
“예? 저걸 보고도요? 말려야 하지 않나요?”
“말린다고 들을 놈들이 아닙니다. 각성자가 다 그렇죠, 뭐.”
모준영이 태연하게 말했다. 구하러 와줘서 고맙긴 한데 이 일에 상관도 없는 주지찬을 억지로 끌어들여 놓고 어쩜 저리 뻔뻔할 수 있을까? 그래도 통구이가 될 순 없었기에 주안은 모준영에게 딱 붙어 자리를 피했다.
“이쯤에서 포기하면 태워버리진 않을게.”
화염방사기를 든 주지찬이 말했다. 그러나 백은후는 비웃음을 날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죽음의 낙뢰를 쓸 때의 모션이었다.
“너야말로 곱게 놔두고 가지?”
“미안한데, 내가 또 민간인 죽는 건 못 봐서 말이야.”
민간인 죽는 건 못 본다는 사람이 실내에서 화염방사기를 쓰려고? 그거 틀면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 다 죽을 텐데……. 어이가 없어 주지찬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주지찬의 이마에서 번쩍, 전기가 튀었다. 백은후가 경고의 의미로 약하게 날린 공격이었다.
“이 새끼가…….”
화가 난 주지찬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백은후를 향해 조준하는 사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방사기의 앞쪽이 부서졌다. 아니, 주지찬……. S급이 왜 이렇게 약한 건데? 구경하는 내 심장이 다 쪼그라들겠다.
“저 정도 공격에 화염방사기를 쓰지는 않을 겁니다. 쓰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요.”
모준영의 말을 듣고 나니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안 쓸 거면 인벤토리에 넣어놓던가 그걸 무겁게 들고 있으니까 약한 공격도 못 피하는 거잖아.
답답해서 머리가 돌 것 같았다.
백은후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하늘의 울림을 쓸 생각일까? 그 스킬 잘못 쓰면 주지찬이 영구적인 장애를 입을 수도 있는데…….
민간인의 안전을 생각하는 주지찬과,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백은후가 싸우면 절대적으로 백은후가 이길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모준영은 여전히 관심 없는 듯한 투로 말했다.
“겁을 많이 먹었나 봅니다. 무서워서 못 걷겠으면 업어줄 테니까 업혀요.”
제 앞에 무릎을 굽히고 등을 대는 모준영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저기요. 모준영 씨, 주지찬 씨 저렇게 두고 그냥 가자는 말씀이세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죠.”
몸을 일으킨 모준영이 주안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면 힘도 없는 주제에 싸우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건 아니지만, 최소한 곁에 있어주기는 해야 하잖아요. 각성자 관리센터의 센터장님이 어쩌면 그렇게 무책임하세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이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성자 관리센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성자들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폭주의 위험성이 있는 각성자들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모준영은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때였다.
“하늘의 울림!”
백은후가 외쳤다. 상관없다던 모준영까지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주지찬은 다급하게 화염방사기를 고쳐 들었지만 백은후가 더 빨랐다. 노란 번개가 천장을 감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주안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하늘의 울림은 정해진 대상에게만 발동되는 스킬이었다. 그 스킬을 주안에게 썼을 리가 없는데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아닌가? 진짜 나한테 쓴 거야?
고개를 돌리자 백은후가 스킬을 쓰기 전 모션 그대로 멈춰 있었고, 주지찬도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지찬이 멀쩡한 걸 확인하고 나자마자 다시 고통이 시작되었다.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고 쓰러지는 순간, 갑자기 상태창이 떴다.
<축하합니다. 성주안님은 S급 버퍼로 각성하셨습니다.>
뭐라고?
갑자기 각성했다고?
그것도 헌터가 아니라 버퍼로?
<각성자 : 성주안
현재 등급 : S (버프계)
스킬 등급 :
악수(SS), 포옹(A), 키스(SSS)>
네?
그런데 스킬 이름은 왜 이따위인 거죠?!
의아했지만 지금은 스킬 이름을 보며 불만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성주안의 각성으로 놀란 백은후가 공격을 멈추고 있으니 이때 뭐라도 해서 주지찬을 도와야 했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고통을 참으며 겨우 스킬창을 열어 각 스킬의 효과를 확인했다.
<악수― 아군의 공격속도와 이동속도를 높임(파티원 전원에게 사용 가능)
포옹― 아군에게 보호막을 만들어 풀 방어력 상태로 만듬(파티원 전원에게 사용 가능, 지속시간: 1분 30초, 쿨타임 : 10분)
키스― 아군의 모든 능력치를 세 배로 높임(1명에게만 사용 가능, 지속시간: 24시간)>
이상한 이름을 보고 오해한 것과 달리 스킬 내용은 성좌일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나 백은후가 다시 미치기 전에 수를 써놓아야 했다.
주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비장한 표정으로 주지찬을 향해 크게 외쳤다.
“주지찬에게 키스!”
하지만 크게 외친 게 무색하게 주지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뻘쭘하게 주변을 둘러보자, 주지찬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았고, 백은후는 대놓고 비웃고 있었으며 모준영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낯간지러움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