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들어오세요.”
센터장의 비서를 맡은 남자가 들어와 주안의 앞에 식판을 놓았다. 따뜻한 밥과 국, 제육볶음과 채소무침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음식을 보자 입에 침이 고였다.
“급하게 찾으셔서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모준영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으나 남자는 나가지 않고 멀뚱히 서서 주안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나가야 빨리 음식을 먹을 텐데……. 주안은 모준영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각성자처럼 위협적인 눈빛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싸한 시선이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모준영이 말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별거 아닙니다. 그저 이런 일이 처음이라 호기심이 들어서요. 이분, 진짜 성좌 맞습니까?”
모준영이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자, 기가 질린 남자가 그럼 실례 많았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 먹어도 되는 건가? 슬쩍 눈치를 보자 모준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세요.”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대화는 다 먹고 하죠.”
대화를 하자는 말에 급하게 욱여넣었던 밥이 목구멍에 탁 걸린 듯했으나 우선 먹고 볼 일이었다.
모준영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묵묵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뻔뻔하게 밥뿐만 아니라 반찬까지 싹싹 비우고 숟가락을 놓았다.
“커피 마시겠습니까?”
“네, 네네!”
밥을 먹었더니 극심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염치없지만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커다란 몸을 일으켜 사무실 구석까지 걸어간 모준영은 커피 머신을 켜고 캡슐을 넣었다. 간단한 동작을 하는 것뿐인데 커피 광고를 찍는 것처럼 멋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커피를 들고 뒤로 돌아본 모준영과 눈이 마주쳤다. 태연한 눈동자가 주안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주안 역시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오묘한 느낌이 드는 눈동자였다. 친숙한 누군가를 보는 듯하기도 하고, 낯선 것을 보는 듯하기도 했으며 설핏 욕망이 실리기도 했다. 이대로 있다간 저 눈빛에 잡아먹힐 것 같아서 주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모준영이 천천히 걸어와 커피를 건넸다. 향만 맡아도 고급스러움이 잔뜩 느껴졌다. KA 소프트에 있는 커피와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에 급히 한 모금 들이켰다가 ‘앗 뜨……’ 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하마터면 입천장이 다 델 뻔했다.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모준영이 바로 표정을 굳히고 시계를 봤다.
“배가 부르시면 이제 말씀해 보세요. 희생의 창조자는 어떻게 아는 겁니까?”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자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얻어먹은 게 있으니 바른대로 말해야겠지만 모준영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감성적인 공세윤이나 단순한 주지찬이라면 노려볼 만한데, 하필 가장 이성적인 모준영이라 믿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후원도 스킬도 못 쓰는 일반인이 성좌라고 우기는데, 누가 믿어주겠는가.
“이왕 잘해주시는 김에 당분간 머물 곳을 마련해 주신다면 궁금증을 풀어드리죠.”
모준영은 한참 말이 없었다. 기죽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모준영은 입가에 비웃음을 매단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사실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진심처럼 들려서 마음이 다급해졌다. 만약 여기서 잘 곳을 제공받지 못하면 도시 아무 곳에서나 자다가 길 잃은 몬스터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그야 제가 희생의 창조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백은후의 약점도 알고 있어요.”
백은후의 이름이 나오자 모준영이 인상을 왈칵 구겼다.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플레이를 어렵게 하려고 둘의 관계를 앙숙으로 설정해 놓아 다행이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하던 모준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각성자들을 위해 만든 시설을 제공하기로 하죠. 단, 무한정으로 제공해 드릴 수는 없고 한 달 정도면 어떻습니까?”
한 달이라……. 그 정도면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지. 그 전에 꿈에서 깨는 게 가장 좋은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한 달 뒤, 시설을 떠나기 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요구였지만, 왜인지 모준영이 들어줬다.
실행력 좋은 모준영이 음식을 가져다줬던 남자를 다시 불러서 주안을 시설로 안내하라고 했다. 비서의 눈빛에 이상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혼자 갈 수 있다고 하자, 모준영이 겁을 주는 바람에 남자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 * *
“타세요.”
띡, 남자가 리모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모준영이 시킨 일이니 센터에 등록된 공용 자동차를 이용할 줄 알았는데 남자가 문을 연 차는 센터 차가 아니었다. 선팅이 심하게 된 차는 아무리 봐도 수상해 보였다. 주안이 망설이자 남자가 재촉했다.
“뭐합니까? 바쁩니다.”
“저기, 공용 자동차 타는 거 아닙니까?”
미심쩍게 묻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놓고 비웃었다.
“각성자세요? 일반인이라면서요. 이 일 공적인 일 아니고 모준영 센터장님이 워낙 인류애가 넘치셔서 사비로 진행하는 일인데 공용 자동차 쓰시겠어요?”
그 말을 듣자 묘하게 안심되었다. 모준영 성격에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캐릭터 성격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차는 선팅이 너무 진한 거 같은데…….
약간의 찝찝함을 가지고 차에 올라타자 남자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시설에 무사히 들어갈 때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졸렸다. 아까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먹을걸. 그래도 잘 곳이 마련되었으니 다행이지. 오늘 자고 내일부터 간단한 일자리라도 알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위해 애쓰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 * *
톡톡, 누군가 뺨을 두드리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떴다.
“……아.”
정전기가 통한 것처럼 뺨이 따끔거려서 손으로 긁으려는데 팔이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정신이 듭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백은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각같이 생긴 배우를 실제로 마주한 것처럼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상과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 그리고 소파까지. 백은후와 마지막으로 매칭되었을 때 본 적이 있던 사무실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명패엔 ‘길드장 백은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각성자 관리센터에서 시설로 가는 길에 잠이 들었는데 눈떠보니 백은후의 사무실이라고? 뭐지? 납치라도 당한 건가. 그럼 여기까지 데려다 준 남자가 백은후가 심어놓은 끄나풀인가? 어쩐지 남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싸하다 싶더니…….
톡톡, 다시 백은후가 검지로 주안의 뺨을 두드렸다. 주안은 일부러 놀란 척 히익, 숨을 들이켜고는 바로 정신을 잃은 척했다.
모준영과 마찬가지로 백은후에게 성좌라고 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뻔했고, 약간의 인류애가 있는 모준영에 비해 백은후에겐 인간적인 정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우선 그가 뭐 때문에 납치했는지 알 때까진 정신을 잃은 척하는 게 좋겠지.
“흐음?”
낮게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감은 눈을 절대 뜨지 않았다. 그러자 곧 어깨를 감싸는 팔이 느껴졌고, 숨결을 불어넣은 듯 귓가가 뜨거워지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자는 척 그만하고 일어나지?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올 것 같은데…….”
그 말에 생명의 위협이 느껴져 눈을 번쩍 떴다. 언제 앞으로 왔는지 눈 바로 앞에서 그가 웃고 있었다.
“왜, 왜 그러시는데요. 아니, 누구세요.”
“나를 모른다고?”
알긴 알지만, 지금은 몰라야 했다.
“누구신데요. 저는 진짜 몰라요.”
“뉴스도 안 봐? 아무리 일반인이라도 그렇지 S급 각성자를 모르다니.”
아, 실수했구나. 각성자와 일반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각성자이면서 S급인 헌터는 유명 인사일 테니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성좌라고 밝히는 것보단 숨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모르는 척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각성자인 백은후를 알긴 알지만 처음 보는 사이란 뜻이에요.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코앞에 얼굴을 대고 있던 백은후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모준영이 팔다리가 모두 울퉁불퉁한 근육이 잡혀 있는 거구라면 백은후는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어깨가 넓고 허리가 얇으며 다리가 길었다.
꼭 모델 같네.
몸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자, 푸른 눈빛이 얕게 일렁였다.
“그래, 분명 모르는 사인데…….”
백은후의 검지가 턱에 닿았다. 손가락은 턱선을 따라 쓱 올라가더니 귓불에 멈췄다.
“앗!”
순간 정전기가 튀어 어깨를 움찔했다. 누가 전뢰계 헌터 아니랄까 봐 만지는 것만으로도 따끔했다.
“왜 어디서 본 것 같을까? 너, 정말 나 몰라?”
답답한 건 오히려 이쪽인데 백은후는 제가 더 답답하다는 듯 굴었다. 모준영도 그렇고 백은후도 그렇고 둘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말하다니.
개발자라는 걸 아는 것도 아니고……. 혹, 개발자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믿어 줄 것도 아니면서…….
“글쎄, 제가 어떻게 알아요. 모르는 사람을 납치해 와서 그게 할 소리예요?”
주안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오자 백은후가 미간을 좁혔다.
인상을 쓰니까 괜히 더 무서워 보였다. 설마, 이런 행동이 그의 화를 더 돋운 건 아니겠지? 등골이 오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