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이, 이게 뭐야?”
성좌가 아니라고? 코인이 있는데 왜 후원을 못 해?
성좌들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인벤토리창에서도, 스킬창에서도 후원하기 버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좌임에도 코인을 후원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멍하게 창을 응시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떴다.
<성좌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좋아합니다.>
<성좌들이 일반인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합니다.>
각성자도 아니고 일반인이라고? 성좌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황당한데 일반인이라니……. 이건 필시 주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성좌들의 장난일 것이다.
<성좌들이 이 이상으로는 일반인과 대화할 수 없으니 아쉽다고 말하며 웃습니다.>
<성좌들이 부디 죽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직 꿈속의 꿈에서 깨지 않았나 싶어 다시 눈을 감으려 했지만 극심한 배고픔과 갈증이 느껴졌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접속이 종료됩니다.
시스템창을 더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어떤 창도 열리지 않았다. 늘 화면 아래 딸려 있던 메뉴도 사라졌다. 너무 놀라서 당황스러울 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육체가 없었을 땐 거의 느끼지 못했던 극심한 갈증과 배고픔이었다.
마실 것이라도 있나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멀리 편의점이 보였다.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가까스로 편의점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 돈 하나도 없네……?”
코인은 넘쳐나지만 꺼내 쓸 수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이대로 죽나? 죽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려나?”
절망적인 순간 한 줄기 빛이 비치기를 바라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주안의 눈에 구원과도 같은 글귀가 들어왔다.
<각성자 관리센터>
모준영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 * *
당장 모준영을 만나러 센터 안으로 들어갔지만, 일반인 신분으로 센터장인 모준영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각성자 관리센터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그중에서도 최상위 공무원인 모준영을 만나기 위해선 절차가 필요할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정수기였다. 지독한 목마름에 일회용 종이컵에 물을 받아 들이켰다. 그 과정을 세 번쯤 반복하자마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때일수록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자.”
주안은 우선 벽면에 게시된 안내도를 꼼꼼히 읽었다. 각성자 등록실, 각성부작용 치료소, 몬스터 신고실, 행정업무처리반, 민원처리반…….
아무래도 민원처리반이 가장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에 와서 육체가 있는 상태로 사람을 대하는 게 처음이라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1층 끝에 있는 민원처리반으로 갔다. 심호흡을 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직원에게 가서 모준영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직원은 미리 약속 없이는 만날 수 없다며 콧방귀를 끼었다.
“일반인 아니라니까요. 저 성좌예요. 성좌.”
담당 직원이 보고 있던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네에, 네에. 이곳은 각성자 관리센터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에요.”
꼭 무슨 미친 사람을 취급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육체가 있는 사람이 와서 성좌라고 우기면 저 같아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모준영을 만나기 전까진 성좌라고 말하지 말자. 이렇게 결심한 주안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저기, 그냥 농담한 거예요. 제가 일반인이긴 한데요. 사정이 좀 있어서 그런데, 모준영 화신……. 아니, 모준영 각성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모니터를 바라보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너 따위가 뭔데 모준영을 찾냐, 뭐 이런 눈빛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찾아오라고 하셨거든요?”
그 말은 무시할 수 없었는지 가늘게 뜬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센터장님께서 찾아오라고 하셨다고요?”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다음에 만날 땐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아예 없는 말도 아니었다. 계약이든 뭐든 지금 이 극심한 배고픔만 해결할 수 있다면 미친 공세윤이라도 계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진짜예요. 희생의 창조자가 찾아왔다고 해주세요.”
잠시 설득되는 것 같았던 직원의 눈이 다시 가느스름해졌다.
그래, 나도 알아. 희생의 창조자라니……. 웬 중2병 걸린 놈인가 싶겠지. 하지만 어떡해? 내세울 거라곤 그것밖엔 없는데.
억울했지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다시 말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연락해 보세요.”
직원은 기가 막힌 듯 팔짱을 끼고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들었다.
“저기, 센터장님……. 희, 희생의 창조자가 왔다고 하는데요. 아, 이상하시죠? 제가 생각하기……. 네?”
그거 봐, 오라고 하지? 사람을 함부로 미친놈 취급하면 안 되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데,
“희생의 창조자라고?”
입구 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생의 창조자라는 단어에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내려온 걸 보니, 궁금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정작 주안은 별생각이 없는데 오히려 주변에서 난리였다.
“센터장님이 민원처리반에 무슨 일이지?”
“그러게…… 직접 오신 건 처음 아냐?”
“저 사람, 일반인은 아닌가 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에 괜히 위축되었다. 주안은 쭈뼛거리다가 모준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준영은 화면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주로 물리 공격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니만큼 피지컬이 가장 압도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목이 꺾이도록 고개를 들어도 눈을 맞추기 어려웠다.
“성좌는 시스템으로만 말하는 것 아니었나?”
모준영의 한마디에 직원이 달달 떨며 말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분이 본인이 성좌라고 해서요. 그런데 센터장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모준영의 시선이 느리게 이동했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절로 숨이 막혔다. 눈이 마주치자 자동으로 고개가 꾸벅 숙여졌다.
“성좌라……. 재밌는 소리네요.”
“하하, 그렇죠? 저도 사실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진데요.”
재밌는 소리라고 해서 분위기가 풀어진 줄 알았는데 모준영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얼마나 냉기가 흐르는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배고픔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대로 그냥 꺼지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럼 답이 없는데…….
모준영의 시선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주안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눈치를 봤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모준영이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따라오세요.”
그 한마디가 다였다.
성좌가 어떻게 해서 육체를 가지게 되었으며, 만약 네가 성좌가 아니라면 희생의 창조자라는 말을 어떻게 알았는지와 같은 최소한의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모준영과 함께 어떤 문 앞에 도착했다. 문에 <센터장― 모준영>이라고 커다랗게 적혀져 있어서 이곳이 센터장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성좌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크, 역시 민간인을 위하는 바람직한 공무원…….
모준영 캐릭터에 감탄하던 그때, 문이 열렸다.
한눈으로 봐도 고급스럽게 잘 꾸며진 방이 나타났다. 한쪽 벽은 유리로 되어 도시의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었고 책상은 물론 소파와 테이블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앉으세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은 들어봅시다.”
모준영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주안도 쭈뼛거리며 걸어가 맞은편에 앉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슨 말이라도 먼저 꺼내면 분위기가 좀 좋아질 텐데…….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모준영은 이쪽을 쳐다보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저기…….”
말이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
“뭐, 먹을 거 없을까요?”
그 말에 모준영이 피식, 했다. 대뜸 찾아와서 성좌라고 해놓고 먹을 걸 찾으니 당황스럽기도 할 거다.
“그러니까 제가 육체를 가진 지 얼마 안 돼서요. 성좌였을 땐 몰랐는데 인간이 되고 보니, 아……. 성좌도 인간이긴 한데, 여기선 아닌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상황을 정리라도 해놓을 걸. 꿈이라고만 생각하며 그저 흐르는 대로만 따라갔지 별 고민이 없었던 터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어쨌든 저는 배가 고픕니다. 죽을 지경이에요.”
대뜸 밥부터 달라니. 제 입으로 뱉은 말이 한심해서 자괴감이 느껴졌으나 본능을 이길 순 없었는지 말을 고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모준영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들더니 누군가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말하고 통화를 끊었다.
“지금은 배가 고파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으니 일단 음식부터 드세요.”
“……네. 민폐를 끼쳐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미안한 것보단 고마운 게 더 컸다. 모준영이라도 없었으면 아사했을지도 모르니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자, 그가 이쪽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럽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 익숙하네요. 당신이 희생의 창조자라고 해도 얼굴을 본 적도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데…….”
“……네?”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일렁이다가 주안의 얼굴에서 딱 멈췄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난 분명 처음 보는데 말입니다.”
이 무슨 옛날 드라마 같은 작업 멘트란 말인가. 살짝 당황했으나 모준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작업하기 위해 저런 말을 내뱉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진심이라는 말인데…….
성주안은 아까 편의점 유리문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원래 제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외모는 어딜 나서면 부끄럽지 않을 정도긴 했어도, 특별히 잘생겼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잘생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못생긴 곳도 없는, 한마디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였다.
“흐, 흔하게 생겨서 그럴 수도 있어요.”
모준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람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모준영처럼 똑똑한 사람이 그렇진 않겠지. 하지만 그럼 대체 어디서 봤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성주안이 아무리 캐릭터를 만든 사람이라고 해도, 현실에선 아직 그래픽도 완성되지 않아 머릿속으로 그려본 게 다였으니 진짜 초면인데……. 설마 머릿속으로 그려본 것만으로 익숙함을 느끼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뭐, 어쨌든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때, 누군가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