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섬뜩한 목소리였다. 공세윤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 차가운 얼음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내가 못 할 것 같죠? 아……. 성좌님, 혹시 나랑 계약하기 싫은 거예요? 생각만 해도 슬퍼서 우울해지려고 해요.
공세윤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다가 백은후와 똑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계약자가 한 명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공세윤의 성격 특징이 떠올랐다.
<공세윤의 성격 특징 ― 집착이 강하고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어떻게든 하고야 만다.>
어쨌든 계약자가 한 명이든 그 이상이든 지금 공세윤과 섣불리 계약할 수 없다는 결론은 같았다.
어쩌지? 코인으로 대충 무마하려 해도 코인에 관심이 없으니 설득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든 미움을 사지 않고 접속을 종료하려면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공세윤을 꼭 안아줍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공세윤을 둘러싸고 있던 냉랭한 기운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하루요? 왜요? 진짜 마음이 있는 거면 지금 당장 해버려도 되잖아요. 역시…… 내가 싫은 거예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고개를 흔들며 부정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각성자, 공세윤의 뺨을 잡고 눈을 마주칩니다.>
―치……. 하루만이에요. 그 이상은 안 돼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아쉬워하며 접속을 종료합니다.>
“휴…….”
화신들이 위험한 상황일까 봐 너무 쉽게 접속을 허용해 준 게 실수였다. 상식적으로 그들은 S급에 SS급 스킬까지 보유한 데다 모두 1,000코인 이상씩 가지고 있는데 당하는 게 말이 돼? 오히려 그들과 부딪히는 몬스터들이 더 불쌍하지!
“이제 아무리 협박해도 절대 접속 안 해야지. 모준영 빼고…….”
그런데 다음 퀘스트는 언제 어디서 받는 거지? 호감 얻기 퀘스트를 완성한 지 한참 지났으면 지금쯤 나올 만한데?
성주안은 마을을 돌며 NPC에게 말을 걸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시스템창엔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백은후의 접속 요청과 갖가지 방법으로 접속을 요구하는 공세윤의 협박만 가득할 뿐 모준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 * *
그 시각, 성주안의 행동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성좌들은 임시길드를 만들어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길드 이름은 거창하게도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성좌모임’이었으나 목적은 희생의 창조자인, 티페레트를 없애버리는 거였다.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S급과 계약 성공하신 분? 일단 주지찬은 실패요 ㅠㅠ 난생처음 들어보는 욕만 엄청 들었어요. 성격 존1나 지1랄 맞아.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저도 실패요. 백은후 그 새1끼 대뜸 얼마까지 지원할 수 있는지 물어보던데요? 저 가난한 거 아시잖아요. 코인 얘기하면 실망할까 봐 아예 말도 못 했어요.
[길드] 전차를 타는 전사(게부라) : 다른 노ㅁ 들도 마찬가지임. 공세윤은 소환조건 자체도 존1나 까다로운데 까다로운 조건 다 해주고 소환해도 말을 한마디도 안 해. 조ㅈ같은 지조를 지키겠다나 뭐라나.
[길드] 로브를 벗은 마법사(예소드) : 모준영은 무섭게 쳐다보기만 해요. 화면 뚫어지는 줄. 그러다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거예요. 역시, 인성 좋은 모준영이라고 감탄했는데…… 결국엔 계약하자니까 먼저 논의 중인 성좌가 있다며 거절하더라고요. 그럴 거면 왜 물어봤는지. ㅠㅠ
S급 영입에 실패하면 파티를 구성해 봐야 고급 던전까지 클리어하긴 무리였다. 지금까지 S급 각성자들이 스스로 레벨을 올려 고급 스킬을 구사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계약을 미뤄왔던 성좌들은, 각성자들이 레벨을 달성한 순간 나타나 숟가락을 얹는 것도 모자라 관심을 독차지하는 성주안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그 많은 코인은 뭐고, 어떻게 첫 퀘스트에서 모든 S급과 다 매칭이 된 거지?
[길드] 전차를 타는 전사(게부라) : 지금 그게 중요해? 그냥 밀어버리자니까. 이대로 뒀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특히 우리 세윤이 같은 경우는 지금도 벌써 넘어갔어. 시1발. 안 그래도 맨날 우울해 하는 애라 기분 좋을 때도 몇 번 없는데!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비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길드] 로브를 벗은 마법사(예소드) : ㅇㅈㅇㅈ. 게부라는 생각이 너무 없고요.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ㄴㄴ, 뭔가 이상해. 주지찬은 성좌를 혐오해. 다정한 말 한마디 듣기 어려운데. 왜 그놈한테는 관심을 보이는 거지?
비슷한 패턴으로 지루한 회의가 계속되었다.
그러다 S급 각성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면서도 그 누구와도 계약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 했다. 정답은 백은후와 매칭한 헤세드가 알고 있었다.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백은후가 말해 줬어요. 한 명과만 계약할 수 있으니까 저울질하는 것 같다고요.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그나마 거짓 정보를 흘려서 계약을 막은 건 정말 잘됐어.
[길드] 전차를 타는 전사(게부라) : □□! 잘되긴 뭐가 잘돼! 그만큼 우리 세윤이가 집착한다는 뜻인데.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맞아요 ㅠㅠ 백은후도 티페레트가 욕심나니까 그런 말 한 거잖아요.
[길드] 로브를 벗은 마법사(예소드) :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네 명 다 뺏기는 것보단 낫잖아요. 하, 진짜 귀찮아.
그들은 이번엔 각자 입장만을 내세우며 다퉜다. 희의를 진행하면 할수록 결론이 나오긴커녕 티페레트, 희생의 창조자에 대한 원망만 깊어졌다. 이에, 지금까지 본성을 잘 감추고 있던 헤세드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됐고! 게부라 말처럼 밀어버립시다. 지금까지 서로 견제하느라 쓰지 않았던 걸 쓸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혹시 제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분 있습니까?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투표정책 말하는 거야? 그거 썼을 때 우리한테도 악영향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투표정책은 큰 죄를 짓거나,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성좌가 나오면 다른 성좌들이 투표를 통해 그 성좌의 힘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만장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데다가 성좌들에게도 페널티가 부여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성좌들끼리 다툼이 일어났을 때나 어떤 성좌가 민간인에게 해를 끼쳤을 때도 사용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길드] 전차를 타는 전사(게부라) : 악영향이 있으면 뭐? □□ 같은 모준영이 티페레트한테 네 명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 되는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쫓아내는 게 낫지.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맞아요. 어차피 성좌가 아니면 뺏어가지도 못할 텐데요.
한참 의견을 교환하던 성좌들은 투표정책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명분상으로는 새로 들어온 신입 티페레트가 무한코인으로 세계질서를 흐리는 것을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원하는 각성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욕심이었다.
이렇게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성좌모임’은 신입 성좌를 내쫓는다는 결론을 내곤 다섯 시간 만에 해산되었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눈을 뜨려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드디어 잠에서 깨려는 건가?
빙빙 도는 머리를 감싸 쥐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몸 여기저기가 쑤셔왔다. 시야가 뿌연 눈을 몇 번 더 깜빡였을 때 흐릿하게 자신의 육체가 보였다.
몸, 몸이라고?
드디어 내가 꿈에서 깬 거야?
성주안은 급하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익숙하게 보여야 할 사무실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이는 풍경이 지혜의 마을인가 하면 또 그런 건 아니었다.
높이 솟은 건물들, 병원, 버스정류장, 인도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여긴 분명 제가 살고 있던 현대 도시였다. 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곳이었다. 그런데도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 머리야. 여긴 도대체 어디야.”
주안은 현실로 돌아왔다고 보기에도, 그렇다고 게임 속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한 상황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치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듯한 느낌에 덜컥 겁이 났다.
“사, 상태창.”
상태창이 떴다. 그렇다면, 꿈이 맞나?
이러다 정말 미쳐버리는 거 아닐까?
주안은 알 수 없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잠들기 전 기다렸던 모준영과 매칭하기 위해 스킬창을 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당연히 있어야 할 ‘소환 스킬’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왜?”
메뉴에 스킬창, 인벤토리, 상태창이 존재하는 것으로 봐선 여긴 현실이 아니라 꿈속인데 퀘스트 보상으로 얻었던 소환 스킬이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일반인 : 성주안
계약자 : 없음
파티 구성원 : 없음
스킬 등급 :
없음>
아닐 거야. 그냥 시스템 오류겠지.
주안은 급하게 인벤토리창을 확인해 보았다.
<코인 : 99999999999…….>
코인이 그대로라는 것을 확인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꿈도 길게 꾸면 현실이 된다더니, 사무실로 돌아간 것도 아닌데 안도감이라니…….
주안은 스스로를 비웃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소환 스킬이 없으면 매칭될 때까지 기다려야 후원이 가능한 거잖아. 즉, 코인이 있어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어제까지 시스템창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공세윤의 메시지도 어느 순간부터 뚝 끊어져 있었다. 누구든 매칭만 된다면 후원이 가능한지 알 수 있을 텐데…….
주안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시스템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메시지가 떴다.
<성좌들이 당신은 성좌가 아니라고 비웃습니다.>
<99999999999……개의 코인을 후원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