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얼마나 위급한 일이기에 성좌를 지명해서 호출했나 했더니 별로 급해 보이지 않았다. 까만색 제복을 입은 백은후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접속을 확인했는지 푸른 눈동자가 느리게 화면을 훑고 지나갔다.
―성좌님, 보고 싶었어.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 코인이 탐이 났던 거겠지요. 이 사람아.
낮게 울리다 귀를 쏙 파고드는 목소리에 다정한 표정까지. 백은후의 본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한 분위기였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얼른 본론을 말하고 꺼지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전했다. 그 말에 백은후가 미소를 머금었다. 예쁜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고 단단한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주안은 홀린 듯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백은후는 겉으론 신사적으로 보이나, 속은 가장 음흉한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군의 배신’이라는 퀘스트를 진행할 때 성좌의 뒤통수를 쳐서 퀘스트를 어렵게 만드는 캐릭이었다. 만약 초반 설정과 그의 성격이 같다면 백은후는 꼭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라? 이거 서운한데. 내가 성좌님과 매칭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생명의 은인…….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백은후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상체를 숙였다. 별것 아닌 동작임에도 괜히 기가 죽었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나로선 고맙고. 그런데, 창조자. 당신 다른 성좌들이 불만이 많은 건 알고 있어?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성좌들끼리의 채팅을 화신이 볼 수도 있나?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의아해 합니다.>
―아, 뭐. 걱정하지 마. 다른 성좌들과 매칭이 됐어도 절대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당신밖에 없는 거 알잖아.
뭐래? 저 미친놈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기는 해도 궁금증은 풀렸다. 성좌들과 매칭되었을 때 다른 성좌들이 백은후에게 계약을 제안하며 주안의 흉을 봤나 보다. 뭐라고 했을지 예상이 가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생명의 은인을 두고 다른 성좌와 계약했을 리가 없잖아?
생명의 은인이라서가 아니라 코인이 많아서라고 정정해 주고 싶은 욕구를 꾹 눌렀다. 잘생긴 얼굴과 계약에 대한 부담감만 없다면 당장 접속을 종료해 버렸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게 한이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고마워합니다.>
―고맙다니 영광스럽네. 그럼 더 시간 끌 것 없이 계약할까?
백은후가 당장이라도 계약할 것처럼 인벤토리창을 열었다. 여러 명과 계약할 수 있는 시스템이면, 그는 꼭 필요한 카드였지만 만약 한 명과 계약해야 하는 거라면, 백은후 따위 필요 없었다.
한 명만 선택하라면 S급이면서도 가장 모범적인 화신인 모준영과 계약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질문이라……. 이제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겼나 보네. 환영할 만한 일이야. 신입이라 궁금한 게 많을 테니 뭐든 물어봐. 성실하게 대답해 줄 테니.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몇 명의 각성자와 계약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 말에 백은후의 표정이 살짝 굳었으나 빠르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주안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웃기까지 하는 모습이 아주 수상해 보였다.
중요한 질문일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해야 하는 건데, 이래선 백은후가 어떤 대답을 한다고 해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는 각성자 때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백은후가 갑자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지금 성좌 상태이니 모션이나 말을 지정하지 않는 이상 그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뭐, 때론 성좌가 되면서 인간일 때의 기억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야.
백은후가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성좌들이 한 말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곳의 성좌는 일반 유저가 아니라 각성자에서 성좌가 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좌가 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고? 그럼 자신이 성좌가 된 것도 자각하지 못할 텐데?
―대답해 주지, 계약은…….
제발, 처음 설정값대로 네 명이라고 말해라. 그럼 너 같은 놈과도 계약할 수 있을 테니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늘도 계약하자고 할 것 같은데 또 거절했다간 무슨 복수를 당할지 몰랐다.
―당연히 한 사람 하고만 맺어야지. 그래야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하지 않겠어?
백은후의 표정만 봐서는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상태창엔 분명 파티 구성원을 적는 칸도 있었는데……. 혹시 계약자와 파티원이 다른 개념인가? 그렇다면 계약자가 한 명이라는 것도 말이 됐다.
계약자가 한 명으로 제한되어 있다면 백은후와의 계약은 거절해야 맞았다. 하지만 만약 백은후가 코인이 많은 성좌를 독점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계약자가 여러 명이 될 수 있다는 뜻이고, 나중에 아쉬워질 수도 있으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됐다. 어떻게 하면 백은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까?
―왜 아무런 대답이 없지? 설마 저번처럼 또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괴로워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고통을 호소합니다.>
―저런, 불쌍해서 어쩌나. 할 수만 있다면 병간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다정한 표정으로 위로 비슷한 걸 건네던 백은후의 표정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성좌는 육체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고통을 호소하지?
한마디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였다. 망했네! 폭주하기 전에 사과부터 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진심을 담아 사과합니다.>
백은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참고 있던 화를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겁나서 실수해 버리기 전에 창을 끄는 게 현명할 것 같아 주안은 재빨리 접속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창이 꺼지고 마음에도 안식이 찾아왔다.
무슨 전투를 한 것도 아니고, 싸운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뻘뻘 흐르는 기분이었다. 육체가 없길 다행이지…….
괜히 잠을 자보려다가 백은후에게 걸려든 것 같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혹시 새로운 퀘스트가 떴나 싶어 NPC들을 누르고 다녔지만 NPC들은 퀘스트를 주긴커녕 성질만 부렸다.
성좌가 무슨 동네북도 아니고…….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돌렸을 때,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각성자, 공세윤이 접속을 희망합니다.>
<각성자, 공세윤이 성좌, 희생의 창조자를 호출합니다.>
<각성자, 공세윤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각성자, 공세윤이…….>
열 몇 개의 메시지가 동시에 쏟아졌다. 글자를 읽는 것뿐인데도 귀가 시끄러운 느낌이었다. 설마, 지금 기분이 업된 상태로 바뀌었나? 만약 그런 거라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서 뭐라도 하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다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세윤이 피곤한 스타일이긴 한데 화신 중 가장 어리고, 우울할 땐 약하기도 해서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웬걸? 수락하기를 누르자 던전을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활기 넘치는 공세윤의 모습이 보였다. 다치긴커녕, 너무 건강해서 던전에 있는 몬스터를 다 얼려 죽였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보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스킬도 만렙까지 찍어서 넉넉할 텐데 솔플 던전은 대체 왜 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상태창을 눌러봤더니 활기참이었다. 사냥이 필요해서 하는 게 아니라 넘치는 활기를 주체할 수 없어서 사냥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위험한 상황이 아닌 건 분명했다.
“하, 또 속았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속았다고 합니다.>
속으로만 말했어야 했는데, 또 꼬투리를 잡으려 하진 않겠지?
―뭐예요. 왜 속았다고 하는 거예요?
던전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공세윤이 눈꼬리를 뾰족하게 만들어 접속창을 노려보았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가 방금 화낸 것도 잊고 천진하게 웃었다.
―뭔데요. 성좌님이 물어보시면 다 가르쳐 줄 거예요.
질문하기 위해 말을 고르고 있는데 공세윤이 갑자기 몸을 배배 꼬며 얼굴을 붉혔다. 어리고 예쁜 애가 저러니까 귀엽긴 한데 갑자기 왜 저래?
―다 물어봐도 되는데요. 속옷 색깔을 묻는다거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는 건 안 돼요. 부끄러우니까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그런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쳇, 실망이네요. 그래서 뭐요. 대답해 줄 테니까 말해 봐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계약은 몇 명과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계약요? 계약은…….
화면을 응시하던 갈색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을 반사했다. 어두운 던전이라 반사될 빛이 없을 텐데 뭐지?
―계약은 당연히 저랑만 하시는 거예요. 몇 명이 아니고 저랑만요. 처음부터 우리는 그렇게 정해진 운명인 거예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공세윤이 성좌에 대한 집착이 가장 심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거짓말을 잘하진 않았다.
그러면 진짜 계약을 한 명과만 해야 하는 건가? 파티 구성은 또 다른 거고?
문제가 풀리진 않고 연속해서 쌓이기만 하는 느낌이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졌다. 역시, 믿을 사람은 모준영밖에 없는 듯했다. 이 와중에 공세윤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역시, 최단 시간으로 던전을 클리어하고 쉬고 있는 저를 보며 반하셨나 봐요. 먼저 계약을 다 제안하시고…….
몸을 배배 꼬며 얼굴까지 붉히는 게 누가 보아도 수줍어하는 기색이었다. 뭔데? 또 무슨 착각을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제발 혼자 부끄러워하지 마라. 서서히 지치는데 그냥 접속을 종료해 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공세윤의 목소리, 아니 협박이 들려왔다.
―그냥 끄려고요? 다른 사람이랑 계약하려고 그러죠. 그러기만 해봐요. 찾아가서 얼려버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