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전투 중이니 가지고 있는 능력치를 올려주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능력치 3배 강화 스킬을 시전합니다.
각성자 주지찬의 이동속도가 3배 증가.
각성자 주지찬의 물리력이 3배 증가.>
능력치 버프를 주자, 주지찬과 새의 거리가 차이 나게 벌어졌다. 주지찬은 한쪽 팔로 아이를 안은 채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도 나머지 한쪽 팔로는 뒤에서 따라오는 괴물을 계속 공격했다.
펑, 펑! 거대한 불폭탄이 구를 그리며 날아가 새의 가슴을 관통했다.
크흐흐흐…….
보스급 몬스터인가? 던전이 닫히기 전에 빠져나온 거라면, 보스를 처리한 상태였을 텐데……. 세 배나 강화된 S급 화염 스킬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살아서 움직이는 게 가능해?
주안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재빨리 스탯을 확인했다.
<각성자 : 주지찬
현재 등급 : S급 (화염계)
스킬 등급 :
화마의 탄식(S), 저주폭발(SS), 불꽃지옥(S)>
스킬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럼 대체 뭐 때문이지?
―뭐야, 시발. 누가 도와달라고 했어? 저따위 새대가리는 불 한 방이면 끝난다고.!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띠띠띠띠띠!
귀를 찢을 듯한 강력한 소리와 함께 경고 메시지가 떴다. 시스템 오류라니? 대체 왜…….
<각성자 주지찬이 성좌, 희생의 창조자의 버프를 거부합니다.>
이런 미친! 아까 버프를 줬을 때 시스템창에 물음표가 뜬 이유도 버프를 받다가 거부해서인 모양이었다. 잠시 받은 버프로 새와의 거리를 벌리고 다시 거부했다는 뜻인가? 아니, 지금 애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러는 게 말이 돼?
호감도고 뭐고 성질 같아선 접속을 종료해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아이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도와달라고 말했는데도…… 안 도와주더니. 시발, 더러운 성좌들의 도움 따윈 필요 없으니까 꺼져.
주지찬은 왈칵 찌푸린 얼굴로 접속창을 노려보았다. 사람을 구하려고 고생을 많이 했는지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상황을 본 건 아니지만 던전에 있어야 할 몬스터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 등장했으니 이 아이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주지찬은 화염 스킬을 쓰는 캐릭터인 만큼 S급 화신 중 성격이 가장 불같은 데다 말을 함부로 했다. 하지만 말만 거칠 뿐 인류애가 가장 강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아이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아이의 상태를 걱정합니다.>
―거짓말하네! 성좌 중에 인간을 위하는 놈이 누가 있다고!
……이상하다.
이 게임은 분명 유저인 성좌가 화신들과 함께 파티를 구성해서 세계를 구해야 하는 게임인데, 만나는 화신마다 성좌들이 세계를 지키는 데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크으으!
그때, 새가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쳐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공격할 셈인 것 같았다.
버프는 상대 쪽에서 거부하면 소용없고, 후원도 거부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코인 1,000개를 후원합니다.>
―이거 뭐야?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지금 그럴 시간이 있냐고 묻습니다.>
―시발.
<각성자 주지찬이 인벤토리를 엽니다.>
<각성자 주지찬이 화염방사기를 수리합니다. ― 2코인>
<각성자 주지찬이 인벤토리에서 화염방사기를 꺼냅니다.>
아, 무기가 고장 나 있었구나. 그럼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무작정 뛴 거야? 겨우 2코인이 없어서 수리도 못 하고 있었다니. 아니, 성좌 새끼들은 저걸 보면서도 안 도와줬다고?
개발자 아이디를 가진 주안과는 달리 그들은 코인이 한정적일 테니 무작정 후원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럴 때도 아끼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지찬은 화염방사기를 수직으로 들고 저주폭발 스킬을 펼쳤다.
과르르, 쾅쾅!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새가 통구이가 될 때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와……. 내가 설정한 스킬이긴 하지만 세긴 세다.”
그리고 화염방사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아이를 데리고 뛰는 주지찬의 모습은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졌다.
하, 후원은 진짜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거 아닌가? 무조건 코인부터 쏘면 싫어할 테니까 일단 이유부터 말하는 게 좋겠지.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아이를 구한 것을 기뻐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주지찬도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1,000코인을 후원합니다.>
병원으로 달리던 주지찬이 갑자기 걸음을 뚝 멈췄다.
―희생의 창조자? 처음 보는 성좌인데 이름 한번 거창하네. 코인도 많은 것 같고. 그런다고 내가 너와 계약해 줄 것 같아?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계약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창을 바라보는 붉은 눈이 어지럽게 일렁이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여전히 표정이 별로인 것으로 보아 아직 감화되지 않은 듯했다. 성격적으로 딱히 모난 구석도 없고 가장 단순한 주지찬의 호감을 얻는 게 제일 힘들 줄이야.
주안은 한숨을 쉬며 주지찬의 호감을 어떻게 얻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순간 메시지가 떴다.
<축하드립니다. 각성자들과 호감 쌓기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소환 스킬과 접속종료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응? 갑자기?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시 화면을 확인해 봐도 주지찬은 여전히 앞에 있는 누군가를 당장이라도 태워 죽일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호감을 획득했다니? 어이없네.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나?
―욕심만 가득한 성좌들과 계약하긴 싫지만, 너 따위와 누가 계약을 해주겠어. 불쌍하니까 내가 해주지.
계약을 해주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거겠지. 할 수만 있으면 얄미운 말만 내뱉는 저놈의 입술을 한 대 때렸으면 좋겠네.
퀘스트도 끝냈겠다 접속종료 스킬도 얻었겠다 그냥 시스템창을 꺼버리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호감은 말 그대로 퀘스트일 뿐, 나중에 주지찬과 진짜 계약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예의를 지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기뻐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상처부터 치료하라고 말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아이도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지 않느냐고 걱정합니다.>
―흥! 핑계 한번 좋네.
주지찬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코인도 넉넉하게 주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지.
시선을 올려 X 표시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버튼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원할 때 종료할 수 있다며.
<퀘스트 보상은 물약 상점 NPC에게 가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은 종료 못 한다고? 하…….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다.
화면을 보니 주지찬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고, 주안은 꺼지지 않는 창을 노려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병원에 도착한 주지찬은 입구에서부터 크게 고함을 쳤다.
―의사 나와! 애가 죽어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애가 죽어간다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 위급한 환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시발, 내 이럴 줄 알았지.
욕을 뇌까린 주지찬은 인벤토리에서 코인 두 개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어때? 이래도 안 와?
그러자, 거짓말처럼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이를 살폈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저 모양인 거지? 돈이면 단가…….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탄식합니다.>
―뭐야? 괜히 동정하는 척하지 마. 사실 별 관심도 없으면서.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분노합니다.>
―……뭐, 세상이 이 꼴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익숙해.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그동안 고생했겠다고 위로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각성자 주지찬의 어깨를 한번 잡았다가 놓습니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의사들이 아이를 응급실로 데려가자, 화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원의 문이 닫힙니다. 10초 전.
접속을 종료합니다. 8초 전.>
―뭐야? 벌써 끊어지는 거야?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아쉽냐고 묻습니다.>
―아쉽기는 뭐가 아쉬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더러운 성좌 놈이랑 접속이 끊어진다고 아쉬워할 것 같아?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주먹으로 어깨를 툭 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오늘 멋있었다고 칭찬합니다.>
―내가 좀 멋있기는 하지. 그럼 우리는 또 언……. 아니, 시발. 됐어.
그 말을 끝으로 창이 꺼졌다.
좋으면 좋다고 하지, 표현을 왜 저렇게 해? 시발데레도 아니고. 좋아하는 거 다 보이는데.
창이 닫힌 것을 확인한 주안은 물약 상점에 가서 퀘스트 보상을 받았다. 필요하면 화신 중 누구든 소환할 수 있고, 언제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스킬이었다. 상점 선반에 놓인 휘황찬란한 물약들이 예뻐 보였지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그냥 나왔다. 어차피 코인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살 수 있으니 크게 욕심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잠에서 깨면 혹시 현실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눈을 감고 양을 1,432마리 셀 때까지도 잠은 오지 않았다.
“진짜 죽겠네. 이놈의 꿈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건지.”
<각성자 백은후가 성좌, 희생의 창조자를 호출합니다.>
원하는 각성자를 소환할 수 있는 거라면 혹시 거절도 가능한 거 아닌가? 시스템창을 보니 이전엔 없었던 거절하기 버튼이 있었다.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시험해 보기 위해 X 버튼을 누르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호출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각성자, 백은후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거절했는데 다시 도움 요청이라니……. 혹시 급한 상황인가? 만약 저번처럼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이게 현실처럼 단순한 게임 테스트였다면 화신이 죽어도 부활을 시킬 수 있긴 한데 게임이라는 말에 성좌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게임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꿈이라도 사람을 죽일 순 없지.
“아, 몰라. 그냥 수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