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계약하자고?
모준영 정도면 나쁘지 않지. S급 중 가장 제정신인데다가 공격력도 높고 파티 안에서 탱 역할도 가능하니까. 하지만…… 여러 명과 계약할 수 있는 건 맞나? 그것만 알면 당장이라도 계약했겠지만 첫 번째 퀘스트에 대한 설명에서 ‘계약’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모르는 걸 함부로 건드리느니 이번 퀘스트를 안전하게 끝내고 난 후에, ‘소환 스킬’을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이니까.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계약을 다음으로 미루고 싶어 합니다.>
―왜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목적이 있어서 후원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 민간인을 위하는 순수성을 훼손하지 말라? 나를 유혹하려고 후원한 게 아니다, 이거야?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코인도 많으면서 욕심이 없는 성좌라……. 특이하군.
욕심이 없는 건 아닌데……. 어쨌든, 이 정도면 의심이 많은 모준영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감화되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인류 구원에 진지한 캐릭터였으니까. 예상대로 창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메시지가 떴다.
<각성자 관리센터의 문이 닫힙니다. 10초 전.
접속이 끊어집니다. 8초 전.>
―다음에 또 보자고.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손을 내밉니다.>
―낯 뜨겁게 악수라니.
<접속이 끊어집니다. 5초 전.>
5초 남았다는 메시지에 모준영은 쯧, 혀를 차며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손을 맞잡고 흔듭니다.>
감각이 희미한데도 불구하고 맞잡은 손이 으스러질 것처럼 센 악력이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 다음에 만날 땐 계약서를 준비하도록.
창이 꺼질 때마저도 모준영은 자기가 갑이었다. 저러라고 만든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공무원이 갑질하면 위험하다구.
어쨌든 모준영에게도 무사히 호감을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신입 퀘스트 : 각성자들과 호감 쌓기
퀘스트 내용 : 총 10명의 각성자와 매칭해서 호감을 쌓아보세요. 퀘스트를 받기 이전에 쌓은 호감도 반영됩니다.
현재 호감도 : 8 / 10
퀘스트 보상 : 소환 스킬(원하는 각성자를 소환할 수 있다), 접속종료 스킬(원할 때 접속을 끊을 수 있다)>
아직 나오지 않은 S급은 주지찬 하나인가? 매칭 기회는 두 번 남았으니 그 안엔 어떻게든 만나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 * *
다음 매칭은 A급 캐릭터였다. 주지찬이 나오지 않아 실망했지만 그래도 퀘스트는 계속 진행해야 했다. 다행히 500개의 코인을 푼 것만으로도 호감을 얻어 호감도가 9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웬 채팅창이 나타났다. 당연히 주지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봤던 창과는 다른 창이었다.
성좌인 유저가 화신들과 대화하거나 모션할 땐 시스템창으로 나타나는데 갑자기 채팅창이라니…….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코인 10,000개라니.
[일반] 성좌, 수단을 입은 왕 : 저러다, S급 각성자들 다 데려가겠어.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저 정도면 핵플레이 아님?
[일반]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 : 핵 ㅇㅈ. 저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일반] 성좌, 로브를 벗은 마법사 : 뉴비 주제에 건방져.
그들의 채팅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게임에서 골드나 코인이 많은 유저가 플레이에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 저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개발자 입장에서 과금러는 대우해 줘야 마땅하니까.
<성좌가 되어라>가 오픈한 후에 이런 유저들이 과금러를 욕한다 생각하니 심란해졌다.
아직 오픈베타도 열리지 않은 게임에서 어떻게 알고 미리 접속……. 아, 꿈이구나.
주안은 자신이 너무 과몰입했다는 것을 깨닫고 연이어 뜨는 메시지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좌들은 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 같은 □□야.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네가 다리 사이에 있는 거 같다는 뜻
[일반] 성좌, 수단을 입은 왕 : □□이 □□ 나대네.
[일반]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 : □□□.
[일반] 성좌, 로브를 벗은 마법사 : □해 버리고 싶음.
굳이 뜻풀이를 듣지 않아도 뭐라고 할지 알 것 같은 내용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성주안은 전에 했던 게임에서 여러 어그로꾼들과 싸운 전적이 있었던지라 채팅으로 싸우는 것엔 자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개발자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일반] 성좌, 희생의 창조자 : 게임 <성좌가 되어라>를 이용해 주시는 유저님들 감사합니다. GM, 제아입니다.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개발자? 성좌가 되어라? 뭔 개소리야?
[일반] 성좌, 수단을 입은 왕 : GM이 뭐임?
[일반]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 : □□□□□□□□□□□□□!
[일반] 성좌, 로브를 벗은 마법사 : 그냥 할 말 없으니까 저러는 거 아니에요?
GM이 뭔지 모른다고? 이 게임을 하면서?
보고 있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채팅창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런데 아무리 다시 읽어도 자신이 게임 속 유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진짜 이상해진 것은 저인지도 몰랐다.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꿈속에 들어왔으니 유저는 유저가 아니라 실존하는 사람, 아니, 성좌니까. 그들이 게임 이름을 모르거나 채팅에서 어떻게 욕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꿈이고.
주안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과몰입 금지, 과몰입 금지.
[일반] 성좌, 희생의 창조자 : GM은 게임 운영자라는 뜻이고, <성좌가 되어라>는 이 게임 이름이잖아요.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뭐? 게임이라고? 정신병잔가?
[일반] 성좌, 수단을 입은 왕 : 또라이인가 봄.
[일반]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 : 야, 너 친구 없지?
참으려고 꾹꾹 눌러놓았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친구가 많은 사람에게 친구가 없냐고 물어보면 상처받지 않겠지만, 진짜 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친구가 없냐고 물어보면 상처를 받는다.
주안은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별로 모나지 않은 성격답게 나름 인싸였다. 그러나 KA 소프트에 들어오고 엿 같은 상사와 팀원들을 만나면서부터 아싸의 삶을 살아야 했다.
매일 계속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친구들도 다 떠나가고 회사와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게 성주안의 일상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열받아 있는데, 아픈 델 건드려?
[일반] 성좌, 희생의 창조자 : 존1나 무식해서 채팅창에서 욕하는 방법도 모르는 것들이 입만 살았네. 친구가 없긴 누가 없는데. 시1발.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저, 저게 뭐야? 개1새1끼, 아! 이렇게 욕하면 되는 거였네.
[일반] 성좌, 수단을 입은 왕 : 미친…….
[일반] 성좌, 로브를 벗은 마법사 : 허억.
간단한 걸 알려줬을 뿐인데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아낸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름 한 방 먹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으나 이거론 부족했다.
[일반] 성좌, 희생의 창조자 : 그리고 겨우 코인 10,000개 가지고 부러워하면 어떡해요? 저는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무한인데요?
[일반]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 : 저런 미친.
[일반] 성좌, 로브를 벗은 마법사 : 각성자일 땐 등급으로 차별하더니 성좌가 되니까 코인으로 차별하네? 재수 없는 금수저들…….
[일반] 성좌, 지혜의 관찰자 : 조ㅈ같은 시스템! 성좌면 뭘 해. 시1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이런 거면 각성자일 때와 뭐가 달라?
각성자였다고?
갑자기 튀어나온 정보에 욕을 치고 있던 주안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곳에선 게임 캐릭터인 화신을 ‘각성자’라고 부르니까,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성좌들은 캐릭터였다가 성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게임 캐릭터가 갑자기 유저가 되는 현상도 꿈이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좌 중 한 명이 귓말을 보내왔다.
[귓속말] 성좌, 수단을 입은 왕 : S급 호감은 어떻게 얻는 것임?
역시, 어디에나 자기만 살겠다는 인간은 있나 보다.
[귓속말] 성좌, 희생의 창조자 : 내가 어떻게 알아요? 지들이 좋아서 계약하자고 난리던데요?
[귓속말] 성좌, 수단을 입은 왕 : □□하네. □□ 같은 □□이!
[귓속말] 성좌, 희생의 창조자 : 내가 시1발. 욕하는 방법 알려드렸는데 머가리가 딸리시나 봄.
성좌들과 채팅하는 것도 점점 지쳐갔다. 채팅창 오른쪽 끝을 올려보자 X 표시가 보여서 바로 눌렀다. 다행히 채팅창은 마음대로 끌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한참을 기다려도 매칭이 뜨지 않았다. 이 퀘스트에 시간제한은 없었는데? 혹시라도 설정이 바뀌었나 싶어 퀘스트 창을 확인하니, 여전히 <9 / 10>이었다. 퀘스트 창을 끄고 시스템창을 열자 메시지가 떴다.
<접속한 각성자가 없습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꿈인 걸 아는 데도 퀘스트를 실패할까 불안해져서 초조하게 집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문득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바깥이 빛 한 점 없이 깜깜했다.
그제야 주안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챘다. 지금까지 패턴을 보면 만났던 화신들은 전부 그 시간에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매칭이 안 되는 것은 아마 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이나 잘까? 그런데 꿈속에서도 잠자는 게 가능해?
일단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종일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몸이 소금물에 젖은 것처럼 축 처졌다.
꿈속에서도 자는 게 가능하구나. 일어나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엿 같은 팀장 얼굴을 안 봐도 되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눈뜨면 제발 현실이기를…….
그러나, 주안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눈을 뜨니 어제 본 그대로였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잤는지 벌써 집 안 가득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스템창을 열어 현재 시각을 확인했더니 오후 한 시였다. 그때, 드디어 메시지가 떴다.
<각성자 주지찬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접속하시겠습니까?>
주지찬! 그토록 기다리던 주지찬이라니…….
수락하기를 누르자 주지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주지찬은 조그만 남자아이 하나를 안고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뒤를 큰 부리 새가 뛰어오고 있었다.
아니, 던전에 있어야 할 몬스터가 왜 시내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거지?
지금까지는 화면에 화신이 나타나면 제 손으로 만든 화신의 외모를 훑어보는 것부터 했지만 지금은 너무 급한 상황이라 주지찬의 외형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발, 아무리 힘들어도 성좌 따위의 도움은 받지 않으려 했는데……!
얘는 처음부터 시비였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 건 상한 거고, 안겨 있는 아이의 상태가 심각해 보이니 도와주기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스킬창을 켜서 후원하기를 누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