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3)화 (3/74)

003.

<성좌님을 위한 안내서 3― 1. 계약 전, 각성자와의 접속을 끄는 방법.

성좌와 각성자의 계약은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첫 줄부터 과한 세계관 주입으로 근질거렸다. 유저를 위한 안내서는 게임 설명서라, 세계관에서 벗어나 개발자의 관점에서 사용자가 게임을 즐기기 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안내서는 마치 NPC처럼 유저가 세계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약을 맺으려면 각성자의 특징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겠죠? 성좌님께서 각성자의 특징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고 판단되면 접속은 자연스레 끊깁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지? 캐릭터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내용에 화가 났지만 인내하며 침착하게 다음 내용을 읽어 나갔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퀘스트를 완료하기 전엔, 각성자가 성좌님께 감화되면 자연스레 접속이 끊깁니다. 계약의 주도권이 성좌님께 있다는 뜻이니까요.>

“무슨 안내서가 이따위야! 퀘스트는 또 뭐고!”

안내서 그 어디에도 접속을 끊는 구체적인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이쯤 되니 그냥 다 포기하고 싶었다. 가장 좋은 건 지금 잠에서 깨는 것이지만 희미하게 남은 감각으로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떠도, 꿈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몰라, 그냥 될 대로 돼라.”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스템창이 따라와 눈앞에서 멈췄다. 공세윤은 여전히 발악 중이었다.

―접속이 끊긴 건 아닌데……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사랑해요. 안고 싶어요. 입 맞춰주세요. 코인 따윈 필요 없어요. 옆에 있어주세요.

아, 진짜 왜 저러지? 쪽팔려서 죽으라는 건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낯부끄러운 말이 계속되니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호출하면 언제든 같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짜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우리 사이에 계약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고 말합니다.>

―우, 우리 사이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공세윤을 꼭 끌어안습니다.>

―흐읍…….

쉴 새 없이 말하던 세윤의 입이 다물렸다. 조용해지니까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때, 눈앞에 보이는 시스템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감화되고 있는 거야……?”

곧 시스템창에 메시지가 떴다.

<공세윤의 집 대문이 닫힙니다. 10초 전.

접속이 끊어집니다. 8초 전.>

―아, 안 돼. 나는, 아직…… 아직…… 못 한 말이 많아.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아쉬워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듭니다.>

겨우, 화면이 꺼졌다.

이제야 안내서에 나온 ‘감화’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각성자들이 호감을 느끼면 이후 계약에서 성좌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니 매칭되었을 때 최대한 호감을 얻으라는 뜻인가 보다. 계약해야만 파티원으로 데려올 수 있는 거라면 화신들을 감화시키는 것이 꼭 필요한 내용이긴 했다. 그럼 좀 쉽게 적어놓든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공세윤의 훌쩍거림이 아직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침대에 걸터앉아 바뀐 시스템과 백은후와 공세윤,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두 장의 카드에 대해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지는지 창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해가 쨍쨍했으니,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꿈속이어서 그런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게임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NPC들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바쁘니까 말을 걸지 말라는 답만 돌아왔다.

원래 게임에서도 화신을 다 등용하지 않은 채로 말을 걸면 저런 반응이긴 했으나, 실제 인간이 눈앞에 대고 투덜거리니까 기분이 나빴다.

“NPC들이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한 바퀴 돌다가 집 바로 옆 물약 상점을 지키는 NPC에게 말을 걸자 드디어 그럴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성좌님, 무엇이 필요하셔서 오셨습니까?

<물약을 구하러 왔다. / 신입 퀘스트를 받으러 왔다.>

“오, 신입 퀘스트?”

곧바로 퀘스트를 누르자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신입 퀘스트 : 각성자들과 호감 쌓기

퀘스트 내용 : 총 10명의 각성자와 매칭해서 호감을 쌓아보세요. 퀘스트를 받기 이전에 쌓은 호감도 반영됩니다.

현재 호감도 : 2 / 10

퀘스트 보상 : 소환 스킬(원하는 각성자를 소환할 수 있다), 접속종료 스킬(원할 때 접속을 끊을 수 있다)>

보상을 보고 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해야 하는 퀘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S급 카드가 네 장밖에 없는데 10명과 호감을 쌓아야 한다는 건 엄청난 노가다로 느껴졌다.

하긴, 게임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10명 중에 S급 네 명을 다 만나면 운이 좋은 거고, 아니면 그 아래 등급과 계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계약은 몇 명이랑 할 수 있는 거지? 게임처럼 네 명 맞나? 만약 한 명과만 계약할 수 있는 거라면 신중해야 하는데, 진짜 중요한 정보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여러 명과 계약이 가능하다면 S급 각성자들을 만나자마자 바로 계약해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일단은 더 해 봐야 시스템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퀘스트를 받고 나니 정신없이 매칭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얼른 퀘스트를 끝내기 위해 뜨는 족족 다 수락하기를 눌렀다.

A급 두 명, C급 세 명이 별 소득도 없이 차례로 지나갔다. 다행히 캐릭터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개발자여서 그런지, 아니면 코인을 필요 이상으로 쏴서 그런지 호감을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처음 만난 S급 둘을 합치면 지금까지 모은 호감은 7개다.

“하, 지친다. S급은 언제 나와.”

집으로 돌아와 다음 매칭을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유의미한 메시지가 떴다.

<잠시 쉬는 시간, 각성자 관리센터에서 수고하는 공무원을 응원해주세요!>

일반 유저였다면 저 메시지를 단순하게 넘겼겠지만, 주안은 저 메시지가 각성자 관리센터 공무원인 S급 모준영을 뜻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아무래도 모준영의 성격상 잘 알지도 못하는 성좌를 직접 호출할 것 같진 않으니 시스템이 억지로 매칭시켜 준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에 모준영의 모습이 비쳤다.

단정하게 넘겨 올린 까만 머리에 새카만 눈동자가 시선을 압도했다. 앉아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어깨와 터질 것 같은 팔과 가슴 근육에 잘 어울리는 무심한 표정까지…….

‘철인’이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외형이었다.

“와……. S급들은 진짜 하나같이 장난 아니네.”

감탄하듯 쳐다보고 있는데 모준영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움찔 떨게 할 만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눈빛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매칭된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윤기가 흐르던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했다.

―뭐지? 새로운 성좌인가?

<코인 10,000개를 후원합니다.>

놀라서,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코인 10,000개를 후원한 후였다. 미친…….

모준영은 성좌든 각성자든 힘이 있다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내세우는 걸 극도로 혐오하는 캐릭터였다. 그런 그에게 코인을 10,000개나 후원했으니 호감을 사기는커녕 욕이나 안 들어먹으면 다행이었다.

모준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새카만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는 걸 보니 아마도 숫자를 천천히 다시 세어보는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엄청난 개수의 코인을 후원한 것이 돈지랄이 아니었음을 밝혀야 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민간인 구제와 보호를 위해 코인을 써달라고 요청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다른 공무원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각성자 모준영을 신뢰합니다.>

말과 모션을 연달아 보냈더니 바짝 굳어 있던 모준영의 표정이 점점 풀려갔다.

―성좌 중에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놈이 있는 줄은 몰랐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오늘을 위해서 열심히 코인을 모았다고 말합니다.>

―훌륭해.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모준영의 칭찬에 기뻐합니다.>

―잠시만, 성좌, 희생의 창조자라고?

모준영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천천히 화면을 훑었다. 마치 있지도 않은 얼굴이 시선에 핥아지는 느낌에 주안은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훌륭하다더니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주안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곤 화면을 응시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라……. 백은후가 계약을 요구했다던 그 성좌?

모준영의 말투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백은후와 모준영은 가장 상성이 맞지 않는 캐릭터였다. 다른 S급들끼리도 그리 친한 건 아니었지만 미친놈들끼리는 어느 정도 서로를 이해한다고, 무관심한 정도였지 적대시하진 않았다. 그러나 백은후와 모준영은 달랐다. 나중에 스토리의 재미를 위해 아군 사이에 트러블 요소를 넣은 것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살벌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계약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매우 억울해 합니다.>

―아, 그건 나도 알아. 성좌가 계약하지 않아서 열받았다고 들었으니까. 그때부터 호감이었지.

뭐지? 이거 완전히 거저먹기잖아.

호감도를 얻지 못할까 봐 조마조마하던 심장이 제 속도를 찾아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모준영이 째려보는 바람에 그의 스탯을 확인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주안은 재빨리 상태창을 열었다.

<각성자 : 모준영

현재 등급 : S (물리계)

스킬 등급 :

무한러쉬(SS). 함성(S), 파괴본능(SS)>

모준영은 물리 공격을 주로 하고, 탱커 역할을 하기도 하는 캐릭터였다. 다른 헌터들처럼 공격력도 높았지만 그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바로 ‘함성’ 스킬 때문이었다. 적이 퍼붓는 공격을 풀 방어력 상태의 헌터에게만 집중시키면 다른 파티원들은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으니 파티에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나저나 호감을 얻었는데 왜 창이 꺼지지 않지? 호감은 있으나 감화되지 않았다는 건가? 얘는 욕심이 없어서 성좌한테 바라는 것도 없을 텐데……. 그때, 모준영이 말했다.

―……희생의 창조자. 백은후가 별로면 나는 어때? 당신의 계약자로 말이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