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본 게임에서는 유저들에게 4장의 캐릭터 카드를 주고 게임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가챠 시스템이 그렇듯, 처음 주는 카드에 S급이 나올 확률은 극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 튀어나온 S급인 백은후를 거부한다는 건 아무리 꿈이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다 되는 거 아냐?”
주안은 바로 스킬창을 열어 후원하기를 눌렀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백은후에게 1,000개의 코인을 후원합니다.>
백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매섭게 뜬 푸른 눈이 깊게 일렁였다.
―누가 코인 달래? 계약하자고 했지.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백은후에게 호감을 표현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백은후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요구합니다.>
―오래 기다릴 생각은 없어.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웃으며 손을 흔듭니다.>
그때, 시스템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솔플 던전이 문을 닫습니다. 10초 전.
접속이 끊어집니다. 8초 전.>
―문 닫힐 시간이 됐나 보네. 받은 코인은 유용하게 쓰겠지만 다음 만남에서도 피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마.
눈앞에 있던 던전이 사라지고 켜놓았던 스킬창도 꺼졌다. 그리고 시스템창이 있던 곳에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밝은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을 정도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난생처음 보는 낯선 곳이 주안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 *
<지혜의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님의 집은 물약 상점 옆에 있습니다.>
마을은 육체가 없는 성좌(유저)가 화신을 데리고 다니며, 퀘스트를 파악하고 무기를 강화하는 곳이며 몬스터에게 패했을 경우 귀환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집이라고……?
게임 내에 스킬창이나 인벤토리가 있긴 했지만 집은 없었다. 유저마다 집을 다 만들어줄 순 없었으니까.
주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처음 보는 마을의 모습을 구경했다.
귀환할 때 바로 떨어지는 곳인 호수를 중심으로 무기와 물약을 파는 상점과 강화하는 대장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 몇 채가 쭉 이어져 있었다. 마치 실제처럼 구현된 그래픽 퀄리티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지붕 위에 빛나는 글자를 확인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
물약 상점 옆이기도 하고, 여기가 내 집인 건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성주안의 집과 비슷한 구조의 방이 나왔다. 일단은 마음을 좀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상태창이 열렸다.
<각성자 공세윤이 접속을 요청합니다.
매칭하시겠습니까? Y / N>
공세윤?
이름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세윤은 S급 화신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화신이었다. 게다가 상태 이상이 있어서 활기찬 상태일 때와 우울한 상태일 때 스킬 능력 차이가 심했다.
보통 스킬은 획득 이후엔 안정적으로 발현되는데 공세윤은 상태에 따라 D급까지 떨어질 때도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어쩌지? 그냥 모른 척할까?
하지만 S급이었다. 공세윤을 포기하면, 그 자리를 더 낮은 등급으로 채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매칭을 취소하시겠습니까? Y / N>
“아, 몰라. S급을 어떻게 포기해.”
이 게임의 세부적인 내용과 엔딩까지 모두 알고 있으니 공세윤 하나쯤은 감당할 수 있겠지.
주안이 접속을 허락하자 텅 빈 방 안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세윤이 보였다. 제 무릎에 이마를 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화신답게 잘빠진 몸과 가느다란 갈색 머리가 부드럽게 흩날리는 모습이 딱 예상한 그대로였다.
“와……. 진짜 캐릭터 외형 디자인 누가 했냐? 바로 영입해 오고 싶네.”
그때, 세윤이 고개를 들었다. 처연한 표정의 아름다운 미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훌쩍거렸다. 눈가와 뺨이 붉은데 얼굴은 또 눈처럼 하얘서 부성애를 일으켰다.
“가여워.”
성주안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자, 공세윤이 훌쩍거림을 멈추고 손으로 눈가를 훑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공세윤을 가여워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뭐지? 얘는 내가 누군지 아는 건가?
아까 분명 백은후는 자신에게 처음 보는 성좌라고 했었는데 공세윤은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이상했다. 그래도 일단 우는 건 안쓰러우니까…….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공세윤의 뺨을 쓰다듬습니다.>
당황한 듯 자신의 뺨을 쓱쓱 비비던 공세윤이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으, 흑…….
“아씨, 실수했나?”
진심으로 불쌍해서 쓰다듬어 준 것일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세윤의 우울 포인트를 건드려버린 것 같았다. 우느라 대화가 안 될 테니 상태창부터 확인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각성자 : 공세윤
현재 등급 : S (빙결계)
현재 상태 : 우울함
스킬 등급 :
차가운 칼날(SS급 ― > D급), 냉정한 포식자(SS급 ― > D급), 물보라의 탄식(SS급 ― > D급)>
“와, 얘는 백은후보다 더하네…….”
공세윤 역시 입이 떡 벌어지는 스탯을 가지고 있었다. 업데이트 이전 스킬을 모두 획득한 것도 모자라 SS급까지 스킬 강화까지 마쳤다니. 밥 먹고 사냥만 한 게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탯이었다. 하긴, 공세윤은 위험성이 큰 만큼 스킬도 사기캐로 만들긴 했지.
주안은 이런 캐릭터를 넘길까 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공세윤을 바라보았다.
울음을 그친 공세윤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려가 있던 눈매가 뾰족해지니, 수빙계 캐릭터답게 차가움이 뚝뚝 떨어졌다.
―뭐 해요? 이제 안 가여워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공세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로합니다.>
그러자 공세윤이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얘는 가만있을 땐 안 울고 왜 위로해 줄 때 더 울고 난리지? 하긴, 캐릭터를 이렇게 만든 게 자신이니 누굴 탓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슬프고 힘들 땐 역시 금융치료지.
주안은 스킬창에 들어가 바로 후원 버튼을 눌렀다.
<1,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아까 Y 버튼을 눌러서 그런지 이번엔 경고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코인을 무한대로 후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개발자의 특혜인가? 쓴웃음이 났다.
―이게 다 뭐예요? 성좌님 저는 코인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코인을 쓰니까 울음을 그치긴 했는데, 어째 또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간 것이 기분이 싸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그러면 뭘 원하냐고 물어봅니다.>
―흐읍…….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울지 말고 말하라고 합니다.>
―울지 않고 말하면 제 말 들어주실 거예요?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고개를 끄…….>
―진짜죠?
<덕이다가 멈춥니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후, 십 년 감수했네.
다른 애들은 몰라도 공세윤만큼은 함부로 뭔가를 허락해 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고, 분위기에 휩쓸릴 뻔했다. 지금이라도 정정해서 다행이지. 정신을 차리고 일단 말이나 들어보자고 하자, 세윤이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러니까요. 저는 성좌, 희생의 창조자님과, 흐읍…… 끕. 계약하고 싶어요. 제발, 저와 계약해 주세요. 저는……. 상태에 따라서 스킬을 못 쓸 수도 있다고 성좌님들이 미워하기도 하고…….
말을 멈춘 공세윤이 또다시 크게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공세윤은 한참 울다가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친구도 없고, 계속 혼자예요.
친구가 없다는 말에 심장이 아려왔다.
하……. 나는 어쩌자고 캐릭터를 저렇게 불쌍하게 설정해 놓은 걸까?
물론 이 게임이 카드를 뽑으면 나오는 캐릭터들의 서사를 하나씩 까보는 재미도 중요한 게임이라 서사를 놓칠 순 없긴 했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인물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자니 정신 소모가 컸다.
그렇다고 덥석 계약하자고 할 수도 없고, 코인을 주면 아까처럼 또 눈을 뾰족하게 뜰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계약 말고 다른 소원은 없냐고 넌지시 물어봅니다.>
―없어요! 없다고요. 나는 계약만 원해요. 다른 건 필요 없어!
지금 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공세윤의 상태가 우울함을 벗어나는 것. 코인으로 상태까지 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불가능했다. 그럼 어떡한다?
―빨리, 계약해 주세요. 빨리, 빨리요.
애도 아니고 20살이나 된 애가 왜 이렇게 보채.
주안은 공세윤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자 공세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몸 어딘가를 쓰다듬어주거나 등을 토닥여 줬을 땐 우느라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던 걸 기억하고 한 행동인데 의외로 잘 먹혔다. 가까스로 공세윤을 안정시켜 놓고, 주안은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성좌 : 희생의 창조자
계약자 : 없음
파티 구성원 : 없음
코인 : 무한대
스킬 등급 :
후원(코인을 후원하여 각성자의 상태 이상을 치유하거나 호감을 살 수 있음), 버프(능력치 3배 강화 및 다양한 전투 보조 스킬 보유)>
이게 단순한 시스템 오류인지, 아니면 꿈이라서 게임 내용이 뒤틀린 것인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상태창을 뒤져 봐도 지금 공세윤과의 접속을 끊을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카드로 공세윤을 다른 캐릭터로 바꿔 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안은 한숨을 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창을 열어보았다. 각각 캐릭터의 장비가 더 중요한 게임이라, 성좌의 아이템은 별것 없었다. 게다가 들고 다니지 않아도 코인만 가득하면, 언제 어디서나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인벤토리창을 연 까닭은 인벤토리창에 책 모양으로 들어 있는 ‘성좌님을 위한 안내서’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이 안내서에 각각의 캐릭터들과의 접속을 잠시 꺼놓을 방법이 적혀 있을지도 몰랐다.
―하, 뭐 해요? 지금 사람을 두고 장난해요? 방치하는 거예요?
―사랑해요, 성좌님.
―아니, 이러면 싫어하겠죠?
―성좌, 희생의 창조자님이라고 했죠? 저기요, 성좌님, 성좌님.
주안은 계속해서 저를 부르는 공세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침착하게 안내서를 열어 해당 항목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