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모니터 한쪽에 업무 메신저 팝업이 떴다. 박 팀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충혈된 눈이 창의 가장 마지막 문구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시스템 테스트 정도는 할 수 있지?
<성좌가 되어라>는
네가 팀장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한마디로 게임 스토리의 진행 확인 테스트를 자신 혼자 감당하라는 뜻이었다.
이제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된 신입에게 팀장이라니?
박 팀장의 뻔뻔한 메시지를 확인하던 성주안이 신경질적으로 메신저를 종료했다. 그런데도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서랍에 간식 넣어놨으니까
당 충전해 가면서
알지?>
기가 막히니 웃음만 나왔다.
게임 <성좌가 되어라>는 성좌가 되어 화신을 키우는 KA 소프트의 새로운 모바일 RPG 게임이었다.
게이머는 성좌가 되어, 일반 몬스터를 잡아 화신 네 명을 키운 후, 화신들과 파티를 구성해 순서대로 나오는 던전을 클리어해서 엔딩을 보아야 한다. 엔딩을 보고 난 이후에도 보스 레이드를 통한 랭킹전과 성좌대전(PVP) 등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1년 전, 성주안은 KA 소프트의 게임 스토리 공모전에 <성좌가 되어라>의 초안을 응모해 당선되었고, 그 결과 이 회사에 특채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 게임사에 들어왔다는 기쁨도 잠시, 그토록 들어오고 싶었던 KA 소프트 개발팀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했고 함께 일하는 팀장은 팀원들의 공을 가로채는 비열한 인간이었다. 심지어 회사 내부는 정치질이 우선이었다.
팀장은 성주안의 포트폴리오에서 시작된 게임이니 모두 네가 알아서 하면 되겠다며 일을 떠넘겼고, 그러함에도 게임 개발과 관련해서 윗선에 보고할 때는 모두 자신의 공으로 돌렸다.
“하……. 이 회사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도대체 야근을 며칠째 하라는 거야?”
회사가 열정페이를 강요하고 상사가 일을 떠넘긴다고 해서, 게임이 오픈하기도 전에 그만둬 버리면 저만 손해였다. 그래서 성주안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게임이 세상에 나가고 개발자 명단에 이름이라도 올려야 조금 덜 억울할 것 같았다. 학력도 별로인 데다가, 프로그램 관련 자격증도 없는 성주안이 내세울 거라고는 공모전 당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안은 메이저 게임회사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결심했다.
그래, 그래픽 만들어질 때까지만 참자. 그럼 곧 오픈이니까.
오픈하고 그만둬 버리는 거다! 이 회사엔 더 이상 답이 없다.
* * *
커피로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게임 아이콘을 클릭하자 어두운 배경과 함께 음산한 BGM이 깔렸다.
<성좌가 되어 화신들을 키우시겠습니까? Y / N>
마우스로 Y 버튼을 클릭하자 로딩창이 떴다.
<성좌가 되는 중입니다.>
<육체에 힘이 빠집니다. ……로딩 20%……>
<손과 발이 희미해집니다. ……로딩 35%……>
<팔다리가 사라집니다. ……로딩 50%……>
<가슴과 배가 사라집니다. ……로딩 67%……>
<머리와 얼굴이 사라집니다. ……로딩 92%……>
여기까지는 주안이 만든 로딩 메시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뒤에 이변이 일어났다.
―치지직. 칙, 칙.
화면이 흔들리고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이 동기화됩니다. 잠시간 어지러움과 구토 그리고 환각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동기화가 완료되어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뭐지? 성좌, 희생의 창조자? 난 이런 거 넣은 적 없― ”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시야가 흐려졌다. 피곤해서 그런가? 눈을 비비는데 얼마 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 머리를 잡고 책상에 엎드리자 감각이 조금씩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위기감을 느낀 성주안은 눈을 번쩍 뜨고 제 손을 쳐다보았다.
“……!”
손이, 보이지 않았다. 팔이 보이지 않았고, 다리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처음엔 눈이 멀어버린 줄 알았으나 몸이 있어야 할 곳 너머로 사무실 비품들이 보여서 육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제가 만든 <성좌가 되어라>의 로딩 메시지와 같은 상황이었다.
꿈인가?
요즘 잠을 못 자서 나도 모르게 쓰러졌나 보네. 그러니까 이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지. 아무리 내가 개발자여도, 게임이랑 동기화되어서 게임 캐릭터가 된다는 게 말이 돼?
꿈이라고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잠에서 깨려던 순간이었다. 귀에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생의 창조자? 처음 보는데. 넌 누구지?
낮게 잠긴 듯, 허스키한 목소리가 성우 뺨칠 정도로 듣기 좋았다. 목소리에 감탄하고 있는데, 익숙한 스킬 이름이 귀에 꽂혔다.
―하늘의 울림!
하늘의 울림은 번개를 일으켜 몬스터를 일정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스킬이었다. 익숙한 단어에 기억을 더듬자 캐릭터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백은후?”
게임 내의 캐릭터, 백은후였다. 그는 전뢰계 스킬을 쓰는 S급 화신이었다. 그래픽이 완성되지 않아 아직 외형은 알 수 없었다.
주안이 백은후를 떠올리자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각성자 : 백은후
현재 등급 : S (전뢰계)
스킬 등급 :
죽음의 낙뢰(SS), 하늘의 울림(S), 창백한 번개(SS)>
“우와…….”
상태창을 보고 너무 놀라서, 상태창의 이상도 깨닫지 못했다. 원래 캐릭터의 이름 앞에는 ‘각성자’가 아닌 ‘화신’ 텍스트를 넣어뒀는데도.
어쨌든 백은후의 스탯은 거의 만렙을 찍어야 볼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 히든 스킬은 1차 업데이트 이후에 나타날 테니 지금 저 정도면 만렙을 찍은 거나 다름없었다.
<각성자 백은후의 상태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상태 이상의 종류 : 중독
코인을 후원하시겠습니까? Y / N>
백은후가 중독 상태면 당연히 후원해야지. 어차피 테스트를 위해 개발자 아이디로 접속해서 코인이 무한대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후원하지? 마우스로 클릭을 할 수도 없고…….
“예스!”
허공에 외치자, 상태창의 Y 버튼이 마치 클릭한 것처럼 빛났다. 그리고 개수를 입력하는 창이 떴다. 그 와중에도 목소리는 계속 들렸다.
―나, 좀 급한 거 같은데?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던전 안에서 쓰러져 있는 백은후의 모습이 보였다. 신비한 빛깔을 내뿜는 은발에 딱 벌어진 어깨,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보이는 푸른 눈, 매끄러운 턱선과 오뚝한 코……. 쓰러져 있음에도 엄청난 피지컬을 자랑하는 외형이었다. 이야, 진짜 잘생겼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있는 모습에 잠시 감탄하던 주안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백은후가 쓰러진 반대편에서 붉은 꼬리 도마뱀이 입을 쩍 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불쌍해라.”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백은후를 불쌍히 여깁니다.>
―하하, 성좌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성주안은 얼른 후원해야겠다는 생각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9999999999…….>
남은 코인이 무한대인 것을 확인한 후 망설임 없이 말했다.
“1,000개 후원.”
그러자 갑자기 화면이 빨개지며 경고 메시지가 떴다.
<후원 코인이 너무 많습니다.
상태 이상은 코인 1개로도 충분히 정상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후원하시겠습니까? Y / N>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우스로 클릭하듯 손끝으로 Y 버튼을 눌러보았다.
<1,000코인을 후원합니다.
백은후의 상태가 정상화되었습니다.
남은 코인 : 9999999…….>
도마뱀이 백은후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다가간다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상태 이상 치료했으니까 빨리 스킬 써.”
괴물과 백은후의 몸이 맞부딪히려는 순간, 그가 몸을 일으키며 죽음의 낙뢰를 시전했다. 그러자 던전이 뒤흔들리며 번개가 도마뱀의 몸통 정 가운데를 관통했다.
도마뱀의 몸이 터지면서 던전 구석구석에 녹색의 독이 튀었으나 후원을 넉넉하게 했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잠시 비틀거리던 백은후는 똑바로 서서 어깨를 탈탈 털었다.
―뭘 잘못 먹기라도 했어? 코인을 이렇게나 후원하다니. 나야 쉽게 끝내서 좋긴 하지만.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백은후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우연히 매칭돼서 누군가 했더니 보석이잖아?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건강히 잘 지내라고 인사합니다.>
백은후를 살려낸 주안은 얼른 꿈에서 깨기 위해 백은후가 있는 던전을 보며 꺼지라고 말하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화면의 X 표시를 눌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말하고 아무리 눌러도 화면이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성좌가 이렇게 어눌해? 꺼지라고 한다고 접속이 끊기겠어?
접속이라고?
게임 속에서는 화신 카드를 캐릭터 탭에 넣고 빼는 것으로 화신을 교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꿈속에선 어떻게 해야 백은후와의 접속을 끊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접속 해지를 요구합니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후원도 끝났는데 무슨 볼일이 남았냐고 불평합니다.>
백은후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계약해야지. 너처럼 코인 많은 성좌는 처음인 것 같은데.
계약?
게임 시스템에 그런 건 없는데? 계약은 이미 끝난 것 아닌가?
잠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꿈이니 게임 설정이 미묘하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백은후와 계약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캐릭터 설정 속 백은후는 한마디로 야망에 미친 인물이라 최소한의 양심도 없고, 모략과 술수에 능했다. 그래서 화신 레벨 만렙을 찍은 이후에는 던전을 공략할 때 파티원에게 피해를 끼쳐 플레이를 어렵게 하는 디버프 효과가 있었다.
만약 백은후와 계약해서 스토리가 틀어진다면? 아무래도 잘 모르는 건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격 더러운 백은후의 요청을 함부로 거절한다고 말할 순 없었다. 아무래도 에둘러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백은후의 손을 맞잡습니다.>
백은후의 표정이 느른히 풀렸다.
<성좌, 희생의 창조자가 생각해 보겠다고 합니다.>
―튕기시겠다? 그럼 내가 다른 성좌와 계약해도 상관없겠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내 파티에 백은후가 없을 수도 있다고? 그건 안 되지. S급 화신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대뜸 계약을 해버릴 수도 없고? 어떡하지?
선택의 상황이었으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스토리에 고민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