因緣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의 자세는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엄숙했다. 그중 한 여인이 너무나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모습이 화선당(火宣堂)의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이라 입고 있던 한복이 흠뻑 젖었는데도 여인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108배를 올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저 여인은 한 달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절에 찾아와 새벽마다 108배를 올리고 있었다. 워낙 산세가 험해서 남자들도 올라오기 힘들다는 이 절에 새벽마다 찾아와 108배를 올리는 연유가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 화선당의 머리에 스쳤다.
“이보세요.”
절을 마친 여인이 신을 신으며 나가려는 것을 화선당이 조심스럽게 불러 세웠다.
“네?”
여인은 아름답고 정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 어린 수심을, 화선당은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무슨 근심이 그리 깊으셔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에 오시는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연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호수처럼 깊은 여인의 눈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당황한 화선당은 동자승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시키고 그녀를 법당 근처 정자로 데리고 갔다. 물을 한 사발 들이켠 여자가 말한 사연은 그러했다.
결혼을 한 지 벌써 칠 년째인데 아무런 소식이 없자 집안에서 벌써부터 첩을 들이라고 남편에게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이 절에서 백 일 동안 108배를 한 여인이 어렵게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찾아왔다고 여인은 말을 맺었다.
화선당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인에게 말을 건넨 것은 수심 가득한 옆모습 때문도 있었지만 그녀 주변에 보이는 희끄무레한 그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동자승에게 붓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정신을 집중하고 쥔 붓끝에서 지금이라도 날아갈 듯한 한 마리의 학이 그려졌다. 그녀는 여인의 손에 이 그림을 쥐여주고 침실의 문 앞에 붙여두라고 말했다.
“이게 무엇인가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쪽 집안의 선조께서 아이를 밴 학을 사냥감으로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학의 원한이 깊어, 당신에게까지 이르는군요.”
“이 그림을 붙여두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붙여두고 있으면 밤중에 창문으로 새의 그림자가 보일 것입니다. 그때 자루에 옥수수를 담아 창밖으로 뿌리고, 노여움을 푸시라고 세 번 말하세요.”
“……그리고요?”
“이 그림을 태워 물에 섞은 다음, 마시고 합방을 하시면 아기씨가 보일 겁니다.”
옆에서 먹을 갈던 동자승이 보살님은 알아주시는 술사님이라고 귀띔을 해주자 여인이 화선당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같은 여인의 처지인지라 마음이 쓰여 말을 건넸습니다.”
“제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 은혜는 어떻게든 보답하겠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목숨을 달라고 해도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인이 자신의 손을 붙들고 그런 말을 하자 화선당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다면 나중의 나중, 언제가 되든 그대의 자손이 우리 집 아이의 수호자가 되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수호자요?”
“언제가 되든 상관없습니다. 언젠가, 그럴 날이 오면 그렇게 되겠지요.”
이해하기 힘든 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선당은 여인에게 다시 한 번 학을 달래는 방법을 알려주고 조심히 내려가라고 배웅을 해주었다.
두 달 뒤, 여인이 기쁜 소식을 갖고 찾아왔을 때, 화선당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깊은 산자락의 끝에서 하얀 학이 날아올랐다.
여인이 낳은 아이의 아이가, 화선당이 낳은 아이의 아이에게 수호자가 되어주는 것은 조금은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