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rivate Concert
밀로드MILORD 안의 열기가 뜨거웠다. 주말 밴드들은 모두 인기가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이수호가 가세하게 된 잉글리시 보이 밴드의 주가는 나날이 높아졌다. 이번 달 마지막 주말에, 그들의 단독 콘서트가 밀로드MILORD안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이전에 다른 밴드들과 합동 공연을 몇 번 하긴 했지만 단독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라 밴드 멤버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공연 시작 전에 이태섭은 화장실을 열 번이나 들락거렸고 김병두는 다리를 달달 떨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우장일은 과묵하게 드럼 스틱만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대 체질이라는 이수호만 평소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 나는 정말 슈퍼스타가 될 것 같은 얼굴이야, 하고 감탄을 날렸다. 대체 넌 왜 이렇게 간땡이가 부은 거냐고 투덜거리는 태섭에게 이수호는 이 정도로 무서우면 전 못살죠, 하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것은 우장일과 신현제뿐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수호의 예명인 푸른 카디건을 외쳤다. 첫 곡은 태섭의 자작곡으로 시작되었다. 간간이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도 했지만 거의가 자작곡으로만 진행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신현제는 무대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수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눈에 새겨질 수 있도록 그는 한순간도 이수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 곡까지 끝나자 사람들은 밴드의 이름을 연호하며 앙코르를 외쳤다.
“앵콜?”
이수호가 귀에 손바닥을 대며 물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무대에 내려놓은 생수를 마시며 이수호가 환하게 웃었다.
반짝거리는구나. 신현제는 이수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목은 아시는 분은 아실, 앵콜요청 금지입니다. 마지막 곡 감상하시고 집에 잘 돌아가세요.”
누구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앵콜곡으로 이걸 선택했다는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신현제는 재미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여자 톤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이수호의 목소리에 맞춰져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신현제는 마이크를 쥔 채 웃고 있는 이수호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노래를 부르던 이수호의 시선이 신현제를 향했다. 신현제는 뜨끈해진 목덜미를 보이고 싶지 않아 옷깃을 위로 올렸다.
우장일이 낮게 코러스를 넣어주자 뒤에 있던 여성 팬들이 꺄악,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빨간 눈을 한 귀신도 그 틈에 끼어서 방방 뛰었다.
이수호는 아직은 우장일이 밴드 내 인기 순위 1위지만 자신이 언젠가 그것을 탈환하겠다고 선언을 한 상태였다. 비명의 강도를 봐서 당분간은 그게 어렵겠다고, 신현제는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자신에게는 좋았다. 지금도 이수호를 둘러싸고 꺅꺅거리는 사람들이 많아 이렇게 배가 아픈데, 1위까지 했다간 자신은 병원에 실려 가고도 남을 테니.
노래가 끝이 났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수호의 노래는 음색도 좋았지만 그 여운의 힘이 대단했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그의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곱씹고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신현제가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그를 따라 박수를 쳤다. 앵콜을 더 요청했지만 이수호는 손을 흔들며 얼른 돌아가시라고 대꾸했다.
무대 뒤로 들어가는 이수호를 보면서 신현제는 생각했다.
저 녀석과 무슨 일이 있어도 종신 계약을 맺겠다고.
“대성공이야. 첫 단독 콘서트인데, 이 정도면 대박이라고.”
“대박인가? 대박 맞아요?”
이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넌 안 그래 보이는 놈이 은근 욕심 많더라.”
“여기서 만족하면 큰물에서 못 놀잖아요. 난 진짜 완전 대박 큰물에서 놀 건데.”
이수호의 맹랑한 발언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큰물에서 놀게 해줄게. 나랑 종신 계약해.”
“……안 한다고.”
“왜 안 해. 내가 회장될 건데. 원하는 조건 맞춰준다니까.”
신현제가 끈질기게 종신 계약을 주장하자 이수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우장일이 티 나게 인상을 찡그리며 너는 대체 왜 여기 있냐고 눈빛을 보냈지만 신현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네 수능 봤겠다?”
“봤죠.”
“잘 봤어?”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들인 돈이 얼마인데.”
신현제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누구도 그에게 형식적인 축하조차 건네지 않았다. 이수호는 아이고, 하며 사이다를 마셨다.
“원만이도 잘 봤어?”
“그놈의 원만이는 그만 좀 부르면 안 돼요? 왜 멋진 제 이름 놔두고 자꾸 원만이라고 해요. 사람들이 제 본명이 진짜 원만인지 알잖아요.”
“어때. 원만이 귀여운데. 너는 어떠냐고. 말 돌리는 거 보니까 망친 거 같은데?”
“그냥, 뭐, 그럭저럭.”
작곡공부를 할지 언어공부를 할지 이수호는 아직도 진로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신현제는 무조건 자신과 같은 학교를 가자고 졸랐지만 무리였다. ……이수호의 성적이 신현제보다 훨씬 좋게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얘기는 성적에 은근히 민감한 신현제에게 아직 하지 않았다.
“우리 학교 와. 우리 학교 괜찮은데.”
김병두가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아, 씨발. 김병두 짜증 나는 배신자, 닥쳐!”
이태섭이 김병두의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며 마시라고 소리쳤다. 고등학교 때 같이 놀아놓고 혼자서만 서울대에 간 그를 이태섭은 아직도 용서하지 못했다.
“좋겠다. 수능 끝나고 나면 놀 일 천지잖아.”
“논술 준비해야죠.”
신현제가 냉큼 대답했다.
“이 새끼도 가만 보면 참 이상해.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모범적이란 말이야.”
“저 원래 모범적인데요.”
이수호가 으엑, 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내밀어 보였다.
“대학 가면 인기 좋겠다, 너.”
김병두가 신현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너네 집 부자잖아. 이놈은 또 그걸 감추는 법이 없어요. 여자들이 좋아할 요건을 다 갖췄지.”
“성격이……, 별로잖아요.”
이수호가 찡그린 얼굴로 상추를 씹으며 끼어들었다.
“여자들은 남자가 돈이 많고 잘생기고 키가 크면, 성격까진 안 바라. 거기서 성격까지 좋으면 사기거든.”
“나처럼?”
우장일이 묻자 다른 멤버들이 뒤집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이수호는 신현제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신현제가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이수호는 대답하지 않고 혼자 사이다만 홀짝였다. 아직 해가 지나지 않아 미성년자인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늘 사이다를 시켰다. 이태섭이 오늘만큼은 한잔 정도는 괜찮다며 이수호에게 계속 맥주를 권했다. 결국 귀가 얇은 이수호가 멤버들이 주는 술을 한 잔씩 받아 마셨다. 신현제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맥주잔을 들고 있는 이수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 하장실…….”
그렇게 말하며 이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하장실이라고 말한 것을 신현제만 눈치챘다. 그는 전화를 받으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호의 뒤를 쫓았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이수호는 물을 틀어놓고 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괜찮은데…….”
“뭐가?”
뒤에서 불쑥 던져진 질문에도 이수호는 놀라는 법이 없이 내 얼굴, 하고 대답했다. 신현제는 등 뒤로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잠그며 이수호의 옆으로 가서 섰다.
“내 얼굴. 이만하면 괜춘허지?”
“괜춘은 또 뭐야. 괜찮지, 제법.”
“음…….”
돌아온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수호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신현제를 바라보았다.
“……재섭서.”
“너 취했다?”
신현제가 웃으며 이수호를 부축해주려고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수호가 이거 놔, 하면서 매몰차게 뿌리치려다 세면대 끝에 손가락을 부딪치고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쳤어?”
“으, 아파…….”
이수호가 벌겋게 부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헤헤 웃었다.
“난 손가락이 참 이쁘네.”
“…….”
다 이뻐, 라고 대답하려다 신현제는 차마 그런 팔불출 같은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내 손가락은 어디 인기 없으려나?”
“무슨 소리야.”
“인기 많아서 좋겠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이수호가 신현제에게 따져 물었다.
“인기 많아서 좋겠어. 신현제.”
“아직 없어.”
“곧 생긴다는 말은 죽어도 반박 안 하네.”
“생기겠지. 나 정도 급에 인기가 없으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서운해하시겠어. 고등학교도 일부러 그래서 공학 아니고 남고로 보내신 건데. 연애하느라 공부 못 할까 봐.”
대한민국의 아들을 둔 대다수의 부모가 그러했지만 신현제의 부모는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이 잘생겼다고 믿고 있었다. 연예인을 보는 직업을 가진 그의 아버지는 곧잘 자신의 아들을 보며 네가 누구보다 잘생겼구나, 라든지, 네가 이 드라마에 나왔으면 시청률이 더 올랐을 텐데, 하는 망언을 진심을 담아 내뱉곤 했다.
“어, 그래. 참. 인기 많아서 좋겠어.”
이수호는 불쾌함을 억누른 채 중얼거리며 신현제를 밀어냈다.
“나갈 거야. 비켜.”
“…….”
“나간다니까?”
“네가 더 많잖아.”
“어?”
“네가 인기는, 더 많잖아. 누구는 좋아서……, 가만히 있는 줄 아나 보지.”
“……장일이 형이 제일 많아.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인기의 뜻이 다른 거 같은데…….”
“넌 너무 반짝거려.”
“오늘 의상이?”
이수호가 일부러 밴드 멤버들과 맞춰 입고 온 자신의 옷을 둘러보았다. 깔끔한 슈트 바지에 흰색 셔츠, 그 어디에 반짝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지 고민을 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신현제가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이수호의 머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이수호는 땀 많이 흘려서 안 돼, 하고 신현제를 밀어냈지만 그는 이미 그 땀 냄새에 잔뜩 흥분해 버린 상태였다.
이럴 때만큼은 행동력이 최고인 신현제가 이수호를 끌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술 냄새가 나는 키스를 나누고 흥분한 아래를 비비며 신현제는 좋아, 너무 좋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수호는 방금 전까지 화를 낸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신현제의 품에서 이수호는 천천히 술기운이 가시고 있었다.
“……우장일하고 왜 친하게 지내.”
이수호의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며 신현제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같은 밴드 멤버잖아.”
“개새끼. 분명히 언젠가 널 노릴 거다. 장담해.”
저 노린다는 말을 신현제는 몇 개월간 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 정작 장본인들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그럼 태섭이 형은?”
“싫어. 고릴라 같아.”
“병두 형은?”
“재수 없어. 머리 너무 좋아.”
“난 그럼 누구랑 친하게 지내. ……넌 내가 왕따인 게 아주 다행이겠다.”
“…….”
처음에 신현제는 이수호에게 친목의 장을 도모해주려 나름 노력했지만 거절을 당한 이후로는 어떤 권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수호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요즘 밴드활동을 하며 주변에 사람이 부쩍 많아진 이수호 때문에 신현제의 초조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나중에 내가 슈퍼스타가 되면 어쩌려고.”
“……설마 되겠어?”
그 한마디에 이수호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신현제를 밀어내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신현제가 부랴부랴 뒤쫓아 나와 사과를 했지만 이수호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농담이라니까.”
“농담할 게 따로 있지.”
“슈퍼스타 해. 그때 가서 질투할게. 그러면 되지?”
이수호는 씻었던 손을 계속 씻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화장실 문을 누군가 밖에서 두드렸다. 문을 열자 우장일이 들어왔다.
“뭐야. 문을 왜 잠그고.”
“잠겼나 봐요. 볼일 보시게요?”
신현제는 우장일을 보는 순간 기분이 잡친다고 밖으로 먼저 나가버렸다.
“아니, 병두 새끼가 나한테 김치를 쏟아서.”
우장일이 셔츠에 묻은 얼룩을 보여주었다. 이수호가 저런, 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빨아야겠는데요? 이거 그냥 두면 세탁소 보내도 얼룩 안 지워질 텐데.”
“그렇겠지?”
우장일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으려고 하자 이수호가 에이, 하고 다시 입으라고 말했다.
“제가 빨아드릴게요. 잠깐만.”
이수호는 세면대에 있는 물비누를 손에 묻혀 김칫국물이 묻어있는 셔츠 위에 문질렀다. 우장일은 열심히 자신의 셔츠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는 수호를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많이 짧아진 앞머리 때문인지 이수호의 얼굴이 한층 해사하게 보였다.
“누나는?”
“우리 누나 며칠 전에 생방송 가요프로그램 방청석에서 방방 뛰고 있는 모습 잡혔는데, 못 보셨죠? ……못 보셨으면 영원히 보지 마세요. 엄청 흉하니까.”
그 말에 숨겨진 진의를 알아챈 우장일이 웃으며 다행이네, 하고 말했다. 이수호는 한 번 더 물비누를 묻혀와 와이셔츠에 대고 문질렀다. 으, 하고 인상을 찡그리는 이수호의 동그란 이마를 펴주고 싶다고 우장일은 생각했다.
“……?”
그 생각을 아무래도 행동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우장일은 이수호의 이마에 닿은 자신의 손가락을 황급히 내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생각보다 잘 안 지워지네. 어쩌지…….”
하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 이수호의 입술에도, 다시 눈이 갔다. 우장일은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라오는 느낌에 손바닥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형, 취했어요?”
“……응?”
“얼굴이 갑자기 빨개져서. 형 취하는 거 잘 못 본다고 그러던데. 하하하. 나도 좀 취했어요. 잠시만요. 이리 와 봐요.”
이수호가 우장일을 세면대로 데리고 가서 셔츠에 있는 거품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는 이수호의 손가락이 우장일의 눈을 끌었다.
“……어?”
우장일이 자신의 손가락 끝을 만지자 이수호는 입을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굳은살.”
“당연하죠. 이건 기타 치는 사람에겐 훈장인데.”
이수호가 씨익 웃으며 손을 빼려 했지만 우장일이 놓아주지 않았다.
“형, 진짜 취했어요?”
“……그러게.”
이수호가 슬그머니 손을 빼내고 우장일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이태섭의 말에 의하면 세 사람이 같이 술을 마신 게 십 년이 넘었지만 우장일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거나 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죽하면 우장일이 아니라 주(酒)장일로 개명신청을 하라는 농담을 했을까.
“오늘 무리하신 거 같은데 일찍 들어가 쉬세요.”
“그래야겠다.”
이수호는 와이셔츠에 남아 있던 비누기를 마저 없애주고 됐어요, 하고 우장일의 가슴을 두드렸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응.”
이수호는 문을 열었다가 아직도 벽에 기대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신현제를 발견하고 엑,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우장일은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열어 세수를 시작했다.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하죠.’
신현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우장일은 그걸 씻어내려는 듯 한참 동안 차가운 물로 얼굴을 닦아냈다. 하지만 온몸을 뒤덮은 열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뭐했어? 화장실 안에서 잠든 줄 알았다.”
“그냥.”
우장일이 우울한 얼굴로 자리에 앉자 이수호가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신현제가 테이블 밑에서 그런 수호의 발을 은근히 밟아주었다. 물론 바로 이수호의 보복이 들어갔고 김병두가 두 사람을 말리기 전까지 테이블 아래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너희 학교 축제에 우리보고 나와 달라고?”
“한번 와서 공연해요.”
“우리 몸값이 얼마인데.”
“얼마인데요?”
지금 지갑에서 당장 돈을 꺼내어 줄 기세로 신현제가 물었다. 김병두가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안 돼. 그때 얘네 시험기간 딱 걸릴걸. 나도 지방에 내려갈 일 있고.”
“뭐, 그럼 하는 수 없죠.”
수능시험이 끝나면 두 사람이 다니는 운영 고등학교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시험을 본 고3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와 학기를 마무리하고 새 출발을 도모한다는 이사장의 취지에 따른 결정이었다.
거기에 신현제는 이수호가 밴드 멤버들과 같이 무대에 서주길 바랐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은 없었지만, 이수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좋은 기억을 하나 안고 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사실 안 좋은 기억을 자신이 너무 많이 줬다는 죄책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수호 혼자 나가도 되잖아. 너 솔로로도 잘하니까.”
아직도 푸른 카디건이란 예명으로 이수호는 밀로드MILORD의 목요일 무대에 서고 있었다.
“맞아. 너 애들 앞에서 기타 친다는 얘기 안 했다고 했지? 그 곰 대가리 쓰고 한번 연주 빠방 해줬다가 노래 다 끝나고 무대에서 곰 머리 딱 벗어봐. 애들 막 울고불고 난리난다.”
이수호가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모르는 김병두와 이태섭이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 곰 대가리 아직 안 버렸을 거 아니야. 집에 있지?”
“집에 있기야 하죠.”
이수호에게 그 곰 머리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꿈과도 같았던 그 며칠을 일깨워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수호가 털을 잘 빗겨서 방에 모셔둔 곰 머리를 이수현이 걸핏하면 베고 누워서 두 사람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제외하고, 곰 머리는 안녕히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거 쓰고 나가보라니까. 흐흐흐흐. 완전 재미나겠다.”
“아우, 시험만 아니면 나도 가서 구경하겠는데.”
신현제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수호는 학교에서 다른 사람의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점심도 혼자 먹는 게 편하다고 아직까지 음악실 안으로 들어가 먹는 녀석이 그런 짓을 할 리가…….
“……헤헤, 그럼 한번 해볼까요?”
“뭐? 진짜 한다고?”
“진짜? 너 혼자?”
놀라서 물은 것은 우장일과 신현제였다. 이수호는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어요. 축제 무대에 서는 거. 자기 전에 늘 상상했는데. 사실, 내가 엄청 유명해진 다음에 서고 싶긴 했지만.”
이쪽 바닥에서 이수호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조금씩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바람대로 슈퍼스타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서 봐.”
처음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던 우장일이 말했다.
“할 수 있어. 너 정도면 애들 콧대를 충분히 눌러줄 수 있어.”
“당연하죠. 난 슈퍼스타가 될 거니까.”
“그럼 슈퍼스타를 위해 건배할까?”
다들 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환하게 웃는 이수호의 옆얼굴에 신현제는 잠시 머릿속을 스쳤던 걱정을 밀어냈다.
이수호가 축제 계획서에 참가 신청서를 냈을 때, 3반의 담임은 몇 번이나 거듭 물었다.
“이거 네가 한다고?”
“네.”
“진짜 네가 노래를 불러? 사람들 앞에서?”
“네.”
“수호 노래도 했었니?”
지나가던 음악 선생님도 놀랍다는 듯이 한마디 던졌다. 이수호가 타악기나 피아노를 다루는 것은 봤어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그녀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할 수 있겠……, 아니, 물론 할 수 있으니까 신청서를 작성했겠지만.”
“할 수 있어요. 선생님. 걱정 마세요.”
이수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3반의 담임은 요즘 수호의 표정이 이전보다 많이 밝아졌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호가 반에서 겉도는 학생이라는 것을 담임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 이건 내가 검토한 다음에 제출하마.”
“선생님. 그런데요, 이거 저라는 거 비밀로 해주세요.”
“왜? 어차피 축젯날 알려질 거 아니냐.”
“그냥요. 애들이 싫어할까 봐.”
“그래. 알겠다.”
축제 참가서조차 익명으로 내겠다는 수호의 말이 3반 담임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는 참가서를 학급 일지 안에 껴두고 이수호에게 그만 가 봐도 된다고 말했다.
이수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담임에게는 애들이 싫어할까 봐 익명으로 처리해달라고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다 죽었어. 으흐흐흐흐.”
곰 머리를 벗었을 때 보게 될 애들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떠올린 이수호는 어깨를 떨며 음침하게 웃어댔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한결 즐거웠다.
“진짜?”
“시발, 진짜라니까. 내가 교무실 청소하다 봤어.”
“무슨 개소리야. 그 병신이 축제에서 무슨 공연을 하겠다고.”
“늦게 신청해서 정규 무대에 아직 편성은 안 됐는데, 체육관에서 한다고 하더라. 시발, 존나 어이없지?”
신현제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졌던 유도부 녀석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존나 어이없지, 하며 연달아 물었다.
“아, 씨발 이수호 새끼. 진짜 졸업 전에 한 번 크게 엿 먹이긴 해야 하는데.”
“신현제 새끼도 그렇고.”
“둘이 요즘 친해진 거 보면 웃기지도 않아. 미친 새끼들. 혹시 이렇게 붙어먹은 거 아니야?”
한 녀석이 손바닥을 겹쳐 요상한 소리를 내며 시시덕거렸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김진철이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 안 둬.”
“오, 김진철이. 졸업 전에 한 번 더 붙게?”
“진철이 요즘 몸도 많이 좋아졌잖아. 한 방 먹여. 그 새끼들.”
“야. 너네 삼촌이 밀키 사운드 매니저라고 했지?”
김진철이 옆에 있던 녀석에게 묻는다. 밀키 사운드는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등학생으로만 구성된 걸 그룹이었다.
“응.”
“전화번호 좀 알려줘. 뭣 좀 물어보게.”
“왜?”
“알려 달라면 알려줘.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전화번호를 건네받으며 김진철은 눈을 빛냈다.
나를 그렇게 우스운 꼴로 만들어놓고 둘은 그렇게 붙어먹어?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이수호, 신현제 개새끼들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진철은 아들의 부탁이라면 껌뻑 죽는 땅 부자 졸부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건네받은 번호를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연습 잘했어?”
“당연하지. 완전 잘 됨. 눈감고도 할 수 있어.”
치켜 올린 이수호의 엄지가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신현제는 알아차렸다.
“너 긴장되지?”
“아니. 하나도 긴장 안…….”
거기까지 말하고 이수호는 뒤를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개놈들이 나에게 쓰레기 던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팰게.”
“개놈들이 나한테 욕하면?”
“내가 팰게.”
“……개놈들이 나한테 돌 던지면?”
“내가 존나, 팰게.”
존나에 힘을 주어 신현제가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이수호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중얼거렸다.
“……괜히 한다고 했나. 나 같은 게 뭘……, 그냥 살던 대로 살걸. 애들이 내 노래 듣고 구리다고 욕하면 어떻게 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위로를 하려면 끝까지 해.”
“네 노래를 듣고 구리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신현제가 그렇게 말하고 이수호를 바라보았다.
이수호는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다 헤헤 하고 작게 웃었다. 재수 없을 정도로 솔직한 신현제가 자신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할 리 없다는 사실이, 지금만큼 기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나 떨었다고 형들한테 말하면 안 돼.”
무대에 올라서기 전에 긴장을 하던 멤버들을 향해 얼마나 많은 비웃음을 날렸던가. 이수호는 지난날 자신의 시건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백 년 놀림감이다.
“말 안 해. 대신 뽀뽀 한…….”
이수호는 진지하게 입술을 내밀고 다가오는 신현제를 밀어내고 집에서 준비해온 곰 머리를 들었다.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했다. 곰 머리를 뒤집어쓰자 그날의 영광과 흥분이 다시 이수호의 몸 안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신현제가 그런 곰의 머리에 팔꿈치를 얹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곰 머리 안에 있던 이수호의 얼굴이 따끈해졌다.
“좋았어!”
기타를 어깨에 메고 이수호가 씩씩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출동이다! ……으앗.”
벽에 머리를 찧은 이수호가 뒤뚱거리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신현제는 얼른 이수호의 손을 잡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의 슈퍼스타를 위해 미래의 회장님인 자신이 오늘 하루 보디가드 노릇을 해줘야 한다고 결심했다.
체육관으로 가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온 두 사람은 사람들의 함성과 환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곰 머리를 쓰고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이수호는 신현제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뭐야? 뭐야? 사람들이 지금 나 알아보고 막 이래?”
“…….”
“내 팬카페에서 다 출동했나? 완전 멋진 내 모습에 다들 벌써 난리난……, 아이구.”
이수호는 비틀거리다 옆에 있던 학생과 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아, 시발. 뭐야. 이 또라이 곰 새끼는. 저리 비켜. 안 보이니까.”
“뭐?”
“곰 대가리 좀 치워봐. 안 보이잖아!”
“대가리 치워!”
이수호의 뒤에 있던 학생들도 사납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방에서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자 이수호가 어깨를 움츠리며 곰 머리를 벗으려 했다.
“닥쳐. 새끼들아.”
신현제가 소리 질렀다.
“키가 존만해서 안 보이는 걸 누구한테 화풀이야. 시발, 꼬우면 키 크든가. 아님 다리에 철심이라도 박아. 씹새끼들아.”
신현제의 사나운 대거리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수호는 고개를 숙이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수호.”
신현제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곰의 머리가 비틀거리며 체육관 쪽으로 향했다. 걸음걸이가 조금씩 빨라지더니 이제는 아예 뛰기 시작했다. 신현제 역시 사람들을 헤치고 이수호의 뒤를 따라 뛰었다.
이수호는 체육관 문을 열었다. 빼곡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차 있을 거라 예상한 체육관 안은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쓰고 있던 곰 머리를 벗었다.
“이수호!”
뒤따라온 신현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뭐야? 밖에 누구 온 거야?”
이수호는 사람들의 환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누가 온 건데 저렇게 좋아해?”
“…….”
“가서 볼래. 누군지.”
“볼 거 없어. 일 년도 안 지나서 어차피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힐 것들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사람들이 봐주잖아.”
이수호는 들고 있던 곰 머리를 떨어트렸다. 오늘을 위해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앵콜곡까지 잔뜩 연습해온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커질수록 이수호의 비참함도 커졌다.
그는 그대로 기타를 메고 체육관을 뛰어나갔다.
“시발.”
신현제는 의자를 걷어차고 욕을 퍼부었지만 화가 풀리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전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근 학교에서도 몰려온 학생들이 운동장에 세워진 무대를 보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쟤네 누구야.”
신현제가 얼굴이 벌게진 채 소리를 지르고 있던 일 학년 녀석을 붙들고 물었다.
“미, 밀키 사운드요.”
신현제는 마음속의 살생부에 그 이름을 새겨 넣고 이수호를 찾으러 달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음악실 옆에 딸린 준비실 안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캐비닛 안까지 뒤져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들어간 3학년 3반의 교실에서 신현제는 이수호를 찾았다.
그는 교탁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아…….”
교내를 한 바퀴 전력 질주를 한 신현제가 숨을 몰아쉬며 이수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기타의 스트링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신현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수호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노래해!”
“…….”
“노래하라고. 난 관객으로 안 칠 건가?”
땀으로 젖은 이마 위에 달라붙은 신현제의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이수호는 왈칵 목이 메었다. 저 병신 같지만 멋있는 새끼 같으니. ……심지어 지금은 그냥 멋있잖아.
“이수호 너 그거 알아? 나중에, 아니 근 십 년 안에 내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거다.”
“…….”
“너만 특별히 줄 안 서도 언제든지 부를 수 있게 해줄게.”
“……그때 되면 사람들이 내 노래 들으려고 줄 설걸.”
꿍얼거리며 이어지는 수호의 허세에 신현제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아. 그러니까 지금 피차 줄 안 설 때, 노래하고 들어주자고.”
“알았어, 그럼 뭣부터 할까.”
앵콜곡까지 혼자 다섯 곡을 준비해온 이수호는 머릿속으로 곡을 고르다가 신현제의 앞에서 처음으로 불렀던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빈 교실 안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신현제는 온 마음을 다해 집중했다. 이수호가 작곡을 한 노래가 그다음으로 이어졌다. 노래가 한 곡씩 끝날 때마다 신현제는 손이 부르틀 만큼 박수를 쳤다.
“앵콜.”
“멍청아. 앵콜하려면 멀었어.”
“아무튼 더 불러.”
“그럼, ……이건 굳이 너 들으라고 준비한 노래는 아니지만……”
말이 끝나자 이수호는 손가락으로 기타의 바디를 탕탕, 내리쳤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안녕 바다의 창밖은 평화로운 식탁이라는, 언뜻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가사가 이수호의 목소리를 빌어 흘러나왔다.
신현제는 이수호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노래를 들었다. 소리가 울리는 공기를 느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사랑이 찾아오고, 소년이 자란 만큼 마음도 자라나고. 이것이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이수호의 말이라는 사실을, 신현제는 알았다.
이수호에게 신현제는 처음으로 갖게 된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들이었다. 그를 소박하다고 표현하기에 무리가 따랐지만 그와 보내는 시간들은 이수호의 삶에 소소하고 작은 웃음이 되었다. 그것이 먹빛 인생 위에 뿌려진 자잘한 별빛 같다고, 이수호는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신현제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 학교에서 손을 잡았던 그날부터였을까. 아니면 같이 햄버거를 먹었던 그날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계단에 앉아 너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그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계절이 바뀌듯 어느새 뒤를 돌아보니 신현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이만큼이나 변해 있었다.
이수호는 신현제를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던 그 날 더럽고 낡은 모텔 방으로 자신을 찾으러 와준 너로 인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야.
이수호는 교실 뒷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을 향해 자신의 온 마음을 들려주었다.
노래가 끝났지만 신현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처럼 박수를 치거나 앵콜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 앉아 가만히 이수호를 응시할 뿐이었다.
선곡이 별로였나. 차라리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줄 걸 그랬네, 하고 이수호가 뺨을 긁적거리고 있는데 신현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교탁 앞으로 다가와 기타를 안고 있던 이수호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사인해주세요.”
“…….”
“사인해달라고.”
“……펜이 어디 있더라.”
신현제는 앞자리에 놓여있던 필통에서 검은색 펜을 집어 들어 이수호에게 건네주었다. 이날을 위해 몇백 번, 혹은 몇천 번 연습했던 사인이던가.
하지만 이수호는 다른 사람에게 사인을 해주는 것이 꿈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신현제의 커다란 손바닥에 조금은 삐뚤어진 사인을 해주고 나자 이수호는 한결 마음이 풀렸다.
“고마…….”
고맙다고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신현제가 갑자기 숨이 막힐 정도로 거세게 자신을 끌어안지 않았다면.
“시, 신현제……, 누구 들어오면…….”
“상관없어. 팬이 스타 좀 안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
목덜미에 신현제의 더운 숨결이 닿았다. 이수호는 이런 식으로 신현제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순간이 좋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간지러움, 머리카락이 부딪치며 느끼는 부드러움,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에 닿는 호흡과 조용한 공간에서 귀에 닿는 숨소리.
이 순간, 이수호는 정말 자신이 살아있구나, 하고 느꼈다.
그때 신현제가 이수호의 등을 끌어안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는 나의 슈퍼스타야.
아직은 어린 두 사람의 얼굴이 그 한마디에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부끄럽잖아. 나도 부끄러워. ……수치를 좀 알아라. ……그럼 슈퍼스타 하지 말든가. ……아냐, 난 슈퍼스타 할 거야. 그럼, 좀 가만히 있어.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교실 밖 운동장에서는 다른 스타를 향한 뜨거운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빈 교실 안에서, 이수호는 신현제에게 안겨 어느 누구를 데려와도 부럽지 않을 조용한 환호를 받았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