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건 뭐지.”
이수호가 자신의 앞에 있는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이지.’
새타니가 말한 대로였다. 이수호가 아까 열고 나온 문이었다. 하지만 그 문은 거실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만 했다. 이수호는 지금 새카만 방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야, 그 방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지 않겠느냐.’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문을 열면 방이 아닌 다른 곳과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수호는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 작은 방을 벗어나기 위한 통로는 나무로 만들어진 저 문, 하나뿐이었으니까.
잊지 말자. 지금 이곳은 모두 허상이고, 나는 시험을 받는 중이다. 절대로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수호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하얀빛의 홍수가 문틈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빵빵.
클랙슨 소리에 이수호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건너편에 있던 차 한 대가 헤드라이터를 깜빡이며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아, 씨발, 운전을 뭐 저따위로 해서.”
창문을 내리고 택시기사가 반대편 차선에 있는 차를 향해 욕을 퍼붓고 삿대질을 시작했다. 옆에 있던 신현제가 쯧, 하고 낮게 혀를 찼다.
“자다 깼지?”
“어? ……어.”
“잘 자고 있었는데. 더 자. 서울 가려면 한참 남았어.”
그가 이수호의 목덜미를 잡아끌어 자신의 어깨에 눕게 했다. 이수호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떴다.
“지금 우리 서울 가는 거야?”
“그래. 다 해결한 거 아닌가?”
“내가?”
“응. 장난 아니던데. 불빛이 번쩍번쩍하고.”
“……어, 그랬던가.”
이수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신이 어떤 주문을 썼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배고파. 빨리 가서 햄버거 먹어야지.”
하지만 신현제의 넉넉한 품에서 같이 햄버거를 먹을 생각을 하자, 기분이 풀어졌다.
“어떻게 나왔어? 그 집.”
“내가 신고했어.”
“뭐?”
“네가 소리 지르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경찰에 신고했다고.”
“……야, 고맙다.”
신현제가 우쭐거리며 웃어 보였다. 이수호는 그의 무식한 행동력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래서? 결국 네가 나를 데리고 나온 거야?”
“문이 안 열리더라고. 경찰 아저씨들이 부수고, 뭐. 그런 거지. 결과적으로는 내가 널 데리고 나왔지만.”
“여자는?”
“누구?”
“그 안에 있던 여자.”
“경찰이 데려갔어. 그 네 명의 여자 자살과 관련해서 조사한다고. 자살이긴 한데 다들 그 점집에 다녀간 뒤로 그랬으니 경찰도 뭔가 조사하고 있었나 보더라고.”
“세금이 아깝지 않은 경찰님들이네.”
이수호는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달리는 차 안이라 졸음이 쏟아졌다. 신현제가 그런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토닥이며 얼른 자, 하고 속삭였다.
가물가물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이수호는 신현제에게 물었다. 그건 어떻게 됐어? 라고.
“뭐가?”
“그 여자 몸에 있던……, 그거랑 내기를 했었는데.”
이수호는 어쨌든 자신이 그 방으로 돌아와 내기에서 이겼음을 확신했다.
“귀신하고 하는 내기는 네가 전문인가 보다. 저번에도 이기더니.”
그렇게 말하는 신현제의 목소리에서 유쾌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대고 있던 이수호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차 세우세요.”
“무슨 소리야.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무슨 차를 세워.”
신현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기사도 황당해하며 룸미러로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수호는 신현제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랑 내기를 했다고?”
“귀신.”
그렇게 말하고 신현제는 왜, 하고 되물었다. 아까부터 그가 귀신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현실성을 느꼈다. 신현제는 곧 죽어도 귀신을 외계인이라 믿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냥 잠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서울까지.”
그렇게 말하는 택시기사의 눈이 백미러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는 운전대를 돌려 반대편 차선으로 차를 돌진시켰다. 빠아아앙, 하는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빠른 속도로 그들이 탄 택시를 덮쳤다. 이수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엄청난 충격이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으악!”
책상에서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자 교실 안에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이수호. 또 너냐!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가서 서 있어.”
수학 선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수호에게 일어서 나가라고 손짓했다. 이수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에 앉아있던 신현제가 눈이 마주치자 쯧쯧, 하며 혀를 찼다.
이수호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교실 뒤로 나갔다. 곧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반장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고 수학 선생이 교실을 나갔다.
“어제 뭐 했는데 수업 시간에 그렇게 엎어져서 자냐.”
신현제의 물음에 이수호가 어, 글쎄, 하고 대답했다. 어젯밤에 뭘 하다 잤더라. 라디오를 늦게까지 들었나, 아님 기타연습을 했던가.
“유명 인사니까 바쁜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윤민철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명 인사?”
“요즘 인터넷에서 너 모르면 간첩이잖아. 곰 대가리. 푸른 카디건.”
“……응?”
“나도 너한테 투표했는데 아깝게 탑쓰리에서 떨어졌어. 문자 값 내놔. 백 원.”
이름은 모르지만 같은 반 녀석이 이수호에게 장난스럽게 손바닥을 펼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걸 보고 있던 신현제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그 녀석의 손을 세게 내리쳤다.
“죽고 싶지?”
“신현제, 넌 뻑하면…….”
“이수호. 오늘 수업 끝나면 뭐해.”
신현제가 다른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이수호에게 물었다. 이수호는 가만히 오늘 날짜를 헤아리다가 기억이 나지 않아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하고 되물었다.
“핸드폰 보면 나와 있잖아. 바보냐.”
“아, 그래. 나 핸드폰 샀지.”
이수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나 오늘 밀…….”
밀로드MILORD에 가서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해도 좋은 것일까. 이수호는 밀, 이란 발음까지만 하고 신현제의 눈치를 살폈다.
“밀로드 가? 같이 가자. 안 그래도 삼촌이 사장님한테 뭐 전해주라고 한 것도 있고.”
“그래? 그럼, 뭐.”
“야, 나도 거기 데려가 줘.”
“거기 물이 그렇게 좋다며.”
윤민철과 박성곤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현제가 정색하며 두 사람을 밀어냈다.
“니들이 가긴 어딜 가. 거기 미자 출입금지다.”
“넌 미성년자 아냐?”
“난 미래 회장님 되실 귀한 몸이고. 안 그래?”
우쭐거리며 신현제가 장난스럽게 이수호에게 물었다. 저놈의 회장님 타령은, 쯧쯧.
이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신현제가 그 뒤를 따라와 계속 끈질기게 치근거렸다.
“오늘 공연 끝나고 뭐해?”
“밴드 연습하러 가지 않을까?”
“……아, 씨. 할 수 없지.”
신현제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연습하는 데 따라가는 수밖에.”
“네가 거긴 왜 가.”
“잊었어? 너랑 나하고는 종신 계약의 갑과 을이야. 맹세코, 넌 우리 회사에서 음반을 내게 될 거야.”
“그거 법으로 어긋나. 노예계약이라고.”
이수호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신현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신현제, 이 새끼 몸이 달았구만. 얘 유명해지니까 지네 회사랑 계약하게 하려고.”
윤민철이 이수호의 건너편에 앉으며 말했다.
“어린놈이 은근 돈을 밝힌단 말이야. 신현제.”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돈이 아니면 뭣 때문에 그러는데?”
“몰라도 돼.”
거기까지 말한 신현제가 엇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너 이번 축제 때 공연하는 거지?”
“축제?”
이수호가 놀라서 물었다.
“수능 끝나고 우리 학교 축제하는 거. 너 나오냐고 벌써부터 옆 학교 애들 난리 났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은 이수호는 뿌듯함으로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공연해. 학교에서도 가수 부른다고 하지만, 솔까 요즘 니가 대세잖아.”
“그, 그런가. 헤헤헤.”
대세라는 한마디에 이수호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교 축제에서 공연이라니. 잠자기 전 매일매일 생각하던 아름다운 상상 중 하나가 드디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 팬 카페도 몇 개나 있다며.”
“헤헤헤헤.”
“내 사촌이 네 사인 받아다 달라고 하던데.”
“해줄게. 사인이야, 뭐.”
이날을 위해 이수호는 중학교 때부터 사인연습을 해온 몸이었다. 그는 연습장에 사인을 휘갈겨서 윤민철에게 건네주었다. 그 모습을 신현제가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수호.”
“응?”
“잠깐 나 좀 봐.”
그렇게 말하고 신현제는 혼자 휙 일어나 교실을 나가버렸다.
“쟤. 왜 저러지?”
“지보다 니가 잘 나가니까 질투 나서 저러지.”
그 말마저 이수호의 기분을 붕붕 뜨게 해주었다. 그는 연신 헤헤거리고 웃으며 교실을 나갔다. 복도 끝에 신현제가 팔짱을 끼고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무슨 일이야?”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던 신현제가 다짜고짜 이수호의 손을 붙들고 과학실로 끌고 갔다. 과학실 문이 닫히고 그는 이수호의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를 시작했다.
“읍―!”
처음에는 누가 볼까 두려워 신현제를 밀어내던 이수호도 어느새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이 자식, 점점 키스가 느는 거 같아…….
“너 왜 자꾸 유명해져.”
신현제가 따져 물었다.
“원래 난 유명해질 팔자였어. 그거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불안하잖아.”
신현제가 한숨을 내쉬듯 읊조리며 이수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커다란 덩치가 자신에게 기대며 약한 모습을 보이자 이수호는 안타까우면서도 알 수 없는 흐뭇함을 느꼈다.
좋았어! 잘난 신현제와 사귀어도 내가 꿀리지 않는, 그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생각난다. ……노인정 유행어가.”
이수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노인정 유행어?”
신현제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그래야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고. 그렇지?”
“하하하. 어느 노인정 유행어야? 누가 그랬어?”
“…….”
“하하하하. 왜?”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는 신현제를 제게 떼어내고 이수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신현제가 왜, 하고 다시 그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넉넉하고 기분 좋은 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가 아닌 것이겠지.
“놔.”
“왜? 화났어? 내가 질투해서 화났냐?”
“……놓으라고.”
“왜 그래. 이수호.”
이수호가 신현제를 힘껏 밀어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에게 이수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갖고 노는 게 취미인가 보군.”
“왜? 재미있잖아.”
신현제의 입에서 성대가 갈라진 듯한 새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수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앞에 펼쳐진 거짓 환영을 거두는 주문을 외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수호는 그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래와 과거, 현실 속을 넘나들며 이수호는 자신이 바라던 모든 것을 겪을 수 있었다. 그렇게 원하던 아버지와 친구들, 성공과 꿈을 손에 넣었지만 이수호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도 자신이 속해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었다.
‘지쳤나? 벌써 지친 건가.’
‘대체 뭐하자는 거야!’
‘그 방으로 찾아오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리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이수호가 돌아오게 되는 곳은 이 작고 더러운, 한줄기 빛도 없는 검은 방이었다.
대체 몇 번이나 저 문을 나가서 이곳으로 돌아왔던가.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일지도 모른다. 숫자를 세는 것을 마흔여덟의 어떤 여름날에서 그만두었으니까. 언제까지 이것이 계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영원히 무한정 반복되는 환영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수호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는 벽을 잡고 속에 있던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웩. 우엑…….”
먹은 것도 없는데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것이 역류했다. 한참을 켁켁거리고 있는 그의 귀에 달콤한 속삭임이 닿는다.
‘저기 출구가 보이지?’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호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사 온 아버지와 그걸 보며 좋아하는 어린 누나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이수호는 가슴이 콱, 막혔다. 눈이 마주치자 누나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수호에게 이곳으로 건너오라고 손짓했다.
‘저기에서 끝이 날지도 모르잖아. 어디가 출구일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야. 자, 어서 가렴. 인간의 아이야.’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이수호는 힘없이 일어나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문밖으로 발을 내딛자 그의 온몸을 다정한 온기가 감쌌다. 마치 태어나기 전의 엄마의 양수에 들어간 듯, 행복해진다.
그는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려는 아버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 따뜻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행복한 저녁시간에 참여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복한 과거가 다시 시작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때렸다. 이수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가 기겁했다.
“――!”
하마터면 건물 아래로 바로 떨어져 내릴 뻔했다. 그는 난간에 주저앉아 조심조심 턱을 넘어 옥상 바닥으로 발을 옮겼다. 분명히 가족들과 둘러앉아 케이크 위에 붙인 촛불을 불며 소원을 빌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누구세요?”
이수호가 고개를 돌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낯익은 얼굴이다. 어디선가 봤는데……, 아.
이수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그녀의 특이한 이름을 떠올렸다.
“하이안!”
“저를 아세요?”
“네. 그 바비걸즈 멤버……, 인데.”
분명히 그녀는 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을 해서 사지가 부러진 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사인해드릴까요?”
난간에 앉아 하늘하늘한 다리를 흔들며 그녀가 싱긋 웃어 보였다. 이수호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금방이라도 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저 팬인데……, 사인 좀 해주세요.”
이수호는 일부러 그녀의 주의를 끌려고 사인요청을 했다.
“종이랑 펜 있어요?”
“아, ……아니요.”
주머니를 만져보았지만 종이와 펜이 들어있을 리……, 있다.
이수호는 주머니에 있던 종이와 펜을 가지고 그녀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곁에서 보니 훨씬 더 마르고 작은 체구라 바람만 불어도 옥상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종이에 사인을 슥슥 해주던 하이안이 이수호에게 물었다.
“어떤 노래가 좋았어요?”
“네?”
“우리 앨범 중에 어떤 노래가 좋았냐고요.”
“……아.”
인간 주크박스라고 칭해질 만큼 많은 노래를 알고 있지만 유일하게 그가 취약한 장르가 아이돌 노래였다. 이수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는 것을 보고 하이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요. 다들 노래는 기억 못하니까.”
“죄송합니다.”
“우리 노래를 들으려고 무대를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냥 잘 빠진 다리를 흔들면서 예쁘게 춤만 추는 모습만 보면 되지. 안 그래요?”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그렇게 물었다. 이수호는 어떤 대답도 찾지 못하고 그저 그녀가 내민 사인 종이를 받아들었다.
“제 생명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네? 그게 무, 무슨 소리예요.”
“가수로서의 생명이요. 데뷔했을 때는 우리 그룹이 제일 어렸는데, 벌써 방송국에는 우리보다 어린 애들로 득시글해요.”
“……인기랑 나이는 그렇게 크게 비례하지 않아요.”
“그건 가수 얘기죠. 우리 같은 아이돌은 나이가 들면 그냥 끝이에요.”
“…….”
“오늘도 그런 악플을 봤어요. 인형도 늙는구나, 라고. 그냥……, 피곤했을 뿐인데. 그런 날도 있잖아요. 유난히 못생겨 보이는 날.”
“당연하죠.”
이수호는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항상 젊었으면 좋겠어요. 나이 드는 게 무서워.”
“아직 어리잖아요! 창창해요! 진짜, 진짜로!”
“지금은 그렇죠.”
그녀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맺혔다.
“평생 젊게 살 수 있다면, 그쪽은 그렇게 하시겠어요?”
“네?”
“평생을 이 젊음을 유지하며 산다고 하면,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어요?”
“……그건, ……글쎄요. 생각해 봐야겠는데.”
이수호는 자신의 나이가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니었다. 십대만이 누릴 수 있는 풋풋한 감성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보다 나이가 들어 조금 더 안정적인 시간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난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뭐든 줄 수 있을 것 같아.”
“…….”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한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는 여자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몰라 이수호는 쩔쩔매며 어색하게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괴물이 된 거 같아요.”
“괴물이라니요. 이렇게나 예쁜데.”
그 한마디에 울고 있던 여자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이수호는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 난간에서 내려오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내려오세요. 내려와서 얘기해요.”
“싫어요.”
“거기 그러고 있으면 위험해요.”
“싫단 말이에요.”
억지로라도 끌어내려야 했다. 이수호가 손을 뻗자, 하이안이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동시에 그녀의 배 부근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이수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게 뭐예요?”
하이안은 두 손으로 황급히 자신의 배를 눌렀다. 하지만 옷 안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거기 뭔가 있어요? 그 안에 뭐가 있는 거예요?”
“건드리지 마! 나도,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단 말이야. 그냥 그 알약을 먹으면 된다고만 했는데……. 그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제가 도와드릴게요. 도와드릴 테니까…….”
순간 옷 위를 뚫고 나온 시커먼 형체에 이수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팔이었다. 사람의 팔. 죽은 지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어 비틀어진, 어린아이의 팔.
하이안의 뱃속은 훤히 드러났다. 그 팔은 또 다른 생명체인 것처럼 그녀의 뱃속에서부터 자라나 뱀처럼 꿈틀거렸다.
“……내가 무서워요?”
“아니, ……도와줄게요.”
“소름 끼치죠? 나도 그래. 당연하지. 이런 게 뱃속에서부터 자라는데, 누가……. 나는 그냥……, 그냥 영원히 예쁘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가 흐느끼며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졌다. 속옷 사이로 뽀얀 젖가슴이 드러나고 배에 너덜거리며 달려있는 팔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오려는 미숙아의 필사적인 몸짓과도 같았다.
“이젠 끝이야.”
“아니라구요. 제발, 제발 내 말 좀 믿어줘요.”
“어쩔 수 없어요.”
하이안이 난간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수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안 돼요. 그러지 말아요. 그건 실제가 아니에요. 다 환상이라고요.”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새타니가 만든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는 하이안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러지 마요. 네? 내려와요.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그걸 없애 줄 테니까, 네?”
필사적으로 그녀의 옆에 있는 난간에 매달려 소리쳤다. 하이안이 그런 이수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참 다정하네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난간 앞으로 한걸음 걸어갔다. 건물 아래에서 불어보는 바람 때문에 어깨까지 닿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실크스카프처럼 흩날렸다. 그 모습을 이수호는 무심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붉은 맨드라미처럼.
그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사납게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 밤의 하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밝다. 수분을 머금은 무거운 구름이 빛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두통을 앓고 있는 고래의 눈동자 색처럼 탁한 빛이 하늘을 뒤덮었다. 이수호의 머리가 아까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날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줘서.”
그렇게 말하던 하이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목구멍을 가득 채우는 그 우울한 습기가 어둠 속에 납죽 엎드려 똬리를 틀기 시작했을 무렵, 뱃가죽을 뚫고 지나갈 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배에서 튀어나온 손이 여자의 내장을 쥐어짜듯 비틀었다. 탯줄을 끊어내는 것처럼 그것은 그렇게 여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끼어아아아어어어억――!”
사람의 비명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음울했고, 동물의 소리라 하기엔 월등히 이성적인 비명이었다.
이수호는 안 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난간에서 손을 뻗었다.
소리의 끝이 미처 공기에 닿아 사라지기 전에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하이안의 몸이 저 아래로 사라졌다.
길고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 속에서, 이수호는 비탄에 젖어 울부짖었다. 안 돼,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건 꿈이잖아.’
목소리가 속삭인다.
“꿈이라도, ……이런 건 싫어.”
‘그럼 어떤 꿈을 원하느냐. 좀 더 달콤한 거? 네가 성공해서 사람들 위에 서서 노래를 하는 그런 장면?’
이수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그 작고 더러운 방에 와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온방의 벽에 자신이 아는 모든 주문을 써넣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호신과 수호목을 그려 넣었다. 시멘트 바닥에 갈린 손가락 끝이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는 그 방에 부적을 그려 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런, 저런. 아직도 모르겠느냐.’
“닥쳐! 내가 너를 없애버릴 거야.”
이수호는 손으로 인장을 맺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나무, 나의 명을 받들어, 나의 수호신이여, 모든 것이 질서를 되찾을지니. 나는 지금 결의 주문을 그리고 모든 곳에서 나의 부름이 날아들지어다.”
눈을 뜨고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렸던 주문이 모조리 사라져 있는 믿고 싶지 않은 광경과 마주해야 했다.
‘아이야, 잠시 잠을 자더니 꿈을 꾼 모양이구나.’
“……이럴 리 없어.”
이수호는 다시 반대편 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입술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벽에 다시 소멸의 주문을 써넣었다. 이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조차 사용을 꺼려하는 주문이었다.
‘나를 없애려고?’
“그래.”
‘너도 같이 없어질 수도 있을 텐데.’
“상관없어.”
저것을 없애기만 한다면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이 사라진다 해도, 저것을 없애기만 한다면!
‘큭큭큭, 크흐흐흐, 흣. 남매가 어쩜 그리 닮았을까.’
“뭐라고?”
‘어디 한번 해보거라. 너희 누나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시도했던 주문이 바로 그것이니.’
“닥쳐. 어디서 수작이야.”
이수호는 소멸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귓가에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짤랑짤랑 울렸다.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고 그 주문을 사용하는 거지?’
“마음의 칼을 합하여 내 있으니, 마음의 주인이여 나의 소망을 가려내 주실지어다. 심주선원(心主選願) 도유심합(刀有心合).”
검지를 위로 올리고 엄지와 약지로 원을 만든 다음 그 옆으로 칼을 뜻하는 인장을 그려 통과시켰다. 그것으로 손가락 끝이 겨누는 힘에 칼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서리게 된다. 그 검에 검기를 실어야 했다.
이수호는 이마의 끝에 검 끝이 겨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필요 없어.”
‘저 여자를 살린다면, 내가 있는 방을 알려주마.’
문이 열렸다. 난간 끝에 여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문밖으로 달려나갈 뻔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이수호.
저것은 새타니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 마음을 비우자.
‘죽게 놔둘 것이냐?’
여자가 입은 검은색 원피스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옷과 대조되는 새하얀 다리 사이로 붉은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배에서는 아까와 같은 시커멓게 죽어 말라비틀어진 아이의 팔이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하이안이 죽기 직전과 같은 장면이었다. 틀린 점이 있다면 하이안의 몸에서 있던 팔보다 이쪽이 조금 더 크고 두껍다는 부분이었다. 마치 팔이 몸에서 자라난 것처럼.
여자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고 비명을 질렀다. 쏟아져 내리는 선혈처럼 섬뜩하고 강렬한 비명이 이수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선택은 너의 몫이다.’
다시 문이 열렸다. 이수호는 달렸다. 여자가 떨어지려는 베란다의 난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간신히 떨어지려는 여자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살려줄게요.”
여자에게 외쳤다. 808호에 산다는,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진 그 여자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이수호를 올려다보았다. 난간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이수호는 필사적으로 버티었다.
“반대편 손을 올려요.”
“……못해요.”
“할 수 있어요! 손을 올려 봐요!”
“……못해요, 나……, 못 한다구요.”
여자가 흐느꼈다. 그녀의 반대편 손에는 아까 보았던 시커먼 손이 꿈틀거리며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그것은 위를 향해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이수호는 그것에 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저 손을 뿌리쳐요.”
“못해요! 안 된다고요, 저게 닿으면 내 몸이 내 몸처럼 움직일 수 없단 말이에요!”
이수호는 옥상에서 만났던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여자는 혼자 옥상으로 올라왔지만 제 발로 온 것이 아니었다고.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있던 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힘내요, 내가 끌어줄게요.”
“흐윽……, ……못 하……꺄아악!”
손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수호의 몸도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그리고 검은빛을 띤 그것이 해가 진 하늘의 어둠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형체만 남은 손톱이 여자의 살갗을 긁어내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수호의 얼굴에도 여자의 피가 튀었다. 여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피 때문에 손이 조금씩 더 미끄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힘내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이었다. 이수호는 그녀를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위로 기어 올라오던 팔이 이수호의 얼굴에서 떨어진 땀을 맞고 잠시 멈추었다. 손이 웃는다. 이수호는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 끝이 부르르 경련을 하듯 떨더니 맹렬하게 이수호를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것에 닿으면 먹혀버리고 만다.
근거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귀(鬼)에 대한 이수호의 예민한 감각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잡아줘요.”
여자가 울면서 간청했다. 이것은 환영이다. 그 썩은 시체가 만들어낸 거짓된 모습이다.
“절대로……놓지 말아요.”
새타니의 팔이 지나간 자리에 끈적한 체액이 얼룩을 만들었다. 여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이수호에게 매달렸다.
“놓으면 안 돼……, 제발…….”
이것은 새타니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환영이다. 이 여자는 이미 죽었고, 지금 자신이 살려낸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향해 기어오고 있는 저 손가락만큼은, 진실이다. 저것에 닿으면 자신의 정신은 누나처럼 먹혀버리고 말 것이다.
이수호는 갈등했다. 귓가에서 새타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때. 네가 살아남으려면 여자를 죽여야지. 안 그래?’
“닥쳐.”
‘저 손이 진짜라는 것은 알잖아. 그러지 말고, 여자의 손을 놓고 다음번에 다른 기회를 줄게. 응?’
달콤하고 간악한 합리화였다. 이수호는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이수호는 여자를 향해 외쳤다.
“절대로 손을 놓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손을 꽉 잡은 채, 이수호는 여자와 함께 옥상 아래로 몸을 날렸다. 여자의 비명이 점차 멀어져갔다.
떨어지면서 그는 생각했다. 아, 한 번쯤은 하늘을 날고 싶었는데, 이렇게 한 번 날아보는구나.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이수호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게다가 몸이 물을 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다쳤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그는 한참을 가만히 누워있어야만 했다.
어디선가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조금씩 명확해졌다.
“이번에는 확실하겠지?”
“당연합죠. 당연합죠.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저번의 아이는 쓸모가 없었다고. 그대로 썩어 독이 터져버렸으니까.”
“이번만큼은 확실합니다. 지 어미가 직접 데려와서 저주받은 아이니 쌀 석 되만 받겠다고 말하고는 냉큼 내뺐는걸요.”
이수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아이를 쌀 석 되와 바꿨다고?
“입단속은 철저하게 해두도록 해.”
“당연합죠. 그 어미라는 사람도 이미 고개를 넘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여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저와 어르신밖에 없습니다.”
“좋아. 여기 있다.”
짤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수호는 저것이 아이를 데려온 대가라는 것을 짐작했다. 남자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어르신이라고 불린 사람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은밀하게 뭔가를 지시했다. 정확한 말은 들을 수 없었지만 마지막의 한마디로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없애버려.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지? 이수호는 고개를 들어 확인하려 했지만 여전히 몸은 무엇엔가 묶인 것처럼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간간히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배고파요, 꺼내주세요, 무서워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제발, 꺼내주세요.
이수호는 어린아이가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텅텅, 힘없고 나약한 손이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다. 텅텅텅, 텅텅.
아, 항아리. 흙으로 빚은 항아리를 손으로 두드리면 저런 소리가 난다. 누나와 함께 어릴 적에 시골에 놀러가 항아리를 두드리며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그 소리는 반복되었다. 그렇다면 아이는 지금 항아리 안에 갇혀있다는 얘기인가? 이수호는 몸을 움직여보려고 애를 썼다. 저 아이를 어째서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거지?
조금 후에 어르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들어와 다정하게 묻는다.
“좀 괜찮으냐? 견딜 만하냐.”
“……목이 말라요.”
“알겠다. 내 물을 줄 테니, 잘 받아 마시도록 하여라.”
무거운 뚜껑을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스르륵, 그리고 아주 약간의 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간청했다.
꺼내주세요,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할게요, 제발.
하지만 간신히 열렸던 항아리의 뚜껑은 다시 닫히고 만다.
어르신이 묻는다.
“목은 좀 축였는가?”
“……꺼내주세요. 소금이 몸을 파고들어 아파요.”
“네가 여기에 얼마나 있었더냐.”
“몰라요. 제발, 제발. 집에 가고 싶어요.”
“네 어미가 너를 팔았다. 쌀 석 되에. 고로 넌 돌아갈 곳이 없다.”
“시키는 대로……. 할게요, 우리 엄마한테 도로 쌀을 받으세요!”
어르신의 목소리에 희미한 기쁨이 묻어난다. 그리고 말한다.
“원망하려무나.”
“……제발.”
“원망이 사무칠수록, 너는 강한 주물(呪物)이 되는 게야.”
“어르신……, 어르신, 제발!”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항아리 안에서 아이가 까무러칠 듯 울며 어르신을 찾는다. 끼이이익, 나무로 만들어진 육중한 문이 닫혔다.
이수호는 지금 이것이 새타니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아닌 새타니의 기억 속에 와 있다는 사실 또한.
어르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은 능력이 있는 아이를 어미에게 사와 커다란 항아리에 소금을 채우고 아이를 가뒀다. 그리고 최대한 원한이 깊어지도록 아이를 죽지 않게 아주 미량의 물과 음식을 주며 천천히 죽여 가는 중이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까짓 주물이 뭐라고, 힘을 가져서 대체 뭘 하겠다고!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어떻게든 일어나 그 아이에게 가고 싶은데 이수호는 의식이 점차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그 아이를 구해줘야 하는데……, 잠들면 안 되는데…….
새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새의 숨통을 누군가 목으로 졸랐을 때 나는 가냘픈 소리가 이어졌다. 이수호는 그것이 아까 그 아이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한참이 지나고서 알아차렸다. 아이는 이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우는 것도 힘에 겨운지 끄어, 끄흐, 하며 바람이 빠지는 소리만 겨우 낼 뿐이었다. 그러다 흐으억, 하는 제법 인간의 목소리다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아이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온몸의 힘을 모아 지른 비명이라는 사실을 느낀 이수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다 됐는가?”
만찬을 기다리는 뚱뚱한 미식가처럼 들뜬 목소리로 어르신이 묻는다
“네, 다 되었습니다. 어르신.”
“그럼 열어보도록 하여라.”
뚜껑이 옆으로 밀려나자 썩은 생선을 소금에 절인 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떻습니까.”
“상태가 매우 좋군요.”
“이렇게까지 오래 살아있다니. 정말 독한 생명력입니다. 이 아이는 최고의 주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혼백이 빠져나가기 전에 얼른 완성시킵시다.”
서로 다른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수호는 저것이 다섯 개의 새타니 시체를 나눠 가질 무당들임을 확신했다. 썩은 내가 점점 심해졌다. 항아리에서 아이의 시체를 꺼낸 모양이었다. 네 명의 무당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명은 고기를 토막 낼 때 사용하는 커다란 칼로 아이를 정확하게 5등분 했다. 퍽, 퍽, 하고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이수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새카맣게 말라비틀어진 아이의 시체가 자신을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수호는 토악질이 올라왔다. 할 수만 있다면 저기에서 기뻐하는 얼굴로 아이의 시체를 나눠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저런 것들이 인간이라니. 저런 것들이 태천무 가의 피를 이어받은 일족이라니. 저런 것들이! 저런 사람들이! 내가 저런 사람들과 피를 나눈 인간이라니…….
‘어떤가. 너를 위해 내가 일부러 오래된 기억을 뒤져 보여준 네 역겨운 일족들의 모습이.’
“…….”
‘너희 일족들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감상은 어떠한가?’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너도 그 피를 갖고 있잖느냐.’
“난 아니라고!”
이수호는 와락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그 더럽고 작은 방이었다. 그는 자신이 절대로, 이곳을 나갈 수 없음을, 그 순간 깨달았다.
‘네 몸을 빌어, 나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하지 마.”
이수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그는 목을 손으로 움켜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물이 있다.’
문 앞에 생수통이 놓여있었다. 눈을 빛내며 그곳으로 달려가려던 이수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아까 전에 보았던 새타니를 만드는 과정과 똑같았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도록 하여라. 그래야 네 목숨이 보전되지 않겠더냐.’
“누가 네 뜻대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억지로 입을 벌려 그 뱃속 가득 소금을 채워버린 느낌이었다. 강렬한 갈증에 그는 구역질까지 올라왔다.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 토기를 참아내며 이수호는 마음속으로 소멸의 주문을 떠올렸다.
‘소용없는 짓을. 흐흐흐흐.’
상대는 새우니가 된 새타니였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소멸의 주문을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 쏟아붓는다는 느낌으로 힘을 집중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정확히 알아내야만 했다.
이수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어디에, 어떤 순간에 그가 숨어있는 것일까.
‘소용없어. 그냥 물을 마시고 편안해지렴, 인간의 아이야.’
“내……, 이름은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고!”
이수호는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이 방에서 나가야 한다. 몇 번이고 몇천 번이고 환영을 거친다 해도 이놈을 찾아내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바닥이 일렁이며 방안이 흔들렸다.
“……?”
자신이 문고리를 잡아서 그런 것인가. 이수호는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신현제였다. 신현제가 한 손을 커다란 어항에 넣고 휘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저놈은…….
갑자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가 열렸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그곳의 신현제는 장미꽃 한 다발을 사서 멋지게 슈트를 차려입고 자신의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른스럽게 변한 그의 옆모습에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눈길이 흘렀다. 눈이 마주치자 신현제가 환하게 웃으며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어, 잠깐…….”
문을 열고 그곳으로 가려던 이수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저건 신현제가 아니야. 내가 아는 신현제는 분명 저것보다 좀 덜 잘생기고, 덜 어른스럽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기이함에, ……그래, 아까 어항을 휘젓고 있는 그런 병신 같은 모습이 바로 신현제였다.
이수호는 문을 닫았다 열었다. 바깥의 풍경이 또다시 바뀌어있었다. 이번에는 푸른 곰의 머리를 뒤집어쓰고 있던 오디션 현장이었다. 밴드 멤버들 사이에 누나도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라는 바였지만, 현실일 리 없는 모습.
문을 닫는 손이 아쉬움으로 떨렸지만 이수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바깥의 풍경이 달라졌다. 대체 이 문은 몇 개의 통로와 이어지는 것일까. 그의 머릿속에 입구는 하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상상하기 힘들 만큼 길이 많아지는 개미지옥의 단면이 떠올랐다.
한 번만, 딱 한 번이면 된다. 아까 어항을 휘젓던 병신 같은 신현제의 모습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간절한 바람을 손끝에 담아 이수호는 문을 활짝 열었다.
“――!”
신현제다. 미친 고양이처럼 어항에 손을 집어넣어 휘젓고 있던 신현제였다. 이제는 아예 어항에 어깨를 처넣은 채,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얇은 벽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이수호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신현제!”
이수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는 어항의 물고기를 잡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신현제! 이 병신아!”
눈만 병신인 줄 알았더니 귀까지 병신이냐!
이수호는 그에 대한 온갖 원망과 설움, 반가움을 담아 온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신현제!”
그 순간, 그는 뭔가를 느꼈는지 물고기를 잡던 것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나……!”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칠 사이도 없이 문이 쾅, 하고 닫히고 말았다. 이수호는 다시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보았지만 이번엔 아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어! 이거 열라고!”
‘건방진 인간 같으니.’
“열란 말이야! 신현제! 나 여기 있어! 신현제!”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악을 쓰고 문에 매달렸다. 이곳을 나가야 했다. 이 끝나지 않는 꿈에서 깨서, 신현제에게 달려가, 저 병신 같은 놈의 손을 잡고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너는 절대로 나갈 수 없다. 네 몸은 우리를 위해 사용될 것이다.’
“문을 열어! 약속이 다르잖아!”
‘약속? 어떤 약속?’
“내가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면 누나를 돌려준다고 했잖아! 이 멍청한 썩은 귀신아!”
이수호의 외침에 새타니가 흐흐흐 웃었다. 구정물이 가득한 바닥에 구더기가 들끓는 악취가 흘러나왔다.
‘돌아오도록 하여라. 네 힘으로.’
“문을 열어줘야 할 거 아니야!”
‘네 힘으로 열면 되지 않겠…….’
짧은 순간에 이수호는 새타니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방이 흔들렸다. 뭔가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주문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호는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주술로써 상대를 묶어 버리는, 주박(呪縛)의 말이었다.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온몸에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수호는 비명을 내지르며 숨을 헐떡였다.
“으악―! 흐…….”
다시 방이 흔들렸다. 누군가 커다란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두드려대는 것 같은 두통을 느꼈다. 이수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게 벌어진 문틈 사이로 미쳐서 날뛰고 있는 신현제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 맞아, 바로 저거야. ……저것이 내가 아는 미친 신현제의 옳은 예지.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이수호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눈가를 찌푸렸다. 매캐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찔렀다. 그의 속을 울렁이게 만들던 새타니의 썩은 내와는 다른 냄새였다. 이건 뭐지, ……뭘 또 태우나. 눈이 시큰하고 매워서 눈을 뜰 수가 없잖아…….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사이로 신현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이수호!
철썩, 하고 뺨을 얻어맞은 충격에 이수호는 와락 분노가 치솟았다. 안 때린다더니 이 개놈이 또 나를 때려…….
분노가 머릿속에 차오르자 몸을 메우고 있던 미칠 것 같은 갈증이 가시고 날카로운 귀감(鬼感)이 그의 몸을 깨웠다. 피가, 혈관을 타고 흘러 세포의 감각을 하나하나 일깨웠다. 그리고 그 순간 겹겹이 쌓여있던 꿈속에 숨어있던 새타니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거기구나…….”
이수호는 몸을 일으켰다.
“……마음의 칼을 합하여…… 내 여기 있으니, 마음의…… 주인이여 나의 소망을 가려내 주실지어다. 심주선원(心主選願) 도유심합(刀有心合).”
칼끝이 겨누어진다.
“전쟁의 신이여 바람을 일으켜서, 빠르고 빠르게 그대를 섬멸해 전율케 할지어다! 전제풍행(戰帝風行) 급급여율렵섬(急急汝慄獵殲)”
검을 뜻하는 인장과 바람, 그 위에 번개를 더하고, 존재의 소멸을 얹었다. 잘 외우지 못해 더듬거리며 따라 하던 그 주문을 이수호는 마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호흡을 모으고 손가락 끝에 날카롭게 벼린 기를 새타니를 향해 겨눴다. 아까 새타니의 흔적을 찾았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림자가 밟힌 귀신은 상대 술사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찾았군.’
주문의 마지막 단계인 발(發)을 남겨두고 있었다. 끝까지 정신을 흩트리면 안 된다. 이수호는 자신이 밟고 있는 새타니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제법이구나, 인간의 아이…….’
죽이기만 하면 된다. 주문을 새타니에게 발(發)하면 모든 게 끝이다. 새타니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가만히 주문의 끝을 기다렸다.
이수호의 머릿속에 꺼내달라고 울며 항아리를 치던, 작고 힘없는 손바닥이 떠올랐다. 탕탕탕, 탕탕탕탕……. 꺼내주세요, 제발……, 탕탕탕, 탕탕탕탕.
‘뭘 기다리느냐. 인간의 아이, 끝내거라.’
지금 자신을 인간의 아이라고 부르는 이것도 언젠가는 인간으로 존재했던 생명이다. 그 생명을 앗아간 것은 인간이다. 아니, 인간의 탈을 쓴 귀신이었다.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귀신인지, 어느 누가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귀신의 마음을 가진 자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수호는 주문을 발(發)하고 결(結)을 맺었다. 마음속에 겨누어진 예리한 검이 정확히 어둠을 갈랐다.
방안이 뒤흔들리고 그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밝아지고 주변의 모습이 점점 명확해졌다. 매캐하게 타던 냄새가 진해졌다. 빛을 찾고, 냄새를 되찾고, 그다음은 소리였다.
“……호! 이수호!……이수호! 정신 차려!”
“…혀…제……, …신…….”
“시발, 정신이 들어? 움직일 수 있겠어?”
신현제의 등 뒤로 새빨간 불길이 치솟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
“지금 그게 중요해? 일어나 봐! 너 일어나보라고!”
신현제가 이수호의 어깨에 손을 넣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주문에 너무 많은 힘을 한번에 쏟아 넣어 이수호는 걷기는커녕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안 되겠다.”
신현제가 이수호의 몸을 아예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들쳐 멨다. 짐짝처럼 취급된다는 생각에 이수호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혀로 걸어갈래, 하고 중얼거렸다가 호되게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가만히 있어! 걷기는 뭘 걷는다고!”
“……또…….”
안 때린다더니 또 때렸다.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수호는 자신이 그제야 질질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길이 치솟아 온 방에 가득 찬 매운 연기 때문에 생리적인 눈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이유가…….
정신은 새타니가 만든 작은 방에 갇혀있었지만 신체는 이곳에서 그대로였으니 눈물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귀감이 순식간에 치솟은 것이다.
불길이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온 집안을 집어삼켰다. 단순히 불이 붙어 타오르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발화를 돕는 촉매제가 없이는 불가능한 불길이었다.
“너……뭐……,……어.”
신현제의 어깨 위에서 흔들리며 멀미를 느끼는 와중에 이수호가 물었다.
“뭘……, 씨발.”
신현제가 앞으로 쏟아지는 제단을 발로 걷어차며 성질을 냈다. 신당을 차린 방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뭘 어떠…케…불이…….”
“그래! 내가 질렀어! 내가 불 질렀다고! 방화범하고는 연애할 마음이 안 드냐!”
“…….”
아아, 이 와중에도 너는 연애할 마음을 찾는 거냐.
“닥치고 좀 가만히 있어, 시발……, 너무 질렀잖아.”
신현제가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퇴로를 확보하고 불을 질렀어야 했는데 초보 방화범인 신현제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계산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수호를 들쳐 메고 불길이 약한 곳을 골라 걸음을 내디뎠다. 고무와 플라스틱을 태우면 발생하는 유독가스와 연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신현제는 이수호를 어깨에 메고 바닥에 엎드려 기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젠장, 쿨럭…….”
신현제는 소매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출구를 찾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저기….”
이수호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손가락으로 출구의 방향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에 연기가 문틈 사이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신현제는 그 문으로 가지 않았다. 신현제는 이수호를 일단 내려놓고 의자를 집어 들어 창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수호는 드디어 얘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머리가 돌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숨이 막혀왔다. 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산소가 폐로 공급되지 않았다. 힉힉, 하고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목에서 새어나왔다.
창문이 부서지자 신현제는 발로 유리를 깔끔하게 없애 이수호를 그 위에 밀어 넣었다. 이수호의 몸이 빠듯하게 창문 틈에 끼었다.
“……뭐…….”
뭐 하는 짓이냐는 질문을 하려 했던 것뿐이었다. 신현제는 그런 말을 들어줄 용의가 없었는지 이수호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밖으로 밀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이수호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유독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서 신선한 공기를 마셔도 숨통이 트이지 않았다. 한참을 헐떡이던 그는 구역질을 시작했다.
“으웩――.”
바닥을 잡고 토악질을 하면서도 이수호는 자신이 나온 창문을 계속 응시했다. 신현제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 신현…….”
안에서 쾅, 하고 폭발음이 들렸다. 그 충격에 이수호의 몸이 날아가 화단에 부딪혔다. 등에 계단 모서리가 찍혀 비명도 나오지 못할 만큼 아팠지만, 이수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현제!”
그는 신현제의 이름을 불렀다. 화마가 집어삼킨 집 안에서 아직 신현제가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신현제! 신현제! 신현제―!”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이수호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는 한 발짝도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이수호는 바닥을 기었다. 팔꿈치가 찢어지고 얼굴에서 피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신현제를 저 안에서 데리고 나와야 했다. 이수호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어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손톱에서 피가 철철 흘러도 아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저 불길에 갇힌 신현제를 반드시 살려내야만 했다. 그 지옥 같은 꿈속에서 자신에게 유일한 현실이 되어준 신현제를……, 자신을 현실에 있게 한 신현제를, 반드시…….
“안 돼! 불을……, 누가 좀!”
이수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불길을 향해 던졌다. 어떻게든 불길을 잡아 신현제를 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잔디를 쥐어뜯고 돌을 던졌다. 병신 같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뭐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악몽 같은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네 생각에는 뭐가 제일 일찍 올 거 같냐.”
“……!”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 셋 중 뭐가 제일 빠르려나.”
한쪽에 기타를 멘 신현제가 정말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나 가질 법한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세 개만 연락하면 되는 거지? 네 말대로.”
“…….”
“더 불러? 기자라도 부를까? 방송국에 연락해줘?”
신현제가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 이수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어떻게, 라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뒤에 있는 창문, 나는 몸이 커서 네가 나온 창문에는 끼더라고. 문을 갑자기 열면 산소가 공급돼서 폭발위험이 있거든. 미드에서 봤지. 이럴 때는 창문이 가장 안전해. 그런데 나오면서 가스 밸브를 건드려서 뒈질 뻔했네.”
“…….”
뒈질 것 같은 건 자신이었다. 방금 전까지 신현제를 부르짖으며 오열을 하던 내가 바로 쪽팔려 뒈질 놈이다.
“괜찮아? 업어줄까?”
신현제가 묻는다. 이수호는 죽고 싶었다. 잔디밭에 고개를 대고 이마를 쿵쿵 박아 봐도 소용없었다.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현제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신현제가 이수호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햄버거는 언제 하러 가지?”
유독가스 때문도 아니고 무리한 주문사용으로 인한 탈진의 탓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분노로 기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수호는 그날 처음 경험했다. 그대로 이수호는 잔디를 손에 쥔 채, 고꾸라졌다.
“학교 계단에서 네가 봤던 공포스러운 환상은?”
“성냥 파는 거. 하나에 십 원.”
“노인정 유행어는?”
“오래 살아야 재미난 꼴 잔뜩 볼 수 있으니 장수하자.”
“내가 밀로드에서 네 앞에서 처음 불렀던 노래는?”
“High& Dry. 이거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냐.”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병원에 도착해서 나란히 치료를 받은 두 사람은 보호자가 오길 기다리며 병실에 격리된 상태였다. 이수호가 눈을 뜬 곳은 응급차 안이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신현제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내가 썼던 곰돌이 털색은? 우리가 처음 갔던 패스트푸드점 이름은? 네가 좋아하는 햄버거는? 내 기타의 이름, 아니, 이건 나만 아니까 취소 취소. 우리 밴드 리더의 이름은? 할머니랑 내기를 하며 걸었던 판돈의 금액은?
그의 입에서는 현실을 증명하기 위한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 신현제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꼬박꼬박 대답해주었지만, 이게 한 시간이나 지속되자 지금은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또 뭐가 있더라. 너 나를 처음 때렸던 장소는 어디인 줄 알아?”
“아, 씨! 그만하라고!”
신현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팔뚝에 꽂혀있던 링거바늘이 빠지자 그의 팔을 타고 선혈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렸다.
“현제야!”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병실로 들어왔다. 이수호는 그것이 신현제의 어머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자 신현제가 됐다고 손짓을 했다.
나는 인사시켜줄 만한 친구가 아니다 이거냐. 괘씸한 놈.
이수호는 불퉁하게 얼굴을 돌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신현제. 너…….”
“저 말고 다른 환자도 있어요. 어머니.”
“신현제!”
“……아버지.”
신현제는 또 한 번 여기 다른 환자가 있으니 조용히 해달라고 부모님께 부탁드렸다. 신현제와 꼭 닮아 보이는 아버지까지 등장하자 병실 안은 미남미녀 패밀리로 북적거렸다.
젠장. 눈부시다, 눈부셔. 잘생기고 돈도 많아서 좋겠네. 당신들.
이수호는 투덜거리면서 베개로 눈을 가렸다.
“넌 안 그래도 지금 학교에서 정학 처분받고 근신 중인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아들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신현제의 아버지조차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제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비서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입국을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는데,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받은 연락이 경찰이었다. 아드님과 그 친구분이 화재 현장에서 구출되었으니 지금 병원으로 가보라는 전화를 듣고 신영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병원까지 오는 길에 현제의 어머니는 울면서 몇 번을 까무러쳤는지 모른다. 그는 부인을 잘 다독이며 병원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사실 까무러치고 싶은 것은 신영환 본인이었다. 다행히 아들이 많이 다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는 확실히 이번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우리가 너를 귀하게 키우긴 했지만, 네 이런 태도는 도저히…….”
“피!”
신현제의 어머니가 아들의 팔에 흐르고 있는 피를 가리켰다. 신현제가 별거 아니에요, 하고 손으로 슥 문질렀다. 그러나 혈관에서 바늘이 막 빠져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금세 피가 고였다.
“많이 다쳤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의 어머니가 신현제의 팔을 잡고 물었다. 신현제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 모호한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이수호는 베개를 살짝 치우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존나 귀하게 자란 신현제가 혼나는 진귀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
신영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영환 프로듀서는 방송가에서 악명이 높았다. 완벽주의자에 엄격하기까지 한 호랑이 피디라서 그와 작품을 하다 눈물을 뺀 여배우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단순한 피디라면 급이 높은 여배우에게 호통을 치지 못하겠지만, 그는 현직에서 물러난다 해도 국내 굴지의 엔터테인먼트 회사 K&P의 경영자라는 직위를 물려받을 사람이었다. 즉, 방송국에서 그가 가지는 권력은 거의 무소불위에 가까웠다. 그가 한번 화를 내면 배우들은 물론이고 같이 일을 하는 스텝들까지 잔뜩 긴장해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쩔쩔맸다. 심지어 한 번은 누가 요의를 참지 못하고 현장에서 실례를 한 적도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에 관한 일화는 방송가에서만 떠도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타고 전설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수호는 두근거리며 신현제 놈이 눈물 콧물 쏙 빠지도록 혼나는 다음 장면을 기대했다.
“……어쩌다가 이랬어.”
신영환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이수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쩌다가 이런 거야.”
“뭘요. 이거요? 이거 그냥 주삿바늘이 갑자기 빠져서…….”
신영환이 급히 몸을 돌려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가 달려오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아들의 몸에서 피가 나는데 빠른 조치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괜찮아요. 이거나 다시 넣어주세요.”
신현제가 간호사에게 링거 주사를 흔들며 말했다. 간호사가 움직이지 말라니까요, 하면서 신현제에게 다시 링거를 놓는 장면을, 그의 부모님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가 이젠 움직이지 마세요, 하고 병실을 나갔다.
이수호는 존나게 귀하게 자랐다는 신현제의 말이, 먼지 한 톨 안 보탠 사실이라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중이었다.
“다른 곳은 다친 데 없어?”
“네. 괜찮아요.”
“왜 갑자기 천안을 내려간 거야. 무슨 볼일이 있어서.”
신현제의 어머니가 아들을 타이르며 물었다. 혼내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옆에 있는 이수호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잠깐 내려갔었는데, ……큰일이 생겼어요.”
거짓은 아니었다. 중요한 사실을 모두 대명사로 처리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신현제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아들의 등을 두드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에 휘말려서 부모님이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으면 어떻겠어.”
“죄송합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신현제의 모습은 가정교육을 잘 받은 도련님 그 자체였다.
“앞으로 조심해라.”
“네.”
“다른 문제는 신경 쓰지 말고 상처 치료나 해라. 알아서 다 처리해둘 테니까.”
“네. 죄송합니다.”
신현제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의 아버지가 손을 뻗어 아들의 볼을 꽉, 쥐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요 귀여운 녀석.”
안 돼! 싫어! 귀가, 내 눈이, 내 마음이 썩을 거 같아!
이수호는 베개로 얼굴을 누르며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신현제의 부모님은 친구도 그럼 잘 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산처럼 쌓인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려 밖으로 나갔다.
이수호는 들고 있던 베개를 신현제에게 던졌다.
“넌 진짜, ……완전…….”
“뭐.”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신현제가 되물었다.
“……됐어. 말이 안 통해.”
이수호는 손을 내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직도 병원에 이렇게 무사히 누워있는 현실이 그는 잘 믿기지 않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또 무슨 질문을 하려고.”
신현제는 의자를 끌어와 이수호의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있잖아, 신현제…….”
불에 그슬러 짧아진 이수호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쓰다듬으며 신현제가 응, 하고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어?”
“뭐가?”
“어항에 손 넣고 물고기 잡으려고 한 거…….”
지금은 그것이 현실이었는지 환각 속에서 본 헛것이었는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친 고양이처럼 어항에 손을 넣고 휘젓고 있던 신현제의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이수호는 그때 처음으로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환상과 실제의 구분이 가능했다.
아……, 신현제는 환상으로는 도저히 꾸며낼 수 없는 그런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를 검은 방에서 끌어내 준 셈이었다.
“어떻게 봤어? 넌 그때 방 안에 있었잖아.”
“……어쩌다.”
신현제가 흠, 하고 잠시 인상을 쓰다 이내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이 얘기해도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믿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있어.”
“네가 방 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랬잖아. 이상한 일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도 신고하고, 비현실적인 일이 생겨도 신고하라고.”
“…….”
기억력 좋다. 암기 과목은 걱정 없겠구나.
“너 들어간 지, 한 일 분쯤 지났을 거야.”
“일 분? 일 분밖에 안 지났다고?”
이수호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안에서 자신이 보낸 시간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 일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시간이 흐를 거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밖에서의 시간이 일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시계를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확실해. 일 분하고 칠 초정도 지나고 있었어. 시계만 보니까 존나 심심해서 옆에 있는 수조를 힐끗, 봤거든.”
평범한 가정집이었는데 유난히 한 벽면을 차지할 만큼 크게 만들어져 있던 수조를 떠올리며 이수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기가 몇 마리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쳐다봤어. 그런데…….”
신현제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매를 찌푸렸다.
“그런데 뭐?”
이수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이야기를 졸랐다. 신현제가 만약 거기서 어항을 휘젓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환상 속에 갇혀 절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싹했다. 다음 이야기가 이수호에게는 너무나 중요했다.
“물고기가 나를 쳐다보더라고.”
“물고기가?”
물고기에게 구경당하는 신현제라니.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니 이상하고 유쾌한 장면이었다.
“응. 그런데……, 아, 시발. 그중 한 놈이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잖아, 기분이 존나 더러워서…….”
“……더러워서?”
“손바닥으로 어항을 탕, 치니까 다른 애들은 놀라서 다 도망가는데 그 한 놈이 나를 계속 쳐다보는 거야.”
“그……래서?”
“물고기 주제에 어디서 꼬라보나 싶어서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댔더니, ……그 새끼가 눈을 깜빡였어.”
“그게 끝이야?”
이수호는 맥이 탁 풀렸다. 결국 신현제는 자신이 눈싸움에서 이기자 신이 나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어항을 휘저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신현제 놈과 비교했던 미친 고양이에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한 거거든.”
생뚱맞은 신현제의 얘기에 이수호는 눈을 끔뻑였다.
“여기서 이과 문과 얘기가 왜 나와?”
“이러니 교육이 중요하지. 생물 시간에 그런 거 배우잖아. 물고기는 눈꺼풀이 없어. 365일 24시간 눈을 뜨고 있다고.”
“……!”
“비현실적인 일이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신현제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기괴한 행동을 설명했다.
“그때 경찰에 신고했어?”
“아니, 그건 나중에.”
“그럼 다짜고짜 그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다고? 대체 왜 그랬어?”
“내다 팔면 비싸게 팔리겠다 싶어서.”
“…….”
“농담이고 할아버지 생신 때 선물로 드리려고. 오래 사시라고.”
“……. …….”
“왜? 할아버지 장수를 비는 내 마음이 잘못됐어?”
“……잘못된 것은 아닌데, 네가 어항에 손을 넣는 바람에…….”
그렇다. 그때부터였다.
수많은 입구와 이어져 있던 검은 방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수호는 신현제가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섯 조각 중 하나인 새타니의 신체는 신당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무당은 그것을 신처럼 모시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고 정성스럽게 돌봤다. 수분이 많고, 깨끗하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공간에…….
“그 물고기를 잡았어야 했는데. 젠장.”
……이놈아. 그거 먹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응. 그래. 그건 그렇고, ……불은 대체 왜 지른 거야?”
이수호는 신현제가 자신이 불을 질렀노라고 방화범과는 연애할 마음이 안 드냐고 버럭 외치던 것을 떠올렸다.
“너 전에 학교에서 외계인 잡을 때 불, 필요하다 했잖아.”
“허……, 허……, ……허.”
불 한 번 더 필요했다간, 지구를 상대로 방화를 저지를 놈이었다,
“그리고 너 그때 울려달라고 했고.”
그때 했던 고약한 첫 키스와 고자킥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이종세트였다.
“맞아. 울면 내 귀감이……. ……그게 왜?”
“연기나면 눈이 매우니까 눈물이 날 거 아니야. 눈물 좀 흘리게 해서 네 힘을 좀 북돋아 주려고 한 거지, 나는.”
그놈의 응원 두 번 받았다간 이 세상 하직하겠구나. 신현제야!
“……눈물이 나기 전에 내가 질식해 죽을 거란 생각은 못 했어?”
신현제는 단순히 불만 붙인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거세게 이는 불길은 휘발유나 신나 등의 촉매제를 기반으로 일순간에 타오르는 게 아니면 불가능했다.
“너 잘 때 모텔 할아버지한테 휘발유 좀 얻어뒀지.”
모텔을 떠나기 전 준비를 다 해뒀다는 것은 휘발유 포함이었구나.
“휘발유를 뿌리는데 그 아줌마가 말리는 바람에 왈칵 쏟아졌어.”
“…….”
이수호는 자신을 방으로 안내해주던 피곤해 보이는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흐릿하게 기억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마음속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아주머니. 얘가 나쁜 애는……, 나쁜 애 맞는데,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 아줌마는 나중에 도망가고, 뭐……. 그냥 뿌린 김에 다 뿌리자 싶어서.”
“…….”
안 돼. 엄마……. 허엉, 나 왜 이런 애랑 엮이게 된 거예요. 엄마, 무서워요.
“어, 어쨌든 내가 너 구해줬잖아! 문도 안 열려서 부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젠장.”
이수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지는 것을 본 신현제가 발끈해 외쳤다. 문을 열고 안으로 쳐들어가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아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로 하면 2박 3일 동안 설명해도 모자랐다.
“어떻게 그걸 열었네.”
분명 새타니의 주문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을 텐데 용케 열었구나 싶었다. 신현제가 그제야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뜨거운 문고리를 잡아당기느라 생긴 화상자국과 상처가 그의 노고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 미안…….”
이수호는 신현제의 손바닥을 쓸어내리며 안타까움에 살짝 입매를 찡그렸다. 정말 아팠겠구나. 이거…….
“아파?”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 이수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눈빛에 신현제는 가슴이 두근거려 병원에 온 김에 심장 검사나 한번 받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여기도 치료해 달라고 해야지.”
“……아까 약 발랐어.”
“붕대는?”
“내가 감지 말라고 했어.”
“왜?”
“…….”
그럼 너랑 손을 못 잡잖아.
이 말을 꿀꺽, 삼키고 신현제는 이수호의 입술에 그대로 키스를 했다. 쪽, 하고 맞물렸던 입술이 아쉬움을 남기고 멀어지자 이수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신현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떻게 하냐.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 앞에서 널 덮칠 수는 없잖아…….”
“덮치면 죽어…….”
“……난 그런 후레자식이 아니거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엔 혀가 얽히고 호흡이 뒤섞이고 입안의 점막을 한껏 휘저으며 서로의 입안을 탐하는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아……, ……젠장.”
신현제가 주먹을 쥐고 욕을 중얼거렸다. 입술이 닿는 거리에서 신현제의 욕을 입술로 느끼는 것도 새로운 기분이었다.
“왜…….”
“나 그냥 후레자식 할래.”
이수호는 망설임 없이 신현제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로 신현제의 부모님이 들어왔다. 경찰과도 모든 문제를 끝마쳤으며 두 사람은 치료를 받다 퇴원만 하면 된다는, 들어본 것 중 가장 감사한 설명을 해주셨다.
이수호는 고개를 숙이며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경찰이 직접 들어와서 두 사람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고 이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이수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만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단순한 화재 현장도 아니었다. 그 안에 있던 사람 하나가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 곳에서 두 명의 남학생이 온몸에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경찰의 의심은 당연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여기까지는 이수호와 신현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신현제의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용의 선상에서 두 사람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경찰의 설명은 뜻밖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도망갔던 그 여자가 자신이 지른 불이라며 자백을 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안에서 발견된 시체는 죽은 지 한 달도 더 된 것이라는 여자의 고백이 더해지면서 이수호와 신현제에게 향했던 의심은 썰물처럼 후퇴해 사라졌다.
이수호는 경찰에게 그 말을 들으면서도 선뜻 믿겨지지가 않았다. 자신과 대면했던 그 여자가 한 달도 더 된 시체였다니. 분명히 살아있었는데, ……그럼 자신이 마주했던 그것은 대체 뭐였을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올려둔 이수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수호는 화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네. 이모.”
링거병이 연결된 스탠드를 밀면서 이수호는 병실을 나왔다. 전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신현제에게도 얼핏 들려왔다. 이수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 바로 올라갈게요, 하고 통화를 끝냈다.
신현제는 이수호를 병실에서 기다렸지만 그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둘러대고 그는 이수호를 찾으러 복도를 걸어 다녔다. 그의 모습은 복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비상계단과 복도가 연결된 문을 열자 멍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있는 이수호를 찾을 수 있었다.
“이수호.”
“…….”
불안했다. 이수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신현제의 가슴속엔 불안이 번졌다. 혹시 어디로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잡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신현제는 다시 한 번 이수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이수호!”
“어……, 왔구나.”
“이모님께 전화 온 거 아니야?”
“응.”
“……어떻게 됐어?”
며칠간 그 고생을 하며 뛰어다닌 이유가 모두 그의 누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신현제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의 연속이지만, 일단 그렇게 하는 것이 구하는 방법이라 하니 믿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수호의 표정이 어두운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깨어났대.”
“뭐? 진짜? 잘 됐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그 모든 과정을 알지 못했지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현제는 이수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다가 그의 표정이 여전히 어둡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왜? 또 무슨 문제 있어?”
“……오른팔만.”
“뭐?”
“오른팔만 깨어났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오른팔이었으니까. 내가 찾아낸 새타니는…….”
새타니는 모두 다섯 개의 몸으로 나뉜다. 그걸 각자 그 혼을 부리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자신과 내기를 하자고 했던 새타니는 분명히 말했다.
나를 이기면 내가 갖고 있는 너의 누나를 돌려주겠다고.
거기에서 이수호는 이겼고, 누나를 돌려받았다. 오른팔의 새타니가 갖고 있던 누나의 오른팔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이수호는 머리를 벽에 짓찧으며 소리 질렀다.
“병신이야! 난 병신이라고! 내가 뭐라고, 내가 할 줄 아는데 뭐가 있다고……, 천하의 병신이야!”
신현제가 이수호의 머리를 손으로 붙들어 벽에 닿는 것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짓이야! 너도 할 만큼 했어!”
“할 만큼 하면 뭐해! 결국 내가 한 거라고는……, 누나의 오른팔을 움직이게 한 것뿐인데.”
“다른 것도 찾으면 되잖아!”
신현제가 소리쳤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나 같은 게, 나처럼 덜떨어진 놈이 어떻게 그걸 다 찾아! 무슨 수로!”
“해! 하면 돼! 내가 도와줄게.”
신현제가 이수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내가 도와주면 돼.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 찾아. 찾으면 돼.”
“…….”
이수호는 주먹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며 울음을 참아냈다. 이미 너무 많은 눈물을 쏟아낸 후라, 울고 싶지 않았다. 울면 머리가 아프고 온갖 귀신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쪽팔리니까.
신현제가 이수호를 와락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널, 그때마다 울게 해줄게. 내가 네 수호자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울지 마.”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며 울음을 참아내고 있었는데 신현제 놈의 한마디에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렸다. 툭, 하고 터져버린 설탕주머니에서 설탕이 새어나가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엉……, 흐어……, 어엉.”
“울지 마. 병신아.”
“흐엉……, 병신은……너고……으어엉.”
“내가 왜 병……, 됐어. 그래. 알았어. 내가 병신 할 테니까, 제발 울지 마.”
신현제는 펑펑 우는 이수호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가 병신이다, 내가 병신이야, 를 늘어놓았다. 결국 울다 지친 이수호가 자신의 품에서 잠들기 전까지 신현제는 그를 달래줘야 했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갈 수 있었다.
연휴가 끝나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이수호는 약해진 마음을 다잡았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누나의 오른손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의사들은 현대과학의 신비니 뭐니 하며 논문을 쓰겠다고 달려들었지만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고 끙끙댈 뿐이었다. 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장일에게 잡혀 이수호는 세 시간 동안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우장일이 그렇게 욕을 잘하고 잔소리가 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수호는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욕을 들어먹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날 우장일은 이수호의 핸드폰을 빼앗아 직접 자신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 번호를 따갔다. 태섭이와 병두에게도 돌아가면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만들고도 번호를 돌리지 않았다고 또 한 번 거하게 욕을 얻어먹었다.
이수호는 전화번호부에는 그렇게 이름이 늘어갔다.
죽을힘을 다해 구한 것이 누나의 오른팔뿐이라는 사실에 처음에는 말도 잇지 못할 만큼 절망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병원에 찾아가면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그 온기에 그는 위안을 받았다.
사람은 이렇게나 적응이 빠른 동물이구나.
어느새 절망에 적응을 하고 그 속에서 삶의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수호는 인류의 위대함에 대해 떠올렸다.
자신의 상황을 어둠에 빌어 표현하자면 불빛 한 점 없는 원시의 어둠이다. 그 시대의 인류는 그래도 어둠 속에서 도구를 발견하고 불을 발견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겠지. ……나도 이제 춤을 배울 타이밍인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의 눈에 거실 괘종시계 옆에 놓아둔 록산느가 들어왔다.
“록산느 안녕…….”
신현제가 목숨을 걸고 구해온 록산느는 습기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려 장렬히 사망했다. 조만간 낙원상가에 가서 괜찮은 기타를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왠지 록산느를 배신하는 것 같아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수호는 문단속을 하고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정원 곳곳에는 아직도 그날 파헤쳐놓은 구덩이가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불같이 화를 낼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걸 원상 복구해두고 싶은 맘이 들지 않았다.
“……엄마가 빨리 와서 나에게 화를 내주면 좋겠다.”
이수호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다 아니야,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돌아오실 것이다. 누나도 눈을 뜰 것이고, ……모든 것이 잘되지는 않겠지만 대체적으로 잘 될 것이다.
그는 힘차게 고개를 들고 걸었다. 높고 푸르른 하늘이 그의 기분을 완벽하게 위로해주지 않아도 그는 일부러 힘을 주어 걸었다.
학교에 도착해 신발을 갈아 신고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건네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불길 속에서 앞머리가 그슬려 눈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앞머리를 다듬은 그에게 머리 스타일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 역시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수호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연휴 전에 있었던 큰 싸움은 이미 잊힌 지 오래다. 아이들은 연휴 기간 동안 뭘 했고 용돈을 얼마를 벌었는지,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보았는지에 대해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교실 뒷문이 열리고 신현제가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잊혔지만 그와 싸움을 벌인 장본인들은 음악실에서의 그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신현제의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머리털이 쭈뼛 서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가방을 자신의 책상에 던져놓고 신현제는 2분단 앞쪽으로 걸어왔다. 이수호는 뭐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
“기타.”
“…….”
“죽었지. 록산느.”
록산느가 뭐야, 몰라, 외국인 노동자 이름인가? 신현제가 드디어 사람을 죽였나 봐, 수군수군.
교실에는 소리를 낮춘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그, 그런데.”
“이거 삼촌한테 물어봐서 제일 괜찮다는 걸로 샀어.”
“…….”
“받아.”
신현제가 이수호에게 기타를 내밀었다. 케이스만 봐도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 얼마나 비쌀지 대충 감이 잡혔다.
이수호는 신현제가 집으로 찾아와 주지 않고 굳이 반 아이들 앞에서 수백만 원이나 하는 기타를 자신에게 선물하는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신현제가 손 떨어져, 하고 말하는 바람에 이수호는 덥석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고……맙다.”
“뭘, 이쯤이야. 내가…….”
신현제가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3반의 담임이 들어왔다. 신현제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건 뭐냐.”
담임이 이수호의 책상 옆에 놓인 기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수호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기타를 책상 밑으로 끌어다 감추었다.
“고3이 공부는 안 하고, 잘한다. 잘해.”
담임이 혀를 차며 이수호에게 아침 조례가 끝나면 교무실로 오라고 말했다.
아, 맞다. 나 적립해둔 죄가 있었지.
이수호는 헉 숨을 삼켰다. 그동안 공포 호러 스펙터클 액션을 찍다 보니 소소한 일상의 문제들을 잊고 있었다. 끔찍한 일에 비하면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 지 않았다.
이수호는 담임에게 들을 잔소리와 몽둥이찜질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담임은 모의고사 일정과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시간 분배를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음악실에서 사고 쳤던 놈들도 교무실로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
자리에서 일어서 교실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사람들은 흔히 큰 고민이 있으면 작은 고민은 생겨도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큰 고민은 큰 고민 나름대로 괴롭고, 작은 고민은 작은 고민 나름대로 괴로운 것이 삶이었다.
한숨을 폭폭 쉬며 복도를 걸어가는 이수호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뭘 그렇게 죽상을 해.”
“신현……제.”
“담탱이 열라 뭐라고 할 텐데, 그래도 별거 아니니까 쫄 거 없어.”
“……응.”
이수호는 자신과 신현제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신현제가 손가락으로 이수호의 목을 쿡 찌르고는 물었다.
“어떤 손가락.”
“…….”
“맞춰.”
“…….”
지금 이게 내 목에 손가락을 찔러놓고 니가 할 소리냐.
주변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경악의 빛이 차올랐다. 이수호는 애써 침착하게 웃으며 신현제의 팔을 어깨에서 내리게 했다.
“더워.”
“그래? 하긴 오늘 날씨가 좋지.”
“…….”
“오늘 어디 안 가냐?”
“……. …….”
“아, 병원 가겠군.”
이미 신현제는 이수호의 누나가 입원한 병실에 수십만 원짜리 과일바구니를 사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하루 종일 병원에서 두 사람은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누나가 가끔 손을 까딱거리며 움직였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수호는 신현제와 둘이 보내는 소소한 시간이 좋았다.
“같이 가줄까?”
같이 교무실로 가던 일행들, 특히 김진철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수호는 신현제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좀 떨어져 걸어.”
“뭐?”
“나 먼저 간다.”
황당해하는 신현제를 뒤로하고 이수호는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교무실로 들어갔다. 음악실 일당들은 교무실 바닥에 꿇어앉아 교감의 일장연설을 삼십여 분간 들은 후에야 풀려났다.
교실로 돌아와서도 이수호는 신현제가 아까처럼 자신에게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할까 가슴을 졸였다.
좋은 친구 사이? 말이야 쉽지. 왕따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루아침에 그런 식으로 굴면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자신이 신현제에게 귀신을 씌게 했다고 할 놈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수호는 신현제가 자신에게 말을 건넬 때마다 부담스러워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띄게 달라진 신현제의 태도에 아이들이 숙덕거리며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수호가 신현제한테 붙은 귀신을 떼어내 줬다더라, 아니다, 이수호가 귀신으로 신현제를 조종하는 거라더라, 신현제의 사주를 받아 이수호가 록산느란 외국 여자를 저주로 죽이는 데 일조했다더라, 등등.
온통 귀신과 관련된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신현제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박성곤과 윤민철은 굉장히 난감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조언을 해봤자 신현제가 말을 들어 처먹는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들이 널 이렇게 뒤에서 씹더라, 하고 귀띔을 해주면 그놈이 누구냐고 달려들어 아작을 낼 게 분명하니까 두 사람 모두 못마땅한 얼굴로 이수호를 노려볼 뿐이었다.
“…….”
이수호 역시 죽을 맛이었다.
신현제를 주술로 속박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이전보다 아이들이 자신을 꺼리는 강도가 심해진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옆을 지나가면 지나가는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가 복도에 나가기만 하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뭘, 내가 뭘 어쨌다고! 신현제가 내가 좋다는 것뿐인데, 내가 뭘!
이수호는 억울함에 치를 떨며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그렇게 수업이 끝날 때까지 얼굴을 묻고 누워있었다.
신현제는 교실 뒤에서 그런 이수호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눈치가 둔한 신현제였지만 아이들이 자신과 이수호를 둘러싸고 숙덕거리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3교시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몇 명은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뜨고, 몇 명은 그 짧은 시간에 농구를 하겠다고 교실을 나갔다. 신현제는 가방에서 준비한 그것을 들고 이수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야 인마.”
“…….”
자신이 부르는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이수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신현제는 이수호의 책상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책상 아래서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이수호의 가느다란 발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신현제가 정신을 차리고 이수호를 괴롭히는 구나, 하고 안도했다. 신현제는 이수호의 발목을 잡고 재빨리 그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이수호를 제외하고 아무도 듣지 못할 조그만 목소리로 나는 이수호의 개다, 라고 외쳤다.
……사실 그것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말을 분명히 알아들은 이수호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고 신현제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4단 찬합을 수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밥 먹자.”
“…….”
“같이 점심 먹자고. 이수호.”
“……. …….”
“나.랑.같.이.점.심.먹.자.고. 이.수.호.”
한 음 한 음 강세를 주어 끊어 말하는 신현제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수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경악은 이내 수치로 변했다.
신현제는 4단 찬합의 뚜껑을 차곡차곡 빼서 어디 한식 경연대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요리를 이수호의 책상에 펼쳐 놓았다.
“넌 도시락 안 싸 왔어?”
“……빵.”
“한국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빵만 먹고 그러면 키 안 큰다. 너처럼.”
“…….”
이 머저리가 뭐라는 거야. 내가 작은 게 아니라고 네가 심하게 큰 거잖아. 게다가 지금은 점심시간도 아니라고. ……그렇게 당당한 얼굴로 4단 찬합 꺼내지 마.
신현제는 하얗게 질린 이수호의 손에 억지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쥐여주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점심을 먹겠다는 그의 야무진 생각은 4교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심해졌고 이수호는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신현제를 피해 다녔다. 결국 청소시간에도 이수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신현제는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이수호 못 봤어?”
“못 봤는데.”
“그 새끼, 잡히기만 해 봐라.”
꽉 안고 놔주지 않을 거다.
신현제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핸드폰으로 열심히 이수호의 위치를 추적했다. 하지만 같은 건물 안에 있으니 당연히 점이 겹쳐진 채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신현제는 악, 소리를 내지르며 교실을 나갔다.
“저 새끼, 이제 정신 좀 드나 본데.”
“그러게. 아까는 영 미친놈 같더니만.”
윤민철과 박성곤이 혀를 쯧쯧 찼다. 그러나 신현제는 여전히 미친놈처럼 복도를 헤매고 다녔다.
“내가……,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젠장.”
신현제는 보는 사람마다 이수호 새끼 어디 갔냐고 질문을 던졌지만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신현제는 이수호가 갈만한 곳을 생각했다.
음악실인가. 아니다, 음악실이라면 아까 자신이 분명 준비실 안까지 들어가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설마.”
신현제는 음악실 옆 준비실에 놓인 커다란 캐비닛을 떠올렸다. 만에 하나 이수호가 거기에 있는 것이라면, 진짜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음악실을 향해 달렸다.
음악실 문을 열었을 때, 신현제는 준비실 안쪽에서 급히 움직이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일단 음악실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그는 천천히 준비실의 문을 열었다. 캐비닛의 문이 삐뚜름하게 닫혀있고 그 사이로 교복자락이 보였다.
“어디 있어. 나와.”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수호는 캐비닛 안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나오라고 해서 나오면 한 번이고, 찾아서 나오면 두 번이다.”
역시 잠잠.
“셋 센다. 하나, 둘셋!”
보통은 둘쯤에서 뜸을 들여 기다려줄 테지만 신현제에겐 그런 관대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셋까지 센 신현제는 캐비닛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안에서 쭈그려 앉아있던 이수호가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다시 세.”
“셋, 다 셌어.”
“그렇게 빨리 세는 게 어디 있어.”
“그럼 넌 날 피해 도망 다니는 게 어디 있어.”
이수호가 시선을 피하며 그건, 하고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왜? 왜? 네가 하라고 한대로 다 했어. 나는.”
발에 입을 맞추고 나는 이수호의 개다, 라고 말했다.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간청을 두 번이나 했다.
신현제는 자신이 이 정도의 정성을 보였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설마 할 줄 몰랐어.”
“했잖아.”
“…….”
“내가 그렇게 싫어? 아직도 무섭냐?”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이수호는 고개를 들었다. 신현제는 정말로 상처를 받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이수호는 졸지에 자신이 가해자가 된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가해자는 이 맛에 피해자를 괴롭히는 거구나…….
“……그게 아니고, 솔직히……. 좀…….”
부담스러워,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바닥에 닿을 듯 조그맣게 울렸다. 신현제는 잠시 충격을 받은 듯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알겠어, 하고 대답했다.
“내가 그렇다니……, 미안하군.”
신현제가 돌아섰다. 그도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괴롭히던 녀석에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의 자신의 위치도 그렇고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이수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걸 이수호는 지금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수호를 위해 했던 자신의 모든 행동이 부정당했다는 생각에 신현제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노와 수치.
둘 중 무엇이 더 강하게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고 있는지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신현제는 몸을 돌렸다.
준비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등을 이수호가 와락 끌어안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
“난 원래 왕따였고……, 그냥 혼자 있는 게 이젠 심지어 편한데…….”
이수호는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신현제가 싫은 건 아니다. 싫어하긴커녕 좋아했다. 좋았다. 매우 좋았다. 지금도 좋다.
뻑하면 삐져서 등을 돌리는 유치한 성격도, 자신을 안아주던 넉넉한 품도, 그와 나누었던 소소하고 일상적인 시간들이, 이수호에겐 더없이 소중했다.
“너 나 싫어하잖아. 시팔. 나 간다고.”
끝에 붙은 시팔에 신현제의 격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간다고.”
“…….”
“갈 거라니까!”
말로는 간다 간다 해놓고 신현제가 아까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음을 이수호는 알았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생각 따로인 이 녀석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이냐.
“좋아……해.”
맨정신으로는, 처음 하는 말이었다. 이수호는 그가 등을 돌리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말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것이 생각보다 몇 배는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신현제. 좋아해.”
거기까지 말했는데도 신현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수호는 자신이 너무 늦게 말을 한 것일까, 혹시 그의 마음이 그새 돌아선 것은 아닌가 두려워져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살짝 앞으로 기울여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신현제는 손을 뻗어 이수호의 뒷머리를 잡고 키스를 시작했다.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이수호가 숨을 할딱거리며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몸은 음악 준비실의 책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아까 내가 뭐라고 했어.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두 번 한다고 했지.”
“차라리 두 대를 때려!”
신현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교복의 넥타이를 끌러 옆에 두었다. 교복 재킷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가지런히 의자 위에 걸어두고 이수호의 교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미쳤어? 여기 학교야.”
“이렇게 구석진 곳에는 아무도 안 들어와.”
“저번에 여기 들어온 김진철 패거리들은 뭔데!”
“여기서 내가 낮잠을 자고 있는 걸 깨워서 그 새끼들이랑 싸움이 났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감히 이제 누가 들어올 거 같아?”
거기까지 말한 신현제는 테이블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여 입맞춤을 시작했다.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었다. 학교 내에서 신현제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수호를 제외하고.
“――!”
입술을 물어뜯긴 신현제가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수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학교잖아. 선생님이라도 들어오면 어떻게 해…….”
이수호가 음악실 열쇠를 받은 이후로 이 안에 다른 선생님이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예외적인 그 한 번이 오늘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문 다 잠갔어.”
“…….”
“걱정 마. 앞 뒤, 다 잠갔어.”
이럴 때만 용의주도한 놈.
신현제는 더 이상 이수호가 반박거리를 찾아내지 못하자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다물고 있던 이수호도 끊임없이 자신의 잇몸을 두드리며 입술을 핥아대는 신현제의 노력에 입을 벌리게 되었다.
혀가 젖은 입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수호는 부끄러움에 몸이 닳아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전의 일은 모텔이라는 공간적 특성과 그날의 상황을 핑계 삼을 수 있지만, 지금은 대낮의 학교였다. 둘 다 교복을 입고 있었고, 여기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아지트인 음악 준비실이었다. 아아, 절망이야. 여기서 이제 혼자 느긋하게 노래 듣긴 다 틀렸어.
더 절망스러운 것은 신현제와 나누는 이 키스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현제가 이수호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아 자신의 다리 사이에 밀착시켰다. 벌써 교복바지 위로 딱딱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곳의 감촉에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으, 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왜?”
신현제가 물었다.
“……너.”
“섰다고?”
“…….”
“너도 섰어.”
신현제가 대담하게 아래로 손을 뻗어 이수호의 것을 움켜잡았다. 그의 말대로 이수호의 것도 바싹 흥분한 상태였다. 손바닥 안에서 그의 흥분을 확인한 신현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너……, 설마…….”
“설마 키스만 하고 끝날 줄 알았어?”
“키스 두 번 아니야?”
신현제는 코웃음을 치며 이수호를 준비실 책상 위에 눕게 했다. 이곳에 놓인 책상은 과학실에서 사용하던 낡고 커다란 책상이라 한 사람쯤은 누워서 잠을 청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수호는 종종 이 책상 위에서 혼자만의 오수를 즐겼다. 자신을 위한 맞춤책상이라 좋아했는데, ……거기에 누워 이런 짓을 하게 되다니. ……책상아. 미안해. 형이 나쁘다.
신현제는 누운 채로 한참 절망을 씹고 있는 이수호의 고개를 자신에게 돌리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동안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그 말을 툭, 내뱉는다.
“나 너 좋아해.”
“……알아.”
아는데, 또 이런 데서 들으니 퍽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또다. 모기가 물어서 부어오른 것처럼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이수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나도 그래, 하고 말했다.
신현제가 웃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듣게 될 줄 알았으면 진즉 말하게 해줄 걸 그랬다고 이수호는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나누려면 꽤나 커다란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멋져야 하고,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서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나 같은 인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한마디였구나.
이수호는 다시 좋아해, 하고 말했다.
입술이 겹쳐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격하고 거친 입맞춤이었다. 이것도 좋았다. 신현제가 이수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입맞춤을 깊게 했다. 조금씩 몸이 달아올랐다. 신현제는 이수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고 허리 아래를 뭉근히 눌러 움직였다. 키스를 하는 와중에도 아래에서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에 이수호는 몇 번이나 아, 하며 낮은 탄성을 냈다. 바지와 속옷이 아래로 끌어내려지자 차가운 공기가 닿은 몸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신현제의 손이 허벅지를 쓸어내리고 허리를 끌어안고 그곳을 훑어 내리자 온몸에 따끈한 피가 돌았다.
이수호는 신현제의 목을 끌어안고 갈라진 숨소리를 내뱉었다. 신현제는 자신의 손으로 서로의 것을 쥐고 문질렀다. 그저 늘 하던 행위에 이수호의 것이 닿는 것뿐인데도 신현제는 머리가 타들어 갈 정도로 느끼고 말았다.
이수호가 빨리, 제발, 신현제, 제발……, 이라고 속삭이는 말에 신현제는 황급히 몸을 뒤로 떼 내었다.
“……?”
그는 이수호의 몸을 뒤집어 책상 위에 엎드리도록 만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아……!”
그곳에 손이 닿는 느낌과 혀가 닿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이수호는 황급히 도망가려고 허리를 움직였지만 신현제의 손이 그걸 용납지 않았다. 충분히 적셔 풀어진 구멍에 신현제는 잔뜩 흥분한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 대었다. 이수호는 경악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학교에서 거기까지 가지는 않겠지 하는 그의 생각이 무색하게 신현제는 망설임 없이 삽입을 시도했다. 살덩이의 끄트머리가 조여진 틈사이로 푹, 하고 밀고 들어갔다.
“……! 아……, 아…파.”
아무리 혀로 적셨다고는 해도, 여전히 아팠다. 신현제는 뒤에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큰 그것을 빼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증거로 숨을 한 번 더 크게 쉬고는 허리를 퍽, 밀어 올렸다. 이수호는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벌어진 틈 사이로 신현제가 자신의 살덩이를 꾹꾹 구겨 넣었다.
“아, 으……읏.”
이수호가 아파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현제는 도저히 자신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 미안, 잠시만, 젠장, 을 중얼거리며 남아있던 성기를 끝까지 넣었다. 내벽 안을 가득 메운 이물감에 이수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흐……, 아, 아파.”
어느새 고통으로 힘을 잃고 수그러진 이수호의 성기가 신현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가엽고 귀엽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이수호의 것을 쥐고 정성스럽게 아래위로 훑어주었다. 처음에는 아프다고 소리만 지르던 이수호의 숨소리에 조금씩 열기가 묻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신현제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바닥이 어느새 이수호의 체액으로 흥건해졌다. 신현제도 슬슬 한계였다. 넣은 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인내심 대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신현제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살덩이가 내벽을 문지를 때마다 이수호의 입에서 억눌린 탄성이 새어나왔다. 신현제는 이수호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 추삽질을 반복했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자신의 물건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사정을 참아내야 할 만큼, 느꼈다.
“아, 으……, 읏, 하…….”
이수호는 끈질기게 자신의 아래를 주무르는 신현제의 손과 뒤에서 추삽을 거듭하는 단단한 살덩이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뒤에서 신현제의 나직하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반으로 쪼개질 것 같던 몸이 이제는 그래도 그의 움직임에 간신히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간신히 따라간다 생각하면 신현제는 한층 더 깊고 빠르게 아래를 찔러댔다. 맘 같아서는 그만하라고 걷어차 버리고 싶지만, 신현제가 너무나 기쁜 듯이 좋아, 좋아, 너무 좋아, 를 중얼거리며 등에 키스를 퍼부어댔기 때문에 이수호는 입술을 깨물어 가며 그를 받아주었다.
신현제가 이수호의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려 자신을 보게 하고 다리로 자신을 끌어안도록 했다. 빠져나갔던 성기가 단번에 쑥, 하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수호가 인상을 찡그리며 신현제를 끌어안았다. 그의 허리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졌다. 두 사람 모두 몸을 달리는 열기 때문에 땀투성이가 되었다.
이수호가 먼저 절정을 맞이했다. 신현제의 손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젖어들게 한 자신의 정액 때문에 이수호는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본 신현제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허리를 박아 올렸다. 몸 안으로 끝도 없이 파고드는 그 감각에 이수호는 몸을 움츠렸다.
“――!”
일순 신현제가 허리를 안쪽으로 길게 밀어붙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에서 뜨끈한 액체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에 이수호는 몸을 흠칫 떨었다. 신현제가 몸을 부르르 떨며 허리를 몇 번 더 추어올리자 간헐적으로 뜨거운 정액이 안으로 흘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엉덩이의 골 사이로 하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하아……. …….”
“후우…….”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숨을 고르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수호는 오줌을 싼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엉덩이를 손으로 더듬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왜.”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신현제가 몽롱한 눈으로 대답했다.
“……넌 이걸 보고도 아무것도 안 느껴지냐.”
이수호는 아직도 아래가 이어진 채로 정액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자신의 엉덩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순간 이수호는 안을 채우고 있던 살덩이가 빠듯하게 커지는 감각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느끼는 건데.”
“…….”
“완전 느꼈어. 지금.”
신현제가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시발, 너 이젠 섹시하기까지 하냐. 젠장, 혼자 다 해 처먹어라, 하고.
뒤로 밀어내려고 해도 신현제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이수호에게 달려들어 쪽쪽, 입술을 빨아댔다. 허리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허벅지를 만지고, 머리카락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신현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수호에게 매달렸다.
이수호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이 영 틀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신현제를 홀렸다는 거.
“……다리 벌려봐. 한 번 더 남았어.”
“…….”
“응? 한 번 더, 하자. 한 번만.”
“……젠장.”
아이들이 모르는 것은 자신 또한 그런 신현제에게 홀랑 넘어가 버렸다는 사실이다. 제정신을 갖춘 예전의 자신이었으면 어디서 귀여운 척이냐고 발로 걷어찼을 텐데 지금은 신현제가 귀여워 보이는 지경이었다. 이수호는 커다란 덩치를 하고 사탕을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에게 한 번 더, 를 요구하는 신현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두 번째 진실은 당분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이수호는 다짐했다.
누구에게도.
“그리고?”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한 거 같아. 밥도 혼자 먹을래.”
이수호는 다른 아이들과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신경 쓰이고 어려운지 그날 점심이 먹고 나서 가스 활명수 한 병을 다 비운 후에 깨달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도시락을 먹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예를 들자면 윤민철과 박성곤의 반찬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밥을 몇 번 씹고 말을 해도 좋은 것인지, 언제쯤 자리에서 일어나도 좋은 것인지 따위를 알지 못해 끙끙거리다 결국 그날 점심이 얹히게 된 것이다.
식사는 혼자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그것이 맛없는 빵이 든, 맨밥과 김만 있는 단출한 도시락이든.
“……그리고?”
마뜩잖은 어투로 신현제가 또 물었다.
“애들하고 노는 거에 나 억지로 끼워주지 마. 싫어.”
“왜? 같이 농구 한 게임 하면 좋잖아!”
“난 그냥 혼자 음악 듣는 게 더 좋아.”
밥을 먹었으니 농구 한 게임 하자고 신현제가 억지로 끌고 간 농구코트에서 이수호는 얼굴로 골을 성공시키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물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도 했다.
“왜? 난 다 너 좋으라고…….”
“알아.”
이수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자신 역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친구, 자신을 위해 열광해주는 사람들, 갑자기 친절하게 변한 주변 사람들.
그날 꾸었던 수많은 꿈속에서 이수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이 자신의 위치가 아님을 깨달았다.
“난 그냥 지금의 이게 좋아.”
“…….”
“물론 네가 생각하면 허세부리는 거 같고 안 믿겨지겠지만, 난 이게 편해. 익숙해졌나 봐. 억지로 누군가랑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밥을 먹는 것은 더더욱 싫어. 그냥 조용히 지내고 싶어. 예전처럼.”
예전처럼, 이라는 말의 울림에 신현제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를 만들면 내가 선택해서 만들고 싶어. 나를 좋아하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친구가 되고 싶어. 나는.”
“……그럼 나 말고 친구 만들지 마.”
어린애 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이수호는 푸핫, 하고 웃고 말았다. 살짝 짧아진 앞머리를 위로 올리며 이수호가 말했다.
“나 왕따 생활이 좋다는 건 아니거든.”
“…….”
“세상에 어떤 병신이 왕따 당하는 걸 좋아하겠어. 나도 왕따에서 벗어나고 싶어.”
“도와준다고, 그러니까.”
“그걸 벗어나도 네 힘으로 벗어나는 건 싫다는 얘기야. 내 말이 어떤 뜻인지 알겠어?”
신현제의 비호 아래 졸업 전까지 모든 아이들의 친절함을 받으며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수호는 그런 억지 친절 따윈 받고 싶지 않았다.
이수호는 신현제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내어주는 친절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사실을 신현제가 알아주길 바랐다.
“……알겠어요.”
드러난 이수호의 이마에 신현제는 또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꾸를 해버리고 말았다. 혀를 깨물며 바로 후회를 했지만 이미 이수호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후였다. 신현제는 쪽팔리긴 해도 이수호가 웃으니 이젠 아무려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 간다.”
병원 앞이었다.
오늘 신현제는 오후에 과외가 있는 날이라 병원 앞까지만 바래다주는 것으로 두 사람은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막상 헤어지려니 이수호의 표정이 금세 우울해졌다. 그걸 보고 있는 신현제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신현제.”
“왜.”
다정하게 대하면 발걸음을 돌리지 못할까 봐 신현제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이수호가 그의 손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뭔가를 써서 그 위에 후, 하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뭐야, 이건.”
“믿지 않겠지만, 네 액을 막아주는 주문,”
“…….”
“나 이거 처음 써보는데, ……이거 되게 비싼 거다. 일부러 지방에서 이거 해달라고 막 찾아오는……!”
이수호는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나 이미 신현제의 입술은 그의 입술 위에 닿은 후였다.
“이게 나한테는 더 효력 직빵인데.”
“이……!”
아무리 지금 사람이 없어도 언제 누가 나타날지 모르는 병원 앞이었다. 이수호가 항의를 하려고 손을 치켜들자 신현제가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녕, 하고 멀어졌다.
몇 발자국 그렇게 걷다가 뒤를 돌아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이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 같은데 멋진 새끼 같으니라고.
이수호는 손바닥으로 한참 얼굴의 열을 식히고 나서야 누나가 있는 병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모는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하게 누워 있는 누나를 보자 이수호는 다시 커다란 우울함과 직면하게 되었다.
“누나…….”
이수호는 누나를 불러보며 의자를 끌어다가 그 옆에 앉았다. 자신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누나는 아직도 이러고 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누나의 오른팔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누나, 나……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감히, 제정신이라면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남매 사이에 좋아하는 사람이니 사귀는 사람이니 하는 얘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는 주제였다.
“전에 여기 왔었는데. 내 대가리만 한 멜론 들고 온 병……. 아무튼 있어.”
이수호는 일기를 쓰는 것처럼 누나에게 하루의 일을 보고했다.
“엄마는 아직 연락이 안 되지만, 그래도 곧 오실 거야. 그럴 거 같아. 어제 꿈자리가 좋았어. 알잖아. 나 꿈 되게 잘 꾸는 거. 그리고 나 얼마 전에 정학 먹었다. 누나 동생 완전 잘 나가지? 흐흐흐. 우리 밴드 그리고 조만간 공연할지도 모른다. 그때 누나가 일어나서 오면 좋겠다. 동생이 얼마나 멋진 줄 알면 그딴 아이돌 따위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어라,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밖으로 나가려던 이수호가 문득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나 핸드폰도 생겼어. 흐흐.”
이 시대에 핸드폰을 사지 않은 십대는 너밖에 없을 것이라고 구박했던 수현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수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로 나간 그는 신현제와 전화통화를 시작했다. 오늘 과외가 끝나면 만나서 햄버거나 하자는 그와 대수롭지 않은 얘기들을 나누다 시계를 보니 자신이 자리를 이십여 분이나 비웠음을 깨달았다.
“나 들어갈게. 아무튼 병원에서 나가면 전화할게.”
이수호는 통화를 마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이모가 틀어놓고 가셨나, 하고 이수호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끄려다 채널을 돌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쇼 프로그램에 나온다는 인터넷 기사를 떠올린 것이다. 노래를 부르진 않겠지만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죽는다, 너…….”
“죽긴 내가 왜.”
“내가 우리 애들 보고 있을 때, 채널 돌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우리 애들은 얼어……, ……!”
길 위에서 귀신이라도 만난 보통의 사람처럼 이수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겁하고 돌아보았다.
이수현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리모컨 내놔.”
“……누나? 어떻게……?”
“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
“엄마?!”
“이 과일은 누가 사 온 거야? 비싸고 알찬 것만 사 왔네. 근데 과일만 있음 뭐해. 과도가 있어야지. 과도 빌리러 건너편 병실까지 갔다 왔잖아.”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잔소리에 이수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야……, 이게 뭐냐고.”
이수호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을 깜빡이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과도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손끝을 그어 환영을 없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의 눈을 현혹하는 존재를……, 악!”
그의 어머니가 손바닥으로 아들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틀렸어. 그건 인장을 먼저 이렇게 만들고 나서 외워야지. 이건 주문 수업 시간에 만날 싸돌아다니니까 실력이 늘지를 않아요.”
“진짜 엄마야? 엄마 맞아?”
“그럼 내가 니 엄마지 아빠냐!”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쩌렁쩌렁한 울림은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수호는 엄마, 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엄마, 어디 갔었어…….”
“니 누나 구하러 간다고 써놨잖아.”
“그래도, 그래도 연락은 해야지……, 이 나쁜 엄마야.”
이수호는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로 맺어진 그들의 영적인 교감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일렁이는 불안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어디서 누나처럼 혼을 빼앗긴 채, 누워있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어딘가의 환영 속에서 나와 누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에 이수호는 잠들기 전 엄마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늘 기도했다.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중생들을 구원해준 부처님에게,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서양의 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중동 석유 부자들을 지켜준다는 알라신에게도. 골고루 기도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어떤 신인지는 모를 그 신이 자신의 소원을 지금 들어준 것이다. 누나의 깨어남과 함께.
“저거 정신머리 빠진 거, 찾으러 갔다 왔다.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연락은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연락을 못 했지.”
“걱정했잖아요!”
“넌 니 걱정이나 해. 그리고 이 정신 나간 것아. 정신을 왜 질질 흘리고 다녀, 어?”
어머니가 누워있는 이수현을 향해 혀를 차며 구박을 했다.
“아, 그럼 어떻게 해요. 그 방에 내가 좋아하는 우리 애들이 싹 다 모여서 나에게 누나누나, 하며 서로 달려드는데. 내가 어떻게 당해.”
“……설마 누나 그딴 환영에 속아서……, 혼(魂)을 내준 거냐?”
“닥쳐. 난 후회하지 않아.”
“…….”
“으이구, 정신 빠진 것.”
“엄마,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본체는 어디서 찾으신 거예요?”
“넌 아직 그 얘기를 들을 자격이 안 된다. 소도와 관련된 이야기다.”
소도는 내림굿을 받은 태천무의 무당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지였다.
“……쳇. 그런데 그게 저를 무슨 열쇠라고 부르던데 그건 무슨 뜻이에요?”
열쇠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수호는 확실히 보았다. 이내 어머니의 얼굴에 스쳤던 당혹감은 사라졌다.
“설명하자면 길고, ……복잡해. 넌 알고 싶지도 않을 거고. 솔직히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옆얼굴이 너무나 피곤해 보여 이수호는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은, 그가 오른팔을 찾아오며 겪었던 그 경험으로도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이제는……, 괜찮은 거예요?”
“누구? 너? 아님 수현이.”
“우리 둘 다.”
“저 계집애는 우리 집안사람들 다 동원해서 쌔빠지게 구하러 다녀야 하고, 넌 당장 다음 주부터 수업 들어.”
“……네.”
이수호는 이제 자신에게 주술 수업이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이라는 것을 알기에 토를 달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적당한 땡땡이는 기본 요소겠지만.
“이 병원에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잘생긴 레지던트 하나 없냐.”
텔레비전을 보던 이수현이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의사 얼굴 보고 있었냐. 어이구, 이젠 그 안 생긴 의사들이 또 논문 쓰자고 달려들걸.”
“멍청이들. 내가 눈 감고 있으면 깨어 난지도 모를걸. 논문거리를 그리 호락호락하게 내줄 거 같아?”
이수현은 흥흥 웃으며 이수호에게 텔레비전이 보이지 않으니 저리 비키라고 손짓을 했다. 이수호는 아직도 그녀의 왼손과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들의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수호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차례대로 구할 거다. 몸이랑 머리가 붙어있는 본체가 제일 어려운 거니까, 그거 해결했으니 반은 된 거야. 그것 때문에 내 명이 십 년은 줄었을 거다. 아무튼 이제 남은 작업이 귀찮긴 하겠지만 할 만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무당 만월당의 호언장담에 이수호는 마음속의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엄마가 있어야 해. 엄마가 최고야. 엄마 만세.
“그런데 오른손은 좀 까다로웠을 텐데, 어떻게 용하게 잡았다?”
과일을 깎던 어머니가 아들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좀 하잖아요. 어머니.”
“그래. 그 김에 내림굿 받아.”
“됐어요. 빨리 걔네 다 잡아 족치세요.”
“말이라도 못하면. 으이구. 그런데 너 그거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않았더라.”
“……수업 좀 들을 걸 그랬어요. 헤헤헤.”
발(發)의 주문을 내뱉기 전에 이수호는 자신이 밟고 있던 그림자를 놓아주었다. 피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는 그것의 운명이었다. 자신은 그 운명을 선택할 권리를 놓아버린 것이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명확히 떠올리진 못했다.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새타니의 기억을 읽고도 아무런 감정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린 귀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발밑의 어둠이 무너지면서 이수호는 그럼 약속을 지키도록 하지, 라고 속삭이던 목소리를 통해 그것이 소멸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이수호는 그것이 어디 깊은 산속에 처박혀 동물시체나 파먹으며 살길 바랐다. 물론 어디선가 흉악한 흉괘를 벌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그때는 반드시 자신이 찾아내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한 번 완전히 읽어낸 혼의 기척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팔이는 이제 이수호의 손바닥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자신의 아래에 두고 부릴 수도 있겠지.
“괜한 짓 하지 마라.”
“……안 해요.”
어머니에게 생각을 읽힌 것 같아 이수호는 뜨끔해하며 대답했다. 얼굴만 봐도 천리를 내다본다는 만월당의 명성은 역시 그냥 나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사과를 깎아 접시에 담아놓자 이수현이 턱짓으로 이수호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뭐야. 손 없어?”
“나 왼손잡이인 거 몰라? 왜 하필 오른손을 가져왔어!”
“누나가 잡으러 간 놈이 오른손이었는데 그럼 어떻게 해!”
“사과나 냉큼 바쳐.”
이수호는 으이구, 하며 포크로 사과를 찍어 수현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삭아삭 부서지는 소리에 이수현은 즐거워하며 리모컨으로 볼륨을 높였다.
어머니는 이모와 나눌 얘기가 있다고 자리를 비웠고 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아, 내가 잠깐 누워 있던 사이 쟤네 1위 했네. 좀 뜨기 전에 친해질걸.”
“……누나, 부탁인데 사생팬 그런 거 하지 마.”
“사생팬은 누가 사생팬이야. 그냥 직접 가서 얼굴도장 찍고 그러는 거지.”
“그러지 마. 흉해.”
“닥쳐. 그러는 너는.”
“내가 뭘?”
“저 니 대가리만 한 멜론 들고 온 녀석,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신…….”
“으악!”
이수호가 두 손으로 누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걸 다 듣고 있었어? 정신 빠져있던 거 아냐?”
“그래도 귀는 열려 있잖아.”
이수호는 아아, 하고 비탄에 젖은 탄성을 내지르며 침대에 몸을 숙였다. 이수현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동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엄마가 니가 호모라는 걸 알면 어떻게 하실까?”
“…….”
“당장 내림굿 받으라고 하지 않을까?”
“결론이 뭐 그래!”
“후후후후. 그렇다는 거지. 아, 시원한 식혜가 먹고 싶다.”
“식혜? 알았습니다.”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비굴함 따윈 잠시 자신의 사전에서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 오는 김에 햄버거랑 포테이토도 사와. 니네들이 여기 와서 햄버거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몸이 얼마나 햄버거를 원하게 됐는지 알아!”
이수호는 기가 막혔다. 자신들이 병실에서 나눈 얘기를 다 들었다는 것인가. ……그럼 설마 뽀뽀를 한 것도…….
“근데 설마 너 걔가 첫 키스는 아니지?”
“으아악! 안 돼! 말하지 마!”
“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보고 며칠 뒤에 오라고 할걸. 그럼 다 말했을 거 아니야. 누나, 오늘은 내가, 히히히힛.”
이수현이 동생을 흉내 내며 오른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수호는 누나가 눈을 뜨지 못했던 십 분 전이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수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이수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누가 그러게 솔로 앞에서, 그것도 병실에서 그렇게 닭살 부리래? 왜 뽀뽀는 하고 난리야. 내 오른손이 분노로 들썩거리는 거 못 봤어?”
“내가 하자고 한 게 아니라 걔가……, 으, 몰라. 가서 사 올게.”
“야. 사 오는 김에 시디도 사와. 쟤네 싱글 새로 나왔어. 아 맞다. 사인도 받아와.”
“내가 쟤네 사인을 어떻게 받아와!”
“글쎄. 나야 그 방법은 모르지.”
이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아무튼 사인 잘 받아와.”
“……나 고3이야.”
“놀자 고3인 거 다 알아.”
“…….”
“텔레비전 안 보여. 궁딩이 저리 치워. 우리 예쁜이들 봐야 해.”
이수호는 이마를 감싸고 병실을 걸어 나왔다. 병실 문을 닫으려던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누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누나도……, 거기서……, 아버지 봤어?”
“……아니.”
이수호는 잠시간의 머뭇거림에서 수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도 문제였지만 이수호는 누나가 한 달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누나는 어릴 적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아버지의 죽음하고 연관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의 자신처럼.
“난 우리 애들만 잔뜩 봤지. 빨리 나가서 사와.”
“응. 알겠어.”
병실의 문을 닫으며 이수호는 누나가 머물러 있던 환상이 과연 그녀가 말한 대로 아이돌이 잔뜩 있었다는 그 방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지만 그는 구태여 누나의 거짓말을 파헤치지 않는다. 누구나 가슴 속에 묻어두고 싶은 시간들이 있을 테니까. 자신보다 강한 누나가 새타니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를 처음에 이수호는 새타니가 강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누나는 자신보다 깊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것이다. 이수호는 누나가 가슴 속에 묻어둔 그 시간이 아마도 자신의 것과 매우 닮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환상은 아버지가 죽기 전날의 밤이었다. 그날은 가족들이 모여 오랜만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누나는 언제나처럼 아이돌이 나오는 가요프로그램을 보자고 주장했고 아버지는 바둑채널을, 어머니는 막장드라마를 원하셨다.
이수호는 그 가운데에 앉아 나름, 단란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 시간들을 지켜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즐겁고 가슴이 뿌듯해져 어떤 프로그램을 봐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꿈인 줄 알면서도, 그는 리모컨을 두고 싸우는 가족들 사이에 앉아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일상에 앉아 그는 일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돌아와야 할 일상은 다른 곳에 있음을, 이수호는 한 조각의 현실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아, 쌀쌀하네.”
병원 밖으로 나온 그는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햄버거와 포테이토, 콜라와 식혜, 시디였다. ……시디는 사인본이어야 했지만.
차가워진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이수호는 핸드폰을 꺼내었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수호자이자 지금은 소소한 일상으로 자신의 시간을 지켜주고 있는 그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뒤에 여보세요, 하는 상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야, 하고 대답하자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부드러운 바람이 이수호의 이마에 축복의 인장을 그리듯, 스치고 지나갔다.
누나가 눈을 떴다는 얘기를 할까, 엄마가 돌아왔다는 말부터 꺼낼까, 아니면 네 도움을 좀 받아 사인시디가 필요하다는 부탁을 해야 할까. 이수호는 사소하지만 즐거운 고민들 사이에서 미소 지으며 늦은 저녁의 가을 길을 걸었다.
이수호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는,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