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문 앞에 선 신현제는 초인종을 누르려다 주먹을 쥐고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던 그는 다시 대문 앞으로 돌아와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초인종을 누르지는 못했다.
“젠장.”
신현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수호는 오늘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아무리 이사장의 입김이 세다 해도 수업 도중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징계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아, 존나 미치겠네.”
징계를 먹고도 신현제의 머릿속은 복도에서 다 뜯어진 셔츠를 붙들고 자신을 바라보던 이수호의 얼굴로 가득 찼다. 상처로 울긋불긋한 얼굴과 얻어맞아 부은 듯한 코, 창백한 얼굴.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신현제는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쓸려 눈앞이 번쩍거렸다. 음악실에서 헐벗은 이수호의 위에 타고 있던 김진철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되는대로 내뱉었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독한 말들을 쏟아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수호는 네 앞에서 꺼져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결국 반성문만 쓰면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수호는 도중에 학교를 나가버린 괘씸죄가 더해져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정학 처분을 받았다.
거기에 대한 알림장을 들고 신현제는 이수호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시발, 아오, 썅.”
대문 앞에 주저앉은 신현제는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담임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 했지만, 신현제가 정학을 알리는 종이를 이수호에게 건네주겠다고 먼저 나섰다.
“아으, 진짜.”
신현제는 거칠게 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이수호를 찾아갈 이유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었다. 결국 그는 담임에게 얻은 이수호의 집 주소를 손에 들고 대문 앞에서 30분째 초인종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 젠장. 될 대로 돼라.”
결심을 굳힌 신현제는 벌떡 일어나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띵동, 띵똥.
세 번의 초인종 소리가 이어졌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구세요,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신현제는 저도 모르게 문 옆에 바짝 붙어 몸을 감추었다. 몇 번 더 누구세요, 하고 묻는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을 하려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폰의 연결이 끊어졌다.
“으악, 미치겠다. 시발!”
신현제는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초인종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이번에는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너무 일찍 이수호와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신현제는 일단 재빨리 손으로 옷매무시를 고쳤다.
대문이 열렸다. 앞머리를 위로 훤히 올린 이수호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신현제는 긴장이 되어 혀가 굳어버렸다.
“……어, ……어.”
놀란 것은 이수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입는 동물이 그려진 잠옷에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를 머리끈으로 묶고서 뛰어나온 터였다. 한 손에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그거로 나 때리려던 셈이냐.”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른 귀엽다는 생각을 밀어내며 신현제가 던진 첫마디였다.
“……너인 줄 몰랐어.”
이수호가 멍한 얼굴로 대꾸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신현제가 자신의 집을 찾아오다니. 자신의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꺼지라고 그 지랄을 하던 신현제가, ……여기에 오다니.
“이거.”
신현제가 주머니에서 네 번 접은 종이를 꺼내 이수호의 앞에 내밀었다.
“뭔데.”
“너 정학 받았다는 거 알리는 통지서.”
“…….”
“걱정 마. 말이 정학이지 학생부에는 올라가지 않아. 교내 봉사만 하는 거지. 내일부터 연휴잖아. 눈 가리고 아웅이야.”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황금 같은 추석 연휴의 시작이었다. 거기에 개교기념일, 학교장 재량 휴일까지 겹쳐 이번 연휴는 총 9일이나 되었다.
싸움에 가담한 학생들은 모두 정학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 재학 중인 학생 중에 학교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고 있는 신현제 부모님의 입김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정학 처분이되 학생부에는 올리지 않고 교내 봉사를 하는 것으로 처분이 내려졌다. 연휴에 정학이라니. 신현제는 듣자마자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살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정말 아웅이네.”
이수호는 종이를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종이를 건네줬으니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는 볼일이 없었다. 그럼 간다, 라고 중얼거린 신현제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고 그래 잘 가, 라고 대답한 이수호는 문을 닫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땅만 보고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잠깐…….”
“잠시…….”
멋쩍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다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수호가 어색함을 떨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들어와. 싫지 않으면.”
싫지 않으면, 이란 말은 일부러 작게 중얼거렸다. 신현제는 대답하지 않고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끝까지 싫지 않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이수호는 등 뒤로 야구방망이를 질질 끌고 계단을 올라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의외로 잘 사는군.”
“찢어지게 가난하게, 단칸방에 사는 줄 알았어?”
“그래.”
“…….”
이수호는 신현제가 거짓말을 하는 법을 좀 배웠으면 하고 바랐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신현제는 예의 바른 목소리로 실례합니다, 라고 인사하고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는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왜?”
이수호의 시선을 느낀 신현제가 물었다.
“……아니, 너 의외로 예의 바르다 싶어서.”
“귀하게 자랐으니까.”
“그래. 그렇지.”
이수호는 투덜거리며 현관 옆에 야구 방망이를 세워두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인터폰으로 화면을 확인했을 때 누구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어 그는 한 손에는 야구 방망이 다른 한 손에는 부적을 쥐고 밖으로 뛰어나간 것이다. 물론 부적은 잠옷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며 신현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당집은 처음이라 신기한가 본데, 여기는 그냥 가정집이야. 신당은 다른 곳에……, 아무튼 사람 사는 집이라고.”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자꾸 말에 뾰족하게 가시가 돋쳤다. 이수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누르고,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마실 거, 줄게.”
신현제가 소파에 앉는 것을 보고 이수호는 냉장고로 가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손님이 오면 음료수는 쟁반에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는 달랑 주스를 담은 머그컵만 들고 나갔다. 신현제를 손님으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마셔.”
“무가당이야? 생과일 백 프로?”
이수호는 대답하지 않고 신현제에게 내민 주스를 자신이 홀랑 마셔버렸다. 입술을 닦으며 그는 그럼 넌 물이나 마셔, 하고 물컵에 물을 담아 내주었다. 신현제는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가만히 컵을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거실에 서 있는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초침이 48번 움직였을 때, 신현제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사과해.”
“……뭐?”
“사과하라고. 나 속인 거.”
“…….”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이수호는 실제로 그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씨나락이란 종자로 사용된 씨를 뜻한다. 한해의 농사가 되지 않으면 농부들은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가 된 말이었다. 어릴 적에 시골에 있는 친가 쪽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이수호는 아직 여물지 않은 벼를 갉아먹고 있는 등이 굽은 노인을 보았다.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어머니는 저것은 농사를 망치는 귀신으로 벼멸귀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셨다. 그 귀신의 이름이 벼멸구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도.
조용한 농가의 밤에 아직 덜 익은 이삭을 갉아먹던 그 사각거리는 소리를 이수호는 잊지 못했다. 사람들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네, 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의 귀에는 그날 밤 들었던 소리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지금 신현제의 말을 들은 이수호의 귀에는 그날의 소리가 재생되었다. 저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생각해보고 용서해주든가 하지.”
신현제는 이제야 자신이 이 집에 온 이유를 찾아냈다는 생각에 숨통이 트였다.
“…….”
반면에 그 말을 들은 이수호는 가슴이 콱, 막혔다.
진심으로 사과하면, ……심지어 생각해보고 용서를 해주겠다고?
이수호는 눈을 부릅뜨고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인간의 언어인가 귀신의 말인가 구분하느라 애를 썼다.
“사과해.”
신현제가 고개를 쳐들고 그렇게 말했다. 이수호는 결론을 내렸다.
“됐어.”
그는 신현제의 손에 들린 물컵을 빼앗았다. 이건 인간의 소리도, 귀신의 소리도 아닌 개소리였다.
“잘 가, 안녕. 배웅은 안 한다.”
이수호가 차갑게 축객령을 뱉었다. 신현제가 이수호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누군가 심장을 회칼로 설컹설컹 자르는 것처럼 뜨끈한 고통이 퍼졌다.
“시발! 그럼 어떻게 하라고! 사람 속여 놓고, 복수했다고 내가 패서 그랬다고 그러는 사람한테 뭐라고 하라고요!”
신현제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제가 이수호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존나 머리 싸매고 이벤트까지 했는데 그날 당신이, 네가, 그놈이라고……, 하, 젠장. 내가 병신이지.”
신현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보면 이수호를 못 알아본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이었다. 같은 반 무당집 아들을 한 명의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덩어리로 여긴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그렇게 많이 본 얼굴인데, 그렇게나 자주 마주친 사람인데, 그렇게나…….
“그래. 마음대로 해. 그 종이 난 건네줬고 담임이 하라는 말 전했고, 볼일 없으니까. 난 꺼진다.”
신현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이 좆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좋아했던 사람에게 속았다는 그 더러운 기분을 뒤로하고 이 집까지 찾아왔는데, 결국 이수호에게 들은 소리는 집에서 나가라는 말이었다.
다친 데는 괜찮냐, 아프지 않냐,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싸움에 니가 끼어드냐, 정학이긴 해도 걱정할 거 없으니 연휴 끝나고 조용히 다시 학교에 나와라, 누나는 괜찮으냐, 오디션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여기에 오기 전에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결국엔 이렇게 쫓겨나는 것이다.
신현제는 화가 치밀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자신도 병신 같았고 자신을 집에서 내쫓겠다는 저놈도 괘씸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뒤죽박죽 섞여 신현제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신현제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집에서 나가면 응급실에 갈 생각이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던 순간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신현제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도 이수호는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망치로 누군가 머리를 내리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음악실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녀석이 자신의 어깨를 의자로 찍어 누를 때도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이건 분명히 몸 어딘가가 심각한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신현제가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119에 전화를 걸려면 몇 번에 전화를 걸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대문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신가요.”
초인종을 누르며 그렇게 묻는 사람은 밴드의 멤버 중, 가장 신현제의 신경을 긁던 우장일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이수호가 달려 나왔다. 이번에는 야구 방망이 없이 나온 이수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신현제는 복통까지 느껴야 했다.
“어이. 원만이.”
“어, 장일이 형.”
이수호는 대문 밖에 서 있는 우장일을 발견하고 놀라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문을 열어주면서도 그는 연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사장님한테 여쭤봤어. 다들 걱정하고 있어.”
“……네.”
“밥은 잘 챙겨 먹고? 며칠 사이에 얼굴이, ……얼굴이 왜 이래. 설마?”
우장일의 날카로운 시선이 계단 중간에서 배를 잡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신현제에게 향했다. 신현제는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짜증도 나고 화도 치밀어 죽겠는데, 우장일까지 저러니 딱 죽을 맛이었다.
“아니거든요, 썅, 내가 얘를 왜 때…….”
……때렸다. 예전에 잔뜩.
신현제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다음 말을 삼켰다.
“학교에서 일이 있어서요. 괜찮아요. 별거 아니니까.”
대신 이수호가 상황을 수습했다.
“그래? 누나는 좀 어떠셔?”
“같아요. 의식은 아직 없고, 별다른 문제도 없고.”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둘 다죠. 들어오세요.”
이수호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자 계단을 내려가려던 신현제는 멈칫하고 그 자리에 섰다.
“넌 나가던 길인가 보네? 잘 가라.”
우장일이 신현제에게 성의 없는 인사말을 날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이수호도 힐끔 신현제를 쳐다보더니 그럼 잘 가, 하고 인사했다.
사실 이수호는 신현제를 붙들기 위해 달려 나왔다. 그를 이렇게 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슬리퍼도 거꾸로 신고 밖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대문 밖에 서 있던 우장일을 본 것은 그 후였다. 이수호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대문을 열어주면서도 이수호의 신경은 온통 계단에 서 있는 신현제에게 쏠렸다.
옆을 지나가면서 이수호는 그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우장일이 있는데 신현제를 붙들고 머릿속으로도 정리가 되지 않은 얘기를 떠들어댈 수는 없었다.
“집 좋네.”
우장일이 현관에 들어오면서 말했다.
“제가 되게 못살아 보이나 봐요. 왜 오는 사람마다 그 얘기지.”
자신의 손님으로 오늘까지 이 집에 온 사람은 신현제와 우장일, 둘뿐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이수호가 중얼거렸다.
“아니. 집이 좋다고 칭찬하는 말이었어. 신기한 것도 많네.”
우장일이 방문마다 붙어있는 부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거…….”
설명을 하려던 이수호의 말을 가로챈 것은 아까 꺼져주겠다고 나가던 신현제였다.
“얘네 집 무당집이에요. 그것도 몰랐어요?”
“…….”
“……. …….”
“아무리 생각해도 분해서 그냥 못 가겠어. 사과 듣기 전에는.”
신현제가 운동화를 벗어 나란히 모아두며 말했다.
“……꺼져주겠다며.”
이수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꺼질게.”
네가 사과하면, 이라는 단서가 재빨리 붙었다.
이수호는 기가 막혀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굴고 나간 게 벌써 두 번이다. 내 인생에서 꺼지라고 하더니 이제는 사과하기 전까지는 못 가겠다고 한다.
“사람이……,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
“내 맘이지.”
신현제가 코웃음을 치며 권하지도 않았는데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되도 않게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뭐해요. 앉아요. 아, 얘네 집에 생과일 무가당 주스는 없으니 목마르면 생수 마셔요.”
“둘이 친했어? 싸운 거 아니었나?”
그날 병원에서 원무과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우장일은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어지간해서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누나의 일로 정신이 없는 애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이냐고 물었지만 이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김병두와 이태섭도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장일은 그 새끼 앞으로 눈앞에 보이면 가만 안 둔다는 으름장을 놓으며 수호를 다독였다.
“난 또 절교한 줄 알았지. 절교할 거 아니면, 그런 자리에서 그따위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하하……, 장일이 형.”
이수호는 우장일이 의외의 독설가라는 태섭의 말이 사실임을 지금 눈앞에서 확인하는 중이었다.
“난 그래서 다시는 안 보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사과받으면 갈 겁니다.”
이수호는 식탁에 놓여있던 사과를 하나 집어 들어 신현제에게 힘껏 집어 던졌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신현제가 사과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야. 사과받았으니까 가.”
우장일이 웃으며 말하자 신현제는 대답 없이 사과를 한입 아삭, 베어 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뭐 드실래요? 커피 타드릴까요?”
“그래. 네가 타주는 커피 한잔하자.”
“나도 줘.”
신현제가 끼어들었다. 이수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커피 머신에 캡슐을 얹고 커피를 내리는데 우장일이 불쑥 그의 뒤에 섰다.
“어, 아직 커피 안 됐는데.”
“알아.”
우장일이 팔짱을 끼고 서서 흠, 하고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저 녀석이 한 얘기는 내가 알아도 되는 거야? 아님 못 들은 척 해줄까.”
“상관없어요.”
이수호는 컵에 커피가 모두 내려온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머그잔을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 무당하는 거 맞아요. 형들에게 말 안 한 이유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그거랑 난 상관없었으니까.”
상관없다, 는 현재형은 사용할 수 없다. 지금은 상관이 생겼으니까. 결국 그 문제로 오디션도 포기하고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뭐. 그렇게 알고 있을게. 냄새 좋은데.”
우장일이 머그잔을 받아들고 커피 향을 맡으며 웃어 보였다. 이수호는 보통 사람이라면 거리낄 수 있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는 우장일이 고마웠다.
“물 줘요.”
신현제가 불쑥 나타나 요구했다. 신현제까지 부엌으로 들어오자 부엌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수호는 앉아서 기다리라고 손짓을 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가져갔다.
거실에 앉은 세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까 둘만 있을 때 느꼈던 미묘한 침묵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이수호는 우장일에게 말을 꺼냈다.
“돈이요, 바로 갚을게요. 통장에 돈 있어요.”
“나중에 갚아. 어머니랑 아직 연락 안 닿았다며.”
“……네.”
“그때 갚아. 어디 도망갈 건 아니지?”
“네…….”
“그럼 됐어. 넌 우리 밴드 거라니까.”
우장일이 이수호의 뺨을 쥐고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신현제는 잠시 잊었던 복통이 다시 고개를 쳐든 것을 느꼈다.
“오디션은 아예 이제 아웃이야?”
“……네.”
이후로 오디션 담당자에게 생각이 바뀌면 연락을 달라고 전화가 오긴 했지만 이수호는 거기에 응답할 수 없었다.
“걱정 마. 너 정도 실력이라면 기회가 다시 올 거야. 우리 밴드하고 같이 데뷔해도 좋고.”
“요즘 밴드 음악이 어디 팔려요?”
팔리지 않는 밴드의 자칭 매니저 신현제가 말했다.
“솔로해요. 솔로.”
“……내 맘이지요, 그건.”
이수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밴드로 데뷔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신현제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둘이 동갑이라며. 태섭이가 그러던데. 아니야? 왜 존댓말 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우장일이 물었다. 아마 그 얘기로 둘이 다툰 것 같다고 태섭이 살짝 귀띔을 해준 것이다.
“그러게요.”
이수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분명 학교에서는 잡아 죽일 듯이 욕설을 찍찍 내뱉던 신현제가 어느새 자신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반반씩 섞어 하고 있었다.
신현제도 거기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리를 뒤로 훤히 넘긴 이수호의 눈을 보면 어쩐지 존댓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녀석이 같은 반 왕따, 무당집 아들 이수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반말이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셨어?”
우장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전화가 안 돼요.”
“음, 경찰에 말해보는 건?”
“모르겠어요, 지금은…….”
이수호가 말끝을 흐렸다.
누나가 저렇게 되고 나니 어머니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찰에게 신고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라면 어머니는 이미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이수호는 어머니가 중요한 문제에 봉착했고 아마도 그것이 누나와 관련되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저런, 괜한 말을 꺼냈네. 미안하다.”
“아니요. 괜찮아요.”
“누나 옆에는 지금 누가 있어?”
“이모가 계세요. 중환자실은 하루에 두 번만 면회가 가능해서……, 오늘 저도 하루 종일 있다가 왔는데 그냥……, 그러네요.”
신현제는 담임이 하루 종일 이수호네 집에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힘들겠다.”
우장일이 수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신현제는 할 수만 있다면 문신이 손가락 마디까지 내려온 우장일의 손가락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어느 정도.”
예의상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지금은 현실에 어느 정도 순응한 상태였다. 누나가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의식불명의 원인인 존재를 찾으면 된다. 그 상대가 녹록치 않을 것임을 알지만 어머니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희망이 있다고, 이수호는 믿었다.
“너 그날 울었다니까 사장님도 걱정 많이 하시더라. 너 웬만하면 잘 안 운다며.”
“네. 안 울어요.”
신현제는 병원에서 의자에 쭈그려 앉아 하염없이 울던 이수호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 부근에 뜨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왜 이럴까. 왜 이 사람과 관련된 일에는 이렇게 몸 여기저기가 아픈 것일까.
신현제는 손바닥으로 가슴 부근을 누르며 슬쩍 낯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우장일이 심술궂은 한마디를 더했다.
“얘 가고 나서도 한참 울었잖아. 너.”
“……. 그 얘기는……."
“아, 잠시만 나 전화 좀 받고.”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우장일이 잠시 양해를 구하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신현제의 반대편으로 돌렸다.
“울었어?”
신현제가 물었다.
“…….”
“나 때문에?”
“아니.”
“울었다는데?”
“……눈에 먼지 들어가서 그래.”
신현제는 학교에 둘이 갇혀 외계인을 만났던 날 자신을 울려달라고 다급하게 외치던 이수호를 떠올렸다.
“잘 울지 못하는 거 아닌가? 그랬잖아. 저번에도.”
“기억 안 나.”
이수호가 고개를 돌리며 청문회 중인 국회의원 뺨치는 뻔뻔함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나 때문에 울었어요? 대답해 봐.”
“아니라니까요.”
“용서해줄게요. 말해 봐.”
용서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는 울컥했다. 간신히 누르고 있던 분노가 그의 마음을 채웠다.
“아니라고요! 왜 자꾸……!”
“자꾸 얘가 너 귀찮게 해?”
어느새 통화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온 우장일이 물었다. 이수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귀찮게 굴거나 괴롭히면 말해. 내가 해결해줄게.”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신현제가 우장일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때 가서 보면 되겠지.”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일었다. 이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어디선가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내 거 아닌데.”
우장일의 벨소리는 오아시스의 노래였다. 내한을 했던 해에 오아시스의 공연을 본 그는 평생 자신의 벨소리를 오아시스의 곡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로 그의 벨소리는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난 진동인데.”
신현제는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나는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거의 진동 모드로 핸드폰을 두곤 했다.
“나다.”
이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식탁에 놓아둔 핸드폰을 들고 여보세요, 라고 통화를 시작하자 두 남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갔다.
“아, 네. 네……, 예. 아니요, 그런 얘기는 한 적 없는데. 네……, 혹시 기억나는 거 있음 말씀드릴게요.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친 이수호는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나 한참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상대편에서 전화를 끊었는지 통화는 이내 종료가 되었다.
“핸드폰 샀어?”
“예. 아까 오는 길에. ……근데 통 뭐가 뭔지 모르겠네.”
이수호는 뺨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안 그래도 신현제가 오기 전까지 핸드폰 사용설명서를 붙들고 씨름을 하던 중이었다.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이수호는 핸드폰 전원을 켜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다른 기능은 사용하지 못하고 통화와 문자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간신히.
“그런데 전화는 누구야.”
“이모요. 뭐 여쭤보시는데……. 흐음.”
이수호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모는 혹시 너희 어머니한테 이상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라는 유언 같은 것을 들은 적이 없냐고 질문했다.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된 이후로 가족들 사이에서는 농담으로라도 나 죽거든, 이란 단어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죽음은 그들에게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그런데 유언이라니. 끔찍했다. 이수호는 이모가 이런 얘기를 제게 하는 연유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돌아가신 것도 아니다. 이수호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죽음을 느낀 것처럼, 어머니는 살아있다고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때 이수호의 머릿속에 어떤 순간이 퍼뜩 떠올랐다. 어머니는 누나와 자신이 속을 썩이거나 말썽을 부리면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내가 네놈들 행패를 일기장에 다 써서 김장독 안에 묻어놨다고.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유일하게 직접 만들지 않는 음식이 김치였다. 어떻게 만들어도 김치가 익기도 전에 맛이 가버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머니는 그게 귀신들의 장난이라고 여기며 이마트 아주머니들이 김치를 맛있게 담가주시니 굳이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담글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셨다. 즉, 이수호네 집에는 김장독이 존재하지 않았다. 김치냉장고라면 모를까.
“……설마 김치냉장고에 그런 걸 두지는 않았겠지.”
이수호는 혼자 부엌으로 가서 김치냉장고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는 역시 잘 익은 각종 이마트 아줌마표 김치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다.”
이수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신현제가 물었다.
“뭐가? 뭐가 이상한데.”
“이모가 그런 걸 여쭤보시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아서.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수호네 가문은 대대로 신기가 대물림 되는 국내에 몇 없는 세습무였다. 이모도 신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뭔가 짐작되니까 그런 말을 했지 쓸데없이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인데. 설명을 해줘야 같이 고민을 하지.”
우장일이 물었지만 이수호는 대체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따름이었다.
“설명해드려도 안 믿으실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나서 믿을지 안 믿을지 결정할게. 최소한 그 선택권은 듣는 사람에게 줘야 하지 않아?”
“난 믿어.”
신현제의 발언에 이수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외계인 얘기하는 거지, 그거. 전에 나랑 단둘이 학교에 남았을 때, 봤잖아. 우리 둘이.”
신현제가 우리 둘, 을 거듭 강조하며 말했다. 우장일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둘이 학교에 남다니? 둘이 같은 학교 다녀?”
“예? ……아, ……예.”
이수호는 저 기괴한 문장에서 학교에 남았다는 대목에 집중하는 우장일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학교 다니는데 몰랐어? 나이도 같으면 같은 학년일 거 아니야.”
“…….”
“……. …….”
같은 학년일 뿐만 아니라 같은 반인 두 사람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지금.”
신현제가 주제 환기에 나섰다. 이수호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봤다는 것은 삼 대에 거쳐 반성문을 써야 할 만큼, 그에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누나랑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게.”
신현제의 물음에 이수호는 얘가 생각보다 바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뭔데.”
우장일이 물었다.
“외계인이요.”
“외계인?”
“있어요. 모르시죠.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귀신이요.”
이수호는 신현제가 사용하는 단어를 정정해주었다. 그와 동시에 신현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귀신?”
“네. 귀신이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 귀신.”
“귀신이 어디 있어. 세상에 그런 건 없어.”
신현제가 정색하며 이수호의 말을 반박했다.
“넌 그럼 외계인으로 믿어. 난 귀신으로 할래.”
신현제는 발끈했다. 정체를 밝힌 이수호가 그날 이후부터는 묘하게 자신을 막 대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장일이 형은 귀신 믿어요?”
“아니. 그다지.”
“그렇죠. 보통은.”
이수호 역시 보통 사람이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른 풍경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아무리 앞머리로 시야를 가리고 저쪽 세계를 외면하려 해도 한쪽 발은 거기에 내딛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럼 믿지 않는 걸로 해요. 나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걸 믿으라고 권하고 싶지도 않고 설득시킬 자신도 없거든요. 대신 말이에요.”
이수호는 건장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삽질 좀 해보실래요?”
“여기 있는 거 맞아? 진짜?”
“글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젠장. 어디 파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김장독을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너 같은 거 꼴 보기 싫다고 내 인생에서 당장 꺼지라고, 네가 안 꺼지면 내가 꺼져주겠다고 패악을 부리던 신현제가 구슬땀을 흘리며 삽질을 하는 와중에 말했다.
“어디 근처, 이런 단서도 없어? 그냥 무작정 앞마당을 다 파야 해?”
삽에 발을 걸치고 셔츠로 땀을 닦던 우장일도 한마디 던졌다. 근처에서 호미로 땅을 파고 있던 이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땅을 파봐야 한다는 거밖에는.”
“이게 대체 네 누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있는데, 설명은 못 해요. 그냥 해주세요.”
텃밭을 가꾸는 취미가 있는 수호의 어머니는 창고에 삽과 호미 등을 구비해 놓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창고에는 삽이 딱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우장일과 신현제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수호는 호미를 챙겨서 옆에서 같이 땅을 파기로 했다.
삽질을 시작한 두 사람은 병신 삽질하네, 라는 말이 대체 왜 나온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헛발질과 헛삽질을 거듭하던 두 사람은 작업을 시작한 지 30여 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된 삽질을 터득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와. 장일이 형 잘하시네요. 전에 삽질 좀 하셨나 봐요.”
“드럼 하다 보면 느는 게 팔 힘밖에 없잖아.”
우장일이 독수리와 십자가가 새겨진 오른팔을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신현제는 힘차게 삽질을 시작했다. 우장일이 피식 웃으며 팔에 힘을 주어 삽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며 말없이 십여 분간 삽으로 땅만 파댔다.
혼자 등을 지고 호미질을 하던 이수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가 성인 한 명이 능히 파묻힐 웅덩이 두 개를 발견하고 기함을 토했다.
“이게 뭐예요. 이렇게 깊이 팔 필요 없는데! 빨리 다시 묻어요.”
“판 김에 뭐라도 파묻자.”
“좋은 생각인데. 뭐라도 파묻고 싶네.”
신현제와 우장일이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수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여기저기 호미로 땅을 파며 앞마당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항아리를 찾았다.
“항아리 있는 거 맞아? 없는 거 아니야? 일부러 지금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지? 이 모든 게 나한테 복수하려는 거잖아. 지금.”
구슬땀을 흘리며 묵묵히 삽질만 하던 신현제가 드디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사납게 눈을 치뜨고 물었다.
“하기 싫으면 집에 가도 되는데…….”
이수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신현제는 누가 하기 싫다고 그랬어, 하고 성질을 부리며 다시 삽질에 열중했다. 그러나 한참을 세 사람이 앞마당을 뒤집어엎었지만 항아리는커녕 작은 상자 하나 찾지 못했다.
“잠시 쉬었다 하자.”
드럼으로 단련된 근육을 가진 우장일도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이수호도 지쳐서 계단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신현제는 들고 있던 삽을 집어 던지고 마당 왼쪽 아래에 있는 나무 등걸에 앉았다.
우장일이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피워도 되지? 하고 물었다. 이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려 하는데 신현제가 성질을 부렸다.
“미성년자 앞에서 무슨 담배예요. 기본 예의범절이 없어. 어른이.”
“넌 안 피우냐? 한 대 줄까?”
“안 합니다.”
“너는?”
우장일이 이수호에게 물었다.
“저는 목에 안 좋아서 이젠 안 피워요.”
“그럼 나도 피우지 말아야겠다.”
이젠 안 피운다는 이수호의 말에 신현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 예전에는 피웠다는 얘기인가? 저게? 저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그러고 보면 저놈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을 때, 은근히 느껴지던 연상의 여유가 있었다.
알고 보면 이수호가 자신보다 이런저런 경험이 많을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신현제는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쉬는 틈을 타서 우장일이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이수호에게 어떤 노래를 들려주었다. 진지하게 음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신현제는 화가 치밀었다.
대체 자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저놈은 날 속인 놈인데. 화를 내고 두들겨 패도 모자랄 이 판국에 저런 왕따 새끼 비위 맞추자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삽질만 하고 있다니.
“……병신 삽질이군, 정말.”
그는 애꿎은 나무 등걸 아래를 발로 차면서 화를 삭였다. 그걸 본 이수호가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거기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그러거나 말거나 신현제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 말……!”
이수호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선 것과 동시에 신현제가 앉아있던 나무 등걸이 기우뚱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지반이 약해진 땅이 안쪽으로 무너진 것이다. 무릎 아래까지 다리가 쑥 빠진 신현제가 성질을 부리며 구덩이 위로 올라왔다.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큰일 날 뻔했잖아.”
“하지 말라고 내가 그랬……, 어!”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이수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자신의 무사함을 확인하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오는 이수호의 모습에 신현제는 마음이 한결 녹아내렸다. 근 한 시간을 삽질해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손바닥 따위 아무려면 어떠랴. 저런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준다면, 날 속인 것도 용서…….
“비켜봐.”
이수호가 신현제를 밀어내며 외쳤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히 구덩이 안쪽으로 갈색의 도자기 뚜껑이 보였다.
이수호는 손으로 구멍 안쪽을 파헤치며 항아리를 찾아냈다.
“여기다. 여기 있어요.”
“그런 데에 있으니 찾을 수가 없지.”
삽을 들고 온 우장일이 인상을 찡그렸다. 세 사람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항아리는 나무 등걸과 담벼락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신현제가 괜한 성질을 내며 발길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장소였다.
“나 아니었으면 절대 못 찾았을걸.”
“이런 걸 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 격이라고 하지?”
“그 뒷걸음질도 제대로 못 해서 한 시간 내내 삽질만 하시던 사람도 있는데요, 뭘.”
“두 사람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도와줘요.”
이수호는 아직 반쯤 파묻혀 있는 항아리를 가리켰다. 셋이 합심을 해 땅을 파헤치자 금세 항아리를 꺼낼 수 있었다.
김장 비닐로 잘 봉인되어 있는 항아리를 보는 순간 이수호는 생각에 잠겼다. 이걸 과연 열어도 되는 것일까. 이모의 말은 사실 별거 아니고 이건 엄마가 예전에 묻어뒀다 실패한 배추김치가 아닐까. ……이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뭐해. 안 열어보고. 이거 찾으려고 온 마당을 이렇게 만든 거잖아.”
신현제가 뚜껑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이수호가 안 돼, 하고 소리쳤다.
“내가 할게. 내가.”
단순한 항아리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저주라도 걸려있거나 귀신이 봉인되어 있어 뚜껑을 여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불행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수호는 불퉁한 얼굴을 한 신현제를 물러서게 하고 혼자 노끈으로 칭칭 감아놓은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까지 다행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수호는 팔을 항아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신현제는 불안함에 연신 입안이 말랐다. 학교에서 캐비닛 서랍 안에 손을 집어넣었을 때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다행히 이수호는 별일 없이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뭐지?”
이수호는 상자를 위아래로 흔들고 귀에 가져다 대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평범한 상자였다. 오목하게 파인 상자의 손잡이에 이수호는 어머니가 만든 부적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뭔가가 봉인된 상자가 분명했다.
“열어 봐.”
“보물찾기 같은데.”
두 남자는 이수호의 속도 모르고 눈을 빛내며 상자를 열어보라고 종용했다. 이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를 열면 끔찍한 무엇인가가 쏟아져 나올 수도 있었다. 지금보다 일이 더 꼬일 수도 있다. 누나의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고, 어머니를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저기요. 그만 돌아가 주실래요?”
“뭐?”
“뭐라고?”
“이거 저 혼자 열어보고 싶어서요.”
“왜? 이게 뭔데. 유품 같은 거예요?”
심각해진 이수호의 옆모습을 보며 신현제가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그에게 물었다.
“유품은 아닌데, ……위험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위험한 일?”
“위험한 일이 있는데 왜 혼자 열어?”
“그러니까 혼자 열어야죠. 그럼 두 사람 다 휘말리게 해요?”
“당연하지!”
“당연한 거 아니야?”
두 사람의 입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터져 나오자 이수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열어. 안 갈 거니까.”
신현제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우장일도 팔짱을 끼고 서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후우……. 난 몰라. 무슨 일이 생겨도.”
이수호는 한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상자에 붙은 부적을 떼어냈다. 파슷, 하고 안쪽으로 붉은 기운이 스며들어가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가 정확히 다섯 장 놓여 있었다.
“참, 위험해 보이네요, 그거.”
백지를 가리키며 뱉은 신현제의 말에 우장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어라, 이게 뭐야.”
오늘 참 이게 뭐냐는 말을 많이도 내뱉었다. 이수호는 백지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햇빛에 비추어보기까지 했지만 아무런 글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저 백지를 찾아내려고 삽질을……. 정말 말 그대로 삽질했군.”
신현제가 들고 있던 삽을 바닥에 던지는 바람에 항아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작은 파편이 튀어 수호의 목덜미에 가느다란 상처를 냈다.
“……!”
수호는 본능적으로 손바닥으로 목을 감싸며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야! 뭐하는 거야!”
“괜찮아요?”
놀란 신현제가 이수호의 손을 잡고 상처를 살폈다.
“젠장, 내가……, 괜찮아?”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신현제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수호는 얼굴을 확 덮치는 열기를 느꼈다.
“괜찮아. 그냥 피만 난 거니까.”
“봐봐. 상처 깊으면 가서 소독해.”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이수호가 뜸을 들이며 대답하는 연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신현제의 기분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이수호가 따로 복수를 계획하지 않아도 이것은 충분히 그에게 복수가 되었다.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그대로 신현제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피 묻었다.”
우장일이 이수호의 손을 가리켰다. 손에 묻은 피를 보려고 고개를 아래로 내린 이수호의 눈에 종이 위에 붉은 기운이 스멀거리다 사라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
상자의 봉인을 풀었던 순간 보았던 기운과 비슷했다.
“왜? 아파? 제기랄. 119라도 부를까?”
수호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는 것을 본 신현제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핸드폰을 꺼냈다.
“뭔 소리……, 잠깐만. 잠깐.”
이수호는 종이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분명하다. 붉은 기운이 종이의 표면에서 아지랑이처럼 스멀거리고 있다. 이수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배우던 수많은 주술을 떠올렸다.
“아! 아! 아!”
이수호가 종이를 들고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신현제는 심장과 연결되는 혈관이 지끈거리며 좁아들었다가 펴지는 기이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복통에, 두통에, 심장 질환까지…….
이수호와 연관이 되기만 하면 몸이 남아나지 않는구나. 조만간 대학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한번 받아봐야겠다고 신현제는 마음먹었다.
“나 이거 알아!”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이수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각난 도기를 집어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그었다.
“야 인마!”
“뭐하는 짓이야!”
둘이 기겁을 하든 말든 수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손가락으로 공중에 자신의 인장을 그리고 그 위로 종이를 통과시켰다. 공중에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움직이며 종이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종이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야.”
“…….”
신현제와 우장일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수호는 극적으로 떠올린 방법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종이를 들고 껑충껑충 뛰었다.
“좋았어! 좋아.”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던 신현제는 알 게 뭐야, 하고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떠오른 잡생각들을 치워버렸다.
“방금 전 그거, ……뭐였어.”
우장일이 황당함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종이를 가리켰다.
“이게 피로 맺은 봉인이라고 하는 건데, 그 이름을 가진 자의 직계가 아니면 풀 수 없는……. 설명해드려도 이해 못하실 거 같은데.”
부적으로 봉인된 상자가 억지로 열리면 원래 쓰여 있던 종이의 글자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 봉인은 직계의 피가 아니면 풀 수 없었다. 이중 잠금장치인 셈이다.
대체 그 방법을 배워다가 어디에 쓰냐고 투덜거리는 수호의 등짝을 후려치며 어머니가 언젠가는 쓸 날이 분명히 올 테니까 잘 외워두라고 호통을 치셨던 바로 그것이었다.
문득 이수호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자신의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킬 생각도 없거니와 그럴 자신도 없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주술을 보여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영 꺼림칙했다.
무당집 아들. 귀신들린 놈. 귀신이랑 얘기하는 기분 나쁜 녀석.
이수호는 자신의 뒤를 내내 따라다니던 별명들을 떠올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두 사람을 보내고 몰래 혼자 봉인을 해제하는 것인데. 너무 성급했다.
“그거랑 비슷한 거 아니야? 예전에 탐구생활에 나오는 거. 귤즙으로 글씨 쓰고 불 위에 올리면 글자 나오는 거. 그거 같은데.”
귀신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던 신현제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툭 내던졌다.
“그러게. 비슷하네.”
우장일도 단순한 그 논리에 금세 동화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호는 오늘만큼은 신현제의 쓸데없이 강직한 주관에 고마움을 느꼈다.
“뭐라고 쓰여 있어?”
우장일이 종이를 슬쩍 보며 물었다. 이수호는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단정한 어머니의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니. 수업을 제대로 듣긴 했구나. 장하다. 아들. 귀신에게 잡혀갈 일은 없겠다.」
여기까지 읽은 이수호는 피식 웃음이 났다. 주술이나 부적을 사용하는 수업을 들으면서 이수호는 기회만 되면 땡땡이를 치고 도망갔기 때문에 어머니는 늘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그러다 귀신에게 잡혀간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해왔었다.
「우선 네가 이 글을 읽고 있을 상황에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런 일이 오지 않도록 그동안 노력을 해왔는데. 역시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구나.」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되고 만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수호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신현제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고 턱짓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세 사람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집안에 들어와 앉으면서도 수호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읽어줄까?”
“아니, 됐어요.”
소파에 기대어 앉은 이수호는 마저 종이를 들고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날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네가 기억을 할지 모르겠다. 너와 누나가 동네에서 놀다가 잠시 어른들이 한눈을 판 사이,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게 되었지.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진 거란다.」
꿈은 사람의 무의식을 반영했다. 특히 수호와 같이 특이한 체질일 경우 꿈은 무의식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수호는 자신이 요즘 계속 꾸고 있는 꿈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했다.
「네 누나가 너를 데리고 간 곳에서 너와 누나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되었고, 손대서는 안 될 것에 손대게 되었다. 수호야. 우리 집안은 양쪽 세계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의무를 가진 사람인데, 가끔은 그 의무에 사로잡혀 힘에 도취되는 족속들이 생기곤 한단다. 너도 알다시피 가장 강한 신은, 첫 번째 딸의 첫째 딸, 그의 첫째 딸이 물려받는 것이란다. 태천무 가의 사람들 중에 그 첫째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거 같구나.」
이수호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힘을 가진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 사람들이 좋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 힘을 얻어내는 것을, 태천무에서는 엄격히 금하고 있었단다.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 일들을 저지른 사람들은 파문을 당했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우리들은 그것의 존재를 잊고 있었단다.」
“대명사가 왜 이렇게 많아? 대체 무슨 얘기야, 이건. 태천무는 또 뭐고?”
신현제가 손가락으로 편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다 읽고 설명해줄게, 하고 이수호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 그날, 다시 그 추악한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지. 난 아직도 그날 너희들이 그 항아리를 발견한 것이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지독한 불행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한단다.」
대체 항아리에 들어있던 돌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수호는 편지를 읽으면서도 어머니가 이렇게나 안타까워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넌 엄마가 늘 말했던 것처럼 그릇이 큰 아이야. 그건 우리 세계에서 좋은 의미로도, 혹은 그 반대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어. 큰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너의 존재는 커다란 악이 될 수도, 커다란 선이 될 수도 있단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이전에 잠시 집에 들어왔던 할머니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수호는 어머니가 자신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신내림을 받으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런 네 능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부끄럽게도 그들은 우리의 일족이며 가문에서 추방당한 태천무들이란다. 그 사람들은 신기가 있는 아이들을 골라 새타니로 만든 다음, 세대를 거듭해 이용하며 그 혼을 속박한단다. 원혼을 속박당한 새타니는 필연적으로 새우니가 되어 사람들을 공격하게 된단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말이다. 새타니와 새우니는 말이다……, 후우, 네가 수업만 제대로 들었어도 이걸 따로 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 밑에는 새타니와 새우니에 관련된 설명이 첨언되어 있었다. 이수호는 재빨리 그 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새우니는 태천무 가의 힘을 받은 사람에게 자신의 원한을 돌리게 된다. 단순히 죽이거나 저주를 받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몸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만단다. 그리고 파문을 당한 사람들은 몸을 빼앗긴 아이를 잡아다가 다시 새타니로 만들어,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는 것이란다. 악순환의 반복이지.」
“불법이잖아. 이거. 납치, 살해, 시체 훼손.”
우장일이 새타니와 관련된 부분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이수호는 아직도 힘을 갖고 싶다는 이유로 사람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 만으로 열여덟이 되지 않은 아이는,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된단다.」
이수호는 자신의 생일을 묻던 누나를 떠올렸다. 누나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문 사람들은 현존하는 모든 새우니를 봉인했고, 지난 백여 년간 새우니와 관련된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단다. 그런데…….」
이수호는 그런데, 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숨통이 턱 막혔다. 누나와 자신이 뜯은 항아리가 백여 년간 잊고 지냈던 끔찍한 존재를 일깨우게 만든 게 분명했다.
「결국 너희 둘이 그걸 찾게 된 것이지. 어떻게 그것이 거기에 놓여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결국엔 그렇게 되고 만 일을 언제까지 한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너희 누나는 달랐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신이 동생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고 몹시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했단다. 그래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것이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신내림은 이십 대 중반 이후에 받는다. 태천무 가의 사람들 역시 그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내림굿을 받은 것이다. 이수호는 그것이 누나가 그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누나가 그 좋아하는 일에 관련되어서는 자신에게 그 어떤 압박도 한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누나는 가끔 보면 무서울 정도로 악귀에 집착했다. 어디선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면 전국 어디라도 득달같이 달려가 무슨 일인지 알아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수호는 그것이 누나의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겼다. 한 번도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우리 집안에서 예외적인 존재이자 가장 큰 힘을 가진 너는 그들이 가장 노리는, 즉 증오하는 대상이란다. 너는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가물이니까. 결국 외할머니와 나, 그리고 수현이가 너의 수호자가 되었단다.」
수호자.
이수호는 그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단어가 어머니의 편지에서도 등장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호자는 네가 그 삶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호막과 같은 존재지. 하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두 사람이서 수호자 역할을 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들의 힘이 점점 세지고 우리의 역할에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현이와 나는 새우니의 종적을 찾고 있었지만 이미 한발 늦은 사건들뿐이었지. 네 올해 생일을 무사히 넘기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너의 자취를 아예 숨길 수 있을 텐데…….」
이수호는 사랑하는 아들아, 라고 시작되는 다음 문장의 서두를 읽는 순간 울컥해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면 안 된다. 그는 손으로 미간을 꾸욱 누르며 다음 장을 읽어갔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이걸 읽고 있을 때쯤이면 엄마는 아마 집에 없을 테지. 내가 네 곁에 있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최선이라는 사실만은 알아다오.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너희들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단다. 모든 것이 바르게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시 너희 곁으로 돌아갈 거란다.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며 기다리고 있어라. 만에 하나 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네가 스스로 너의 그릇 안에 담을 수호자를 찾아야 할 것이다. 명심해라. 아들아. 수호자는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란다. 수호자는 결국 네가 네 삶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사람이란다. 네가 수호자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수호자가 널 택하게 되는 거지. 그 마음이 너를 지켜줄 것이야. 행복과 불행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되어 삶을 만드는 거지. 행복만으로 가득한 삶은 존재할 수 없단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이 견디도록 하여라. 이런 EBS 어린이 만화 같은 교훈으로 편지를 끝내서 이 엄마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구나. 사랑한다. 수호야.
PS-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모와 상의해라. 이모 외에는 친족 중 누구도 믿지 말거라. 그리고 앞마당 파헤쳐 놓은 거 원상복귀 해놓아라. 엄마 텃밭 엉망으로 만들면 가만 안 둔다. 공부 열심히 하고, 학교 빠지지 말고, 누나 말 잘 듣고, 빨래는 흰색이랑 검은색은 구별해서 돌리고, 양말은 이틀 이상 신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이후로는 통상적인 잔소리로 세 장이 채워져 있었다. 이수호는 끝까지 모든 편지를 읽은 후에야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 편지의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야? ……무슨 공포영화 속에 나오는 얘기 같은데?”
같이 옆에서 편지를 읽고도 이 상황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지 우장일이 얼떨떨한 어조로 물었다.
“그 공포영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일상적인 코미디 영화나 로맨스 영화처럼 사는 건 아니잖아요.”
대답을 하고 나서 이수호는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또 우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의 옆에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눈치만 살폈다.
“결국 누나는, ……나를 숨기려다가 그렇게 된 거구나.”
우울한 중얼거림에 신현제는 선뜻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우장일이 이수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누가 등 떠밀어서 널 지키려고 하신 건 아닐걸. 기꺼운 마음으로 그랬을 거야. 그걸 네가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수는 없어. 난 외동아들이라 동생이 없어서 그런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너 같은 동생이라면 분명 나라도 지켜줬을 거야.”
“고마워요. 장일이 형.”
“그래. 넌 덜떨어졌으니까.”
고심을 하던 신현제도 한마디 던졌다.
“…….”
이수호는 이것이 신현제식 진심 어린 위로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어디가 불안하고 덜떨어져 보인다는 거야. 내가, 그래요?”
이수호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우장일에게 물었다.
“덜 떨어져 보인다기보다, 하하……, 좀 손이 가는 녀석이라는 느낌은 들지. 도와줘야 할 것 같고.”
“그러니까 그게 덜떨어졌다는 뜻이죠.”
신현제가 한 줄로 간단하게 요약했다.
“덜떨어지긴 누가! 저 진짜 재능 넘쳐요. 재능 맨이에요. 재능 맨.”
그렇게 말하는 수호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자 두 사람은 마음이 놓였다. 방금 전의 이수호는 온 세상의 모든 고통과 시름을 어깨에 얹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치자.”
“장일이 형까지 왜 그래요. 나 안 떨어졌어요. 딱 붙었어요.”
“그래, 그래.”
귀찮다는 얼굴로 신현제가 손을 두어 번 흔들자 이수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두고 봐.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라고. 나 진짜 독립적이고 능력 있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셈으로 하지.”
“아니라니까!”
자신을 노려보며 바락 대드는 이수호의 눈을 보며, 신현제는 차라리 이편이 낫다고 여겼다.
풀이 죽어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는 수호의 모습은 도무지 건강에 좋지가 않았다. 그는 이수호의 옆에서 슬슬 깐죽거리며 욕을 먹으면서도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결국 두 사람은 온 김에 저녁까지 먹고 가겠다고 하더니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편의점에서 맥주까지 사와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이수호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늘 꿈꿔오던 친구들과 보내는 집에서의 하룻밤이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터였다.
“뭐해. 안주 가져와.”
“…….”
신현제가 빈 접시를 흔들며 외쳤다. ……여기서 현실감이 떨어진다. 신현제라니. 자신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신현제는, 상상 속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이수호는 냉장고에서 노가리를 꺼내 구워서 두 사람에게 던져주고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모와 상의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 것이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뒤에 피곤한 기색이 묻어나는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응, 수호구나. 밥은 먹었어?」
자매라서 그런지 역시 어머니와 목소리가 퍽 닮았다. 수호는 마치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먹었죠. 별일 없죠?”
「응. 의사 선생님 아까 잠깐 뵈었는데 별일 없대. 다음 주쯤에는 일반 병실로 옮겨도 될 것 같대.」
결국 병원에서는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이모, ……새우니에 관해서 들은 얘기 있으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수호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 얘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외감을 넘어선 비참함까지 느꼈다.
「엄마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둔 종이가 있으니 찾아보게 하라고 시키셨거든. 그래, 그간 말은 못했는데 아무래도 너희 누나가……, 그것한테 먹힌 거 같아.」
우려했던 사실을 이모의 목소리를 통해 듣자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해요?”
「너희 엄마가 갔을 거야. 걱정 마.」
“먹힌 거라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묻는 수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어머니가 자신을 붙들고 귀신 얘기를 할 때 조금만 집중해서 들을 걸. 대체 그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이모 생각에는 일단은 네 누나는 신을 모시고 있잖니. 그래서 통째로 삼키긴 했지만 소화를 시킬 수는 없을 거야. 어떻게 하지는 못해.」
이모의 말에 이수호는 아주 미약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도 찾아와야지. 혼이 너무 오래 몸을 떠나 있으면, 제 몸을 찾지 못하거든.」
생령이 너무 오래 몸에서 떨어져 있으면 몸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이승을 떠돌게 된다. 자는 사람의 얼굴에 낙서를 하면 잠이 들었을 때 빠져나갔던 영혼이 제 몸을 찾지 못해 영원히 잠들게 된다는 미신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이야기였다.
“그렇죠……. 이모, 저 여쭤볼 게 있어요.”
「뭔데?」
“지금 제가 내림굿 받으면, 좀 더 도움이 될까요?”
죽기보다 싫다고 생각했던 일이다. 하지만 누나와 엄마를 위해서는 그 죽기보다 싫은 일도 할 수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것하고는 상관없어. 넌 그런 걱정 말고, 밥이나 잘 챙겨 먹고 있어. 이모가 시간 되면 집에 한 번 들를게. 알았지?」
“예. 그럼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고 이수호는 허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밤하늘이 오늘따라 무섭게 느껴졌다.
기다려라, 걱정하지 마라,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그것이 주변에서 그에게 하는 유일한 말이었다. 이수호는 자신이 그런 말을 듣는 이유가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결과는 자신이 초래했다. 이쪽의 일이라면 무조건 눈 막고 귀 막고, 고개를 돌렸으니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무력하다. 자신은 어느 쪽에서도 무력했다. 노래로 세계의 평화는커녕 오디션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으며 학교에서는 누구에게나 무시를 당하는 왕따였다. 그렇다고 무당의 세계에서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배운 바가 없어 있는 것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정말 구제불능이다.”
이수호는 혀를 차며 자신의 무능함을 원망했다. 땅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는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벌레 같은 자신이라 할지라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누나가 눈을 뜨는 것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우선 그렇다면.
“일단은 거기로 가봐야겠지.”
“어딜 가?”
“……!”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수호는 놀라서 몸을 돌렸다. 한 손에 맥주 캔을 든 신현제가 약간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요.”
그가 차가운 돌계단에 앉아있는 수호의 옆에 앉았다. 신현제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멍한 얼굴로 이수호를 바라보았다.
“그냥 있어. 장일이 형은?”
“잠들었어요. 코 골면서. 시끄럽게.”
신현제가 밖으로 나온 이유가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이수호는 단단해 보이는 그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아름다운 얼굴. 남자와 소년의 경계에 선, 그 나이에만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신현제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수호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돌렸다.
“집에 안 가……요?”
끝의 요자는 신현제가 계속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안 가도 돼요. 엄마랑 아빠 오늘 아침에 캐나다로 놀러갔으니까. 오로라 보러. 오로라 본 적 있어요? 오로라. 대기 오염으로 앞으로 사라진다는 오로라 말이에요.”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봐선 취한 게 분명했다. 이수호는 작게 눈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집에 가요. 지금 가면 버스는 다닐 텐데.”
“버스는 무슨. 가려면 모범택시 부르면 돼요. 난 모범적이니까 모범택시.”
“…….”
“안 웃겨요? ……쳇.”
회심의 농담이 통하지 않자 마뜩잖은 얼굴로 신현제가 맥주를 홀짝였다.
“오늘 설마, 여기서 자고 갈 거예요?”
“응. 왜요? 저 문신 새끼도 자는데 나라고 못 잘 이유가 있나.”
이수호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대체 신현제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화를 냈다가 와서 말을 건네고, 또 화를 내고, 이제는 자고 간단다. 마치 우장일과 누가 여기서 오래오래 머무르나, 하는 내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저기……, 이런 말 참 그렇지만. 너 나한테 화나지 않았어……요?”
끝에 붙은 요가 소심했다. 하지만 신현제는 돌계단 위에 앉은 다음부터 꼬박꼬박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화났어.”
술에 취해 몽롱했던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 이수호는 자신에게 책을 집어 던지고 욕을 하던 신현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갑자기 밤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졌다.
“화났지, 시발. 말이라고 해. 그걸.”
“…….”
이건 푸른 카디건을 대하는 신현제가 아니라, 자신의 반 왕따를 대하는 신현제의 목소리다. 이수호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끼며 손바닥으로 팔뚝을 감싸 안았다.
“화났어요. 존나 지금도 화났어. 시발, 생각하면 미칠 것처럼 화가 나. 누가 널 괴롭히는 걸 보면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화가 나. 내가 그동안 당신 못 알아봤다는 사실도 좆같이 화가 나고, 같잖은 이유로 널 존나 팼던 것도 화가 나. 당신이 나를 싫어해서 나한테 복수하려고 했다는 그 말도 화가 나고, 그게 당연한 것 같아서 더 화가 나!”
말을 마친 신현제는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비우고 캔을 찌그러트렸다. 존나 시발, 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게 화가 많이 나는데, ……왜 안 가.”
이수호는 신현제가 화를 내고 문 밖으로 나갔을 때 이대로 그를 보내면 다시는 말을 나눌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뒤쫓아 나왔던 것이다. 신현제가 사과를 받겠다고 다시 집안으로 불쑥 들어왔을 때 이수호는 황당함을 넘어서 놀라움까지 느꼈다.
“나 갔으면 좋겠냐?”
“…….”
“꺼져버려? 지구에서 아주 꺼져줄까?”
“지구에서 뭘 꺼져, 꺼지긴.”
“그럼 어쩌라고…….”
신현제가 무릎에 고개를 대고 수호 쪽으로 돌리며 웅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화가 치미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면 또 그런 거 따위 알 게 뭐야, 존나 개나 줘버려, 이런 생각이 들고요.”
“왜 자꾸 존댓말을…….”
“그러게.”
신현제가 맥주 캔을 한 손에 쥐고 힘을 주었다 놓았다 하며 투덜거렸다.
“막 반말해도 되는데, 어차피 동갑이니까, 그런데 눈을 보면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열라 이상하네.”
아무래도 신현제는 지금 이수호와 푸른 카디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수호는 빨리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의 정체성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평화로운 쪽으로.
“아, 맞다. 핸드폰.”
신현제가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이수호에게 내밀었다.
“번호 찍어.”
“번호?”
“핸드폰 번호. 개통했다면서요.”
“…….”
이수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신현제를 바라보았다. 얘는 아직도 나와 푸른 카디건을 헷갈리다 못해 이수호의 모습은 아예 배제하려는 거 아닐까.
“나, 이수호야.”
“누가 몰라? 핸드폰 번호나 찍어.”
“어……, 잠깐만.”
이수호는 아까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오늘 개통한 것이라 아직 번호를 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현제의 전화번호부에 번호를 찍고 이수호는 제 이름을 무엇으로 저장해야 할까 망설였다.
푸른 카디건이란 이름으로 저장을 하기엔 너무 낯간지러웠고 이수호라는 이름으로 저장하기엔, ……두려웠다. 신현제의 주변 사람들이 전화번호부에서 자신을 찾아내 조롱을 퍼부을까 봐. 그렇게 되면 신현제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삭제하겠지.
“뭐해? 이름 저장할 줄 몰라? 하여간 이래서 사람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니까.”
신현제가 이수호의 손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아 능숙한 솜씨로 이름을 입력시켰다. 이수호는 화면 속에 저장된 이름을 힐끗 확인했다.
이수호.
그 이름 석 자가 뭐라고 이수호는 가슴 속이 뿌듯해졌다.
“뭐하는 거야? 그건.”
“그룹 지정해야지.”
신현제는 전화번호부에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이수호는 그룹명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차오르던 뿌듯함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종신 계약자.
“……나 계약한다고 아직 안 했는데?”
“하게 될걸. 우리 회사 같은 대기업이 걸고넘어지면 어디를 들어가도 고달파질 테니까. 어떻게든 나랑 계약하게 될 거야.”
“이름 바꾸고 다른 회사랑 계약하면 되지!”
신현제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있다. 이수호는 멍한 얼굴로 그가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학교에서도 신현제는 크게 웃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매사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만 끼고 있는 타입이었다. 웃을 일이 있어도 잔뜩 무게를 잡고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 게 전부였다.
“하하하. 진짜 웃기네. 너.”
신현제가 손가락으로 이수호의 이마를 쿡 누르며 말을 이었다.
“이름 바꾼다고 내가 당신을 몰라 볼 거 같아?”
“……몰라봤으면서.”
이수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앞머리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던 머저리가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이제는 완전히 외웠어.”
“그렇구나. 완전히 외웠구나. 내가 장발로 머리를 길어서 양옆으로 땋고 다니기라도 하면 그때는 또 못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 막 하시나.”
이수호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장발로 머리를 기를 생각도, 머리를 양옆으로 땋을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모던한 음악과는 거리가 먼 헤어스타일은 이쪽이 사양이다. 그저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신현제를 비꼬고 싶은 것뿐이었다.
“땋을 거야?”
신현제가 이수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쥐며 물었다.
“안 땋아!”
“땋지 마. 안 어울……, 어울릴지도 모르겠고.”
그가 다양한 각도에서 이수호의 얼굴을 관찰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무슨 머리를 해도 괜찮으니 눈은 가리지 마.”
신현제가 이수호의 얼굴에 손가락을 뻗었다. 눈썹 위의 뼈부터 속눈썹, 눈두덩을 더듬는 손가락에 이수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눈이 신기해요.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어?”
“……아니.”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들을 만큼, 오랜 시간 누군가와 눈을 마주쳐 본적도 없으니까. 늘, 그렇게 자신을 숨기고 다녔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잠시 뜸을 들이던 신현제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음, 하고 생각에 잠긴다.
“편안해진다고?”
“아니, 반대. 반대.”
“예?”
“뱃멀미 해봤어요? 오장육부가 다 뒤집어지는 그 느낌.”
“…….”
역하다는 뜻인가.
“마음이 울렁거려요. 멀미하는 것처럼.”
이수호는 키미테라도 사서 이 녀석의 귀밑에 붙여줘야 하나 고민했다. 사람을 보고 멀미를 한다니.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눈이 멀어 봉사가 되어도…….”
신봉사라니. 너무 어울려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이수호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간신히 참았다.
“그 노래는 절대로 안 놓쳐. 그건 내 거야. 내가 계약할 거야.”
신현제의 눈빛에 일렁이는 집착에 이수호는 순간, 숨이 막혔다. 우장일이나 다른 밴드 멤버들이 이 보컬은 우리 거야, 넌 우리 밴드 거야, 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걸 몰라봤지…….”
그렇게 말하던 신현제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입술 끝의 뾰족한 부분을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가 떼는 그 움직임에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드, 들어가자. 추운데.”
“그럴까.”
신현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수호는 보이지 않게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저놈은 대체 손에 뭘 바르고 다니기에 닿는 것만으로도 파스를 바른 것처럼 이렇게 화끈거리는 걸까.
“와……, 진짜 시끄럽네.”
거실에서 대자로 누워 코를 골고 자고 있는 장일을 발견한 이수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친구네 집에 가기는커녕 남의 집에서 잠을 자본 적이 없는 수호에게 장일이 보여주는 행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수호는 안방으로 가서 이불을 가져와 우장일에게 덮어주었다. 텔레비전을 끄고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캔들을 주워 재활용 통에 모아두었다. 거실의 불을 끄려는데 자신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신현제를 발견하고 그는 조용히 소리를 낮춰 물어보았다.
“뭐 하려고?”
“자려고.”
“여기서 자.”
“침대 아니면 못 자는데.”
“…….”
귀하게 자란 신현제는 아무래도 잠자리도 가리는 모양이었다. 누나나 엄마의 방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이수호는 하는 수 없이 신현제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복도 계단의 불을 켜고 이수호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리라도 좀 해두는 건데.
이수호는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과 악보들을 한데 모으며 자신의 침대를 가리켰다.
“저기서 자, 그럼.”
“네 방이야?”
“응.”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네.”
존댓말을 했다가 반말을 했다가,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한단 말인가.
“뭐가 주렁주렁 달려있을 것 같았는데.”
“없다니까, 신당은……, 됐어. 잠이나 자.”
자신은 안방에 가서 잠을 자면 된다 생각하며 이수호는 방의 전등을 끄려 했다. 스위치에 손을 뻗는 순간, 등 뒤에서 커다란 손이 다가와 와락 안는다.
불이 꺼진 방에서 소년은 약간은 술에 취해 몽롱한 기억으로 소년을 끌어안았다. 소년의 심장들이 쿵쾅거렸다.
“뭐야…….”
어두운 침묵 속에서 가까스로 방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몰라.”
“모르면 잠이나 자.”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려고 힘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굳어버린 나무뿌리처럼 그는 이수호의 몸에 자신의 팔을 얽었다.
“넌 왜 내 인생에서, ……이렇게 알짱거리냐.”
“꺼져준다고 했잖…….”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 키스를 당했다. 이수호는 놀라서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왕따 이수호라는 사실이 밝혀지고도 신현제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촉촉한 입술이 맞물리는 습한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등 뒤로 상대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쿵쿵, 쿵쿵쿵, 쿵쿵쿵쿵.
신현제는 이수호의 어깨를 돌려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엉겁결에 그를 끌어안게 된 수호는 이놈이 또 술김에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너 술 취했지?”
“조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이러는 거야.”
그렇게 묻고 있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수호는 자신이 신현제 앞에서 멋지고, 쿨하고, 능력 있는 푸른 카디건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자신이다.
왕따를 당하고 무당집 아들이며 귀신을 볼 줄 아는 이수호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도 그 모든 것을 합쳐 자신인 것이다.
“이수호.”
“…….”
“왕따 새끼,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무당집 아들, 그렇게 괴롭혀도 한 번도 우는 소리 안 하던 강한 척 하던 같잖은 녀석, ……노래를 잘 부르는, 이상한 녀석. 그리고…….”
거기까지 말해놓고 신현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이수호는 생각했다. 거기에서 그쳐야 한다고. 거기서 자신에 대한 생각은 멈추고 이제 서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살아야 한다고.
그런데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신현제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숨소리조차 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아……, 씨…….”
신현제가 이수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겹쳐진 몸을 사이로 그가 흥분하고 있음이 전해졌다.
“……너 뭔가 나한테 저주라도 걸었냐?”
“뭐?”
“뭔데 이렇게 너만 보면 미치겠냐고, 나!”
신현제는 애가 닳아 외쳤다.
곰이 그려진 유치한 잠옷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도, 앞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 위로 올린 모습도, 자신에게 툴툴대면서 면박을 주는 모습도, 미치도록 예뻐 보인다. 이놈은 나에게 복수를 하려고 나를 속인 놈이라고, 불같이 화를 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수호를 보기만 해도 총구가 머리에 겨누어진 어린 새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허허.”
이수호는 힘없이 웃었다.
저주라니. ……아, 맞다. 옷장 안에 저주 인형이 있긴 한데, 이놈이 잠들면 몰래 치워야겠다.
“걸었군?”
수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신현제가 놓치지 않고 추궁했다.
“아, 아니야!”
“걸었어, 나한테 뭔가 걸었어.”
“아니라고! 아무리 나라도 네가 나를 좋아하게는 못해!”
억울하다.
배탈이 나라, 넘어져라, 길을 가다 새똥에 맞아라, 정도의 약한 저주는 걸었지만 신현제가 나한테 빠져 이렇게 껄떡대게 할 재주는 없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아예 자신을 괴롭히지도 못하게 만들었겠지.
“내가 널 좋아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헉…….”
이수호는 무심코 자신의 입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것을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그렇게 묻는 신현제의 눈에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움이 스쳐 갔다.
“그…….”
“어떻게 알았지? 쳇, 고백도 제대로 안 했는데.”
“…….”
야, 이 병신아.
나랑 종신 계약을 하자고 하지 않나, 나한테 보여준다고 전교 10등을 하겠다고 골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지 않나, 나만 보면 쪽쪽 거리고, 아래를 바짝 세우고 달려드는데 어떻게 그걸 몰라, 내가!
“고백 안 할 거야.”
심통이 난 어린아이처럼 신현제가 중얼거렸다.
“하지 마!”
“안 해! 젠장. 네가 나한테 사과하면 그때 해주지.”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평생.”
평생이라는 단어가 심기를 거슬렸는지 신현제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는 이수호를 번쩍 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티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옷 입어, 야, 야, 야.”
손바닥으로 신현제의 배 부근을 찰싹찰싹 내리치며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 이수호의 어깨를 신현제가 내리눌렀다.
“신현제. 나 이럴 기분 아니라고.”
“이럴 기분이 어떤 기분인데요?”
신현제가 이수호의 몸 위에 엎드리듯 몸을 숙이며 재차 물었다.
“어떤 기분이냐고요.”
“……이상한 짓 하려는 거잖아, 지금.”
베개에 고개를 묻으며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수호는 머리가 복잡했다. 누나와 엄마의 일만 해도 그렇고 앞으로의 대한 걱정과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거기에 신현제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으면, 나중에는 들어? 그럴 생각?”
“그게 어떻게 그렇게 해석이 되지. 너 언어영역 점수도 별로지?”
정곡을 찔린 듯이 신현제가 움찔하며 몸을 굳힌다. 그러나 금세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끈덕지게 수호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런 생각이 언제 드는데? 나한테 그런 생각 들면 얘기해 줄 거예요?”
“아아니.”
일부러 길게 발음을 늘어트리며 이수호는 부정의 뜻을 더했다.
“그럼 그런 생각이 들게 해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현제가 이수호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맨 살갗에 닿는 타인의 익숙하지 않은 온기에 이수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신현제가 쳇, 하고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불쑥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그 수호자라는 거, 내가 할게.”
“뭐?”
“내가 해주겠다고. 수호자.”
마치 오늘 너 대신 내가 청소당번 해줄게, 정도의 가벼운 투였다. 이수호는 더운 호흡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현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수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나 환상, 혹은 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열려 있는 방의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움직였다. 꿈은 아니구나. 그런데 얘는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다정한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하면 안 돼? 그거 능력 유무 관계없이 무경험자도 오케이, 아니었나?”
햄버거 가게 알바 지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이수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거, 한다고, 하고 싶다고 막 하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알려줘.”
“됐어. 네가 그런 걸…….”
“왜? 나는 못 할 거 같아? 나는 안 돼? 널 전에 그렇게, ……때려서?”
그렇게 묻는 신현제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두운 밤이 주는 착각일 테지.
“아, 그래. 넌 날 그렇게 팼으니 수호자 자격미달이다. 자신이 수호할 상대를 두들겨 패는 녀석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좋은 핑곗거리를 찾았다. 이수호는 웃으며 연신 신현제를 공격했다.
“그렇게 날 때려놓고 무슨 수호를 하겠다고, 안 돼. 자격미달. 패스. 탈락.”
사실 수호자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되는지, 수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로 모자라서 신현제에게까지 그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넌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을 하려 했다. 신현제가 갈비뼈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자신을 끌어안지 않았으면, 말이다.
“윽…….”
숨통을 조여 오는 엄청난 고통에 이수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신현제는 팔의 힘을 풀지 않고 점점 더, 팔에 힘을 주어 이수호를 끌어안았다.
“아, 아파!”
팔에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저릴 정도였다. 갑자기 이놈이 머리가 돌아버렸나 하는 공포까지 들었다. 이수호는 아프니까 좀 놓으라고 연신 소리쳤다. 신현제는 계속 무거운 침묵만 고수했다.
“…….”
“놔! 신현제, 제발! 제발, 제발 좀.”
아래층에서 잠든 우장일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와서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만큼, 수호는 다급했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신현제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욕설이 이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이수호는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려고 몸을 뒤척거리며 외쳤다.
“신현제, 이것 좀 놓고, 욕하든가, 때리든가 네 맘대로…….”
“안 때려!”
신현제가 외쳤다.
“안 때려! 안 때린다고, 젠장, 안 때려!”
“…….”
“미안하다고, 시발, 미안해. 나는 무당이 할머니를……제기랄. ……무슨 말을 해도 내 행동이 시발인 건 마찬가지지만, ……미안하다고.”
처음이었다. 신현제가 자신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사과를 한 것은.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 재미있는 것을 잔뜩 볼 수 있다고, 그러니 오래오래 살라는 덕담을 해주시던 외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수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안 돼, 안 되지. 이런 야리꾸리한 순간에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끌고 들어올 수는 없다.
하지만 더 놀라운 순간은 그다음이었다.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신현제의 어깨가 아까부터 조금씩 떨려왔다.
“……너, 설마 울어?”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떨어. 추워?”
“아니…….”
신현제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추운 것도, 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서웠다.
이수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자신이 그에게 고백조차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무섭고 화가 났다.
살아오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다. 적당히 노력하면 되고 노력해서 안 되면 돈으로 매수하면 되지, 라고 늘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상대도 있을 수 있다고,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상대에게 눈길조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신현제는 무력함을 넘어선 공포를 느꼈다. 끝도 없는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나 싫어하는 거 당연해. 당연한데……, 시발, 당연한데……, 당연하다고. 알아. 그래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신현제를 보며 이수호는 입맛이 떨떠름했다. 신현제를 단념시키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지 이놈을 이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 어떤 이유를 대도 그의 폭력은 신현제의 말대로 시발스러운 것이었으니까.
음악으로 성공해서 자신을 괴롭히던 놈들이 발아래에서 굽실거리며 자신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상상은 수도 없이 해왔다. 그중 신현제는 가장 납죽하게 엎드려 사인을 구걸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감정을 구걸하며 이런 식으로 어깨를 떠는 모습은 원치 않았다.
“……야. 야.”
이수호가 신현제의 어깨를 흔들며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납작하게 몸을 엎드려 고개를 파묻었다.
어쩌지. 난 얘를 때린 적도 없는데 마치 온몸의 뼈가 부러질 만큼 때린 기분이 들잖아. 억울하다. 억울해…….
이수호는 손으로 신현제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
“나 괴롭힘당한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당연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그러니까, 물론 네가 한 짓이 더럽고 치사하고 싸가지 없고, 재수 없고……, 나쁜 짓이긴 하지만 그냥 그렇다고.”
이수호는 거짓말로 상대를 위로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나를 때린 일은 모두 잊었다고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너를 모두 용서한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사용해 신현제의 기분이 나아지게 하고 싶었다.
“날 괴롭히던 녀석들 얼굴 기억 안 나. 걔들도 날 기억 못하듯이. 서로 그런 정도의 가치니까. 걔들도 날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나도 걔들 하찮아.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더 신경 쓰이는데…….”
이수호는 음, 하고 눈가를 좁혔다. 다른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어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는 어색하게 손바닥으로 신현제의 등을 두어 번 더 두드려 주었다.
“난 괜찮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담담하게 이수호는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도 많고, 안 좋은 일도 일어나고, 오디션도 물거품이 되고, 정학도 당하고, 엄마도 누나도 지금 내 곁에 없지만, ……어째 말로 하니까 최악인 거 같은데, 아무튼 나는 괜찮아. 지금은 살아있으니까.”
다른 때라면 감히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에 칠해진 불행이 마를 새도 없이 또 다른 불행이 덧칠되어 어느 불행에 슬픔을 느끼고 당혹스러워하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하지만 이수호는 괜찮다고 여겼다.
살아있으니까. 그것으로 어떻게든 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죽는 것보다 나은 삶은 없잖아. 난, 그래.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
“그러니까, 내가 말을 제대로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난 괜찮다고.”
조용한 방안에 이수호의 목소리만이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존재였다. 말을 하는 음성과 노래를 부르는 음색이 많이 달랐지만, 신현제는 이제 둘 사이에서 그만이 갖고 있는 색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듯하면서 그 안에 나름의 빛을 안고 있는, 까마득한 밤하늘과 닮아 있는 이수호의 목소리.
“이수호.”
신현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나한테 사과해줘.”
“뭐?”
“제발, 나한테 사과해줘. ……너한테 고백할 수 있게.”
진한 감정이 묻어나는 그 음성에 수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건 고백이나 진배없잖아.
“……제발.”
신현제가 이수호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느낌에 이수호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현제를 밀어내지 않았다.
거기에서 용기를 얻은 신현제는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어 키스했다. 조그만 입술 안에 혀를 밀어 넣고 움직이던 신현제는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살짝 얼굴을 젖히고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지금 하고 있는 건 키스가 아닌가?”
사실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사람들이 흔히 일컫는 키스가 알고 보면 다른 행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수호였다.
“아니, 맞는데. ……허락하라고. 아니, 해달라고요.”
“……있잖아. 신현제.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대답해줘.”
“뭔데?”
“내가 이런 거 잘 모르고, 경험도 없어서 그러는데, ……원래 다 허락받고 하는 그런 거야?”
이수호는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누군가와의 첫 키스를 꿈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할지, 어떻게 할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연애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냥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일일이 허락받고 그러면 되게 귀찮겠다 싶어서. 원래 그런…….”
쓸데없는 이수호의 걱정은 격정적인 신현제의 입맞춤으로 종결되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얼굴을 어루만지고, 목덜미를 만지고, 몸을 더듬었다.
이수호가 몇 번이나 잠깐, 잠깐, 하면서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신현제의 이와 입술이 얼굴과 목덜미, 귓불을 깨물고 머금었다. 그의 행동을 제지하던 선이 무너져버린 듯, 신현제는 거침없이 몸을 움직였다.
“아, 잠……, 아, 잠시…….”
이수호는 자신의 바지가 발치로 끌어내려지는 느낌에 놀라서 허리를 파뜩 세웠다. 신현제 역시 자신의 바지를 벗어 던졌다. 속옷 한 장 사이로 단단하게 불거진 살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가 수호의 몸을 끌어안은 채, 허리 아래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뜨겁게 부딪쳐 오는 살덩이의 감촉에 수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억……, 무슨…….”
“물어보지 말라며.”
“내가 언……, 으앗.”
속옷이 다리 사이로 끌어내려지고 차가운 방의 공기가 비부에 닿아 온몸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신현제는 망설임 없이 다리 사이에 손을 뻗어 살짝 힘을 받기 시작한 성기를 그러쥐었다. 수호는 얼굴은 물론 귀와 목덜미, 어깨 부근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잔뜩 할 테니까, 하고 싶은 거 잔뜩 할 테니까, 가만히 있어요. 너는.”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엉망인 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수호에게 중요한 것은 신현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다리 사이를 쥐고 있는 손의 향방이었다.
신현제가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수음을 하는 듯한 그의 손놀림에 이수호는 이를 깨물며 신음을 참아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신현제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잔뜩 흥분한 신현제가 내 위에서 샅을 비비적거리며 내 것을 손에 쥐고 있다니.
경악스럽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써 두 번째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푸른 카디건이 아니라 이수호의 몸으로.
화를 내야 하는데, 싫다고 거절하고 밀어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신현제가 자신에게 매달려 온 감정을 토해내고 있는 이 상황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신현제가 열기를 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말을 건네고, 같이 햄버거를 먹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어느 순간 당연하게 여겨졌다. 교실에서 그가 자신을 향해 전과 같은 냉소를 던졌을 때, 이수호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상실감을 맛보았다. 손끝까지 차가운 피로 가득 차는 듯한, 그 상실감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이놈이랑 이런 짓을…….
“하아……, 흐으…….”
“으……, 흐읏…….”
마찰이 더해질수록 교차하는 숨소리가 가빠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이수호는 신현제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를 죽여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읏.”
비비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 하겠는지 신현제가 이수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이수호의 어깨에 이를 세워 질근질근 물기 시작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포개어 앉은 민망한 자세에 이수호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는 바람에 신현제의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 미처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
신현제의 팔이 허리를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이수호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어, 어딜 만져!”
“여기.”
신현제가 능청스러울 만큼 평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손가락으로 아랫부분을 쿡 눌렀다. 이수호는 다시 몸을 비틀어 온몸을 지배하는 수치심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 변태가…….”
온갖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수호는 이를 사리물고 자신의 입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며 욕을 참아냈다.
“비비고 문지르는 것도 좋은데……, 그냥 싸기 아까워.”
“됐어. 됐거든! 됐어요. 충분해요. 지금 것도. 아니 차고 넘쳐!”
비비고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터질 만큼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뭘 더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이 이상은 죽어도 사양이다.
“물론, 충분히……, 흥분되지만.”
뿌옇게 젖어 벌써 꺼덕거리기 시작하는 살덩이를 슬쩍 내려보며 신현제가 중얼거렸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따라갔던 이수호는 이크, 하며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더 야한 게 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난 더 야한 건 몰라. 모르니까……. 으학.”
엉덩이 사이를 더듬는 손가락의 감각에 이수호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모르면 알려드릴게요.”
“영원히 몰라도 된다고!”
울상이 되어 애원해 봐도 소용없었다.
무지의 상대에게 광명을 선사해줄 기쁨에 젖은 신현제의 귀에는 그런 애원 따위 닿지 않았다. 수호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척하게 젖은 살덩이를 엉덩이 사이에 대고 비벼댔다. 부풀어 오른 귀두가 살짝 벌어진 틈 사이를 스칠 때마다 이수호는 입매를 찌푸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울 듯한 그 표정이 마음에 들어 신현제는 일부러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살덩이를 움직였다. 한 손으로는 수호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뿌옇게 젖기 시작한 수호의 성기를 쥐고 그는 끈질기게 허리를 움직였다.
“읏……, 하지, 읏……, 하지 마.”
“하아…….”
넣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성기를 구멍에 대고 계속 비벼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뿐인데도 이수호의 하얀 몸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호가 너무 파들파들 떨고 있어서 털이 잔뜩 난 신현제의 양심에도 살짝 가책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울지 않는 이수호를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는 뿌듯한 이율배반적인 쾌감 역시 고개를 들었다.
“……넣을게.”
“뭐?”
“넣고 싶어, 문득 안에서 하고 싶어. 할래, 안에서.”
“싫어.”
“싫어도 넣을래. 내 맘이다.”
일생일대의 고백이었다. 남자를 상대로 상대방의 어깨를 붙잡고 넣게 해달라는 비굴한 부탁을 한다는 것은 신현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안에 넣고 잔뜩 싸야 이수호를 완전히 가질 수 있다고, 그러니 이번에 이건 꼭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신현제는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본능은 상대방의 감정을 미처 계산하지 못하는 아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수호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발을 들어 신현제의 복부를 있는 힘껏 차버렸다.
“꺼져.”
신현제가 윽, 하고 배를 움켜쥐며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문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문둥이 같은 자식이!”
꽉 쥐고 있는 이수호의 하얀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이수호라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냐! 푸른 카디건일 때는 내 의사를 그래도 존중해주는 척하더니, 이건 뭐야. 이수호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제멋대로잖아! 싫어도 넣는다고? 니 마음이라고? 니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
이수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마음 유무 싸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린애건 유치하건 자신의 마음은 아예 무시해버린 신현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수호는 얼른 시트를 몸에 감고 일어섰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잔뜩 흥분한 아래가 시트에 스쳐 찌르르 하게 울렸다.
“으……. 너…….”
얻어맞은 배도 아프지만 신현제에게는 걷어차인 충격이 우선이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래빗반의 황태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현재까지.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하는 법 없이 살아온 외길 인생 19년이었다.
남자의 자존심을 다 굽히고 이수호네 집에 찾아와 나가라는 소리까지 듣고도 이러고 있는데, 나를 발로 찼어. ……내가 차이다니.
“하, 함부로 보지 마. 내가 왕따라고 네 모든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수호는 이날을 꿈꾸었다. 신현제가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있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오만하게 눈을 내리뜨고 이런 말을 하는 날을.
……상상 속의 자신과 신현제는 물론 옷을 다 걸치고 있었지만.
“안 넣을게, 그럼 비비고, 물고, 핥고, 빨기만 하면 되잖아!”
신현제가 버럭 외쳤지만 이수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수호는 시트를 몸에 둘둘 감고 걷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신현제가 시트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놔.”
“안 놓는다.”
“놓으라니까.”
“못 놔!”
“놓으라고! 내놔!”
시트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갑작스러운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신현제의 힘이 워낙 출중했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이수호도 안간힘을 써서 버텼다. 결국 시트가 찢어져 신현제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자 이수호는 재빨리 그대로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직도 아래가 잔뜩 부풀어 있어 걷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가?”
어느새 뒤따라 온 신현제가 바람 난 마누라를 추궁하는 의처증 환자 같은 말투로 물었다.
“씻으러!”
“나도.”
“나 씻고 나서 씻어. 아님 일층 욕실 사용하든가.”
이수호는 최대한 냉정을 가장하고 말했다.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몸에 저 커다란 손이 뻗어온다면 아까처럼 저도 모르게 무심코 휩쓸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수호는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고개를 돌렸다.
“같이 씻어.”
그 말까지 들은 이수호는 망설이지 않고 신현제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호되게 걷어차여 아픔이 굉장할 텐데 신현제는 고통보다도 이수호가 자신을 두 번째로 때렸다는 충격이 먼저였다.
“……또 때려? 나를?”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니까. ……폭력 금지지만, 나도 모르게 또 발이 나갔네. 미안.”
이수호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폭력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 신현제에게는 발이 절로 나가게 되었다. 무조건적인 반사였다.
“야, 야. 이수호.”
신현제가 이수호의 뒤를 졸졸 쫓아오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호는 수건을 챙겨가지고 욕실로 걸어갔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천하의 개새끼 신현제를 두 번이나 걷어차다니. ……나 정말 대단하잖아.
이수호는 떨리는 손끝을 시트 안으로 감추며 걸음을 재촉했다.
“야, 너 나 쳤냐? 또 쳤어? 처음 거는 실수라고 해도 두 번째는 실수라고 할 수가 없잖아. 아니, 둘 다 실수일 수도 있겠지. 내가 그렇게 받아들여줘? 그래줄까?”
“둘 다 실수 아니야.”
“……정말 진심으로 날 걷어찬 거냐?”
“찼어. 그래. 행여나 나를 때린 건 니가 처음이야, 이런 식상한 대사는 하지 마. 너 치고받고 싸우는 건 많이 봤으니까.”
이틀 전에도 자신의 앞에서 김진철 패거리와 난투극을 벌인 것을 떠올리며 수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다. 찢어진 시트 사이로 드러난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상대가 눈치채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두 번이나 발로 걷어차였다는 충격과 흥분으로 아플 정도로 단단하게 불거진 아래 때문에 신현제에게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넌 내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렇게 뭐. 됐거든.”
이수호는 신현제가 나름대로 자존심을 굽히고 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나름의 자존심이 있었다. 왕따라고, 모든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는 사람이라고 자존심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해?”
“뭐?”
“어떻게 하면 되냐고!”
욕실 문 앞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신현제가 화를 냈다. 잠시 멍한 눈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던 이수호가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무릎 꿇고 내 발에 입 맞추고 난 이수호의 개다, 라고 애들 앞에서 외쳐. 그리고 나한테 제발 점심 같이 먹어달라고 부탁해 봐. 물론 애들 앞에서.”
“무슨…….”
신현제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수호는 망설이지 않고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신현제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야! 이수호!”
욕실 안으로 들어간 이수호는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게 위해 문을 걸어 잠갔다. 탈칵, 하고 문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천장이 높은 욕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쾅.
문 뒤에서 신현제가 몸을 일부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수호는 가만히 버티고 서서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윽고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쿵쿵 울렸다.
샤워기의 콕을 틀어놓고 이수호는 쏟아지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머리끝에서부터 따스한 물방울들이 그의 몸을 적셨다. 혼자만 조용한 공간에 남게 되자 그는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이수호는 아직도 부풀어 올라있는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욕조 타일에 얼굴을 대보았지만 진정이 되기는커녕 자신의 몸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올라있는지만 확인하는 꼴이었다. 샤워기의 온도를 아래로 확 낮추었다. 찬물 아래에서 한참을 있었지만 아래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빼버리자.
이수호는 살덩이를 손으로 쥐었다. 이것도 오랜만이었다. 이를 사리물고 손을 움직였다. 손바닥이 살덩이를 슥슥 스칠 때마다 숨이 가빠졌다. 신현제의 성기가 위로 겹쳐지고 커다란 손바닥이 두 개를 한 데 그러모아 비비던 움직임이 떠올랐다. 어깨에 닿던 호흡과 뜨거운 살덩이가 부딪쳐오던 감각.
“읏……! ……!”
손바닥에 뜨끈한 액체가 퍼져 나왔다. 몇 번 더 몸을 파르르 떨고 나서야 이수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아…….”
쏟아지는 물줄기가 방금 있었던 비현실적인 감각을 씻어주었다. 이수호는 다시 차가운 타일에 이마를 대고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신현제의 손을 떠올리며 가버리다니.
“난……, 썩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손이 거기에 닿는 것은 처음인데다 그것이 신현제의 손이었으니, 신현제를 떠올릴 수밖에.
“그래. 신현제가 나빠. 그놈이 다 나빠.”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준 신현제가 제일 나쁜 것이라고 이수호는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아까의 장면에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으앗……. 으아…….”
이수호는 주먹을 쥔 채로 한바탕 난리 블루스를 치며 발을 굴렀다.
내가, 내가, 이 내가 신현제를 드디어……!
“때렸어. 내가, 무의식적으로가 아니고 일부러!”
이전에 손을 뿌리치려다 손을 내치는 정도는 있었지만, 마음을 먹고 폭력을 휘두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 이거 의외로 기분 좋네. 중독되면 안 되는데.”
샴푸 용기에서 두어 번 펌핑을 해서 머리에 거품을 만들던 이수호는 문득 스친 생각에 손을 멈추었다.
“……지금 때린 게 중요하냐. 이 멍청이 개똥아.”
물줄기에 애써 만든 거품이 씻겨 내려갔다. 이수호는 다시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신현제에 대한 생각들을 이렇게 씻어내자고.
하지만 머리를 깨끗이 감고 나서도 이수호는 신현제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많이 화가 났을까, 혹시 진짜 모범택시를 불러 집에 간 것은 아닐까, 두 번이나 발로 걷어차이고도 나에게 복수는 하지 않으려나. 기타 등등.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려면 이전처럼 신현제를 미워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신현제를 싫어하거나 미워할 만한 이유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이 있건만, 그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참 멍청하군. 손해 보는 성격이야.”
비누거품을 씻어내며 이수호는 중얼거렸다.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현제와 이런 사이가 되다니.
“잠깐, ……무슨 사이인데.”
이수호는 아직 신현제가 자신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자신의 다리 사이에 그것을 대고 헉헉거리는 와중에도 어서 사과를 하라고, 그래야 고백을 할 수 있다고 종용하지 않았던가.
‘빨리 사과해, 내가 고백할 수 있게.’
신현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병신. 이 병신아. 고백만 하면 되냐. 내가 그걸 받아줄 거 같아.
이수호는 쏟아지는 물줄기 안에서 눈을 감았다.
지금은 우선 이쪽 세계보다는 저쪽 세계와 관련되어야 한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연휴가 어쩌면 자신에게 이 일에 다가가라는 계시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이제 그만하자고, 이수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신현제의 모습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 것인가 싶어 방문을 열어보니 커다란 덩치가 침대 위에서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퍼지는 안도감에 이수호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왜 이렇게 난 쟤한테 휘둘리는 걸까.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티슈뭉치를 보고 이수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망할 놈.
이수호는 방으로 들어가 기타를 들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창고로 사용되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내일 아침 해가 밝자마자 집을 떠나겠다고 결심을 했으니 차라리 밤을 새는 게 나았다.
이수호는 기타의 줄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마치 처음 기타를 산 날처럼, 그는 기타 줄을 하염없이 만지고 두드렸다.
안녕. 록산느. 당분간은 너하고도 이별이야. 너에게 꼭 돌아올게.
벽 너머에서 쿵쿵,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이수호는 놀라서 기타의 줄에서 손을 떼었다. 자신의 방과 이곳은 원래 하나의 공간이었는데 짐을 쌓아두려고 얇은 패널로 가로막아 창고를 만든 것이었다. 조심해서 기타를 만진다고 했는데 방음이 되지 않아 잠을 자던 신현제가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려면 제대로 해.”
벽 너머에서 신현제의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해?”
“기타 연주. 제대로 된 걸로 하라고.”
새벽 2시에 무슨 기타 연주냐.
시계를 확인하고 이수호는 다시 기타를 케이스 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벽 너머의 신현제가 귀신같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외쳤다.
“연주하라고. 내가 지금 너랑……하지도 못했는데, 기타 연주까지 못 들어야겠어?”
억지도 저런 억지가 없다. 그런데도 어느새 기타를 케이스에서 꺼내서 다리 위에 얹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손해 보는 성격 맞다니까.
이수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는 방 너머의 신현제를 잠재우기 위한 잔잔한 곡을 골랐다. 새벽에 떠날 때 그가 깨어있으면 곤란하니까.
연주가 끝날 때마다 신현제는 백 원, 이백 원, 삼백 원, 하면서 노랫값을 적립시켰다.
이천백 원쯤 되었을 무렵에야 신현제는 잠이 들었다. 수호가 기타를 내려놓아도 방 너머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기타를 케이스에 넣어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신현제가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까 싸둔 가방을 어깨에 짊어졌다.
방문을 나서기 전에 그는 세상모르고 곤히 잠든 신현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고마워.”
사심이 섞여 있긴 했지만 종신 계약을 하자고 해준 것도 고맙고, 핸드폰에 이수호라는 이름으로 저장해준 것도 고맙고, 자신과 같이 햄버거를 해준 것도 고마웠다. 무엇보다 자격 미달인 주제에 수호자가 되어주겠다는 말을 한 것이 고마웠다.
신현제가 바보멍청이똥개병신인 것은 확실했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웠다.
“그래도, ……지금은 안녕.”
수많은 고마움을 뒤로 하고 이수호는 방문을 닫았다. 이쪽 세계의 문이 닫히자 저쪽 세계의 문이 열렸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