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먼저 손을 든 것은 담임이었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이수호에게 그는 질렸다는 얼굴로 몽둥이를 내던지고 백지를 내밀었다.
말로 하기 싫으면 여기에 반성문을 써오라고. 그때까지는 집에 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담임은 교실을 나갔다.
다른 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다가 하나둘씩,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에 혼자 남은 이수호는 제 자리로 가서 말없이 백지를 노려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담임이 반성문을 달라고 교실을 찾아왔다. 백지에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화를 벌컥 냈다.
“너,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선생 말이 말 같지 않냐. 오냐, 그럼 오늘 집에 가지 말고 밤새 학교에서 나랑 이러고 있자.”
교실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에 이수호는 우울해졌다. 그는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대체 무슨 말부터 써야 할까.
나는 귀신을 봅니다. 그래서 부적을 썼습니다. 재수 없고 싸가지 없는 놈이긴 하지만 우리 반에서 시체 나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여기까지 쓰고서 이수호는 지우개로 모든 글자를 지웠다.
다시, 시작하자.
나는 무당집 아들입니다. 무당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사람으로서 예전에는 인간들의 우두머리였다고 하더군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주식을 그만두시는 편이 인생을 위해 좋을 것 같습니다.
건방져 보이려나.
이수호는 지우개로 다시 글자를 지워버렸다. 연필을 움직였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흑심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MP3 플레이어가 필요했습니다. 왜냐면 오디션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요. 무슨 오디션이냐고? 슈퍼스타가 될 제 꿈을 이뤄줄 오디션이랍니다. 모르셨겠지만, 전 조금만 있으면 국민 대스타가 될 사람이랍니다. 짜잔. 놀라셨죠?
“……휴.”
여기까지 쓴 이수호는 종이를 아예 구겨서 던져버렸다. 자신의 연습장을 꺼내 다시 반성문을 채우기 시작했다.
죽고 싶다.
이번에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었다. 이런 마음은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절대로 글자로 남기면 안 된다. 연습장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수호는 다시 하얀 종이와 직면하게 되었다.
“아아……, 아아…….”
이수호는 힘없이 앓는 소리를 내다가 책상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옆으로 보이는 연습장에 신현제 개새끼, 라고 적어 본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눈을 감고 상상했다. 슈퍼스타가 되어 자신에게 콩고물을 얻어먹으려고 친한 척 구는 놈들을 무시하는, 자신의 멋들어진 모습을.
잠들기 전에 늘 하는 그 상상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빨리 가자. 과외 시간 늦겠다.”
교실을 나서며 박성곤이 호들갑을 떨었다. 가방을 챙기는 신현제의 동작이 유난히 느려서 그는 몇 번이나 재촉을 하고 있었다.
“과외쌤이 한 달 동안 지각 안 하면 피자 사준다고 했잖아. 빨리 가자.”
“됐어. 늦으면 늦는 거지.”
오늘따라 늦장을 부리는 현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박성곤이 연신 투덜거렸다.
“저번에도 늦었잖아. 울 엄마가 얼마나 지랄하는데. 넌 잔소리 안 들어도 되지만, 난 장난 아니라고.”
5대 독자 신현제가 얼마나 곱게 자랐는지 그의 집에 한 번만 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신현제의 부모님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성적표를 보고 한숨을 쉬실 뿐.
“농구나 한 게임 하고 가자.”
갑작스러운 신현제의 제안에 박성곤과 윤민철이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종종 신현제가 제멋대로 굴 때가 있지만,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뭐야. 무슨 농구.”
“오늘 과외 있는 날이라니까. 뭐 들었냐.”
“농구 하고 싶다고.”
“그래. 해. 과외 끝나고 좆 빠지게 하자고.”
앞서 걷던 신현제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농구 하고 싶다고.”
“…….”
“…….”
얘가 왜 이러지. 다 늦어서 사춘기도 아니고.
두 사람은 당혹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농구 안 할 거야?”
“……그래. 하자, 해.”
“아이고, 고집은 하여간.”
이해할 수 없는 신현제의 고집 덕분에 세 사람은 운동장 옆에 있는 농구 코트로 갔다. 핸드폰을 꺼놓고 농구를 시작했다. 한 시간 내내 쉬지도 않고 뛰어 윤민철은 거의 녹다운 상태가 되었다.
“야, 존나 힘들어. 시발, 뭣 좀 먹으러 가자.”
“햄버거 먹을까? 햄버거.”
“농구 더 하고 가.”
“넌 농구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작작 좀 하자. 한 시간 내내 뛰었잖아.”
신현제가 손가락 위로 농구공을 올려 빙글빙글 돌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뭐가 힘들다고.”
“그건 너나 그렇지!”
“사람들 체력이 다 너랑 같은 줄 아냐!”
“한 게임 더 해.”
“싫어. 난 갈련다. 토할 거 같아.”
윤민철이 먼저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멨다.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로서는 한 시간 내내 농구 상대를 해준 것도 엄청난 양보였다.
“잘 가.”
정떨어지는 목소리로 신현제가 인사를 하자, 윤민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동장을 가로질러갔다.
“넌.”
신현제의 시선이 남아 있던 박성곤에게 향했다.
“……아, 시발. 한 게임만 더 하고 가는 거다.”
“오케이.”
신현제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박성곤의 가슴팍에 던졌다.
“하아, ……하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박성곤이 손을 내저으며 그만하자는 의사를 표했다. 신현제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왜, 하고 물었다.
“그만 좀……, 야, 죽겠다.”
“아직 한 게임 안 끝났는데?”
“다음에, 다음에 하자.”
간신히 거기까지 말한 박성곤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신현제는 대답하지 않고 혼자서 농구공을 갖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슛을 던졌다. 농구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자 망이 출렁거리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승리.”
신현제가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박성곤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한 게임 더 하자.”
“미쳤어? 다리 후들거려서 서 있지도 못하겠구만. 진짜 민철이 말대로 농구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신현제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박성곤의 옆으로 날렸다.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농구공의 날카로운 기세에 박성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내가 시발, 귀신 얘기하는 거 존나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
“닥치고 한 게임 더 해.”
박성곤은 아까부터 같은 말만 반복하는 친구가 미친 것은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미친 짓에 동참해줄 수는 없었다. 박성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 바지를 탈탈 털었다.
“나는 가련다.”
“…….”
“혼자 하든가 말든가 맘대로 해.”
신현제는 혼자 남겨졌다. 그는 쉬지 않고 농구공을 갖고 코트를 누비며 뛰어다녔다. 농구공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이미 해는 지고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학교에 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현제는 자신의 반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불이 켜진 채였다.
“아, 짜증나.”
왕따 놈에게 MP3 플레이어를 준 것은 자신이 쪼잔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까 신현제는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그거 제가 준 겁니다, 라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주먹을 쥐며 참았다. 음침한 왕따 녀석하고 엮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담임은 왕따 놈에게 반성문을 다 쓸 때까지 집에도 가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불호령을 내리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다른 애들은 좋다고 가방을 들고 교실을 떠났다.
신현제가 교실을 나오기 전까지도 왕따 놈은 자리에 앉아 백지를 원수 보듯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도와달라는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담임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얻어맞으며 신음 한번 내지 않는 것이다. 왕따 놈 따위 눈에서 사라져버리면 시원하겠다고 늘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지가 말하면 되잖아. 내가 준 거라고. 아, 짜증나.”
신현제는 농구공을 발로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교복 재킷을 집어 들었다.
과외 시간은 이미 훌쩍 넘긴 상태였다. 교문으로 걸어가던 그는 씨팔, 이라고 욕을 하며 몸을 돌렸다.
병신 같은 왕따 새끼. 그냥 말하면 되지, 내가 이렇게까지 직접 가서 얘기를 해줘야겠냐.
걷고 있는 보폭이 커졌다. 계단을 올라갈 때쯤에는 신현제는 자신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층에 불이 켜진 곳이라고는 3학년 3반 교실뿐이었다.
신현제는 교실의 뒷문을 열어젖혔다.
모험을 가는 거야.
무슨 모험?
그냥, 재미있는 곳으로.
누나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게 된 허름한 창고는 신기하다는 느낌보다는 더럽다는 느낌이 우선이었다.
돌아가자, 더러워.
계집애처럼 깔끔 떨긴. 그러다 고추 떨어진다.
누나는 그렇게 종종 수호를 놀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었지만 수호는 혹시라도 자신의 고추가 떨어질까 두려워 누나의 뒤를 따르는 것을 택했다.
여기 봐봐. 뭔가 있어.
만지지 마. 더러워.
깔끔 좀 그만 떨라니까. 어, 이거 무슨 그림 같아 보이지 않아?
누나가 가리키는 항아리는 더러운 종이로 주둥이가 막혀있고 노끈으로 대충 묶여 있는 상태였다.
열어볼까.
됐어. 치워라. 구더기 나온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
누나는 요즘 학교에서 배운다는 속담이나 고사성어를 쓸데없을 만큼 자주 사용했다.
보물이 들어있을지도 몰라.
보물이 아니고 고추장이겠지.
보물이야. 보물을 발견하면 난 해적선을 사서 해적이 될 테다.
모험심 강한 누나는 기어코 항아리의 종이를 뜯어버렸다. 수호는 그 옆에서 누나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항아리 안에는 보물도 고추장도 들어있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푸른색 돌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은 어떤 결론을 내릴 새도 없이 거기에서 끝이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떻게 알고 오신 것인지 어머니와 할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들의 앞에 서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할머니가 그렇게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가 정말로 존재한다니. 내가 죽기 전에 저걸 보는 게 다 업인 것 같다.
뭐라고 하셨더라. 그걸, 그 푸른 돌을 뭐라고 부르셨더라.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애써도 그 부분만 칼로 도려낸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 귀곡성, 비명, 짐승의 목덜미를 쥐고 비틀 때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소리, 끔찍한 소리들이 겹겹이 쌓여 저절로 귀를 막고 싶게 만든다.
눈을 감았다. 듣고 싶지 않은데, 그 소리가 끔찍한 아교처럼 늘러 붙어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는 ……를 담을……다.
오래된 쇠가 찌걱거리며 움직일 때 나는 소리가 울렸다.
그만, 그만해.
너는……나를………, 이다.
그만하라고! 듣고 싶지 않아, 제발, 그만해.
너는 나를…………이다. 너는 나를, 너는 나를, 너는 나를……!
“그만해!”
이수호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를 깨우려고 어깨를 흔들던 신현제가 놀라서 손을 뗐다. 꿈에서 깬 이수호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한참 동안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러고 자니까 악몽을 꾸지.”
신현제가 멋없이 중얼거리며 손바닥으로 제 목덜미를 긁었다.
“나……, 그래. 꿈을 꿨어.”
이수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일부러 기억해내려 하지 않아도 영화 속 장면처럼 선연하게 떠오른다. 요 근래 계속 같은 꿈을 꾸었으니까. 꿈은 무의식의 발로라고 하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는 무의식,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대체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날에 관해 물으면 누나도, 어머니도 짠 것처럼 함구했다. 할머니는 그날 일은 절대 입에도 담지 말라고 화를 내기까지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할머니는 수호에게 그날의 일을 얘기해주지 않으셨다.
“아직까지 그러고 있었냐.”
신현제가 시계를 보며 혀를 찼다. 반성문만 쓰면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는 담임의 말을 어디로 들었는지 이수호는 백지를 베고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이다.
“……몇 시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이수호가 멍하게 중얼거리자 신현제가 8시 넘었어, 라고 대꾸했다.
“반성문 아직 다 못 썼는데…….”
그래도 좀 쓰긴 썼나 보군. 신현제는 이수호의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흘깃 쳐다보았다.
“신현제 개…….”
이수호는 황급히 연습장 위에 몸을 날렸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적은 종이를 가려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신현제의 표정은 개 다음의 글자가 무엇일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 참나.”
신현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담임에게 증언해주기 위해 여기까지 뛰어 올라온 자신의 노고를 간단히 박살 내버린 왕따 놈의 행태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
변명거리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수호는 침묵을 택했다. 신현제는 짜증 섞인 눈초리로 그런 이수호를 내려다보다가 가자, 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반성문 다 쓰고 가야 하는데.”
이수호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안깐수호 버전에서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됐어. 내가 담임한테 말할 테니까 가.”
“뭐?”
“그 MP3 플레이어 내가 준 거라고 말할 테니까, 너는 가라고.”
“…….”
이수호가 멍한 얼굴로 신현제를 올려다보았다.
신현제는 왕따 놈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 인사 따위 치워버리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참 일찍도 말하는군.”
“뭐라고?”
“…….”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이수호는 가방을 끌어안았다. 신현제는 자신이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다시 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무 말도…….”
그때 창문 밖으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창가로 돌아갔다. 담임의 빨간색 승용차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뭐야! 담탱. 지만 먼저 가버리고!”
“……와.”
이수호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기가 막힌다. 분명히 까먹었다. 까먹었다에 내 전 재산을 건다.”
3반 담임은 다혈질인 만큼 뒤끝도 없는 사람이었다. 학교에 남아서 잔무를 처리하던 그는 애초에 자신이 남은 이유조차 까맣게 잊고 차를 몰고 퇴근한 게 분명했다.
“와, 진짜 얼척 없네.”
투덜거려 봐도 소용없었다. 담임의 차는 이미 교문 밖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이수호는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둘러멨다. 일단은 집에 가자고 생각했다. 담임도 집으로 가버렸으니 더 이상 교실에 남아있는 의미가 없었다.
그때 나가려는 이수호를 신현제가 불러 세웠다.
“야.”
“…….”
이수호는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 고개만 돌렸다. 앞을 가린 머리카락 때문에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학교에서 신현제와의 접촉은.
“왜 말 안 했냐.”
“……뭐?”
“내가 준 거라고 왜 말을 안 했냐고.”
“……, …….”
잠시 벙쪄서 이수호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서서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응? 뭐라고? 얘가 뭐라고 하는 거지?
“그거 내가 준 거잖아. 알고는 있었냐?”
“……어, 응.”
신현제가 손바닥으로 이수호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내리쳤다.
“그런데 받았으면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해?”
“……!”
이수호는 억울함에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차라리 신현제에게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는 편이 몇십 배는 나을 지경이었다. 이수호는 눈을 부릅뜨고 앞머리 사이로 신현제를 올려다보았다.
“왜 말을 안 했어?”
“그냥 말하기 싫어서.”
그러자 신현제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왜 싫은데? 싫으려면 내가 싫어야지. 네가 싫어하는 건 좀 아닌데?”
이수호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학교 밖에서 이놈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겠지만, 지금은 대충 신현제의 생각이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이놈은 단순하다.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으니 상대가 당연히 그걸 황공하게 받아들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나는 왕이오. 너는 내 성은을 받자와 황공한 줄 알 거라.
바로 이런 마인드인 것이다.
됐다. 치워라. 승은 따위 입고 싶어 하지 않는 무수리도 있다. 무수리에게도 취향이 있고 호불호가 있으니 제발 치워라. 신현제.
“나도 네가…….”
더럽게 싫다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복도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교실 안의 형광등도 몇 번 깜빡이더니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버렸다.
“뭐야. 사람 있는 줄 모르나.”
“……나가자.”
이수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 학교의 밤은 저쪽의 세계와 많이 맞닿는다. 음기가 강한 곳에 학교를 세우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공동묘지나 집단 학살 자리에 음기를 누르려고 일부러 젊은 학생들의 양기가 가득한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드물게 존재했다. 바로 이수호가 다니는 이 학교가 그런 경우였다.
신현제가 뒷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밖에서부터 잠긴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종종 고장이 나서 아이들이 창문을 타고 넘어가 뒷문을 열곤 했기 때문에 신현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앞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이 몸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밖에서 있는 힘껏 문을 닫은 것처럼 반쯤 열려있던 앞문이 닫혀버렸다.
“뭐야.”
신현제가 먼저 뛰어갔다. 앞문을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철로 땜질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가 장난치는 거야! 나가면 뒈질 줄 알아.”
신현제가 사납게 윽박지르며 소리쳤지만 복도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는커녕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열이 받은 신현제가 사납게 문을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네.”
신현제는 망설임 없이 의자를 손에 들었다.
“깨려고?”
이수호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3층에서 뛰어내리게? 아님 너랑 밤새 교실에서 있냐?”
“……깨.”
이수호가 우울한 목소리로 신현제의 선택을 지지했다.
신현제가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뒷수습은 나중 문제였다.
그는 오른손에 교복 윗도리를 둘둘 감고 의자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에 대한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신현제는 손을 움켜쥐고 한걸음 물러섰다.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쇠를 후려갈겼을 때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을 뿐이다.
앞머리로 가린 이수호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신현제는 헛손질을 한 것도 아니고 정확히 의자의 끝으로 유리창을 내리찍었다. 유리가 무사히 버틸 만한 충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현제는 얼마 전 체육 시간에 했던 멀리 던지기에서 쇠공을 학교 담장 밖으로 넘겨버린 무지막지한 힘의 소유자였다.
“진짜 되는 일 없군.”
신현제는 다시 의자를 양손으로 집어 들고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한 손이 아니라 양손에 예의 그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시발, 진짜 짜증 나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신현제가 성질을 내며 이번에는 책상을 집어 들었다. 이수호가 그런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소용없을 거 같아.”
“무슨 소리야.”
이수호는 대답하지 않고 교실 창가에 놓여있던 돌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수석을 취미로 가진 담임이 교실을 꾸미겠다는 취지로 산에서 가져온 기둥 모양의 돌이었다. 결과적으로 교실이 한층 더 삭막해지긴 했지만 반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들에겐 기둥 모양의 돌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난감이 되었다. 그들은 길쭉한 돌을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넣고 음란한 허리 짓을 하며 놀았다. 이수호는 그 남근 모양의 돌을 집어 있는 힘껏 유리를 향해 던졌다.
신현제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돌은 탱,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을 뿐이다.
이번에도 유리창은 무사했다.
“……. 뭐야, 이거.”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신현제의 표정이 굳었다. 이수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이걸 흔히 사람들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겠지.”
두 사람은 어두운 교실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교실 뒤에 앉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를 나눌 만큼 친근한 사이도 아닐뿐더러,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한 생각으로 두 사람 다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이게 뭐야.”
먹통이 된 핸드폰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던 신현제가 물었다.
“…….”
“넌 뭐라고 생각하냐.”
아까부터 희미하게 복도 쪽에서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집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만큼 희미할 정도로.
“글쎄…….”
이수호는 대충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상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말을 아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진짜 어이가 없군.”
“그러게.”
“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 아, 시발. 욕 나오려고 하네.”
“……벌써 해놓고 뭐.”
“……너 교실에서 나가면 맞을래, 아님 교실에서 맞을래.”
이수호는 습관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얼굴은 때리지 마,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수호는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렸다.
“일주일.”
“뭐?”
“일주일 동안 안 때린다고, 너.”
“…….”
대단한 보은이로다. 이수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약속 지켜라, 하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한번 입 밖에 내면 지킨다고.”
“…….”
두고 보자. 신현제. 엄청나게 깐죽거려 줄 테니. 제발 때리게 해달라고, 한 대만 때리게 해달라고 내 다리를 붙들고 애걸복걸하게 만들어 주겠다.
“겁먹었냐?”
“아니…….”
왜 겁을 먹어야 하냐고 되물으려던 이수호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 미묘한 뜸을 신현제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뭐, 너 같은 애가 지금 울고불고 안 하는 게 신기하긴 하다.”
“난 안 울어.”
“그래, 그렇다 치자.”
신현제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성으로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신현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실에서 맨 뒷자리는 보통 반에서 가장 힘이 센 녀석이 앉거나 가장 키가 큰 녀석이 앉거나 둘 중 하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신현제는 둘 다 해당되었다. 키도 제일 크고, 싸움도 제일 잘하고.
일어서는데도 한참이 걸리는 긴 다리를 보며 이수호는 조금 부럽다고 생각했다. 슈퍼스타가 되려면 끝내주는 노래 실력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큰 키는 남자로서 매우 큰 메리트였다.
뭘 먹고 저렇게 자라는 걸까.
“뭘 봐.”
어둠 속에서도 이수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신현제가 날 선 목소리로 내뱉었다. ‘네 다리’, 라고 대답하려다 이수호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수호도 일어서려다 저도 모르게 짧게 신음했다. 태연한 척해도 교복에 피가 배어날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아프냐?”
신현제가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바로 돌아온 솔직한 대답에 신현제는 약간 놀란 듯 눈을 치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수호는 그동안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별다른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어딘가 모자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왜? 뭐가 놀라워?”
“존나 솔직하게 대답해서.”
“맞으면 아프고, 욕먹으면 기분 나쁘고, 손가락질 당하면 화가 나. 난 인간 아닌 줄 알았어?”
“…….”
얘가 왜 이러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신현제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평소와 느낌이 다른 왕따 놈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지, 지금 이런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지.”
갑자기 딴 생각이 들었는지 이수호가 눈을 내리깐 채로 중얼거렸다. 신현제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어두운 교실에 갇혀 왕따 놈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떡하지…….”
이수호는 초조해졌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귀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졌다. 징조가 좋지 않다. 그러나 이걸 신현제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지금에 와서 교실에 결계를 만들기에는 늦었다. 부적을 써서 귀신을 물러가게 하려면 존재와 직접 마주쳐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쾅. 쾅. 쾅.
누군가 교실 문 뒤에서 육중한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시발! 누구야!”
신현제가 사나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고요가 교실에 흘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나가자.”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신현제가 앞문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이수호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
“……감이 안 좋아.”
“그럼 나랑 밤새 교실에 있을 거냐?”
“…….”
“마음대로 해. 난 나갈 테니까.”
어쩔까.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이수호는 신현제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의 말대로 밤새 교실에 있을 수도 없었다.
복도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불빛 한 점 없는 교실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던 터라 어둠 속에서 형체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일층으로 가려면 복도 끝까지 걸어가서 계단을 거쳐야 했다.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신현제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이수호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
신현제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수호가 왜, 하고 묻자 신현제가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였다. 복도 끝에서 흐리마리한 형체가 이수호의 눈에는 물론 신현제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다.
“……저게 보여?”
혹시 몰라 한 번 더 확인하고자 이수호가 물었다.
“그럼 내가 눈 병신인 줄 아냐.”
“…….”
이수호는 어릴 적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 귀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장애가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장애’라 부를 수 있는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 제 쪽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구야.”
신현제가 복도 끝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물었다. 이수호는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다. 귀신하고 말을 섞어봤자 그것도 너에게 악의를 가진 상대와 엮여봤자 좋을 게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누구냐고.”
그러나 신현제는 겁대가리가 없는 만큼 성격도 급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신현제는 거침없이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이수호는 황급히 달려가 신현제의 허리를 붙들었다.
“안 돼.”
“왜?”
“똑바로 봐. 눈 똑바로 뜨고.”
이수호가 손을 치켜들었다. 창백한 흰 피부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띈다고, 신현제는 이수호의 손가락을 보며 생각했다.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은 여자의 다리였다.
“다리가 왜?”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이수호의 말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여자의 다리를 샅샅이 훑어보던 신현제의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그의 표정에서 이제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자는 어깨가 살짝 기울어진 채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검은색 코트 아래로 정강이가 한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뭐야, 저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신현제가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대답을 듣고자 하는 질문이 아닌, 소름 끼치는 적막을 깨기 위한 무의식적인 혼잣말이었다.
여자의 다리는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 아슬아슬해 보일 만큼 앙상했다. 대충 흘깃 본다면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없겠지만, 조금만 주의를 집중해 보면 다리와 몸의 연결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자의 두 다리가, 몸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왼쪽으로 심하게 치우쳐 있었다.
“대체 저게…….”
신현제가 이수호를 돌아보며 말하는 그 짧은 순간에 여자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저거 봤지? 지금 사라진 거 봤지?”
신현제가 이수호의 어깨를 흔들며 외쳤다. 이수호는 으응, 하면서 어색한 대답을 흘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신현제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 옆에 선 이수호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귀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원념이 강하거나 특별한 장소의 기운 때문이다.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여자가 학교까지 찾아와 신현제의 눈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몹시 명백한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가자…….”
신현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학교를 나가자마자 이수호는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누나든 엄마든, 누구든 좋으니 저 귀신을 보내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겹쳐지는 발소리 사이에 끈적한 적막이 아교처럼 들러붙었다.
복도 끝에 다다른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라오던 발소리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지만, 둘 다 계단이 비정상적인 어둠에 휩싸여있음을 알아챘다.
학교 안에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해도 피아의 분간이 가능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계단 아래는 달랐다. 집요한 어둠이었다. 한 터럭의 빛조차 용납하지 않는 본연의 어둠이 깃든 채였다.
본능적으로 두 사람은 그 앞에서 걸음을 내딛는 것을 주저했다.
“나, ……안 믿어.”
신현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뭐?”
“귀신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 믿지 않는다고.”
“그래.”
이수호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신현제에게서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넌 이 상황에서조차 그딴 얘기가 나오느냐고,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고 놈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이상해.”
“그렇지, 이상하지.”
이수호는 상대의 말에 힘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상해도 한참이나 이상했다. 이런 어둠이라니. 대체 무슨 수작이냐. 검은 옷의 귀신.
“그래, 좋아. 내가 양보하지.”
양보라는 단어에 이수호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신현제의 옆모습에서 굳은 결심이 엿보였다.
“이제는 이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어.”
인정한다는 표현이 거슬리긴 해도 불우한 과거를 가진 신현제로선 대단한 진보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즉, 무당의 존재 의의도 인정한다는 것일 테니, 어쩌면 괴롭힘도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렷다. 그래, 맞아. 어쩌면 저 검은 옷을 입은 귀신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등장한 수호천사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되었다.
“너 미쳤냐? 왜 웃어.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저것들이 지금 침공해온 이 마당에.”
그런 이수호를 본 신현제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침공? 누가?”
귀신과 침공이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조합이었다.
“외계인.”
“…….”
“외계인이잖아. 이런 이해 안 되는 일이라니. 외계인일 게 분명하잖아.”
“아…….”
이수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자기 위주로 상황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이건 길 가는 사람 백 명을 잡고 물어도 백이면 백, 귀신의 짓이라고 답할 텐데.
“외계인이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신현제는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뒤에 서. 너 같은 찐따는 외계인에게 한주먹거리도 안 될 테니까.”
그의 말 어디에서도 상대에 대한 따스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수호는 그런 허세가 밉지는 않았다.
“있잖아. 신현제.”
처음이었다. 그의 이름을 직접 입 밖에 내어 불러본 것은. 신현제가 귀찮다는 듯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나 말이야, 그러니까……, 이런 거…….”
익숙하다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사실 나 무당집 아들이잖아. 그래서 외계인도 완전 관심 많아서 외계인 조사 모임에도 나가고 하루 종일 책도 읽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 말을 좀 들어…….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수호가 눈을 부릅뜨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방금 어둠이 일렁거리며 움직인 것이다.
“이런 거 뭐? 무섭다고?”
이수호가 대답할 새도 없이 어둠이 일순 손을 뻗듯이 이수호의 발목을 향해 왈칵 쏟아졌다. 신현제는 이수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다급히 그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수호가 복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야. 젠장.”
신현제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계단을 확인했다. 어둠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시발.”
신현제가 초조하게 욕설을 잇새로 내뱉었다.
교실에 갇혀 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저 불길한 계단뿐이었다. 비상구와 연결된 다른 문은 학생들의 하교가 끝나면 자물쇠는 물론 쇠사슬까지 걸어 잠가버린다. 이전에 도둑이 들어 컴퓨터실의 컴퓨터 부품을 싹 훔쳐갔던 일이 있은 이후, 학교 문단속이 몇 배는 철저해진 것이다.
“뭐 이런 병신 같은 일이 다 있어.”
신현제는 다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지만 여전히 먹통이었다. 이수호는 아직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신현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교실에 갇힌 이후로 왕따 놈은 긴장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겁을 집어먹은 상태는 아니었다.
“야. 무……, 너.”
무당집 아들이라고 부르려다 신현제는 너, 라고 호칭을 바꿨다. 이런 좆같은 상황에서 괜히 무당이란 단어를 꺼내고 싶지 않은 터다.
“너 왜 그러냐. 아까 넘어지면서 머리 다쳤어?”
이럴 때 다치면 자신도 곤란해지는 것이다. 신현제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수호의 머리통을 붙잡고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니……, 다친 데는 없어.”
그제야 이수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빠서.”
이수호가 손바닥으로 팔뚝을 감쌌다. 아직도 식은땀이 났다. 발끝에 어두운 그것이 닿았을 때의 감촉이 아직도 선연했다.
“나도 기분 나쁘거든.”
“뭐……?”
“누군 좋아서 너랑 지금 학교에 갇혀있는 줄 아냐고. 아, 진짜. 더럽게 짜증 나네.”
신현제가 투덜거리면서 시계를 보았다. 평소라면 과외가 끝나고 동네 농구 코트에서 통성명만 한 양키 놈들과 한판 붙을 시간이었다. 밤마다 농구를 하러 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어머니에게 상대가 미국인이라 영어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를 대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오락거리이건만.
이수호는 제 말을 또 제멋대로 해석해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신현제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저런 놈이 옆에 있으니 묘한 의미에서 현실감이 느껴져 안심되었다.
“차라리 그냥 교실로 돌아갈래? 그렇게 무서우면 그냥 교실에 짱 박혀 있어. 아침이면 애들 올 테니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이수호의 시선이 복도 끝에 닿았다. 어둠이 벌레처럼 넘실거리며 밀려들고 있었다.
이수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철썩 내리쳤다. 정신집중이 필요했다.
“너 정신 차리고 내 말 잘 들어.”
“뭐?”
신현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전교 왕따인 이수호가 자신에게 명령조로 얘기하는 이 상황이 검은 옷을 입은 여자보다 더 괴기스러웠다.
“우리는 계단으로 내려갈 거야. 내가 앞장설게.”
“네가 앞장을 선다고? 네가?”
신현제는 동양인치고 콧대가 높았다. 미간에서부터 완벽하게 떨어지는 그의 콧날을 보며 반 친구들이 아부 반, 진심 반을 담아 신현제의 외모를 찬양하는 걸 종종 듣곤 했다. 이수호는 그런 신현제의 콧대가 싫었다. 재수가 없었다. 그의 높은 코에 자신의 기타를 휘두르는 상상을 하며 얼마나 즐거웠던가. 심지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저 높은 콧대를 옆으로 돌리며 비웃기까지 하자 몇 배는 더욱 싫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놈의 코에 대한 호불호를 논의할 때가 아니었다.
“네 말대로 외계인이라고 하자.”
“뭐?”
“저거 외계인이고 난 외계인 전문가야. 전문가니까 지금은 내 말 들어. 위험한 상황이야.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나갈 수 있는 곳은 저기밖에 없어. 나간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이 건물을 빠져나가려면 저 어둠의 숙주를 봉인해야 해.”
“뭐?”
“외계인을 우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이수호는 재빨리 언어 교정을 통해 신현제 설득 작업에 나섰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해. 실체와 직접 마주해야 하고. 너 라이터 있어?”
“없어.”
“왜? 왜 없어?”
“학생이 왜 라이터를 가지고 다녀. 병신 새끼야.”
“……. 담배 안 피워?”
“안 해.”
잊고 있었다. 이 새끼 존나 귀하게 자란 놈이었지.
“왜 사람들은 내가 술 담배를 옆에 끼고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건 네가.”
“내가 뭐.”
그거야 네가 존나 싸가지 없게 생겨서 행동은 더 싸가지 없으니까 그렇지.
이수호는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켰다.
“여하튼 불이 필요해. 어디로 가야 하지?”
“글쎄. 교무실은 건물이 아예 다르고. 음, 일 층에 서무실이 있긴 한데.”
“그래. 그럼 거기로 가자.”
이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정말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신현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저……, 외계인을 잘 안다니까.”
이수호가 변명을 늘어놓듯이 말했다.
“알든 말든. 네까짓 게 내 앞에 선다는 게 기분 나빠.”
“위험해.”
“니가 내 앞에 서면 그 위험이 사라지냐?”
“…….”
계단 끝에서부터 넘실거리며 밀려드는 어둠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막 앞으로 나가려는 신현제를 이수호가 다시 다급하게 잡아끌었다.
“한 가지만 얘기할게.”
“뭘.”
“무서운 일이 생길 거야.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 무서운 것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질 거야.”
이수호의 발끝에 닿은 것은 탄식의 어둠이라 불렸다. 거기에 갇힌 인간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와 맞닥트리게 된다.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은 각종 벌레가 온몸을 뒤덮고 파먹는 환영이, 귀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온갖 무서운 귀신이 자신을 따라오며 달려드는 환영이, 죽음이 무서운 사람은 온갖 방법으로 죽게 되는 환영이 나타난다. 그 안에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한계는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정신력이 강한 사람에 한해서였다. 보통의 사람은 3분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수호는 신현제를 올려다보았다. 이 녀석도 조금 후에는 극한의 공포와 맞닥트리게 될 것이다. 싫은 놈이지만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수호가 신현제의 손을 잡았다.
“뭐야”
신현제가 질색하며 수호의 손을 떨어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수호는 손에 힘을 주며 담담히 말했다.
“계단 끝까지만, 참아. 나도……, 역하니까.”
“……내가 더 역하다.”
“조금만 참아. 절대로 잊지 마. 여기가 어디인지. 정신 단단히 붙들어 매.”
“잔소리 집어치우고 가자.”
신현제가 앞장서서 걸었다.
새카만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그들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어느 무더운 날의 수업 시간이었다. 수업 도중에 허둥지둥 들어온 뚱뚱한 담임 선생님을 보자 그가 전하려는 소식이 나쁜 소식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담임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집으로 가는 길옆에 핀 맨드라미를 보았다. 흐드러진 붉은 다발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가는 길에 꽃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란 인간은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니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근처의 절로 갔다. 어째서 병원에 빈소를 마련하지 않았는가, 하는 멍청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오셨다. 유골함은 텅 비어있었다. 사고였다. 시체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아버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두들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지만 끝끝내 입을 열지 않으셨다. 늘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 어떻게 돌아가셨기에 시체조차 찾을 수 없던 것일까. 어떻게, 어떤 식으로, 누구에 의해, 어떤 존재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까.
교통사고였을까. 그렇다면 사체는 돌려받았겠지. 사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하게 시체를 끌고 다니는 무서운 괴물 트럭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우리 아버지의 시체는 그 트럭에 매달린 채, 어느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말인가.
실족사일지도……. 이름 모를 어느 산, 어느 바위에 누운 백골에 꽃이 피고 이끼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 자는 누구일까. 누가 아버지의 등을 밀고서 뻔뻔하게 전화를 걸었지? 아니다, 그랬다면 어머니가 범인을 찾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 바다로 가라앉았을까. 바다의 수많은 물고기들이 모여 아버지의 사체를 뜯어먹었을 것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물고기는 그물에 걸려 어느 날 우리 저녁 밥상에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시체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쁜, 사악한 귀신이 아버지를 죽였을지 모른다. 우리가 이런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는 살해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살해당했다. 그래서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살해당한 것이다. 누구에게? 무엇에게?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언제? 지금은?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영혼은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었을까?
생각을 멈추고 싶다. 멈추고 싶은데 제어장치를 잃은 기차처럼 계속해서 달리기만 했다. 아버지는 살해당한 것이다. 나 때문에, 혹은 어머니 때문에, 누나 때문에, 아니, 우리 집안의 정상적이지 않은 내력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어디에선가, 아버지는 계속해서 살해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걸 찾아야 한다. 나는 찾아야 한다. 아버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개를 돌렸다. 맨드라미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름답다는 생각과 죄책감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가슴이 아팠다. 숨이 막혔다.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무슨 생각을 해야 지금 이 지옥 같은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그만해, 제발 그만둬! 생각하고 싶지 않아.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를 탓하고, 누나를 탓하고, 어머니를 탓하고, 이 저주받은 핏줄을 탓하게 되니까. 제발, 제발, 그만하자.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지를 수가 없다. 누군가 입을 벌리고 강제로 생각을 처넣는 것처럼, 좋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을 뜨면 맨드라미가 보인다. 아름답다는 생각과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이 번갈아 나를 괴롭힌다. 다른 생각을, 제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무릎에 고개를 묻고 어린아이처럼 웅크려 앉아있었다.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곡명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였다.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노래의 선율에 집중했다. 손이 아프다. 오른쪽 손이 쿡쿡 쑤신다. 무시하려고 노래에 더 집중했다. 괜한 생각이 들면 안 되니까.
그러나 손에 전해지는 압력이 점점 강해진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강하게, 누군가 자신의 손을 쥐고 있다. 누가, 지금, 어째서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일까. 노랫소리가 깊어졌다. 다시 그 편안한 음에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저릿.
저릿저릿저릿.
손끝을 타고 그 희미한 감각이 다시 전해진다. 고개를 들어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닿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다시 저릿한 감각이 손을 타고 올라온다. 현실적인 감각이다.
현실적인, 감각.
그 단어를 머리에 떠올리는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맨드라미 꽃밭이 무너졌다. 온갖 생각들도 발아래로 사라져갔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에 눈을 감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탁.
차가운 돌계단이 발바닥에 닿는다.
“……!”
눈을 뜨니 3층과 2층이 연결되는 계단의 끝이었다.
이수호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지막지하게 힘만 센 신현제가 절대 손을 놓지 말라는 말은 기억하고 있는지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제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덕분에 여기에서 현실을 느낀 것이다. 이수호는 엉겁결에 신현제의 도움을 받았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어둠 속에 들어가기 전에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탄식의 어둠에 농락당하고 말았다.
“휴……. 이 바보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신현제는 아직도 탄식의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수호는 그런 신현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 어이. 신현제.”
“…….”
넋이 나간 듯한 신현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땅에 발바닥이 붙은 사람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수호는 어둠을 물리는 주문을 속으로 외며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아……, 하아…….”
그와 동시에 신현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물에서 건져낸 사람처럼 그는 거칠고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 차려.”
“……하아, 지금…….”
“학교야. 기억 안 나?”
신현제가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 있었다. 그도 끔찍한 무엇인가에 시달렸다는 증거였다. 신현제는 아직도 온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계단 난간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끔찍해.”
호흡이 어느 정도 돌아왔는지 신현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다른 사람의 끔찍한 기억이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것은 실례라 생각해 이수호는 적당히 맞장구만 쳐주었다.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던 신현제가 몇 분 만에 수척해져 바닥을 기는 듯한 음울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가난하다니.”
“뭐?”
신현제가 쓴 독약을 삼키는 것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내가, 라고 말문을 열었다.
“내가, 가난했어.”
“……뭐?”
“졸라 가난해져서, 성냥을 팔고 있었다고.”
“…….”
“성냥이 하나에 십 원이야. 그걸 열 개를 팔아야 백 원이고……. 난 그걸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지 못해서 하나도 못 팔았어.”
“…….”
광장에서 성냥을 팔고 있는 신현제라니.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끔찍하다.
“시발, 인형에 눈도 붙이고, ……눈 없는 인형들이 방안 가득 쌓여 있었는데, 아무리 붙여도 끝나지 않고 점점 불어나서.”
거기까지 말하고 난 신현제는 손으로 다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눈 없는 인형에 깔려 죽을 뻔했어.”
“…….”
결국 신현제의 가장 큰 공포는 빈곤이라는 뜻이었다. 저런 내추럴 본 도련님이라니.
“눈 없는 인형 틈으로 빠져서 죽어 가는데 누군가 내 손을 잡아당겨서 간신히…….”
여기까지 말한 신현제의 시선이 이수호와 마주잡고 있던 자신의 손에 닿았다.
“……!”
“……!”
두 사람은 불에 덴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놓았다. 머쓱해진 분위기 속에서 헛기침을 하던 이수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잘했어. 일단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너 아까부터 나한테 명령이다?”
“……그럼 네가 명령해.”
“좋아. 그럼 계단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자.”
의기양양하게 명령을 내려놓고 신현제가 머뭇거렸다.
“왜?”
“그 환영 같은 거, 이제는 다시 안 보이겠지?”
“응, 아마.”
배운 대로라면 탄식의 어둠에서 빠져나온 이후라 더 이상 어둠은 두 사람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확실하지?”
거듭 되묻는 신현제를 보니 성냥을 팔거나 인형 눈을 붙이는 상황이 퍽 끔찍했던 모양이었다. 사람마다 공포의 대상이 다르다지만 가난이라니. 왠지 답다, 다워.
이수호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이제 괜찮아. 서무실만 찾아가면 돼. ……아마.”
계속 붙는 ‘아마’는 ‘그 전에 검은 옷의 여자와 마주치지 않는다면’이란 전제를 생략한 말이었다.
신현제가 앞장서 걸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복도의 벽에 부딪쳐 음산한 울림을 만들었다.
“외계인이……, 왜 이런 상황을 만드는 거지?”
신현제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나도 몰라. 외계인한테 물어봐.”
“말이 통할까? 지구인이 아닐 텐데.”
“……. ……통할 거야.”
이수호는 아직도 저걸 외계인이라고 믿는 신현제의 불굴의 의지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불만 있으면 돼? 다른 거 필요해서 또 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지랄하면 외계인한테 네 시체를 던져줄 거다.”
“일단은 불만 필요해.”
“알겠어. 넘어지지 말고 따라와.”
“안 넘어져.”
“영화에서 이럴 때 보면 꼭 자빠져서 죽는 병신들이 있잖아. 바로 너 같은.”
“내가 본 영화는 너처럼 무모한 인간이 제일 먼저…….”
이수호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신현제의 눈빛이 분노로 번뜩였다. 이럴 때는 침묵이 그저 최고다.
두 사람은 어둠 속의 복도를 더듬어 서무실 앞에 당도했다. 자물쇠로 잠긴 문을 확인한 이수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쓸데없이 문단속만 철저한 학교 같으니.”
당연한 사항을 욕하면서 신현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화기를 찾아낸 그는 그것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물쇠를 내리쳤다. 두 동강난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이수호는 어깨를 움츠렸다.
“혼나면 어떡해.”
“지금은 인간이라면 누구든 좋으니 혼나고 싶다. 병신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들어와.”
신현제가 문을 닫았다. 사람이 없는 서무실 안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이수호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슥슥 문지르며 재빨리 책상 위를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라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아, 젠장.”
신현제도 짜증을 내며 책상을 헤집고 다녔다. 교내 모든 구역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한 건전한 정책이 지금 두 사람의 목숨을 위협했다.
“서랍 뒤져.”
신현제가 서랍을 열면서 이수호에게 말했다. 이수호는 서무실장의 책상에 놓여 있던 소금을 발견하고 재빨리 문 앞에 그걸 뿌렸다.
“너 뭐하냐?”
“외계인이 소금을 싫어한다고, ……책에서 읽었어.”
소금은 부정한 것을 막아주었다. 자신의 봉인을 깨고 여기까지 온 귀신에게 소금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최소한의 방어라도 하고 싶었다.
“만약 아니라면 그 책 저자 찾아가서 죽인다.”
신현제가 이를 부득 갈면서 캐비닛을 열었다. 이수호도 가까운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여기…….”
라이터를 찾은 이수호가 신현제를 부르는 순간 서랍장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 굳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스윽, 쾅, 스윽, 쾅, 스윽, 콰앙, 쾅,
서무실 안의 모든 서랍장과 캐비닛의 문이 미친년 널뛰듯 열렸다 닫혔다.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굉음에 학교 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수호는 빠르게 여닫히는 서랍 안에 손을 넣으려다 손톱을 호되게 찧었다. 그걸 본 신현제가 달려와 이거냐, 하고 물었다.
“어?”
“여기 라이터 들어있냐고?”
“어!”
서랍의 문이 매서운 속도로 여닫혔다. 쿵쿵 울리는 소리에 어디 한번 해볼 수 있으면 해보라는 적의가 느껴졌다. 말릴 새도 없이 신현제가 손을 집어넣었다. 뼈가 짓찧어 으스러지는 소리에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신현제는 팔을 빼지 않았다. 그의 팔을 잘라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서랍이 점점 더 빠르고 거세게 닫혔다.
“빼! 손! 손 빼!”
이수호가 소리 질렀다.
“닥쳐. 어디서 명령, 윽…….”
신현제가 짧게 신음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의 몸이 서랍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서랍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그를 잡아끌기 시작한 것이다.
“야! 여기 뭐 있다고 말한 적은 없잖……, 읏.”
그가 힘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무리였다. 이수호는 그의 반대편 손을 잡아끌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현제의 오른쪽 어깨가 서랍 아래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시이발.”
신현제가 잇새로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이수호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그는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너, 가.”
“……어?”
“가라고, 병신아.”
“무슨 소리야, 윽…….”
이수호도 점점 힘이 부쳤다. 이대로 가다간 신현제를 놓쳐버릴 것 같다.
“외계인이 날 먹는 사이에 넌 가서 경찰이든 FBI든 아무거나 불러오라고!”
신현제가 이수호를 밀어내려고 그를 발로 걷어찼다. 이수호는 배가 저릿하게 울리는 고통을 참아내며 신현제의 팔에 매달렸다.
“못 가! 죽더라도 시체는 남겨두고 죽으라고!”
“뭐라는 거야. 이 왕따 새끼가.”
서랍이 한 번 더 크게 덜컹거렸다. 신현제의 몸이 서랍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수호는 눈을 감았다.
생각해 내라. 생각해 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제발, 제발, 생각해 내. ……젠장. 내가 슈퍼스타가 되는 장면은 나중에 생각하고! 제발, 제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술을 배울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래!
“신현제!”
이수호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꺼지라고!”
신현제는 이수호를 밀어내려고 또 발길질을 했다. 그의 발길질을 온몸으로 받으며 이수호가 외쳤다.
“날 울려.”
“뭐?”
“울리라고.”
“이 병신이 머리가 돌았나.”
“울려. 제발, 나 좀 믿고. 날 울려.”
“널 어떻게 울려!”
신현제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의 머리까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떻게든 울려봐! 내가 진짜 싫어할 것 같은 일을 해!”
이수호는 울지 않았다.
그렇게 두드려 패고 괴롭혀도 우는소리 한 번 하는 적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오기로 더 그를 괴롭히는 놈들도 있을 만큼, 이수호는 눈물이 없었다.
사실 이수호는 눈물을 흘리면 귀감이 평소보다 몇십 배는 올라가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로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눈물이 무엇보다 간절했다.
“네가 싫어하는 게 뭔데!”
신현제가 다급하게 물었다.
“너!”
묘하게 치미는 분노에 신현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먼저 싫어한다고 얘기하려 했는데 차례를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 짝이 없었다.
“왕따 새끼야. 나도 너 존나 싫어. 씨.”
“나도 너 싫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비호감을 목 놓아 고백했다. 신현제는 왼손으로 이수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길고 가느다란, 고양이 털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감겨들었다.
그대로 그를 앞으로 끌어당겨 신현제는 입을 맞추었다. 이수호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신현제가 눈을 부릅뜨고 한층 더 악착같이 혀를 움직였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퉤!”
“으악! 퉤!”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이수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미쳤어?!”
“존나 싫어하는 일 하라며! 나도 존나 싫어!”
“울리라고 했지, 역하게 만들라는 게 아니잖아!”
“건방진 새……, 윽.”
신현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수호가 황급히 달려와 그를 끌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신현제의 눈에 이수호의 가느다란 몸이 들어왔다. 신현제는 아예 감각이 없는 오른팔을 내버려 두고, 왼팔로 몸의 균형을 잡은 다음 있는 힘껏 이수호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이수호가 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울어.”
“으…….”
“울어!!”
“누가……고자를 만들라고…….”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남자만이 알 수 있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감이 일순, 극대화되었다.
캐비닛의 옆!
이수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공중에 인장을 그린 후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향해 날렸다. 썩은 살점이 타들어가는 비릿한 냄새와 비명이 울렸다.
신현제의 몸을 끌어당기는 힘이 사라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이수호는 그를 잡아당겨 서랍장 안에서 꺼내주었다. 신현제는 마지막까지 쥐고 놓지 않았던 라이터를 이수호에게 던지고 정신을 잃었다. 실체를 드러낸 여자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끄……, 죽일……, 거야……, 끄윽……, 끅.”
이수호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결계를 맺었다. 죽을 쓰든 뭐가 되든 이 안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여자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태천무(太天巫)가의 만월당(滿月堂)의 자(子) 이수호다. 억울한 그대의 말을 들어줄 테니, 그대는 입을 열도록 해라.”
수호는 아직 내림굿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당으로서의 호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을 빌리는 것만으로도 귀신과의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여야 해…….”
“뭐?”
“죽여야……, 죽……서……, ……갖는…….”
원한이 깊고 죽은 지 오래된 귀신일수록 대화가 힘들었다. 여자의 혼은 하필, 하리가망인데다 수목귀였다. 생전 성격이 나쁜 여자가 나무에 씌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음험한 기운을 끌어들였을지 불 보듯 뻔했다.
이수호는 정신을 바짝 모으고 바람이 새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죽여……한다……, 그래야……, ……니님께서…….”
“뭐라는 거야! 크게 말해!”
여자의 부릅뜬 눈에서 시커먼 피가 왈칵 쏟아졌다. 알아듣기 힘든 기괴한 바람 소리를 입에서 내며 여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여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명복을 빌어 승천시켜주겠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이수호는 라이터에 불을 붙여 자신의 피를 떨어트렸다. 불꽃이 살아있는 것처럼 넘실거리며 이수호의 손가락 위에 올라왔다.
무당은 벼린 칼날에 발을 올려놓고 몸의 균형을 잡는다.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줘야 하므로 순간의 집중이 필요했다. 이수호는 정신을 집중해 손가락 끝으로 결(結)의 인장을 그렸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나무, 부명일도(符命一到), 나의 수호신이여, 그리고 역명자흉(逆命者凶), 모든 것이 질서를 되찾을지니. 나는 지금 결의 주문을 그리고 모든 곳에서 나의 부름이 날아들지어다. 오금서결(吾今書結), 비소천방(飛召千方).
이수호는 완벽하게 인장을 그리고 자신의 호흡을 불어넣었다. 쇠를 갉아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썩은 살이 타들어가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부풀어 오른 고름이 터지듯 엄청난 독기가 일순 쏟아졌지만 이수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결의 인장을 맺은 그 자세로 버텨냈다. 스러져가던 검은 옷의 여자가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이수호의 왼손을 가리켰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그 존재를 감추고 말았다.
“……하아.”
좋지 않은 음기와 독기에 너무 많이 노출된 터라 이수호는 무릎을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잃은 신현제는 다행히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 이수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신현제의 어깨를 쳤다.
“……야.”
119라도 불러야 하나 고민을 하며 이수호는 다시 신현제를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눈을 번쩍 뜬 신현제가 몸을 일으켰다가 어깨를 감싸 안고,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그는 왼손에 잡히는 대로 공구를 집어 들고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갔어.”
“……갔어.”
정확히 말하면 보냈지만.
“어딜 가.”
“자기네 별나라로…….”
“갈 거면서 왜 와서 지랄이야.”
이수호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러게, 하면서 맞장구쳤다. 신현제가 핏기없는 이수호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
이수호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이놈이 정신을 잃은 척하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다. 이놈은 특히나 그랬다.
신현제의 눈이 어둠 속에서 매섭게 빛났다. 이수호는 이놈이 죽으면 보통 원귀도 아닌 야차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너, 너…….”
“……어.”
이수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신현제는 외계인이니 뭐니 하는 걸로 자신을 우롱했다는 누명까지 씌우고도 남을 놈이었다.
“어디 가서 말하면 죽는다.”
“어?”
“나랑 손잡았다고, 그리고 입……, 그거 한 거, 말하면 죽인다.”
“…….”
“알았어?”
“……그래.”
혹여 미쳐서 그 역한 사실을 내가 입 밖에 내게 되면 네가 날 죽여 달라고 이수호는 마음속으로 간곡히 빌었다.
두 사람이 학교를 빠져나왔을 때,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어둠에서 빠져나온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밝게만 느껴졌다.
헤어지기 전에 두 사람은,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나누었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다.
다음 날 등교하자 담임은 이수호를 교무실로 호출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반성문을 제출하라고 말했다. 이수호는 속으로 역시, 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담임이라도 갑자기 교실에 있는 자신을 두고 퇴근을 한 것이 이상했다. 담임은 검은 옷을 입은 여자의 사념에 영향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거짓된 상황에 홀려 퇴근한 것이 분명했다.
이수호는 어제 집으로 가서 쓴 반성문을 담임의 앞에 내밀었다. 반성문을 눈으로 훑어본 담임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다시 한번 같은 일이 발생하면 정학 처분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어제 있었던 어마어마한 일들 때문에 이수호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버거웠다. 이수호는 네, 네, 하고 고개를 숙이다가 교실로 돌아왔다. 어제 집에 가기 전에 서무실을 깨끗이 치워놓고 간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현제는 아직 등교 전이었다. 1교시가 끝나고 2교시가 거의 끝나갈 때쯤 신현제는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이어지는 깁스를 두르고 나타났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수학 선생은 별말 없이 신현제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다들 궁금함이 가득한 눈으로 신현제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평연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삐딱하게 앉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 그의 주변에 꼬붕들이 몰려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 설마 천하의 신현제가 누구한테 쥐어 터진 건 아니겠지?”
“닥쳐.”
“어쩌다가 이랬냐? 진짜.”
어제 학교 운동장에서 헤어지기 전까지는 멀쩡하던 친구가 깁스를 두르고 나타난 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박성곤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농구 하다가.”
“어떻게 농구를 하다가 이렇게 다치냐.”
“니들도 양키들이랑 농구 해봐. 몸이 성하나.”
신현제의 허세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신현제, 그나저나 너 조심해라. 너한테 칼 가는 놈들도 많을 텐데.”
“얘한테 칼 꽂는 놈은 아주 비싼 변호사를 데려온다 해도 인생 조지는 거지. 크하핫. 안 그래?”
“얘는 더 비싼 변호사를 데려올 테니까? 하하하하.”
“걔만 조지면 다행이지.”
신현제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이수호는 황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어제의 그 귀신은 신현제가 아닌 자신을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사라지기 전에 뻗은 귀신의 손은 이수호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신현제에게 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하는 입장인데 이걸로 졸업 전까지 구타 자유이용권을 끊어줄 필요는 없었다.
“야! 3교시 체육 체육관이래.”
아이들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체육관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 적당히 뛰어놀기 편했기 때문이다. 이수호도 운동장보다는 체육관을 선호했다. 체육관 스탠드는 등을 기대어 앉기가 훨씬 편한 터다.
오디션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연습이 절실했다. 이럴 때는 MP3 플레이어가 큰 도움이 될 텐데. 어제 뺏긴 플레이어를 생각하면 아까움에 목이 멨다.
이수호는 체육복을 들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에 가서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교실로 돌아오니 다행히 아직 나가지 않은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되겠지.
그는 악보와 고장 난 MP3 플레이어를 챙겨 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해도 그냥 귀에 꽂고 있을 생각이었다.
다친 팔 때문에 혼자만 교복을 입고 있던 신현제가 이수호의 옆을 지나쳤다. 작은 상자가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수호는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돌아본 신현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수호는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감히 신현제에게 아는 척을 하다니.
이수호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네 것이니까 주워, 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신현제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친구들과 교실을 나가버렸다. 이수호는 떨어진 상자를 주워들었다. 다시 그놈에게 돌려줘야 하나 망설이던 그의 눈에 상자에 적힌 글자가 들어왔다.
「받고 입 닥칠 것.」
이수호는 이것이 누구를 위한 입막음용 선물인지 깨달았다.
아아, 신현제. ……이런 거 안 줘도, 난 정말 입을 닥칠 거란다.
하나둘씩 교실을 나가자 이수호는 안 되겠다 싶어 상자를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어제의 일 때문에 당분간 교실에 혼자 있는 것만은 삼가야만 했다.
체육 선생은 출석체크만 하고 알아서 놀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2학년 학생들과 합동 수업이었다. 아이들은 하던 대로 팀을 나누고 운동을 시작했다. 이수호는 구석에 자리 잡아 입닥침용 상자를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어제 받은 것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신제품이 들어 있었다. 흰색 아이팟(iPod)에는 심지어 음각으로 무당놈, 이라는 이름까지 새겨져 있었다.
이수호는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놀림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니 감사히 받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때 스탠드 옆에 누워서 희희낙락거리던 무리 중 한 명이 이수호의 손에 들린 아이팟을 발견했다.
“뭐야. 무당. 너 그거 샀냐?”
“어제 쌔빈 거 걸려서, 다른 사람 거 또 쌔빈 거 아냐?”
으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이수호는 상관없었다. 이번만큼은 누구의 것하고도 헷갈리지 않을 완벽한 각인이 기계에 새겨져 있으니까.
“진철아. 너 근데 어제 그거 니거 맞긴 하냐?”
개중 한 명이 근처에 누워 노닥거리던 김진철에게 물었다. 그러자 놈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아아, 그거. 집에 가서 보니까 아니더라.”
“뭐?”
“푸하하하하.”
“병신. 지것도 구분 못하냐?”
“심지어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까 내 건 검은색이었어. 하하하하.”
김진철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제 이수호의 가방에서 나온 기계는 흰색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을 헷갈린다는 것은 김진철의 눈이 멀기 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어제 그는 가방 검사를 당하기 싫어 거짓말을 꾸며내 이수호를 도둑으로 몰았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태연하게 당사자 앞에서 말하면서도 김진철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니까.
그는 재빨리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잔인한 웃음소리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었다.
그때 꽥,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김진철이었다.
“뭐야! 시발, 어떤 새끼야.”
농구공으로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김진철이 소리쳤다.
“어, 미안.”
신현제였다. 한 손에 깁스를 한 신현제가 반대편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조심 좀 해.”
김진철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고작이었다. 학교 안에서 누구도 신현제에게 언성을 높이는 짓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신현제의 앞으로 농구공을 굴려주었다. 농구공을 발로 튀겨서 왼손으로 잡은 신현제가 다시 있는 힘껏 공을 김진철을 향해 던졌다.
“――!”
이번에 김진철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신현제가 일부러 이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현제, 뭐냐. 장난이 지나치다.”
김진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릴 뿐이었다. 농구공을 돌려달라는 뜻이었다.
김진철은 농구공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이걸 그냥 건네주자니 같은 반 녀석들뿐만 아니라 2학년들 앞에서도 위신이 서지 않고, 그렇다고 안 주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뭐 해. 공 줘.”
신현제가 다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세 번이나 하겠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한 김진철은 공을 굴려서 신현제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신현제는 이번에는 공을 발로 걷어차서 김진철의 복부를 명중시켰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 그의 모습을 보며, 신현제는 빙긋 웃었다.
“야! 신현제!”
보다 못한 김진철의 친구 한 명이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현제가 목을 양옆으로 꺾자 관절이 풀리는 소리가 우득, 우득 울렸다. 그에게 수많은 날을 두들겨 맞은 이수호는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속된 말로, 지금 존나게 빡친 것이다.
체육관 안에 있던 학생 중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왜 불러?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신현제가 물었다.
“아, 아니. 손도 다쳤는데 조심하라고.”
“걱정해줘서 고맙군.”
이수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싸가지 없는 놈의 심술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폭발하고 어떻게 끝날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무서웠다. 그걸 다른 사람에게 퍼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안하지만 조금 재미있는 게 사실이었다.
“공.”
신현제가 농구공을 왼손으로 가리키며 짧게 명령했다. 김진철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농구공을 다시 그의 앞으로 굴려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현제는 농구공을 집어 들고 다시 김진철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그러고는 빗맞거나 김진철이 공을 피할 때마다, 신현제는 한껏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깝다, 아아, 아까워.
그날 김진철은 코에서 피가 터지고 이가 부러질 때까지 신현제의 농구공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피투성이가 된 김진철에게 체육 선생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놀다가 넘어졌다고 개미 같은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신현제였다.
“어머! 예뻐라.”
앞머리를 까고 들어온 이수호를 보자마자 민 사장이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이수호에게 느껴지던 음습함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맨날 이러고 다녀. 얼마나 보기 좋아.”
“당분간만이에요.”
이수호는 중얼거리며 어색한 앞머리를 매만졌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신현제가 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손톱은 그게 뭐야? 매니큐어 했어?”
“아, 예.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이수호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한밤중의 서무실 사건으로 손톱이 시커멓게 죽어 보기 흉할 정도였다. 미관상 문제는 둘째 치고 신현제가 이곳에 오기라도 하면 바로 눈치챌 위험이 컸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외모에 신경을 써? 연애하냐?”
오픈 준비를 하고 있던 웨이터 승혁이 놀림을 섞어 물었다. 이수호는 흥, 하면서 코웃음 쳤다. 곧 슈퍼스타가 될 자신에게 연애는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단어였다.
“넌 그래서 안 돼.”
“네?”
“아무리 어려도 연애를 한 번쯤은 해봐야지. 그래야 사랑 노래를 불러도 애절함과 깊이가 느껴지는 거야.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그래서 지금 저더러 연애를 하라고요?”
“그럼. 그래야 사랑 노래가 애절해지지.”
“고3한테 연애를 하라니. 참나.”
“어쭈. 고3이 지금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건 어쩌고?”
“이건 다르죠. 완전 다른데? 그렇지 않아요?”
이수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얘기했지만 누구도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긴, 가끔 그런 생각도 들더라. 애가 어려서 그런지 사랑 노래는 확실히 느낌이 부족해.”
믿었던 민 사장마저 이런 얘기를 하자 이수호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경험을 해봐야만 아는 건 아니잖아요. 죽어본 사람만 죽음을 노래하나? 그럼 데쓰메탈 하는 정택이네 형들 멤버는 다 귀신이게?”
귀신이란 단어가 나오자 구석에서 흐느껴 울던 빨간 눈의 귀신이 이쪽을 스윽 돌아보고는 민 사장의 옆에 서서 헤드뱅잉을 시작했다. 진지한 만큼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이수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랑을 굳이 안 해도 저는 사랑 노래할 수 있어요.”
“그래. 할 수는 있지. 하지만 사랑을 해보고, 잃어봐야 그 노래에 빠질 수 있잖아. 설마 넌 그 나이 먹고 아직 첫사랑도 안 해 봤어?”
이수호가 발끈해 외쳤다.
“첫사랑이 뭐 대수라고요! 제 노래에는 사랑이 충만해요. 세계 평화와 사랑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가디언에게…….”
그건 대단한 실례라고 말할 차례였다. 신현제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 현제 군 왔네.”
민혜나 사장이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팔은 왜 그래요?”
“넘어져서 다쳤습니다.”
신현제는 학교 아이들에게도 했던 거짓말을 여기서도 태연한 얼굴로 하고 있었다. 이수호는 앞머리를 올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그게 뭐예요.”
신현제가 이수호의 손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응? 아…….”
이수호는 손톱에 칠해져 있는 검은색 매니큐어를 발견하고 씨익 웃었다.
“피스(peace).”
손가락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모양을 만들며 말했지만 신현제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무안해진 이수호는 주섬주섬 손가락을 폈다.
“그런데 웬일이에요? 현제 군은 고3이라 공부하느라 바쁘지 않아요?”
이수호가 말하고 싶은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민 사장이 대신해주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로 성적에 지장 받지는 않으니까.”
“…….”
재수 없긴.
이수호는 보이지 않는 비웃음을 날리며 등을 돌렸다.
“안 보내요?”
이수호는 민 사장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녀가 왜, 하고 물었다.
“미성년자.”
“너도 그렇잖아.”
“저는 특별하잖아요.”
요즘 김남원 대표와 핑크빛 연애 모드인 민혜나로서는 조카인 신현제 역시 특별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얘는.”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신현제 쪽이 더 특별할 정도였다. 그녀는 일부러 그와 동갑내기인 이수호를 그쪽으로 밀면서 현제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 가게 열기 전이니까 그때까지 얘하고 놀고 있어요.”
“뜨앗…….”
이수호가 떨리는 손을 민 사장에게 뻗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웃으며 수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아, 그래요. 현제 군은 첫사랑 해봤어?”
신현제가 고개를 들어 뭔 소리냐는 눈빛을 보냈다.
“얘한테 첫사랑 얘기 좀 해줘요. 우리 애는 아직도 첫사랑을 안 해봤다네.”
“아악, 사장님.”
이수호가 기겁하며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신현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수호를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진짜예요?”
“…….”
“진짜 첫사랑도 안 해봤어요?”
이수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망했다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음악이니 뭐니,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첫사랑을 아직까지 하지 못한 이유는, ……그에게 다정한 여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당집 아들 이수호가 귀신을 본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자들은 그를 역병이라도 옮기는 사람처럼 대하며 무서워했다. 그는 사춘기를 앓기도 전에 잃어버린 셈이었다.
“……나중에 할 거예요. 지금은 음악이 먼저니까.”
이수호는 아무도 묻지 않은 얘기를 웅얼웅얼 늘어놓으며 자기변명을 했다.
“와, 되게 신기한 사람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신현제의 얼굴에 우월감이 스치는 것을 이수호는 똑똑히 눈으로 확인했다.
“……는.”
“뭐라구요?”
“그러는 너는…….”
신현제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저요? 하고 되물었다. 이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 같은 외모를 가진 신현제였지만, 저렇게 더러운 성격을 가진 그가 누구를 상대로 첫사랑을 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 있죠, 당연히.”
“누구…….”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괜히 분한 기분이 들어 그렇게 물었다.
“유치원 선생님이요. 다들 그러잖아요.”
“…….”
“나 다닌 곳은 사립이라 선생들 물도 좋았거든요. 끝내줬는데.”
유치원생이 선생을 보며 끝내준다는 생각이나 한다니. 신현제의 뒤에 있는 조상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무슨 첫사랑이야. 현제 군도 은근히 순진한 데가 있네.”
지나가던 민 사장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신현제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사나운 얼굴을 했다.
“제가 왜요.”
“유치원 때 하는 그런 첫사랑 말고. 밤새 가슴 아파 우는 그런 첫사랑 말이야.”
“했습니다. 그때.”
신현제가 다녔던 유치원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다. 신현제는 래빗반의 황태자였다. 포니반의 금종석이란 놈이 들어오기 전까지. 놈은 사골국물처럼 뽀얀 얼굴과 막강한 재력으로 선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신현제는 자신이 좋아하던 래빗반의 선생이 금종석에게 사탕을 주는 장면을 목격한 날의 밤을 잊지 못한다. 그 억울함, 분노, 배신감.
어린 신현제는 할아버지에게 찾아가 금종석이네 회사를 망하게 하라고 배를 뒤집고 울었다. 5대 독자가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는 것을 그의 할아버지는 곤란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결국 신현제의 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금종석네 아버지의 회사를 사들이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신현제는 래빗반 선생의 관심이 자신에게 온전히 돌아왔음을 확인한 그날,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첫사랑이었어요.”
“……퍽이나.”
옆에서 이수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신현제가 치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혼잣말하는 거 버릇인가 봐요.”
“예? ……음. 네. 그렇죠.”
“그거 되게 기분 나쁜데.”
“…….”
싸가지 없는 놈. 그럼 나랑 얘기하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라도 말해야지, 안 그러면 입에 거미줄 생긴다고!
“……고3인데 공부 안 해요?”
이수호는 일부러 신현제가 싫어하는 주제를 끄집어냈다.
“이 시간은 괜찮아요.”
신현제는 보통 이 시간에 늘 어울리던 외국인들과 농구를 했다. 하지만 팔이 이러니 농구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농구 코트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농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신현제의 머릿속에 스친 곳이 밀로드MILORD였다. 별 생각 없이 그는 이곳으로 향했다.
“이런 노래 싫어하면서 왜 왔어요.”
이수호는 혹시나 하고 앞머리를 연신 손바닥으로 올리며 말했다. 아무리 저놈이 사람의 얼굴을 외우지 않는다고는 해도 신경이 쓰였다. 학교에 단 둘이 갇혀 그런 일까지 있은 직후라 더더욱 그랬다.
“시간 때우려고요.”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에 수호는 기분이 상했다.
“여기서 노래하는 사람들 다 진지하게 노래해요. 시간 때우려면 피씨방이 나을 거예요.”
“아, 그렇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신현제는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어 내밀었다. 또 한 번 기가 막힐 시간이었다.
“…….”
“받아요, 노랫값.”
“…….”
얘는 왜 이럴까. 내가 돼지 저금통으로 보이나? 왜 자꾸 나에게 동전을 갖다 주는 걸까.
이수호가 아무런 말 없이 서있기만 하자 신현제는 직접 수호의 주머니에 동전을 넣어주었다.
뭐야. 지금 백 원 주고 노래라도 불러달라는 건가.
이수호는 살짝 위로 찢어진 눈을 치켜뜨며 신현제의 뻔뻔한 낯짝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신현제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혹시 말이에요.”
“…….”
헉. 내가 미쳤지. 아무리 이놈이 학교에서의 왕따 이수호에게 관심이 없다 해도 눈 병신이 아닌 이상 이렇게 오래 눈을 마주 보고 있으면, 분명 깨닫는 바가 있을 텐데.
이수호는 재빨리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어색한 목소리로 으, 응하고 말끝을 흐렸다.
알아봤을까. 알아봤을 거야. 어쩌지, 뭐라고 둘러대지? ……얼굴은 때리면 안 될 텐데.
“혹시…….”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는지 신현제가 잔뜩 눈가를 찡그리고 고뇌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이런 얘기 좀 황당하겠지만.”
“…….”
황당하겠지. 여기서 기타 치고 노래하는 내가 너네 반 왕따랑 몹시 닮았다는 그 얘기, 그 생각 황당하겠지. 그러니 그 황당한 생각은 얼른 지워버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자! 나랑 관련 없는 다른 주제로! 다른 주제! 다른 주제! ……아아, 없어. 나에게 다른 주제 따위 없어. 내 머릿속에는 내가 너무 많아.
이수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의 심각한 자의식을 탓했다.
자수하자. 자수해서 광명 찾자. 그럼 학교에서 목숨을 구해준 것까지 더해 얼굴은 분명 안 때려줄 것이다.
“내가 그러려고…….”
“혹시 외계인 본 적 있어요?”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이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예? 뭐라고요?”
“……예?”
이수호가 먼저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외계인이요?”
최대한 놀랍다는 듯이, 그리고 엄청나게 관심이 있다는 듯, 팔을 양옆으로 휘저으며 이수호는 말을 이었다.
“외계인이라고요? 설마요. 지구를 침략하려고 찾아오는 그런 나쁜 외계인 말하는 건가요?”
말해놓고 이수호는 아차 싶었다. 외계인이 나쁜 놈만 있으라는 법은 없는데. 이티처럼 착하고 순수한 외계인도 분명히 지구에 올 텐데!
“그래요, 그런 외계인이요.”
신현제가 동감을 얻어 기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호도 덩달아 기뻤다. 이 병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병신이구나.
“외계인 본 적 있어요?”
“아뇨.”
귀신은 길에 난 잡초처럼 자주 보며 살지만 외계인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신현제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이수호는 일단 아니라고 대답했다.
“흐음.”
신현제는 약간 실망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수호는 기가 막혔다. 외계인을 봤다는 물음에 네, 그럼요! 하고 대답할 인간이 세계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실망을 드러내다니. 신현제는 상상이상으로 자기 본위의 인간이었다.
“왜요?”
“뭐가요?”
“왜 외계인 얘기를 물어봐요?”
이 정도는 예의라고 생각해 던진 질문이었다. 신현제는 옳다구나 싶은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외계인을 봤거든요. 학교에서요.”
“…….”
“제 말 안 믿죠?”
“…….”
믿는다 안 믿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얘기를 제게 하는 놈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이수호의 얼굴에서 의심을 엿본 신현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믿을 줄 알았어요.”
“안 믿을 줄 알면서 왜 얘기를 해요?”
“이런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그럼 반 녀석들이나 가족한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놈하고는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이수호는 신현제가 말하는 그놈이 누구인지 짐작되는 바가 있어 괴로웠다.
“그럼 왜 나한테…….”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니까.”
“…….”
“적당한 관계잖아요.”
신현제가 이수호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이수호는 적당한 관계라는 범주가 가리키는 의미를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적당한 관계가 뭔데요?”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얘기할 수도 없고, 아는 사람한테 얘기하자니 미친놈 취급받기는 싫고.”
“……혼자만의 비밀로 해요, 그럼.”
“그건 해봤는데 좀 답답하더라고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냐!
그날 일은 절대로 꺼내지 않기로 맹세에 맹세를 거듭해놓고 이 자식이 지금 적당한 관계인 사람을 붙잡고 뭔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답답하고 짜증이 나.”
신현제가 성한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혀를 낮게 차며 낯을 찌푸리는 옆모습에서, 그가 진심으로 불쾌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믿어주지도 않을 그런 일을 알고 있다는 거 말이에요.”
“네? ……예.”
다른 사람이 모르는, 얘기해도 믿어주지도 않을 그런 일.
이수호에겐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당장 천장 전등에 거꾸로 매달려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빨간 눈의 여자만 해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얘기한다 해도 믿어주지 않을 그런 일이었다.
“짜증이 나더라고요, 빌어먹을 정도로.”
“……그렇죠.”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남들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 이수호는 종종 실수를 저질렀다. 보이는 그대로의 것을 입 밖에 내는 일.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와 혐오, 반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렇겠죠?”
신현제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되묻는 바람에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수긍하고 말았다.
“그럼 카디건 씨도 오늘부터 믿어 볼래요? 외계인.”
“…….”
난 외계인을 믿지 않아. 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귀신 보는 소년일 뿐이니까.
상대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신현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를 앞으로 하고 앉았다.
민혜나 사장이 가게의 인테리어를 정하고 나서 소품을 모두 고르는 데까지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의자와 테이블 모두 독일에서 유명한 장인을 찾아가 가게의 콘셉트와 인테리어를 직접 설명하고 맞춘 작품이라고 했다. 인테리어를 하는 시간보다 테이블과 의자가 나오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의자는 앉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오늘, 여기서, 이수호는 그 생각을 약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다리가 긴 신현제가 저러고 앉아있으니 의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늘 서는 밴드 중 유일한 여성 멤버인 정현 누나와 바텐더 누나가 아까부터 이쪽을 흘깃거리며 숙덕거리고 있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확실히 신현제가 앉아있으니 장인이 만들었다는 의자의 가치가 돋보였다. 이수호는 자신의 팔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비슷한 자세로 의자를 끌어다 앉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자신에게 의자는 의자일 뿐이었다.
의자의 등받이에 고개를 대고 있던 신현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누가 믿겠어. 그딴 걸. 병신이 아니고서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현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평화로웠던 자신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외계인의 침공을 받은 것이다. 없던 일로 하고 싶지만 오른팔의 통증이 그날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과 유일하게 그날의 비밀을 나눈 상대는 무슨 생각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학교를 다녔다. 그런 겁쟁이 왕따 녀석에게 너의 세계는 안녕하냐는 질문 따위, 입이 찢어져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친구나 가족에게 할 얘기도 아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외계인 얘기를 불쑥 꺼낸 것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재채기 같은 변덕이었다. 믿어줘도 그만, 안 믿어주는 게 당연하단 생각이었다. 신현제는 노랫값을 지불했으니 노래나 불러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믿어줄게.”
“네?”
“믿어줄게요, 그거.”
“뭘요?”
핏기없는 얼굴, 우울하고 외로워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상대가 말하는 모습을, 신현제는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믿어줄게요. 그 외계인이라는 거.”
“왜요?”
믿어달라고 장난처럼 말하긴 했지만 상대가 믿어줄 거란 기대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어떤 기대도 없이 내던진 무의미한 말이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면, ……외롭잖아.”
외롭다. 그 외로움을 이수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현제를 도와주려고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스스로에게 한 말이나 다름없었다.
약간의 의아함과 놀라움을 담은 시선이 이수호의 뺨에 닿았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시선을 마주했다.
“아하하……. 노래 연습이나 해야지.”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해보고자 이수호는 기타를 무릎에 얹었다. 손가락으로 스트링을 만지며 어색한 소리를 냈다.
“노래 만든다면서요.”
“……예?”
“노래도 만든다면서요, 직접.”
“그냥, 가끔.”
대스타가 싱어송 라이터가 되면 좋은 점이 많겠지만, 가장 큰 장점은 노래의 수익료를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수호는 그날을 위해 작곡 작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만들어 봐요.”
“예?”
“지금 노래 만들어 보라고요.”
“…….”
이건 마치 찰흙으로 똥이나 한번 만들어 보라고 말하는 듯한 투다.
“노래라는 게 그렇게…….”
“못 해요? 그럼 하지 말고.”
못하면 하지 말라는 말이 이수호의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해! 하면 되잖아.”
이수호가 기타를 다시 고쳐 메고, 스트링에 손가락을 얹었다. 긴 손가락이 움직이자 음울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너의 비밀을 나에게 얘기해줘.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말해봐. 속삭여봐. 말해봐. 그렇게.
기타 위에서 가느다란 손가락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어떤 날은 그런 날도 있겠지.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을, 너에게 말하지 못한 그 비밀을
말할래, 고백할래, 속삭일게, 너에게.
부드러운 허밍이 섞여 이어지는 목소리가 비밀스러운 고백을 하는 것처럼, 차갑고 달콤하게 울렸다.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수호에게 가 닿았다.
기타의 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이수호가 눈을 감았다.
이 모든 비밀이 우리에게 영원히 머물러
맹세를 하지, 영원히 너를,
그다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 때문에 기타를 치던 손이 멈췄기 때문이다.
“오! 원만이!”
이태섭이었다. 이수호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주말 멤버인 그가 목요일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지는 몰라도, 어쩐지 예감이 좋지 못했다.
“노래 부르고 있었어? 우리 원만이 무슨 노래했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친한 척 다가오며 머리며 뺨이며 여기저기를 만지는 손이 수호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아무 노래도 안 했어요.”
흥이 깨졌다.
즉석에서 작곡을 하는 것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한 번 흥이 깨지면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오늘 공연이지?”
“네. 그런데 웬일이세요.”
“응. 나 네 공연 보러 왔지.”
이수호는 미심쩍은 눈으로 이태섭을 바라보았다. 가끔 태섭이 가게에 놀러 오는 일은 있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공연을 보러 온다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왜요?”
“우리 보컬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곁에서 지켜보려고.”
“그래요, 제가 얼마나 노래를……, 네?”
이수호가 놀라 물었다.
방금 전 절대 흘려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다.
“우리 보컬.”
이태섭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수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잉글리시 보이 밴드의 보컬이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다며 그만둔 이야기는 웨이터인 승혁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밴드의 보컬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왜……요?”
“잘 어울려. 우리 밴드에. 음악성도 충분하고.”
“다른 사람 구해요.”
잉글리시 보이 밴드의 보컬이라면 들어오고 싶다는 사람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찾아봤는데 별로야. 딱, 하고 여기 와 닿는 게 없어.”
이태섭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완벽한 보컬은 아니지만, 어울릴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라면 완벽하지. 나에게는.”
“어……, 저는 밴드 같은 거 별로 생각이…….”
신현제가 기분이 좋지 않은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이수호는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래? 왜?”
“저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나……, 잘 못해요.”
이태섭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잘 됐지. 이번 기회에 어울려. 우리 밴드 놈들 다 괜찮아. 물론 너보다 다 나이는 많지만 좋은 친구가 되어줄 거다.”
“됐어요. 필요 없어요.”
이태섭이 아까부터 이쪽을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신현제를 흘깃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어깨를 낮추어 이수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 친한 친구가 이미 생겨서?”
“네?”
이태섭의 손가락 끝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아챈 이수호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친구. 절대 아니에요.”
학교에서 아는 척이라도 했다가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맞지 않으면 다행인 상대였다. 친구라는 역한 단어로 함께 묶이고 싶지 않은 인물 1위가 바로 신현제인 것이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신현제와 눈이 마주치자 이수호는 한층 더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아님. 절대, 절절절절대로.”
“왜요?”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있던 신현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예?”
“왜 친구가 절대로 될 수 없냐고요. 될 수도 있지.”
“어, 아니……, 아니. ……안 될 것 같은데.”
이수호는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손을 잡은 소문을 내면 너를 죽이겠노라고 협박을 한 인간이다. 아침마다 얼굴을 마주치면 재수가 없다고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패던 인간이다. 세상에 무당들은 다 사라져야 한다며 자신을 조롱하던 인간이다.
……안 돼. 너하고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 비극적인 사이다.
“될 수도 있죠.”
신현제가 무뚝뚝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이태섭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이태섭의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그는 이수호의 팔을 잡아끌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있잖아. 형이 너한테 부탁할게. 우리 밴드로 와줘.”
“됐어요. 전 밴드 그런 거 적성에 안 맞아요.”
“적성이야 바꾸면 그만이고. 한번 해봐. 해보고 아니면 그만두라고.”
달콤한 공약 따위 믿지 않는다. 이태섭이 얼마나 뒤끝 있는 성격인지 이수호는 그날 술자리에서 벌인 추태를 보고 알게 되었다. 자신이 나간다고 순순히 내보내 줄 인간이 아닌 것이다.
“됐어요. 전…….”
“태섭아.”
이태섭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이수호는 흠칫 놀랐다.
“태섭아. 우리 상부상조해야지. 응?”
“그…….”
“난 밴드의 보컬을 얻고, 넌 친구를 얻고. 오케이?”
이태섭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하라 했던 좋은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지금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보다 수십 배는 절박하고 집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
“네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잖아. 그치?”
“……예.”
이수호는 그날 그렇게 원치도 않은 친구와 밴드를 떠안고 말았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