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깐수호.
앞머리를 깐 이수호에게 붙여진 또 하나의 별명이었다. 평생 무당집 아들 내지는 무당 놈, 귀신 붙은 놈 등등의 암울한 별명만 등에 업고 살다가 다른 별명이 붙으니 이건 또 나름대로 고역이었다. 벌써 밀로드MILORD에서 붙은 별명만 세 개였다.
푸른 카디건, 원만이, 깐수호.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민혜나 사장의 웃음기 섞인 말에 이수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손만 내저었다. 이번에는 앞머리를 살짝 묶은, 일명 사과머리를 한 자신의 낯선 모습에 그는 거울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오! 앞머리 올렸네. 잘 어울려.”
토요일 저녁 멤버 중에 가장 인기가 좋다는 잉글리시 보이 밴드의 리더 이태섭이 다가와 농을 건넸다. 밴드들은 자신이 공연하지 않는 날에도 바에 나와 서로의 무대를 보곤 했다. 서로 알음알음하는 관계였지만 목요일 클럽의 이수호는 가장 어린 막내였기에 다들 귀여워해 주는 편이었다.
“으허어.”
이수호가 이상한 신음을 입으로 내며 자리에 힘없이 앉았다. 자신이 꿈꾸는 슈퍼스타의 이미지와 조금씩 멀어지는 현실이 피곤했다.
“오늘 몇 곡해?”
“한 곡이요. 땜빵이에요, 저는.”
“고3이 공부 안 하고 노래만 불러도 돼?”
“괜찮아요. 전 슈퍼스타가 될 거니까.”
이수호의 말버릇이었다. 다들 첨에는 썰렁한 농담이라 여겼는데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수호는 본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 스타가 될 것이라고 누구보다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친구들이 공연 보러 안 와?”
“저 친구 없는데요.”
덤덤하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수호의 태도에 태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것이다.
“학교 친구들 부르기 뭣하면 동네 친구들이라도 부르지.”
“동네 친구들도 없죠, 당연히.”
이수호가 거울 속의 어색한 자신의 모습을 몇 번 흘깃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친구가 없는 것보다 자신의 사과머리가 더 신경이 쓰인다는 표정으로.
“하긴 나도 친한 애들 몇 명밖에 없어. 원래 나이 들면 인간관계가 더 좁아지거든.”
연장자로서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년을 위로하려고 해준 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호는 마뜩잖다는 얼굴로 이태섭을 돌아보았다.
“전 한 명도 없는데요.”
“……어, 그러냐.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요. 제가 친구가 없는 걸, 형이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뭐, 문제 있냐?”
“무슨 문제요?”
“친구가 없다니까. 너 성격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래도 왕따당할 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이수호는 이태섭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쓸데없는 오지랖만큼 쓸데없이 솔직한 성격이구나 싶었다.
“제 문제라기보다는, 음…….
이수호는 머리를 긁적거리다 대충 둘러댔다.
“저희 집이 좀 특이해서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뭐라고? 하, 나 참나.”
아직도 가정환경으로 사람을 왕따시키는 녀석들이 있다니. 정의감이 투철한 이태섭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여기서 노래 불러?”
“네?”
“돈 벌려고 노래 부르는 거야?”
“그렇죠.”
무대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밀로드MILORD는 다른 가수들의 수준도 높기 때문에 옆에서 배우는 것도 많은 데다 좋은 기회도 종종 생기곤 했다. 거기에 돈까지 주니 수호에게는 이곳이 최고의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하지만 뭉뚱그려 말한 그의 대답이 이태섭에게는 전혀 엉뚱한 의미로 해석되고 말았다.
“딱한 녀석.”
그가 갑자기 이수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토닥이며 말했다.
“혹시 힘든 일 생기거나 고민거리 생기면 이 형한테 말해라. 핸드폰 번호 알지?”
“네. 수첩에 적어뒀어요.”
“수첩? 핸드폰 없어?”
“네.”
“이 가여운 녀석.”
이태섭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수호는 이미 가난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음악을 팔러 나온 소년가장이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형한테 언제든지 말해라. 알겠지?”
“네.”
이수호에게 어려운 일이란 지금 당장 저 구석에서 미친년 널뛰듯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귀신을 누군가 치워줬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원만아!”
오늘은 그 별명이 입에 붙는지 민 사장이 해맑은 목소리로 이수호를 부르며 손짓했다. 이수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민 사장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갔다.
“심부름 좀 해줄래?”
“싫어요.”
무슨 심부름인지 듣지도 않고 냉큼 대답하는 이수호를 민 사장이 지그시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뭔지 듣지도 않고?”
“뭐 사오라고 시키려는 거 아니에요? 귀찮은데. 가사도 아직 다 못 외웠고. 아, 맞다. 월요일에 영어 단어 시험도 보는데.”
“내가 심부름시키는 거랑 영어 단어시험 보는 게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시간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전 심부름을 하기에는 너무 고급인력이잖아요.”
“어머? 그래. 그럼 난 다른 사람 찾아야겠다. 드림 엔터테인먼트 다녀오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된다고 생각할 테니 다들 가려고 줄 서겠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가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외쳤다.
“1번.”
“뭐?”
“줄 1번입니다.”
민혜나는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이수호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무슨 심부름인데요? 심부름 값은 주실 거죠?”
“그래. 차비는 내가 주지.”
“좋습니다.”
방금 전까지 귀찮다고, 자신은 고급 인력이다를 주장하던 이수호가 행여나 민 사장이 말을 바꿀까 봐 자신의 기타와 가방을 챙겨왔다. 심부름이라지만 드림 엔터테인먼트에 가볼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도 직접 만날 수 있고 사인을 받을 수도 있으며 김 대표와 얼굴을 한 번 더 트는 기회가 될 것이다. ……신현제와 얽히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오늘은 일단 저만치 미뤄두자.
“차비, 그리고 이거 김남원 대표님께 전해드리면 된다.”
“뭔데요?”
“레코드 음반. 급히 쓰실 곳이 있다고 하셔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건데 내가 마침 갖고 있었거든.”
살짝 내려오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렇게 말하는 민혜나의 눈에서 이수호는 흑심을 엿보았다.
“김남원 대표님, ……노려요?”
“어머, 얘는. 내가 무슨 짐승이니? 노리긴.”
“그럼 김 대표님하고 연애하려고요?”
“하긴 뭘 해!”
“이상한데. 이런 걸로 날 심부름시키기에는 좀, 이상한데.”
이수호가 레코드와 민 사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저번에 연락 왔었어.”
“뭐라고요?”
“차 한잔하자고.”
“그래서요?”
“했어.”
“그리고요?”
“그리고는 뭐가 그리고요야.”
“그다음이 19금이라 저한테 안 들려주시는 거면, 제가 알아서 상상할게요.”
“아니라고! 그냥 젠틀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시고 가셨다고.”
“흐음. 그러니까 저한테 가서 이 사람을 좀 살펴보고 와 달라 이거죠?”
이럴 때만큼은 눈치가 귀신처럼 빠른 이수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응. 그렇지. 유부남은 아니지?”
“네. 미혼.”
“뭐 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디? 괜찮은 거 같지 않아?”
도서관에서 만났다던 남자는 일찌감치 정리한 모양이었다. 민혜나가 눈을 빛내며 이수호의 소맷자락을 잡고 꼬리를 물어 질문을 던졌다.
“잘생겼지? 돈도 많을 거 같고. 난 솔직히 내 돈 노리고 날 만나는 찌질한 놈들을 많이 봐서 일단 내 돈을 안 노린다는 전제의, 돈 많은 남자가 좋다고. 능력도 있어 보이고. 음악 듣는 취향도 괜찮아. 김 대표님 음반사는 실력파 뮤지션들이 가득하잖아.”
이미 본인 스스로 결론을 내려놓았으면서 민혜나는 쓸데없는 질문 하나를 이수호에게 던졌다.
“괜찮은 남자 같지? 응?”
“음, 잘 모르겠어요.”
신현제로 인한 쇼크가 컸기 때문에 그날 수호는 김 대표를 찬찬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까 가서 확인하고 와. 괜찮은 남자인지,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두 번째 데이트를 해도 좋을지 말이야.”
이수호는 그녀가 자신에게 건네준 레코드가 허울 좋은 수단일 뿐임을 깨달았다.
“그럼 말이 달라지죠. 심부름을 두 개나 시키셨음 돈이 두 배가 와야죠. 안 그래요?”
영특하다! 실익과 이상을 단번에 챙기다니!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에 이수호는 어깨를 앞으로 쫘악 펴며,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 참나.”
이수호는 손바닥 위에 있는 백 원짜리 동전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빛나는 동전 하나를 건네주며 민혜나 사장은 특유의 프랑스 여배우 같은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이 백 원까지 뺏기고 싶지 않으면 당장 갔다 오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백 원이 뭐냐, 백 원이. 쳇.”
이수호는 주머니에 다시 동전을 넣었다. 투덜거리긴 해도 지금은 단돈 백 원이라도 아깝다. 한 푼 두 푼 모아 얼른 MP3 플레이어를 고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길을 찾는 것은 쉬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얼마 걷지 않아 드림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수호는 로비에 세워져 있던 거울을 통해 자신이 지금 깐수호 상태임을 깨닫고 재빨리 머리를 풀어 내리려 했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치지 않았다면.
김남원 대표였다.
“안녕하세요.”
이수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의 바르게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허리까지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이만하면 예의 좀 있어 보이겠지하고 고개를 드는 그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어김없이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신현제 놈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푸른 카디건 군.”
“그, 저기…….”
이수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레코드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께서 전해주시라고 하셨습니다.”
음성 변조, 음성 변조.
이수호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요? 다음번에 만날 때 주셔도 될 텐데.”
“……네.”
민 사장은 다음번 만남을 계속해도 좋을지 수호를 보내 동태를 파악하게 만들 속셈이었다. 이수호는 재빨리 김남원 대표의 모습을 샅샅이 훑었다. 신현제 때문에 여기를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겠지만 살필 것은 살피자 싶었다.
“어…….”
이수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희미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무당집을 찾아오는 사람 중 절박한 사람에게서 자주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누나와 엄마는 ‘바닷가에서 나는 썩은 생선 냄새’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몇 번이나 맡아본 냄새라 확신할 수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죽음의 냄새가 남자에게서 묻어났다. 이수호는 조심스럽게 김남원 대표에게 물었다.
“혹시 상갓집 다녀오셨나요?”
“아니요.”
하긴 상갓집을 다녀온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차림새였다.
“그럼 어디 가세요?”
“청담동 쪽에 볼일이 있어서 가고 있는데, 왜요?”
정확히 어디를 가는지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수호는 김남원 대표에 대한 평가에 용의주도함을 재빨리 첨가했다.
“아니, 그냥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김남원 대표가 호방하게 웃으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조카를 가리켰다.
“저 녀석이 누구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신현제가 정색을 하면서 김 대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내가 언제!”
“네가 그랬잖아. 혹시 바비걸즈 만날 수 있냐고. 만날 수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건 만나게 해달라는 것과 같은 뜻 아닌가?”
“아니거든. 하, 기가 막혀서.”
신현제가 얼굴까지 붉혀가며 부정을 하는 모습을 봐선, 아무래도 저 말이 사실인 듯했다. 바비걸즈라. 정확히 개개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지만 거의 벗은 몸으로 나와 선정적인 춤을 추는 모습이 단번에 떠오르는, 소위 말하는 요즘 뜨는 걸그룹이었다.
가끔 점심시간에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그 그룹의 무대라도 나오면 남학생들은 벌떼처럼 몰려가 환호했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전교 1등을 놓칠까 두려워 화장실도 정해진 시간에만 가는 반장과 혼자 자기 자리에서 음악만 듣는 전교 왕따 이수호, 그리고 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 신현제 정도였다. 그런 현제를 두고 친구들은 어른스럽다며 동경의 시선까지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뒤로는 삼촌을 통해 직접 만나게 해달라는 공작을 펼치고 있다니. 이수호는 약간의 비웃음을 담은 시선으로 신현제를 훑어보았다.
“아니라니까. 아, 진짜.”
신현제가 머리를 긁으며 주절주절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러니까 성곤이 녀석이 생일인데 바비 걔네 팬이라고 해서 사인 시디나 한 장 얻을까 여쭤본 건데……, 삼촌이 그냥 부르신 거잖아요.”
“그래. 누가 뭐라고 했냐.”
김남원 대표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조카를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남학생이라면 고자 아니면 호모 빼고는 다 좋아하는 그룹이라잖아요, 뭐.”
이수호는 속으로 버둥거렸다. 고자 아니면 호모 빼고 라니! 이 얼마나 통렬한 유머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신현제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괜찮아. 이 정도의 소심한 복수라면! 이제 재빨리 이 레코드판만 김 대표에게 건네주고 사라지면 된다.
민 사장에게 건네줄 정도의 정보는 수집되었다. 김 대표는 유부남도 아니고, 여자 문제도 복잡하지 않으며,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문제남도 아니었다. 두 번째 데이트를 권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푸른 카디건 군도 같이 갈래요?”
“……헤헤헤, 네?”
“모든 남학생들의 꿈이라니, 내가 그 꿈을 이루게 해줄게요. 같이 가죠.”
김남원 대표가 너무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수호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그, 저……, 제가 바로 가서 공연을 해야 해서.”
거짓.
오늘의 공연은 태섭이네 밴드가 한 곡 더 부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지금은 레코드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음성 변조를 해 걸리지 않았다지만, 언제까지 자신에게 운이 따라줄지는 모른다. 저 신현제 놈이 3초 뒤에라도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김남원 대표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김남원 대표입니다.”
상대방과 연결되자 김남원이 구석으로 걸어갔다.
“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이수호는 갑자기 통화를 시작한 김 대표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고 귀를 쫑긋 세웠다. 누구지? 누구랑 통화하는 거지?
“아니거든요.”
그때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제가 바비걸즈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요.”
억울하다는 듯이 신현제가 투덜거린다. 억울한 것치고는 오늘 신현제의 옷차림이 지나치게 번듯했다. 터져버린 만두 속처럼,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이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화를 마친 김남원이 되돌아 왔다.
“오늘 공연은 다음으로 미루라 하시네요.”
“네?”
“민 사장님이요. 바비걸즈 구경 잘하고 오라 하셨어요. 그리고 부탁하신 것은 꼼꼼하게 처리해달라는 말씀도 덧붙이셨고요.”
“저는 굳이 안 가도 되는데……, 분명히 실례가 될 것 같고요.”
이수호의 시선이 신현제의 얼굴에 머물렀다. 야 이 싸가지 없는 자식아. 너의 싸가지를 보여줘!
“전 상관없어요. 사인 시디만 받는다면.”
신현제가 답지 않게 쿨한 척,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이수호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현제에게서 호의를 받게 되었다.
1g의 쓸모도 없는, 똥 같은 호의를.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 대표가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는 신현제가 앉아, 뒷좌석에는 이수호 혼자 앉게 되었다. 이수호는 행여나 신현제가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 사과머리로 묶은 헤어스타일을 몇 번이나 손으로 만져보며 확인했다.
앞머리가 내려오면 안 된다. 계속 깐수호로 남아있어야 해.
“푸른 카디건 군은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죠?”
“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더듬고 있던 머리를 쥐어뜯을 뻔했다. 이수호는 침착하게 하하, 하고 힘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대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 저기……, 거기, 거기, 실용음악과에 서울예대…….”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과를 떠올리며 수호는 간신히 대답했다.
“오. 1학년이면 권 교수님께 배우겠네요. 권 교수님은 여전하신가요?”
“네.”
이수호는 단답식의 대답을 택했다. 대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거짓말이 탄로 날 가능성이 높으니까.
“넌 대학 어떻게 할 거냐?”
다행히 질문의 화살이 신현제에게로 넘어갔다.
“아무 데나 가는 거죠, 뭐.”
신현제가 삐딱하게 대답했다.
“너 성적 떨어졌다고 누님이 걱정하시던데. 괜찮은 거냐?”
“아, 그런 얘기를 왜 지금 해요. 쪽팔리게.”
“쪽팔리면 공부해, 인마. 대학은 뭐 땅 파서 가는 줄 알아?”
“안 되면 돈 내고 가면 되잖아요. 집에 썩어나는 게 돈이면서.”
코피를 흘리며 공부하고 있는 전국의 수험생들이 들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말을, 신현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돈 내고 학교 들어가면 참 좋겠다. 응?”
“돈 없어서 못 가는 것보다 낫잖아요. 안 그래요?”
“카디건 군은 어떻게 생각해요?”
“네?!”
화살이 다시 이쪽으로.
“현제 얘기 말이에요.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아, 그…….”
백미러로 신현제의 번뜩이는 눈이 보였다. 이수호는 습관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이 녀석이 부모님만 믿고 이러는데, 돈이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 좀 해주세요. 선배로서.”
이수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레코드판을 쥔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앞좌석에 앉은 사람이 보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돈이 전부는 아니죠.”
이수호는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김 대표의 말에 성의 없이 맞장구쳤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뾰족한 목소리로 신현제가 물었다.
젠장, 당연히 돈이지! 말이라고 하냐!
이수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것을 꾸욱 참으면서, 짐짓 어른스러운 척 대답을 골랐다.
“그러니까, 꿈이나, 희망 같은, 그런 거?”
“내 꿈은 돈인데? 그건 벌써 부모님이랑 할아버지가 이루셨으니까 난 된 거잖아. 안 그래요? 삼촌?”
“그게 네가 한 거냐. 으이구. 네 할아버지께서 아시면 피눈물을 흘리실 거다. 인석아.”
“우리 할아버지가 흘릴 피눈물을 왜 삼촌이 걱정해요.”
“언제 철들래?”
“그런 얘기를 왜 남 앞에서 하냐고요. 짜증 나게.”
신현제가 사납게 성질을 부렸다. 그의 어깨를 톡톡 치면서 철 좀 드세요, 라고 얘기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이수호는 소리죽여 웃었다.
“뭘 웃어요.”
“……?”
“눈이 웃고 있잖아요.”
레코드판으로 눈은 미처 가리지 못해 몰래 웃는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왜 웃는 사람한테 성질이냐. 신현제.”
“…….”
“그러고 보니 푸른 카디건 씨는 눈이 참 예쁘네요.”
“……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김남원 대표가 담담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나중에 데뷔하고 나면 그 눈빛에 여자 팬들 좀 녹아나겠어요. 노래도 잘하고, 외모도 훌륭하고, 기타 치는 솜씨도 일품이던데. 열심히 준비하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이수호는 오늘 김남원 대표가 왜 자신을 차에 태워 바비걸즈를 보여주려 하는지 알아차렸다.
나의 성공 가능성을 읽고, 미래를 위한 포석을 깐 것인가.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옆에 철도 안 들고, 싸가지도 없고, 건방진 신현제가 함께인 것이 영 마음에 걸리지만.
이수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김 대표는 뒷자리 청년의 공손함을 반이라도 배워보라며 신현제를 또 구박했다.
좌불안석(坐不安席).
이수호는 또래의 학생들보다 한자어를 잘 알았다. 부적이나 결계를 만들 때, 한자를 종종 사용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모두 떼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좌불안석이라는 한자를 공들여 한 획 한 획 그었다.
죽겠다……. 바비걸즈고 뭐시깽이고, 빨리 집에나 갔으면.
“다 왔네요.”
김 대표가 건물 앞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두 사람은 내려서 먼저 기다려. 주차하고 올 테니까.
“네? 같이 가도 되는데…….”
이수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신현제는 먼저 차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김 대표와의 대화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혼자 뒷자리에 버티고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이수호도 쭈뼛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김 대표의 차가 주차장 안으로 사라지자 수호는 신현제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서 레코드판을 만지는 척했다.
“저 공부 못하는 거 아니에요.”
“네?”
“공부 적당히 한다고요. 우리 집 인간들이 비인간적인 성적을 바라서 그렇지.”
“아……, 어.”
뭐라고 맞장구를 쳐줘야 할지 몰라 이수호는 등을 돌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
“남들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면 그저 팔자 좋은 줄 알지. 얼마나 피곤한 줄 알아요?”
“…….”
“존나 피곤한 일이 한둘이 아니라니까. 평민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
엄마, 얘 재수 없어요.
“그러니까, 아, 젠장…….”
신현제가 초조한 듯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제 말뜻은…….”
신현제의 목소리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수호의 귓가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온몸의 감각이 일제히 곤두섰다. 평소보다 수백 배는 민감해진 감각이 이수호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딱 한 번. 어렸을 적 누나와 장난을 치며 놀던 곳에서 그는 엄청난 악귀와 마주치는 불행한 경험을 했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것인지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달려왔고 두 사람은 한 시간 내, 소리를 높여 주문을 외고 결계를 만들어 간신히 그 귀신을 봉인했다. 악귀의 전신이 아닌 부분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소멸도 불가능했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수호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 감각이다. 허름한 창고에서 형체도 없는 무엇인가가 자신을 향해 드러내던 악의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감각.
이수호는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동공이 놀라움으로 번졌다.
“제 성적은 나쁘지 않고 바비걸즈도…….”
신현제의 쓸데없는 말은 끝맺음을 할 수 없었다. 뒤에서 잡아끄는 힘에 의해 바닥에 꼴사납게 나뒹굴어야 했기 때문이다. 뭐하는 짓이냐고 짜증을 내려던 신현제의 등 뒤로 시커먼 형체가 퍽, 하고 곤두박질쳤다.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의 지붕이 찌그러지고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자동차의 경보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주변은 순식간에 끔찍한 혼란 속에 갇혔다.
“어떻게…….”
자신을 잡아당긴 푸른 카디건을 바라보는 신현제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이수호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레코드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미안하다.”
경찰서 앞에서 김남원 대표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둘만 놔둔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됐어요.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죠.”
사람이 건물 위에서 떨어진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두 사람은 김남원 대표와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해야 했다. 본명을 묻는 경찰에게 이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이태섭의 이름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주민등록번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수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김남원 대표가 자신의 연락처와 인적사항을 말해주고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오늘 두 사람이 좋아하는 여가수가 눈앞에서 죽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겠느냐는 말을 덧붙이며.
이수호는 그 여자가 바비걸즈의 멤버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몰려든 사람을 통해 듣게 되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신현제가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으로 여자의 몸을 가려주기 전까지는, 누구도 한 소녀의 죽음을 지켜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죽음은 사적이고 존중받아야 할 순간인데 요즘 사람들은 그런 소중한 사실을 잊었다고 한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습이 이수호에게는 기괴하게 뒤틀린 시체보다 수십 배는 무섭게 느껴졌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같은 인간으로서 그런 경박한 태도라니. 구역질이 났다. 이수호는 경찰서에서 나오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 오늘 저녁에 먹은 음식들을 모두 게워냈다.
김 대표가 병원에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수호는 극구 사양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 집까지 태워다 줄게요.”
“아닙니다.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택시비도 없으면서 이수호는 허세를 부렸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경찰서 밖으로 나오자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몇몇 기자들이 그들의 앞으로 달려오며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퍼부었다. 수호는 화들짝 놀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바비걸즈 멤버인 하이안 양의 죽음이 자살이라는데 아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 자리에 우연히 계셔서 목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말씀 해주세요.”
다행히 기자들의 목표는 김남원 대표였다. 그는 현제에게 적당히 빠져나가라고 눈짓을 하고 기자들을 구석으로 끌어모았다.
“제가 현재 아는 사항은…….”
신현제가 하얗게 질린 이수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네?”
“빨리 이 틈에 가야 한다구요.”
기자들 틈을 헤치고 경찰서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더 이상 누구도 뒤를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시발, 요즘 일진 한번 더럽게 사납네.”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현제의 말에 자신이 절대적인 공감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신경 쓰지 마요. 혼잣말이니까.”
그 사납다는 요즘 일진에 자신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저 싸가지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왠지 이건 이것 나름대로 무섭다.
“그럼 저는 이만.”
이수호는 신현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이후로 민혜나 사장이 무슨 말을 하든 드림 엔터테인먼트 쪽을 향해 오줌도 싸지 않으리라!
“가긴 어딜 가요.”
신현제가 이수호의 목덜미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
“바래다 드릴게요. 삼촌이 그러라고 하셨어요.”
“아니요, 혼자.”
“됐어요. 아까 도움받았으니 저도 보답을 하죠.”
“…….”
엄밀히 말하자면 이수호는 이로써 신현제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 신현제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면 떨어지는 시체의 일부가 그의 머리통을 엄청난 힘으로 찍어 눌렀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집에 바래다주는 것이라고? 보답을 원하고 널 구한 건 아니지만, ……바래다주는 게 정말 그 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왜요?”
뻔뻔스러운 낯짝을 한 신현제가 물었다. 이수호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목숨을 구한 대가가 종이 한 장을 주워 주는 것이나 집까지 바래다주는 정도의 가치로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 저렇게 당당할 수는 없다.
“뭐 하실 말씀 있어요?”
“아니, 참, 목숨값이 저렴하다는 생각이…….”
당혹스러운 나머지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그대로 입 밖에 내고 말았다.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었다. 그 말의 의미를 신현제가 재빨리 알아채고, 잔뜩 낯을 찌푸린 후였으니.
“아, 그렇지. 내 목숨은 소중한데…….”
“…….”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신현제가 자신의 실수를 시인했다. 이수호는 자신의 앞에서 호락호락 실수를 인정하는 신현제의 낯선 모습에서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잠시 고민하던 신현제는 엄청난 호의를 베푼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뭐, 햄버거라도 하나 먹을래요?”
목숨값으로 받은 햄버거 세트를 손에 들고 이수호는 터덜터덜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라는 인사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그를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어? 누나 왔어?”
“밥은 먹고 다니냐? 그런 걸 먹으니 살이 안 찌지.”
이수현이 동생이 들고 있는 햄버거 봉투를 보며 한마디 했다. 이수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같이 먹을래? 하고 햄버거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햄버거 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는 잘 다녀?”
“그냥 그렇지.”
동생이 학교에서, 그리고 동네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을 이수현이 모를 리 없다. 이수호는 단 한 번도 그런 얘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우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공부는 잘하고 있어?”
“그럭저럭.”
“저번에 성적표 나온 거 보니까 수학은 바닥이던데?”
“하하하하. 수학 안 보는 곳으로 가야지.”
사실 대학은 이수호 인생에 필수가 아닌 옵션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오디션을 통과만 한다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성공가도가 열릴 테니.
“용돈은 괜찮아?”
“응. 남았어.”
땡전 한 푼 남지 않아 학교 점심도 거를 판이었지만 누나에게만큼은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청춘과 맞바꾼 돈이었다, 누나의 돈은.
“산으로 기도하러 다녀?”
“아니. 귀신 잡으러.”
빨간 케첩에 감자튀김을 찍어 먹으며 이수현이 씨익 웃었다. 해사하고 예쁜 얼굴이다. 귀신이나 잡으러 다닐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천안 근처 대학가에서 여대생들 의문의 죽음, 어쩌고 하는 뉴스 봤지?”
“응.”
이수호는 천안 근처의 대학가에서 비슷한 시기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 세 차례나 반복되어 한동안 뉴스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것을 떠올렸다.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보러 갔다 왔어. 확실히 이상하더라. 여대생이 죽은 지 한참 지난 곳에도 먹립의 흔적이 보이더라고.”
먹립은 원한을 가진 혼에 기생하는 어둠으로 원혼들은 보통 어른의 머리통만 한 크기를 토해내게 된다. 그러나 일단 토해놓은 먹립은 오랜 시간 공간에 머무르지 못한다. 사람들의 양기에 닿으면 스러져 없어지기 때문이다.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보통의 양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시간이 지나고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현상은 한꺼번에 사람들이 학살당하거나 사고를 당한 곳에서 흔히 보이는 일이었다.
“이상하네.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제대로 본 거 맞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무당집 아들 인생 18년이면 웬만한 이쪽 세계의 일은 가닥이 잡혔다.
“응. 다시 한 번 가보려고. 그래서.”
“갔다 오는 김에 호두과자나 사다 줘. 천안 호두과자 맛있잖아.”
“그래. 알았어.”
이수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현은 남은 감자튀김을 다 먹겠다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나는 먹는 거 어디로 가는 줄 모르겠어.”
“귀신 추적하고, 잡고, 보내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소비되는 줄 알아?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일을 할 줄 안다면 다이어트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엄마는? 뭐야?”
“특이 케이스. 스트레스를 온통 먹는 걸로 풀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어머니는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먹어댔다. 온 세상의 음식을 다 먹어치울 기세였다. 수호는 그것이 마음속의 허함을 채우려는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어머니를 말리지 못했다.
“누나는 스트레스를 뭐로 푸는데?”
“아이돌 빠질.”
“참나. 그 나이 먹고.”
이수호는 투덜거리다가 바비걸즈의 사인을 받겠다고 삼촌을 졸랐다는 신현제의 얼굴이 떠올라 비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장면의 결말이 보고 싶던 아이돌의 시체라는 사실이 비극이긴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데 표정이 그렇게 버라이어티하냐?”
“아무 생각도 안 해.”
수호는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쓸어내려 눈을 가리며 대답했다. 감자튀김을 집으며 웃던 수현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수호야. 너 오늘 어디 갔다 왔니?”
“응? 밀로드.”
이수호는 일부러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다른 일로도 힘든 누나에게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구나. 무슨 일 있으면 꼭 얘기해.”
“당연하지.”
“너 생일이 얼마나 남았더라?”
“생뚱맞게 생일은 왜. 아직 한참 남았어.”
“……그렇지. 너 이상한 일 있으면 꼭 얘기해. 알았지?”
“알았다고, 하여간 잔소리는. 이 집 여자들 유전이야.”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며 수호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대스타가 될 운명이지만 무늬는 학생이니 학생답게 지내주자고 관대한 결정을 한 것이다.
오늘 정말 끔찍한 사고가 있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잊을 수 있다고 믿었다. 시험공부를 하고 잠들기 전에 자신의 앞에서 죽어간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이수호는 기나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일요일에 가게를 나온 것은 순전히 변덕이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어서 집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혼자 방구석에 있자니 우울한 생각만 들어 바람이나 쐬자고 나온 것이다.
태섭은 주말 내내 가게에 죽을 치고 있는 것인지 웨이터인 승혁을 도와 가게 오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황금 같은 주말에 혼자 가게를 찾아온 수호를 보며 잠시 눈물을 훔치더니,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밥은 먹었어?”
“네.”
“수호 왔네. 공부는 안 하냐? 명색이 고3인데.”
승혁이 지나가며 한마디 했다. 고3으로서의 자각이 현저히 부족한 수호의 모습에 걱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영 꼴통은 아니니까.”
“그런 말을 영 꼴통인 태섭이 형 앞에서 하면 태섭이 형 서운해한다.”
이태섭이 승혁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죽는다, 하고 얼굴을 붉힌다. 수호는 물끄러미 그런 태섭을 보면서 꼴통이었구나, 하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넌 또 왜 고개를 끄덕이냐. 형, 그런 사람 아니다.”
“어때요. 형은 대신 인디밴드 기타의 신이잖아요.”
“하긴, 내가 기타의 신이긴 하지.”
잠시 우쭐거리던 이태섭이 놓칠 뻔했던 이야기의 본질을 퍼뜩 떠올리고 손을 내저었다.
“형 그런 사람 아니다. 이 형이 고등학교를 다니다 만 것은 우리나라의 비합리적인 교육제도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다고. 너도 알지? Rock spirit!”
그가 손가락을 꼬아서 앞으로 내밀며 외쳐보았지만 이수호는 듣는 둥 마는 둥 유유히 옆을 지나쳤다. 그의 머릿속에 이태섭은 고등학교 중퇴라는 정보가 한줄 덧새겨졌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진짜 웬일이야. 어제도 왔었는데.”
“그냥요.”
테이블에 걸터앉은 수호는 발을 앞뒤로 흔들며 태섭과 승혁이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대 걸레로 바닥을 밀던 승혁이 아, 하고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거 뉴스 봤어? 난리 났더라. 그 바비걸즈 죽은 애.”
“아이고, 끔찍하다, 안 그래도 아는 밴드 드럼 녀석은 어제 기사 보자마자 울고불고 난리다. 나중에 드럼으로 성공해서 걔랑 결혼할 생각이었다나? 미친놈.”
어제의 사건이 이미 인터넷을 한바탕 쓸고 간 모양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소녀의 죽음에 진정으로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보다 가십거리로 흥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수호는 어제 컴퓨터를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잠들어 버린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걔 왜 자살했는지 그 이유 알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승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걔네 소속사가 좀 더럽기로 유명하거든요. 사장 놈이 접대한답시고 걔들을 돌린 거지. 그러다가 재수 없게 이번에 죽은 애가 임신을…….”
“떽!”
이태섭이 손바닥으로 승혁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호통을 쳤다.
“인마, 너는 이 바닥 소문이 어떻게 도는 줄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냐.”
“아니, 나는 그냥 그렇다고.”
“이미 죽은 애를 그런 식으로 한 번 더 죽여야겠어?”
거기에는 이수호도 동의하는 바였다. 사람들은 말의 무거움을 모른다. 말은 때때로 행동보다 잔인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악의가 담긴 말은 그 힘이 더했다. 말로써 상대를 저주하는 저주술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형.”
수호가 승혁을 조용히 불렀다. 태섭에게 얻어맞고 있던 승혁은 수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줄 알고 눈을 빛내며 돌아보았다.
“자살한 영혼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거 알아요?”
“뭐? 무슨 말이야.”
“그렇게 떠돌던 영혼이 승혁이 형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겠어요.”
“야, 인마. 갑자기 뭔 봉창을 그렇게 뜯냐.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글쎄요. 형 뒤에 있을지도 모르죠.”
무심한 듯 던지는 한마디에 승혁이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태섭이 배를 잡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으하하, 멍청한 새끼. 넌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그런 농담에 속아 넘어가냐.”
“으이 씨. 수호. 너 앞으로 그런 농담하지 마. 가게 셔터도 내가 닫는데.”
“하하하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안 그러냐? 수호야.”
그렇게 묻는 태섭의 머리 위에 빨간 눈의 귀신이 눈을 부라리며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게 수호는 조금 아쉬웠다.
가끔은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이 필요하기도 한데.
“아, 몰라 몰라. 오늘 밤에 화장실은 다 갔네.”
승혁이 투덜거리면서 의외의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수호는 가끔 이런 장난을 칠 상대를 찾았다는 생각에 약간 즐거워졌다. 어제 있었던 우울한 기억이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눈이 마주친 빨간 눈의 귀신이 자신을 가리키며 어깨를 우쭐거렸다.
……뭐지. 지금 자기 덕분이라고 생색이라도 내는 건가.
“뭐하냐? 왜 허공을 보면서 넋을 놓고 있어. 너도 귀신이 무서워? 농담을 던져놓고도 생각해보니 막 무섭냐?”
“아니요. 그건 아니고…….”
“무서우면 이 형님한테 말해라. 형님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귀신들도 이태섭, 내 이름 석 자 들으면 다 도망간다고. 크흐흐. 짜식이 귀엽게 겁먹어서.”
눈치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이태섭이 수호의 양 볼을 쥐고 흔들며 그를 귀여워해 주었다.
“됐고요. 저 기타나 좀 가르쳐 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귀여움 받는 것 따위는 사양인 사춘기 소년 이수호는 이태섭의 손을 내치며 말했다.
“호오, 이 녀석 봐라. 너 내가 누구한테 기타를 쉽게 가르쳐주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
겉은 헐렁해 보여도 이태섭이라는 이름은 이 바닥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대단했다. 작사, 작곡 실력도 좋아서 그에게 눈독을 들이는 음반회사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밴드 전체가 아니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버리는 바람에 아직도 데뷔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수호는 그 소문을 믿었다.
“가르쳐주시면 저도 좋은 거 알려드릴게요.”
“뭐? 꼬마 주제에 뭘 알려줘.”
이수호는 씨익 웃었다. 조만간 밴드의 보컬이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고급 정보를 언제 말해줘야 할까.
이수호는 몇 번이나 이태섭의 조상신이 밴드 보컬을 볼 때마다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는 모습을 보았다. 그럴 경우는 딱 하나였다. 당사자가 조만간 등 뒤에서 칼을 꽂거나 배신을 때린다는 뜻이다.
“글쎄요. 봐서 알려드리죠.”
“어쭈, 배짱 있다? 근데 오늘은 깐수호 안 하냐?”
“네. 오늘은 안깐수호예요. 오늘 무대 설 것도 아니니까 사장님은 제 헤어스타일에 관여할 권리가 없거든요.”
이수호는 아직도 자신의 앞머리가 주는 다크한 매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내린 다음, 구석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어머. 네가 오늘 여긴 웬일이니.”
민혜나 사장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수호를 보고 인사말 대신 의아함을 내보였다.
“그냥 왔어요.”
수호는 오늘 하루 같은 대사를 대체 몇 번하게 될지 세어보자고 다짐했다.
“너 어제 거기에 있었다며. 김 대표님이 안 그래도 걱정된다고 연락하셨더라. 괜찮니?”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기에 수호는 음,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민 사장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재차 물었다.
“괜찮아? 얘, 어쩌다 거기에 가서 그런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니. 놀랐겠다.”
“그러게요.”
“안 됐지. 어린애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이 바닥이 그래. 너도 나중에 데뷔하게 되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알겠어요.”
민 사장이 손으로 수호의 턱을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혀를 찼다.
“넌 마음이 약해 보여서 걱정이야. 눈을 보면 눈물이 와락 쏟아질 것 같단 말이야.”
“저 안 울어요.”
울어본 지가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울고 나면 저쪽 세계의 것들을 느끼는 귀감(鬼感)이 몇십 배는 민감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제 그 얘기 듣고 걱정이 되어서 잠이 와야 말이지. 핸드폰도 없으니 연락도 안 되고.”
“밤늦은 시간에 통화하셨나 봐요?”
놀림이 묻어나는 이수호의 물음에 민혜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얘,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몸을 돌린다.
“괜찮아요.”
“응?”
“그분 괜찮은 것 같아요. 유부남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좀 쪼잔한 구석이랑 의뭉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정말? 정말이야?”
재차 확인을 하는 민 사장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꼬이는 남자는 많은데 쓸 만한 놈이 없어, 풍요 속의 빈곤을 살아오던 그녀에게 방금 전 이야기는 금과옥조와도 같았다.
“예. 계속 만나보세요.”
민혜나 사장이 꺅, 하고 새된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며 이수호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게 영 나쁜 것은 아니란 생각까지 들었다.
“아, 맞다. 맞아.”
한참 근본을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좋아하던 민 사장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입을 열었다.
“그 사장 조카라는 애가 아래 와 있어. 내가 네 전화번호를 알려준다고 해서 아래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으각!”
이수호가 기겁하며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세수를 하는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는 것과 동시에 신현제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곳에서 푸른 카디건과 마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던 그는 이내 평연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허……네.”
신현제에게 존댓말로 인사를 받자 기분이 묘했다.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좋아하자니 후환이 두렵다 못해 끔찍했다.
이수호는 필사적으로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태연하게 뒷걸음질 쳤다.
“삼촌이 직접 가서 괜찮은지 확인하라고 했는데, 뭐 괜찮은 거 같네요.”
“아하하, 예.”
“그리고 민번이랑 연락처 좀 주세요. 제가 가서 정황설명은 했고 아마 그쪽한테까지 연락은 안 갈 거예요. 그래도 형식상 인적사항은 필요하다 하네요. 이태섭이었죠? 이름.”
“응? 나?”
구석에서 기타를 만지고 있던 이태섭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수호는 잠깐만, 하고 외친 후에 태섭에게 달려가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의아해하는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가 이수호는 목소리를 낮춰 협상을 시작했다.
“제가 아까 좋은 정보 하나 알려드린다고 했죠.”
“그래. 그게 뭐?”
“지금 알려드릴 테니까, 제 말대로 좀 해주세요.”
“무슨 부탁인데?”
이수호가 눈짓으로 바 앞에 서 있는 신현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제 쟤랑 같이 있다가 사건에 좀 휘말렸어요.”
“응, 그런데?”
“제 신분을 밝힐 일이 생겼는데, 아시다시피 제가 위장취업이잖아요.”
“아하.”
“본명을 말했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태섭이 형 이름을 대버렸어요. 죄송합니다.”
이수호는 일단 깍듯이 사과했다.
“됐어. 괜찮아. 지금이라도 그냥 네 이름 말하면 되지, 뭐.”
“……그게 그러니까.”
다시 신현제가 서 있는 곳을 힐끔거리던 이수호가 굉장히 곤란하단 얼굴로 우물우물 말을 되새김질했다. 이태섭이 얼른 말해보라며 그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저기……, 제가 미성년자인 걸 알게 되면……, 싫어할까 봐.”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미성년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신현제가 그렇게 괴롭히고 무시하던 무당집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음. 흐음.”
이태섭이 신현제와 이수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전혀 딴판인 두 사람.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이수호. 겉으로만 봐도 친구가 넘쳐날 것 같은 신현제.
두 사람의 간극과 거짓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태섭은 본인의 오지랖으로 뚝딱 결론지었다.
“녀석,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
“좋아. 그래. 내 주민 번호, 이름, 다 사용해. 원하면 핸드폰 번호도 줄게. 주소는 어떠냐?”
“민번이랑 이름만……, 일단.”
이태섭이 재빨리 수호의 귓가에 대고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속삭여주었다. 수호는 몇 번 입으로 숫자를 중얼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이태섭의 귓가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속삭여주었다.
“뭔 개소리야. 크하하핫.”
이태섭은 수호의 얘기를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냥 알고 계시라고요. 그리고 쟤 앞에서 제 이름 절대 부르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해달라고 대신 말해주세요.”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푸른 카디건.”
“크하핫, 그래.”
이수호는 호흡을 가다듬고 바로 걸어갔다. 신현제는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주민번호. 여기.”
이수호는 메모지에 방금 외운 태섭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못미더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신현제에게 건넸다.
“나이가, ……1학년 아니었나?”
“아, 응…….”
이태섭의 나이를 고려하지 못한 거짓말의 한계였다.
“어려 보이네요. 흐음.”
“그래. 내가 좀 동안이에요. 이제 됐지? 나한테 더 볼일 없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젖혀 유지시키는 것도 일이었다. 이수호는 얼른 그가 가게에서 나가주길 바랐다.
“그럼 저는 이만.”
신현제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이수호는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오지랖 넓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태섭이 그걸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어허, 가긴 어딜 간다고. 기왕 왔으니까 공연이나 보고 가.”
“저 이런 노래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신현제가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취향을 밝혔다.
“그게 안 들어봐서 그래. 이런 노래는,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진다니까. 낯선 것에 반감을 갖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이치지. 하지만 한번 물꼬가 터지면, 애정이 콸콸콸. Rock spirit!”
이수호는 이태섭이 지하철에서 물건을 판다면 대박 상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대박이 나면 안 되지. 신현제! 가버려! 얼른 가!
“너 얘 노래 안 들어봤지?”
신현제가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서 있자, 이태섭이 비장의 카드인 수호를 잡아끌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신현제를 앞에 둔 이수호는 으힉,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들어봤어요.”
“어때? 좋지?”
“…….”
신현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 가버려! 내 노래 따위 백 원짜리라고 욕하고 가버리라고!
이수호는 열심히 눈으로 신현제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뭐, 들을 만은…….”
“……!”
애초에 텔레파시가 통할 놈이 아니었다. 이수호는 괴로워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그럼 오늘 네가 친구를 위해 한 곡 불러줘라. 너 어제 노래 안 부르고 그냥 가서 서운했잖아. 안 그래?”
“아니, 그걸 어떻게 제 맘대로 해요.”
이수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응. 내 맘대로 해도 돼.”
“어떻게 형 맘대로 그게…….”
“사장님. 오늘 푸른 카디건 씨 한 곡 해도 되죠?”
“응. 네가 애들이랑 조율해서 괜찮으면.”
민혜나 사장이 이태섭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태섭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수호는 잊고 있었다. 이태섭은 밀로드MILORD 주말 밴드의 우두머리였다.
이수호가 기타를 들고 조율을 하는 모습을 보던 이태섭이 신현제의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어때?”
“네?”
“친구로서 어떤 거 같냐고.”
이태섭이 턱짓으로 수호를 가리켰다.
“친구 아닌데요.”
“나이 차이 때문에? 나이는 우정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아.”
“…….”
“저 녀석 참 괜찮은데.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그렇지. 엉뚱한 구석이 있거든. 근데 그게 또 매력이야.”
신현제는 무대에서 자기 몸통만 한 기타를 무릎에 얹고 마이크를 체크하고 있는 푸른 카디건을 흘깃 쳐다보았다. 고무줄로 앞머리를 위로 묶은 헤어스타일을 한 창백한 옆모습이 얼핏 흐릿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끌었다. 남자의 외모 따위 내 얼굴만 잘생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신현제가 푸른 카디건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그의 노래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허스키하고 음울한 그의 음색은 손톱 옆에 인 거스러미처럼, 신현제의 신경을 날카롭게 서게 했다.
“엉뚱해요?”
“어.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니까. 근데 그게 잘 맞아서, 사람들이 자기 연애운 좀 봐달라고 줄을 서지. 사장님이 그래서 완전 편애하잖아.”
의자에서 내려와 음향 체크 중인 이수호를 바라보던 신현제가 설핏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안 그래 보이는데, 통찰력이 있는 사람인가 보군요.”
“흐음, 통찰력이라고 해야 하나? 흐흐흐, 나한테는 방금 우리 밴드 보컬이 배신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거야. 귀여운 녀석. 그런 개소리는 안 해도 명의는 빌려줬을 텐데 말이야.”
신현제는 왜 이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작곡은 들어본 적 없지? 저 나이치고 제법 괜찮아. 분명히 나중에 유명해질 거야. 어, 시작한다.”
오픈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게 안에 사람이 몇 없었지만, 이수호는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저를 보세요.
내가 이 동네에서 제일 멋지답니다.
모두가 날 좋아하지요.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음울하게 깔린 낮은 음색이 요부와도 같은 매력을 내보이며 부드럽게 노래를 시작했다.
날 보는 순간
모두가 매료된 것처럼 느끼지요.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내가 도착하면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신현제의 눈빛에 스친 놀라움을 읽고 이태섭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쟤 진짜 노래 잘해. 음역대가 높고 바이브레이션만 소 모는 놈들처럼 한다고 다가 아니라고. 저런 게 노래를 잘하는 거지.”
“…….”
저런 목소리도 내는구나.
신기했다. 신현제에게는 노래라고 해봤자 가요프로그램이나 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 게 전부였다. 그에게 있어 노래는 소모적인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렇게 만만하진 않다고요.
저를 유심히 보세요.
저를 유심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세요.
이런 사람은 찾기 힘들죠.
전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죠.2)
흔한 눈웃음 한번 치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듣는 사람을 유혹했다.
신현제는 멍한 얼굴로 푸른 카디건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낸들 아나.”
테이블에 걸터앉은 이태섭이 싱긋 웃었다.
“영어는 아닌 거 같은데…….”
“너도 꼴통이구나. 불어잖아.”
“제2외국어 독일어 배웠는데 알 게 뭐예요.”
신현제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태섭은 흐뭇한 얼굴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푸른 카디건의 노래를 음미했다.
“우리 밴드 보컬이랑 불알친구만 아니면 그 새끼 차버리고 저놈을 영입하는 건데. 아따, 발음도 찰지네.”
“곡명이 뭔데요.”
“모른다니까. 거참 자식, 더럽게 끈질기네. 직접 물어봐.”
“…….”
영어도 아닌 불어로 완벽하게 노래까지 부르는 사람에게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할 곡명을 묻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신현제는 핸드폰을 꺼내 마지막으로 치닫는 푸른 카디건의 노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가 끝났다.
수호가 노래를 마치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푸른 카디건을 연호하며 발을 굴렀다. 이수호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 사장이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한 곡 더 해라! 푸른 카디건 멋져요! 팬할래용!”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진 이태섭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며 주접을 부리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혜나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호는 다시 기타를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매우 슬픈 목소리로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노래를 시작했다. 기억에 새겨질 푸른 카디건의 노래를, 신현제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듣고 있었다.
“마셔, 마셔.”
“자자, 한 잔씩 돌리고.”
“우리 밀로드의 평화를 위하여!”
역시 건배제의는 이태섭이 주도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높이 쳐들고 건배를 했다. 태섭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주말 멤버 회식자리에 참여하게 된 이수호의 잔에는 당연히 사이다가 채워져 있었다.
“술 안 마셔요?”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이 이태섭이 끌고 온 신현제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당연히 술을…….”
“……?”
물을 마시던 신현제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어째서, 라는 얼굴을 한다. 이수호는 얼른 주절주절 말을 주워섬겼다.
“……못 마셔서.”
못 마시는 게 당연했다. 미성년자인 이수호가 술을 접할 기회는 없었으니까. 신현제는 떠들썩한 사람들을 흘긋 쳐다보더니 소주병을 들어서 뻔뻔하게 자신의 잔에 따랐다.
“헉……!”
“어때요. 애당초 미성년자를 술집에 출입시킨 사람들이 잘못이지.”
신현제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소주를 들이켰다. 이수호는 혼자 사이다를 마셨고, 신현제는 소주와 사이다를 번갈아 마셨을 뿐, 두 사람 사이에 이렇다 할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대체 왜 나를 여기에 끌고 온 거냐, 얘는 왜 또 따라온 거고. 설마 뭔가 눈치챈 걸까?
이수호는 사이다 잔을 들고 신현제를 힐긋 쳐다보았다. 상추에 삼겹살을 얹어 먹으려던 신현제와 눈이 마주치자 이수호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젠장. 무서워. 내가 왜 이런 기분으로 사이다를 마셔야 하냐고!
“머리가 왜 그 모양이에요.”
“예?”
“별로 안 어울리는데.”
신현제가 고무줄로 쫑쫑 묶은 앞머리를 가리키자 이수호가 정색하며 그의 손을 내쳤다. 닿지도 않았는데 손을 얻어맞은 신현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이수호는 심장에 식은땀이 흘렀다. 반사적인 대응이었다. 앞머리가 눈을 가리게 되어 신현제가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이렇게 나란히 앉아 사이다를 나눠마시기는커녕 사이다병으로 얻어맞을 게 분명하다. 얻어터지는 곳은 학교만으로도 충분했다.
신현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 행동을 지켜본 이수호의 머릿속에 유레카,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유레카. 내가 신현제를 때렸다! 때렸어! 신현제를 내가 팼어!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러브 앤 피스를 외치며 살아왔는데, ……폭력은 이렇게 좋은 거였어!
63빌딩에라도 올라가서 확성기에 대고 전국방송을 해버리고 싶었다. 오늘의 이 희열을 잊지 말고, 꼭 노래를 만들어 부르리. 곡명은 내가 깐, 신현제. 찰싹찰싹찰싹.
“둘이 뭐 하냐아.”
서먹한 분위기를 눈치챈 이태섭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앉으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태……, 형.”
이수호가 재빨리 이름의 끝을 흐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드셨어요.”
혹시나 싶어 수호는 태섭의 밴드 보컬을 흘깃 쳐다보았다. 평연한 척 낯을 꾸미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오늘 회식 자리를 갖자고 한 장본인이 보컬인 것을 감안해 보면, 아무래도 중대발표가 있을 모양이었다.
“응? 난 원래 마시면 이렇게 마시는데. 둘이 좀 친하게 지내고 그래. 신현제? 현제라고 했나?”
눈치 없는 이태섭이 신현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원만이 잘 부탁한다.”
“원만이?”
“……형.”
이수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태섭을 제지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댔다.
“원만이 몰라? 원만이. 백 원만. 크흐흐. 얘가 손님한테 노랫값으로 백 원을 받았잖아. 그래서 백 원만. 원만이. 크하하하핫.”
“그 얘기를 왜 해……, 어휴.”
백 원을 준 장본인을 옆에 앉혀두고 이수호는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기분에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었다. 신현제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자.”
“……뭐.”
신현제의 커다란 손바닥.
학교에서 자신을 때리거나 후려칠 때, 종종 보았던 그 손바닥.
그 손바닥 위에 놓인 500원짜리 동전을 이수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랫값.”
“으하하하. 올랐네. 올랐어. 오백 원으로 올랐어. 그럼 뭐라고 물러야 해? 오백이? 오백이 귀엽다. 오백이. 자, 오늘부터 너는 오백이다.”
이태섭이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그러나 이태섭이 원하는 대로 수호의 또 다른 별명은 생기지 않았다.
신현제가 다시 손바닥을 내민 것이다.
“……?”
“거스름돈. 400원.”
이수호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댔지만, 그는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 싸가지 없는 자식. 아이돌이나 좋아하는 주제에 내 노래 값을 또 100원으로 매기다니.
한방 먹인 것이 퍽 유쾌했는지 신현제는 피식 웃으며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다.
“……구두쇠구나.”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파들파들 떨던 이수호가 내린 결론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해준 값으로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를 건네준 놈이다.
스크루지의 환생이다. 이런 놈이니 자신의 노랫값으로 백 원을 건네준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자 이수호는 오히려 신현제가 안 돼 보였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 뭐하나. 제대로 돈을 쓸 줄을 모르는데.
“구두쇠? 글쎄, 별로 아닌 거 같은데요.”
신현제가 중얼거렸다.
“구두쇠 맞는데요, 뭐.”
신현제가 갑자기 자리에서 스윽 일어섰다.
갔나? 구두쇠라고 놀려서 삐져서 갔나?
이수호는 고개를 빠끔히 빼들고 신현제가 사라진 방향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에게 이태섭이 친구를 두고 어딜 그렇게 다니느냐고 농지거리를 걸었다.
“계산했어요.”
“뭐?”
“여기 테이블 계산했다고요.”
“뭔 소리야, 쟤가?”
“몰라. 계산했다는데? 계산하긴 뭘, 으흐흐흐흐.”
다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기에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수호만이 지금 신현제가 하고 온 짓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이십만 원 정도 나왔어요.”
학생 주제에 이십만 원을 턱 내놓고도 동네 구멍가게에서 요구르트 하나 사먹은 얼굴로, 신현제가 대답했다.
“돈이 많으신가 봐요.”
이수호가 나직하게 빈정댔다.
“네.”
거리낌 없이 냉큼 대답하는 꼴에 이수호는 이 자식 정말 끝내주게 재수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박해요?”
“박하다니? 뭐가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내가 뭘 받으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목숨을 구해준 사람한테 햄버거 세트 하나로 입을 닦지는 않잖아요.”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이수호는 행여나 신현제가 자신을 알아볼까 조마조마해, 연신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깠다. 물론 목소리 변조에도 특별히 신경썼다.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잖아요.”
“네?”
“그거면 됐지. 솔직히. 난 누구한테 그 정도로 뭘 해준 적이 없는데.”
“……. 좀 다른 예지만 여자들 만나고 그러면 집까지 바래다주잖아요.”
“내가 왜?”
“남자고, 사귀는 사이면 보통은…….”
“전 보통이 아닌데요? 나 같은 남자랑 사귀면 오히려 여자가 날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닌가?”
“…….”
“뭐, 가끔 생일이나 이런 날은 데려다줄 수도 있겠지만.”
이수호는 잠시, 머리가 띵했다.
어떻게 하면 저런 개싸가지로 18년을 살아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식에게 싸가지 한 톨이라도 생길까, 하며 지금까지 마음을 졸이며 살아오셨을 신현제 부모님의 노고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나를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한 거나 햄버거 세트를 사준 것은 정말 엄청난 호의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이수호가 신현제의 끝 간데없는 싸가지에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을 무렵,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이태섭이 비틀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오! 친구! 영원한 친구!”
“친구 아니에요.”
이수호가 얼른 부정했다. 진짜 친구가 들으면 관에서 일어나겠다.
……아, 난 친구가 없으니 상관없으려나.
“둘이 사이좋게 지내봐. 우리 파랭이, 친구 갖고 싶다며!”
특유의 오지랖이 발동한 이태섭이 두 사람의 머리통을 잡고 바싹 붙였다. 놀란 이수호가 화들짝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
누가 파랭이냐! 누가 갖고 싶다 했어! 설사 갖고 싶다 해도 얜 아니잖아! 묶음으로 줘도 싫어! 반품이다!
“얘가 부끄럼이 이렇게 많아. 우쭈쭈. 아휴 귀여워.”
갑자기 이태섭이 이수호를 끌어안고 볼을 부벼대는 바람에 앞머리를 묶은 고무줄이 툭, 하고 끊어지고 말았다.
“……!”
안 돼. 이것만은 절대 안 돼!
이수호는 앞머리를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술에 취한 이태섭은 수컷 고릴라보다 힘이 셌다. 신현제가 짜증 섞인 얼굴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이수호는 몸을 날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물병과 사이다병이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수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야 인마! 너 괜찮냐!”
“수……, 파랭이. 너 다친 데 없어?”
수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 상태를 확인했다. 됐다. 이만하면 충분해.
그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자 머리카락을 흠뻑 적셨던 물과 사이다가 반원을 그리며 공중에 흩뿌려졌다.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악, 하고 소리 지르며 성질을 냈다.
이수호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좋다. 완벽하다.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흘러내리지 않겠지.
“인마, 너 뭐하는, 으, 퉤퉤.”
사이다 섞인 물을 뱉어내며 이태섭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아, 니네가 락을 아냐고!”
갑자기 밴드의 드럼이 젓가락으로 미친 듯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ROCK SPIRIT! BABY!”
흥에 겨운 이태섭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그는 숟가락을 쥐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두들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그때 밴드의 보컬이 손을 들고 뭐라고 말했다.
“뭐? 안 들려 인마, 명색이 보컬인 놈이 그렇게 모기 같은 목소리로 뭘 해! 샤우팅 좀 해! 새끼야!”
“나 밴드 그만둔다고! 새끼야!!!!!”
쨍그랑.
테이블에 숟가락이 떨어지며 정적을 깨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이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처음 받은 그 느낌을 마음껏 음미했다.
순식간에 술자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배신자라느니, 그럼 땅 파서 노래만 부르고 사냐는 둥, 현실적인 문제였다는 둥, 날 밟고 가라는 둥. 드잡이로 시작된 싸움판은 순식간에 주먹다짐이 오고 갔다. 이수호는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계산도 완료되었겠다, 본인이 신경 쓸 문제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다.
큰길로 걸어가고 있는 그의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신현제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이수호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네?”
“해산할지 어떻게 알았냐고요.”
단순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따지는 듯한 말투였다.
별 얘기를 다했구나.
이수호는 고개를 내저으며 태섭의 오지랖을 한탄했다.
“그냥 어쩌다가.”
“어쩌다 뭐요? 점쟁이나 이런 건가?”
뜨끔했다. 신현제가 자신을 알아본 것일까? 아까 잠시 앞머리가 내려간 사이에 이놈이 자신을 알아차린 것일까?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있잖아요.”
“……그냥, 얘기를 좀 듣게 됐어요. 보컬 형이 관둔다는 얘기를.”
여기서 속아주지 않으면 이수호는 그냥 납죽 엎드려 얼굴은 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신현제는 그 대답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래요? 다행이네.”
“뭐가 다행인데…….”
“점쟁이나, 그딴 거. 질색이라서.”
“…….”
“만에 하나 카디건 씨가 그런 거라면, 삼촌한테 부탁해 매장시키려고 했죠.”
“…….”
귀신보다 독한 놈.
어쩜 저런 얘기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 있냐.
“시발, 진짜 싫다.”
신현제가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왜 그렇게 싫어해요?”
한번은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다.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냐고. 내가 너희들에게 무슨 피해를 준 것이냐고. 내 존재 자체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고.
“뭐?”
“그런 거, 점쟁이, 뭐……. 귀신. 뭐…….”
이수호는 무당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럼 귀신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
지금도 저 골목 끝에서 눈동자 전체가 새카만 남자애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고 얘기해봤자겠지?
“난, 그런 거 안 믿어.”
신현제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귀신, 점, 무당. 이딴 거 절대로 안 믿는다고요.”
“개인차가 있죠. 그런 거는.”
“개인차는 시팔.”
평소보다 거친 신현제의 말투에 이수호는 슬금슬금 옆으로 떨어져 걸었다.
“그런 것들은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사기꾼 새끼들.”
“무슨 사기를 쳤다고, 설사 사기 좀 쳤다고 죽이는 건 좀 심하잖아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죽였어.”
“네?”
“죽였다고. 우리 할머니.”
신현제가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신장 때문인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수호에게는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난 안 죽였는데…….”
이수호는 말해 놓고 놀라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래서야 자신이 무당집 아들임을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다행인지 신현제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우리 할머니, 그런 거 엄청 좋아하셨다고. 점, 무당, 운세. 매년 내 손을 잡고 그런 곳에 가셔서 점을 보시곤 했어.”
점집에 들어가는 신현제라. 머리가 상상을 거부한다.
“그런데……요.”
“할머니가 아프셨어.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았는데 기침이 안 멎는 거야.”
“…….”
“그 빌어먹을 무당은 귀신이 할머니의 목을 잡고 있다고 굿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 그 개새끼가 아픈 할머니한테 큰 굿을 해야 한다고 수천만 원을 받아 처먹었다고.”
가끔 그런 무당들이 있다. 돈에 눈이 멀어 사람의 목숨을 뒷전에 두는 사이비 같은 것들이.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굿하고 사흘 뒤에 돌아가셨어. 병명이 뭐였는지 알아? 하하하, 가래로 인한 질식사였어. 그냥 병원에 가서 가래만 제거하면 되는 건데, ……고집 센 노인네가 말도 안 듣고.”
옛날 일이 떠올라 울컥했는지 신현제가 주먹을 쥔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서 싫어.”
“……네.”
싫어할 만하네요. 하지만 전 그 사기꾼이 아닌데, ……졸업 전까지 좀 살살 때려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 거 아니라 다행이야.”
“…….”
근데 언제부터 얘가 나한테 반말을 하고 있지? 깐수호 버전이면 그래도 연상이라는 설정 아니던가?
이수호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신현제를 올려다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거 되게 기분 더럽거든.”
“네?”
“왜 나랑 눈만 마주치면 그렇게 놀라냐고. 내가 귀신도 아니고. 씨팔. 귀신은 얼어 죽을.”
본인 입으로 말해놓고도 단어 선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신현제가 또 한 번 거칠게 욕설을 했다.
“음……, 그것이…….”
어디서부터 설명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귀신과 눈이 마주치는 것은 예삿일이라 놀랄 일이 전혀 아니올시다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니면 난 깐수호로서 네가 아는 이태섭이 아니라는 말부터 해야 할지. ……그냥 얼굴은 때리지 말라고 순순히 불어야 하나.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 중인 이수호를 신현제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것일까. 수호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아까부터 머릿속을 떠돌고 있는 질문을 입 밖에 내기로 마음먹었다.
“……저 누구랑 닮지는 않았어요?”
“누구? 모르겠는데.”
“혹시 사람 얼굴 잘 기억 못 해요?”
“내가 왜?”
“……?”
“내가 왜 사람 얼굴을 기억해야 해? 걔들이 날 기억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
거기 뒤에 있는 신현제 조상신. 눈 돌리지 말고 똑바로 봐! 이게 바로 네 후손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
“별로 관심도 없고. 기억할 필요도 없어.”
“……그렇군요.”
무한이기주의가 자신을 살렸음을, 이수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근데 카디건 씨 노래는 확실히 기억에 남는단 말이지. 내가 사장되면 음반 내줄까?”
“근데 왜 아까부터 반말해요?”
앞머리를 깐 이상은 이 인간이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확신이 서자 이수호는 대담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반말하면 안 되나? 아까 그 사람도 반말하더니.”
“누구요?”
“고릴라 같은 놈.”
“태……, 형.”
이태섭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현제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밴드가 망하다니 꼴 좋다, 라는 지금 당장 유치원에 입학시켜도 좋을 만한 유치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화장실.”
신현제가 갑자기 불쑥 중얼거렸다.
“네?”
엉뚱한 한마디에 이수호가 놀라서 되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신현제가 벽에 손을 짚었다. 이수호가 기겁하며 그를 뜯어말렸다.
“여기서 무슨 짓이에요. 이틀 연속 경찰서 가고 싶어서 이러나?”
“화장실에 볼일 좀 보겠다는데 무슨 경찰서 타령.”
재수 없게 코웃음을 치는 신현제의 낯짝을 보며, 이수호는 깨달았다.
아, 얘. 취했구나.
“술 잘 마시는 거 아니었네.”
“오늘 처음 마셔보는데.”
“…….”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시발, 나 존나 귀하다고.”
“네…….”
이수호는 이 광경을 찍어다 신현제에게 들이밀면 평생 자유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강한 유혹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카디건 씨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집에 데려다준다고 한 거면, 대단한 거 아니야?”
“객관적인 기준에서 평하면 박한 거고, 그쪽 기준에서 평가하면 대단한 거지.”
“그래. 알면 됐어.”
“그런데 보통은 객관적인 기준에서 평가하잖아. 내가 네 기준에 맞출 이유도 없고. 솔직히 햄버거 세트가 뭐야. 평생 맥도널드 이용권 정도면 몰라도. 쪼잔해.”
술에 취했겠다, 나도 못 알아보겠다. 이수호는 내뱉고 싶은 대로 떠들었다.
“그래? 그런 거야?”
“그렇지. 다른 것도 아니고 목숨을 구했으니까. 아까 말했잖아. 존나 귀하게 자랐다면서. 그럼 존나 귀한 목숨일 거 아니야.”
신현제가 흐음, 하고 골몰히 생각하더니 갑자기 간다, 하고 방향을 틀어서 대로변의 택시를 잡았다. 뭐라고 말을 붙일 틈도 없었다.
택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이수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현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버렸다는 시원함에 그는 이후에 닥칠 일에 관해서는 어떤 걱정도 하지 않았다.
“아아, 나도 택시 타고 갈까.”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지만, 신현제가 건네준 500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다.
이수호는 웃으며 걸었다. 골목 끝에서 그를 바라보던 꼬마 아이도 따라 웃었다. 어린 귀신의 웃음소리가 짜랑짜랑 울려 퍼졌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밤이었다.
주말이 끝나고 학교에 갔더니, 교실은 온통 바비걸즈 멤버의 죽음 얘기로 한참이었다. 이수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 앉았다.
“시발, 어떻게 나의 하이안이 죽냐고! 이건 무슨 음모가 있는 거야. 분명해.”
“현제야. 너 들은 소식 없어? 정말 자살 맞아? 타살 아닐까? 너 삼촌이나 할아버지한테 물어봐. 진짜 자살이래?”
바비걸즈의 열렬한 팬이라는 박성곤이 신현제를 붙들고 늘어졌다. 어젯밤 비보를 전해 듣고 한잠도 자지 못한 것인지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였다.
“몰라.”
“너 그런 얘기 잘 알잖아. 좀 알아봐.”
“모른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여신님을 돌려줘. 내 생일에 대체 이게 무슨 끔찍한 일이야. 난 평생 여신님을 떠올리며 우울한 생일을 보낼 거야.”
“병신아. 내년이면 다른 아이돌 보면서 껄떡댈 거면서.”
윤민철이 우둔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나름 날카로운 혜안을 발휘했다. 박성곤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성질을 부렸다.
“시발, 니가 뭘 안다고 지랄이야. 하이안에 대한 내 사랑을 니가 알아?”
“염병떤다. 니놈이 일주일 내에 그 지고지순한 사랑 잊고 다른 아이돌 판다에 내 두 손을 건다.”
신현제는 주변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현제야. 진짜 몰라? 들은 거 하나도 없어?”
“모른다니까. 꺼져. 시끄러워.”
신현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자 박성곤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의 주변에서 물러났다. 신현제의 똘마니 노릇을 오래 해온 터라, 누구보다 그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기에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수호는 괜한 불똥이 튀지 않을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뒤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가방에 들어있던 책을 책상 안에 넣으려고 하다가 덜그럭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뭐지.”
상자였다.
죽은 동물의 사체는 이전에 국어 선생님이 보고 기절해서 큰 사건이 되고 난 후에는, 절대로 배달되지 않았다. 담임 선생이 한 번이라도 비슷한 사건이 생기면 한 명 한 명 다 조져서 퇴학을 시켜버리겠다는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압정이나, 칼, 찢어진 교과서 정도인데.
이수호는 검은색 비닐봉지로 둘둘 말려있는 네모난 상자를 흔들어 보았다. 크기로 봐서는 교과서는 아니고, 칼도 아니었다. 압정을 상자 안에 넣어둔 것이라면 무의미한 배달물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다 이수호는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MP3 유명 브랜드의 흰색 상자가 들어 있었다.
누가 잘못 넣은 것인가 싶어 상자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신현제와 눈이 마주쳤다. 신현제가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너구나.
어제 헤어지기 전에 쪼잔하다고 한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단 말인가.
이수호는 조심스럽게 박스를 개봉했다. 완전한 새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사용한 흔적이 없는 제품이었다.
“우아…….”
한입 베어 먹은 사과 그림이 박힌 제품이라니. 쓰던 것이든 뭐든 이수호에게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다. 안 그래도 오디션 준비나 무대 준비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는데.
“고마워…….”
이수호는 들릴 듯 말 듯 한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걸로 오디션 준비를 해서 내가 대스타가 되면, 너희를 짓밟아줄게. 정말, 고마워.
“야. 무당.”
박성곤의 목소리에 이수호가 선물 받은 상자를 후다닥 책상 아래로 숨겼다.
“요즘 너 건방진 거 같다?”
“……하하, 오해야.”
“오늘 몇 대 맞고 싶냐? 몇 대로 할래?”
놈들은 교실에서 되도록이면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행여나 재수 없게 지나가던 선생에게 걸리면 피곤해지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일 테니.
“나중에 해.”
이수호의 배려에도 박성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고 성질을 부리며 발로 책상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시발, 오늘 기분도 더러운데 너 잘 걸렸다. 몇 대 맞을지는 이 형님이 정해주지.”
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거면 밖으로 나가자는 무언의 종용이었다.
“됐어.”
뜻밖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가로질렀다. 신현제였다.
“왜? 현제 네가 하게?”
박성곤이 히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나도 안 해. 당분간.”
“뭐라고?”
“일주일.”
“뭐?!”
“일주일간 안 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현제야.”
“신현제 너 약 먹었냐?”
그건 이쪽이 묻고 싶었다. 신현제, 왜 그러냐. 내가 더 무섭다.
“갑자기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어. 당분간 휴식 기간이니까 니들도 그렇게 알아둬.”
“뭐라고?”
“말이 많아. 그러면 그런 줄 알아.”
신현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악스럽게 한마디 덧붙이자 박성곤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콧김을 씩씩 내뿜던 그는 이수호에게 두고 보자, 라며 창의성 없는 말을 던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주변에서 신현제가 웬일이냐고 수군덕거렸다. 인생 저 혼자 사는 줄 알고 제멋대로의 정점을 찍는 신현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수호를 두둔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책상에 혼자 남은 이수호는 긴장이 풀려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일주일 프리패스라. 생각지도 못한 득템이었다. 게다가 이런 귀중한 선물까지.
이수호는 MP3 플레이어를 꺼내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번에 나온 것보다 한 세대 전의 모델이긴 하지만 새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콧노래가 흘렀다.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날의 운세가 좋을지 나쁠지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수호는 일부러 자신에 관한 감은 절대 읽지 않았다. 점쟁이들이 자신의 운명을 읽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모든 패를 알고 임하는 게임이 재미있을 리 없다고 이수호는 생각했다.
“좋은 하루야, 좋은 하루.”
그렇기에 그는 오전 내내 그렇게 중얼거릴 수 있었다.
따분한 수업이 계속되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국어 선생이 고전문학 작품을 읽어주는 이 시간에 살아남은 학생은 몇 되지 않았다. 전교 1등을 놓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맨 앞줄의 반장과 고전문학 속의 작품들을 노래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이수호, 잡담을 나누고 있는 몇 명의 학생들이 그 전부였다.
분필을 잡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선생이 기가 막힐 정도로 깨끗이 판서를 하는 모습을 보던 이수호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늙은 선생님, 거의 잠들어 버린 5교시의 수업 시간, 지루한 고전문학 이야기. 얼마나 시적이란 말인가.
악상을 노트에 정리하며 히죽거리고 있던 이수호의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처음에는 누가 오징어라도 뜯어먹는 건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악취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해졌을 때, 이수호는 이 교실 안에서 그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복도와 연결되어 있는 창문 사이에서 음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형체가 없는 그것은, 뱀이 전신의 비늘을 움직여 꿈틀거리는 것처럼 이동했다.
한 번 맡아본 적 있는 냄새였다. 이수호의 시선이 창문 밖에 서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씨익 웃었다.
“……호.”
“…….”
“이수호!”
제 이름이 호명되었음을 깨달은 수호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문학 선생이 분필로 이수호를 가리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문 밖에 누가 서 있냐?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쳐다봐.”
“네? 그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사라져버린 후였다. 헛것을 본 것일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중 우리나라 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작품이 뭐라고 했냐. 대답해봐라.”
“속미인곡이요.”
이수호는 살짝 얼빠진 얼굴로 기계적인 대답을 하고 앉았다. 자라, 자라, 더 자거라, 하는 듯한 나이 든 선생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가져온 한낮의 꿈일까.
그는 악상을 적고 있던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잠결에 쓴 글씨라고 보기 힘든 비교적 단정한 글씨가 방금 전까지의 즐거운 상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이수호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비릿한 냄새가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귀신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고개를 돌렸다. 1분단 맨 뒤에 앉아있는 신현제가 눈에 들어왔다.
말을 해줘야 할까? 한다면 뭐라고 하지? 아니, 말을 한다고 저놈이 과연 믿어나 줄까.
이수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책상에 고개를 대었다.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버렸다.
“으아, 죽을 뻔했다.”
“국어는 말을 하는 건지 옹알이를 하는 건지, 진짜 뒤에서 들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안 들려.”
“5교시에 국어면 우리 보고 죽으라는 거지. 으아.”
쉬는 시간이 되자 일제히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기지개를 켜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야! 체육 밖이다!”
뛰어들어온 체육부장의 한마디에 아이들은 환호를 하며 옷을 벗어젖혔다.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뛰어다니는 놈들도 여럿 있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들.
이수호는 혀를 차며 체육복을 들고 언제나처럼 화장실로 갔다. 체육복을 갈아입고 그는 아까 챙겨온 칼과 종이를 꺼냈다.
“후우……, 오랜만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이수호는 칼끝으로 손가락에 조그맣게 상처를 냈다. 따끔한 감각 뒤에 피가 몽글몽글 솟아났다.
깨끗한 흰 종이에 이수호는 자신의 인장을 그려 넣었다. 흔히들 사용하는 부적은 괴항지에 주사(朱砂)로 쓰지만, 이것은 자신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방법이었다. 보통은 동물의 피를 사용했지만, 긴급한 상황이나 큰 귀신, 즉 힘이 강한 귀신을 제압할 때는 본인의 피를 사용하기도 했다.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물로 부적을 그려도 그것이 피처럼 붉어진다 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되려면 수십 년은 공부해야 했다.
“이게 위급 사항이지 뭐가 위급 사항이겠어.”
이수호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귀신은 언덕 위의 소나무에 얽혀있는 지박령이었다. 지박령은 그 근처에서만 어슬렁거리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마음에 걸려 어머니의 서랍을 뒤져 부적을 훔쳐와 나무 밑에 심어두고 왔다. 이러면 최소한 지나가는 사람을 해치지는 못하겠지, 하고 안심했는데 이게 나무를 벗어나 학교까지 신현제를 찾아온 것이다.
일단은 자신의 피로 인장을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수호는 자신의 수호신인 여우와 나무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태천무 집안의 사람들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이름과 인장을 받게 된다. 그 인장은 결계를 만들거나 귀신을 봉인할 때 사용하는 개인 고유의 주술이었다. 이쪽 일을 워낙 좋아하지 않는 수호였지만 어릴 때 강제로 해야만 했던 여러 실습 때문에 인장을 그리는 법쯤은 터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는 법만 간신히 배운 수준인 데다 그 이후로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
두 장의 부적을 그렸다. 하나는 대상에게 나머지 하나는 주술자가 소지함으로써 효과를 높이는 방법이었다.
이수호는 상처 난 손가락을 휴지로 대충 동여매고 화장실을 나왔다. 교실로 돌아오니 반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나간 상태였다. 당연히 전교 왕따인 이수호를 기다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따인 것이 도움이 되는군.”
이수호는 혼자 중얼거리며 씨익 웃었다. 이제 이 부적을 신현제가 늘 지니고 있을 물건이나 옷에 몰래 넣어두는 일만 남았다.
옷이 좋으려나?
이수호는 신현제의 교복 재킷을 집어 올렸다. 자신의 것보다 몇 사이즈나 큰 재킷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쯤이 좋겠지.
“흐음…….”
안주머니에 넣어놓았지만,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누나나 엄마한테 검은 옷의 귀신을 잡아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길게는 사흘, 이르면 오늘 밤이라도 당장 없앨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신현제의 목숨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다. 자신이 24시간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수호는 뺨을 긁적거리다가 부적을 도로 꺼냈다. 교복 재킷보다 몸에 상비하고 다닐 가능성이 클 물건을 찾아야 했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지갑을 떠올렸다. 보통의 남학생이라면 잘 갖고 다니지 않겠지만, 저번에 술자리에서 신현제가 명품일 게 분명한 본인의 지갑을 들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이수호는 쾌재를 부르며 신현제의 교복 재킷을 뒤졌다. 다행히 반대편 안주머니에서 갈색 지갑을 찾아냈다. 발견되지 않길 빌면서 이수호는 최대한 깊숙한 곳에 부적을 접어 넣었다.
자아, 이제 지갑을 넣고 교실을 나가기만 하면 상황종료.
“어, 너 뭐하냐?”
“무당 놈이다.”
“……!”
깜짝 놀란 이수호는 신현제의 교복 재킷을 손에서 놓쳤다. 지갑을 등 뒤로 숨긴 것이 그나마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지였다.
체육부장과 운동부 일파였다. 한 녀석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가방 안에 넣는 것을 보고 녀석들이 무엇을 하고 왔는지 이수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안 나가냐?”
체육부장이 미심쩍은 얼굴로 이수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 그냥. 좀 찾을 게 있어서.”
변명을 대도 하필 이런 것을…….
체육부장의 표정에는 여전히 네놈이 몹시도 의심스럽다는 기색이 팍팍 묻어났다. 다행히 다른 녀석들은 이수호의 존재를 아예 신경 쓰지도 않는지 이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 왕따 네가 문단속하고 나올 거지?”
“……응.”
이수호의 힘없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교실의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이수호는 신현제의 지갑에 부적을 재빨리 처넣고 재킷을 의자에 걸어두었다.
운동장으로 나가자 왜 이렇게 늦게 기어 오냐는 체육 선생님의 한마디가 뒤따랐을 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걸로 됐어.
오늘따라 유난히 파랗고 높은 하늘을 보며 이수호는 생각했다.
3반 담임의 종례는 늘 간단했다.
집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내일 지각하지 마라, 주번은 문단속 잘하고 고3의 신분에 맞게 살아라.
비슷한 이야기를 시시껄렁하게 늘어놓고는 반장을 불러일으켜 인사를 하게 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온 담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들 주목해라.”
혼자 악보를 읽고 있던 이수호는 살벌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 반에서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김진철 일어나서 말해.”
2분단 앞줄에서 김진철이 일어서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 MP3 플레이어를 가방에서 봤는데 청소시간에 들으려고 찾아봤는데 없어졌어요.”
“확실히 언제까지 갖고 있던 거 기억나냐.”
“음, 점심시간 전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4교시에 물통 꺼내려고 가방 열어봤을 때는 있었어요. 점심시간에도 계속 책상에 있었고 이후에도 별로 자리를 떠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흔히 이런 경우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귀신은 이런 일에 곡을 하지 않았다.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귀신은 팔짱을 끼고 서서 지켜보는 게 보통이었다.
이수호는 안됐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악보로 시선을 슬쩍 내렸다.
“오늘 우리 반 안으로 수상쩍은 놈 출입하는 거 본 사람 있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럼 우리 반 소행으로 알겠다. 다들 가방 들고 책상 위로 올라가. 소지품 검사 한다.”
담임의 서릿발 같은 호령에 다들 술렁거렸다. 담배를 피우는 몇몇에게 불똥이 튈 것은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거리낄 게 없는 대다수는 가방을 들고 책상 위에 올라가 앉았다. 이수호 역시 책상 위로 올라가 가방을 무릎에 올려두었다.
“오늘 너네 MP3 플레이어 찾을 때까지 다 집에 못 갈 줄 알아라. 그리고 학교에 쓸데없는 물건 가져온 새끼들도 다 뒈질 줄 알아. 김진철, 너도 올라가. 병신새끼야. 물건 간수 하나 똑바로 못하고.”
담임은 평소엔 느슨한 편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앞뒤 가리는 거 없는 다혈질이었다. 애연가들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 때때로 아이들과 몰려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김진철 역시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가방 검사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때 체육부장의 옆에 앉은 정용완이 손을 들었다. 그 역시 담배 때문에 아까부터 숙덕거리던 일당 중 하나였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쓸데없는 얘기면 너부터 조질 줄 알아.”
평소에도 체벌금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담임이었다.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독박을 쓴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용완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아까 체육 시간에, 이수호가 다른 사람의 옷을 만지는 것을 봤는데요.”
“……!”
허를 찌르는 발언에 이수호는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이수호가?”
“네.”
“누구? 김진철 가방 만지고 있데?”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럼 누구 자리에서 어슬렁거렸어?”
“자세히는 못 봤는데, 아무튼 체육 시간에도 제일 늦게 왔어요. 그건 다른 애들도 분명히 봤어요.”
“네. 맞아요.”
“체육 선생님한테 그래서 혼났어요.”
“저 새끼는 매일 늦게 와요.”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입을 모아 수호를 규탄했다. 이수호는 아이구 두야, 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수호. 사실이냐? 니가 교실에서 제일 늦게 나왔어?”
“네.”
“이수호. 가방 가지고 앞으로 나와.”
“……네.”
상관없다.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수호는 교단 앞으로 걸어가서 가방을 담임 선생님께 건네주었다. 담임은 가방을 열고 안에 있는 물건을 교단에 탈탈 쏟아냈다. 노트와 책, 필통, MP3 플레이어가 하나 굴러 나왔다.
“이건 누구 거냐.”
“제 건데요.”
이수호가 대답했다.
“어, 그거 이수호 거 아닌데.”
2분단 중간쯤에서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저 새끼 쓰는 건 존나 구린 거예요. 저거 분명히 아닌데.”
“제 것 맞는데요.”
이수호가 대답했지만 담임은 팔짱을 끼고 서서 심문하는 듯이 재차 물었다.
“이거 네 거 맞아? 확실해?”
“네. 맞아요.”
“김진철, 네가 잃어버린 게 이거 맞냐?”
“그게…….”
김진철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 거랑 같아요, 하면서 이수호의 가방에서 나온 것을 가리켰다.
“확실해?”
담임은 다시 이수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 제 거 맞아요.”
“이게 네 것이 확실한지 누구한테 물어보면 되냐.”
“글쎄요, 오늘 선물 받은 거라서…….”
“선물? 누가?”
담임의 질문에 교실에 킥, 하는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왕따인 이수호에게 누군가 선물을 줬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너한테 이걸 선물했냐고. 선물한 사람을 말해. 그 사람이 확인해주면 되니까.”
“……그게…….”
이수호는 힐끗 1분단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신현제가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의미인지, 수호는 알 수 있었다.
담임은 무턱대고 누군가를 의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도 최대한 이성을 발휘해 자신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수호는 차마 그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학교에 와보니 제 책상 서랍 안에 있던 거라서.”
아까보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커졌다. 이수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면 정상참작해줄 테니까, 솔직히 말해.”
“정말……, 선물 받은 거예요.”
거짓이 아니다. 사실이다.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보낸 장본인의 의도야 어떻든지 간에,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받은 거냐고.”
“…….”
신현제가 손을 들고 자신이 줬다는 얘기를 해주길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신현제와 자신의 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호의는 여기에서 끝이니까.
이수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담임이 몇 차례 재차 그를 추궁했다. 이수호는 침묵했다. 그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제 편을 들어줄 친구 하나 없다는 것보다 떳떳하게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비참했다.
언제쯤, 얼마쯤 나이를 먹으면 이 비참함에서 이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칠판 잡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이수호에게 담임이 나직하게 한마디 했다. 이수호는 나무로 만들어진 칠판 아래를 붙들었다.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살이 터지는 둔탁한 소리가 교실 안에 울렸다. 이수호는 입술을 깨물고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해.”
“……선물 받은 거 맞습니다.”
“이 녀석이 끝까지!”
담임이 다시 들고 있던 매를 한껏 위로 올려 휘둘렀다. 십분 간 쉬지 않고 매질이 계속되었다. 처음엔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들도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교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가끔 누군가 혼잣말처럼 독한 놈, 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와 엉덩이에 단단한 매가 부딪칠 때 나는 둔탁한 타작 소리만 들려왔다.
이수호는 용서해달라는 말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눈을 질근 감고 서서 무력함의 대가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