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타 스위치 스캔들-98화 (98/123)

#98

“내, 내가 언제 널 좋아한다고…….”

“그럼. 안 좋아해?”

“…….”

우영찬이 안 되겠다는 듯 날숨을 토하고서는 말했다.

“세상엔 ‘사실혼’이라는 게 있어. 한호성 너, 사실혼이 뭔지 알지?”

“알아. 그런데 그게 왜?”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더라도, 부부로서 행동하면 사실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원리에 따르면 우린 사실연이야.”

“사실연?”

“사실 연인.”

“…….”

처음엔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키스까지 했는데-심지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사귀지 않는 것도 이상하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한호성은 퍼뜩 깨달았다.

‘나는 사실상 우영찬과 사귀고 있는 건가……?’

신선한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한호성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바짝 얼어붙었다.

우영찬은 그런 한호성을 닦아세웠다.

“그래, 안 그래. 사실연이야, 아니야.”

“……그런가?”

넋 나간 대답을 받아 낸 우영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대체 무엇이 ‘그런가’란 말인가. 세상엔 키스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짓을 하고도 상대와 사귀지 않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 한데 입술 몇 번 맞췄기로서니 예식장에 억지로 끌려가기라도 한 듯한 저 표정이라니.

하여간에 한호성은 이따금 멍청할 정도로 순진해 빠졌다. 그게 아이돌이란 직업 때문에 평범한 생활을 못 해 봐서 그런 건지, 단순히 천성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어느 놈이 작정하고 수작질하면 ‘어라? 뭔가 이상한데?’ 하다 후루룩 말려들 성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이 한호성의 곁을 지켜 줘야겠다.

“맞아. 우린 이미 사귀는 사이야.”

“…….”

“그리고 생각해 봐. 안 사귀고 야한 짓 하는 것보다, 사귀면서 야한 짓 하는 게 더 건전한 거 아닌가? 너 솔직히 나랑 키스하는 거 좋아하잖아.”

우영찬의 단언에, 크게 뜨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차마 거짓말은 안 나오는 듯, 한호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영찬은 유쾌한 기분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아직 생각 정리가 다 안 된 모양인데 기꺼이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이미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영찬아.”

잠시 후, 한호성이 입을 열었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정식으로 헤어지면…….”

“절대 안 돼!”

흐뭇하던 기분이 한순간에 곤두박질쳤다. 우영찬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넌.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헤어지려고 해? 연인 사이에 이렇게 쉽게 이별 운운하는 거 못 할 짓이라는 거 몰라?”

“아니,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합의 이별이 아니면 안 돼. 말해 두겠는데, 난 절대 합의 안 한다.”

“그런 게 어딨어?”

“원래 상대에게 귀책이 있지 않고서는 멋대로 이혼 못 하는 거다.”

“우리가 부부냐고.”

“응.”

우영찬은 뻔뻔하게 우겼다.

“나한텐 아무런 귀책 사유가 없으니 넌 이별 못 해.”

“진짜 어이없어……. 설령 부부 관계더라도 이건 사기 결혼이야, 완전.”

“억울하면 혼인 무효 소송하든가.”

“소송이 성립할 리가 없잖아?”

“바로 그거야.”

한호성이 무어라 투덜거렸다. 우영찬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성을 와락 끌어안았다. 억센 팔이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결국 우영찬의 품에 몸을 맡긴 한호성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자고 가.”

“안 돼.”

“그럼 내가 너희 집에 갈까?”

얼마 전 독립한 한호성이었다. 그는 기존의 숙소를 나와, 보안이 더 좋은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겼다. 같은 동 다른 호수에 문해일도 이사 온 덕분에 더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좀 곤란해.”

“그럼 그냥 자고 가. 이상한 짓 안 할 테니까. 응? 약속할게.”

우영찬은 조르다 못해 한호성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억지로 얽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호성은 끄떡없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일 촬영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 샵 들려야 하니까.”

다른 거라면 몰라도 스케줄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우영찬은 아쉬운 속을 달래고자 한호성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촬영이라고 했었지?”

“‘천사들의 하모니’ 시즌 2.”

참 감사한 일이다. 시청률이 높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시즌 2 제작이 결정됐으니 말이다. 어쩌면 ‘만우절의 러브레터’의 감독처럼, ‘천사들의 하모니’를 감명 깊게 본 시청자가 많은 덕분일지도 모른다.

“한동안 바빠지겠네.”

“응. 이번엔 로케이션도 멀리 가서 더 바빠질 거야.”

이동 시간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여유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 당분간은 이렇게 우영찬과 소파에서 뒹굴며 놀 일도 없을 터다. 한호성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괜히 우영찬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참, 영찬아. 나중에 ‘천사들의 하모니’ 공연 보러 올래?”

“언제 하는데?”

“11월 둘째 주에. 그때가 마침 약속한 석 달째잖아.”

“그렇지.”

한호성도, 우영찬도 각자 생각에 잠겼다.

‘김제국이 석 달 동안 내 몸을 멋대로 차지했으니까. 나도 김제국의 몸을 최소 석 달은 차지해야 공평하지.’라고 주장한 우영찬이었다.

그 긴 듯 짧은 석 달이 어느덧 거의 지나가고, 원래대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영찬은 이번에야말로 오롯한 자신으로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참 쉽지 않았는데.”

우영찬의 말에, 한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이 타인에게 빙의한 우영찬도 힘들었겠지만, 자신도 나름대로 힘들었다. 고생을 분담한 정도만 다르다뿐이지 하이파이브와 장 대표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호성은 그 모든 일이 벌써 그립게 느껴졌다. 그때 우영찬이 중얼거렸다.

“원래대로 돌아가면 좀, 아쉬울 것도 같다.”

“그래?”

“어. 네 말마따나 흔치 않은 인생 경험이었으니까.”

“아이돌이 적성에 맞았던 건…….”

“그건 아니고.”

우영찬이 딱 잘라 말했다. 단호한 반응을 보이는 것치고 어떤 면에선 그가 자신보다 더 아이돌답다는 걸 알기에, 한호성은 큭큭 웃었다.

“아무튼 시간 되면 공연 보러 와 줘. 내가 표 준비해 둘게.”

“그래, 꼭 갈게. 응원봉 가져가도 되지?”

“음…… 응원봉은 안 될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인 공연이거든.”

그 이전에, 전봇대처럼 커다란 우영찬이 하이파이브의 응원봉을 들고 있으면 무척 눈에 띌 터였다. 그 모습을 상상하고야 만 한호성이 중얼거렸다.

“무대에서 찾아보긴 쉽겠네…….”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자기 얘기를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우영찬이 한호성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호성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

우영찬은 홀린 듯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우절의 러브레터’가 방송되고 ‘꽃 우표’도 덩달아 호평받은 후, 한호성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세상엔 ‘구름 위로 붕 뜬 듯이 기쁘다.’라는 표현이 있다. 다만 한호성이 얻은 기쁨의 종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호성은 고조됐다기보다 차분했고, 흥분했다기보다 안정된 상태였다. 그의 마음은 오랫동안 공들여 가꾼 숲속 정원처럼 평온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한호성의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원래도 예쁘고 잘생긴 그였지만,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내면에서부터 빛이 나는 게 꼭, 별 같았다.

우영찬은 빛에 이끌려 손을 뻗었다. 머리를 슬며시 쓰다듬자 호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손길을 피하진 않는다. 우영찬은 그에 힘입어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키스가 시작되었다. 슬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온 혀가 상대를 탐했다. 사귀지 않는 사이라기엔 열렬하고, 연인이라기엔 능숙하지 않은, 그 사이 어딘가의 키스였다.

***

한호성은 졸린 눈을 비비며 HBS의 보안대를 통과했다. 그를 뒤따르던 장영수가 걱정스레 물었다.

“형, 많이 피곤해?”

“아냐, 괜찮아.”

“괜찮긴 뭘. 요즘 이사하느라 바빴잖아. 그 와중에 스케줄도 많았으니 피곤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한호성은 그냥 웃고 말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은 스케줄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늦은 시각까지 우영찬네 집에서 논 자신이 문제다.

‘정신 차려야겠다.’

사생활이 일에 영향을 미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주의해야만 했다. 특히 다른 것도 아닌 연애 때문에 컨디션 관리를 소홀히 하는 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연애. 무심코 떠올린 개념에, 한호성은 어깨를 움찔했다. 귓가에서 ‘우린 사실연이야.’라고 주장하던 우영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형, 방금 오한 든 거 아냐? 정말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어야겠는데.”

“아냐, 정말 괜찮아. 그런데 나 피곤한 거 많이 티 나?”

“겉으로 볼 땐 괜찮아. 형이 자꾸 멍하니 있어서 그렇지.”

그건 자꾸만 어제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한호성은 뇌리 깊은 곳에 어제 일을 꽁꽁 봉인해 두었다.

“촬영할 땐 주의해야겠다. 아무튼 화면에서 티 날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응, 그건 확실해.”

“좋아.”

정신을 다잡은 한호성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로비 쪽에서 무언가 술렁술렁하는 듯싶었다. 한호성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무슨 촬영 하나?”

“글쎄?”

그러는 중에도 네다섯 명이 저편으로 달려갔다. 자세히는 몰라도,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혹은 유명한 연예인이 나타났거나.

“정말 무슨 일이지?”

장영수가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렸다. 그 의문에 답해 주듯, 누군가의 외침이 방송국 로비에 울려 퍼졌다.

“오버 더 리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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