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CCTV 영상은 어떻게 구한 거야?”
“나 아니라고 했잖아.”
“……정말 너 아니야? 정말로?”
“응.”
우영찬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CCTV 영상 구한 것도, 채널 주인도 나 아니다.”
“…….”
“네 포스터를 모두 걸고 맹세할게.”
그가 장난스럽게나마 오른손까지 들고 선서해, 한호성은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순간 ‘정말인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우영찬의 주장엔 맹점이 하나 있었다.
“그럼 다른 사람한테 CCTV 영상 구하라고도, 위튜브에 그거 업로드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다는 거지?”
직접 행동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우영찬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시키면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우영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빙그레 웃으며 한호성을 바라볼 뿐이다.
“영찬아…….”
“내가 한 게 아니야.”
“…….”
“엄연히 따지자면, 자기가 한 일에 자기가 걸려 넘어진 거지.”
어쨌든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우영찬이란 말이었다. 그걸 마냥 잘했다고 할 수도 없고, 못했다고 할 수도 없어 한호성은 앓는 소리를 삼켰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냥 잠자코 지켜봐.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했다.”
사실 우영찬은 개인적으로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한호성 구경이었다.
“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으로 처맞는 모양새가 될 테지만, 그편이 더 재밌지 않냐?”
“……잘 모르겠어.”
한호성이 한숨을 내쉬듯 대답했다. 무른 구석이 있는 그라면 이렇게 반응할 줄은 알았다. 그래도 고개를 떨군 모습이 마음이 들지 않아, 우영찬은 한호성의 턱을 붙잡고 억지로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는 네 일에만 집중하면 돼. 저런 놈에 신경 할애하지 마.”
“…….”
“그래서, 다음에 손가락 빨게 해 줄 거지?”
우영찬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이도 허광범 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긴 했다.
“쪽쪽이라도 사 줘?”
“이왕이면 네 손가락 본뜬 거로 부탁해.”
“으으.”
한호성이 치를 떨며 우영찬의 손을 쳐냈다. 그래도 아예 싫다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나중에 슬그머니 밀어붙이면 손가락을 빨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 같았다. 우영찬은 검은 속내를 슬그머니 감췄다.
가을.
누군가는 독서를, 누군가는 천고마비를, 누군가는 단풍놀이를 연상하는 계절.
그리고 한호성은 가을 축제부터 떠올리는 이 계절은 또한, 수확 철이기도 하다.
수확의 계절이 무르익고 있었다. 바야흐로 잘 익은 결실을 거두어들일 때였다.
***
허광범은 그야말로 몰락했다.
‘어흥오빠’가 어떤 짓을 저지르든 그를 지지하던 팬들이 어쩌다 죄다 떠나갔을까. 허광범에 대한 유감을 떠나, 한호성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그야, 자신이 보낸 후원금이 남의 도박 빚을 갚는 데 쓰였다는 걸 알게 되면 어지간히 뜨거운 팬심이라도 식을 만했다.
게다가 허광범의 이미지 실추는 그뿐이 아니었다. 예의 위튜브 채널이 또 다른 영상을 올린 것이다. 현금 박치기로 샀다고 자랑하던 차가 알고 보니 지인에게 빌린 것이라거나, 걸치고 다니던 명품 중 상당수가 가짜라는 내용이었다.
그로써 허광범의 허세는 완전히 까발려졌다. 이에 질려 그나마 남은 팬마저 떠나가니, 더는 허광범이 무슨 소릴 하든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허광범은 이제 하이파이브에 대해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을 터였다.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한호성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조차 얼마 가지 않았다. 한호성 본인의 일이 워낙 바빠진 까닭이었다.
***
“곧 시작한다.”
“알았어, 잠시만.”
한호성은 서둘러 양치를 마친 후 거실로 달려갔다. 먼저 소파에 앉아 있던 우영찬이 그를 맞아 주었다. 한호성은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에 앉았다.
“아, 시작한다.”
마지막 광고가 끝난 후 드라마가 시작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만우절의 러브레터’라는 제목이 쓰였다 사라졌다. 이어 카메라 앵글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여자 주인공을 비쳤다.
“어제 최고 시청률 찍었다며?”
“응! 21.6%.”
한호성은 제가 출연한 드라마인 양 뿌듯하게 말했다. 대사 없는 단역으로나마 출연했으니 아주 틀린 경우도 아니었다.
게다가 한호성이 출연한 신은 꽤나 반응이 좋았다. 해당 장면의 클립이 위튜브를 비롯한 SNS 곳곳에 퍼질 정도였다.
-영상 내리세요... .. .... 내남친 인기 많아지면 곤란해요...
-성스럽게 잘생겼다ㅋㅋㅋㅋ
-진짜.. 진짜로 정말 정성스럽게 잘생겼다... 맨날 정성스럽게 못생긴 놈들만 보다가 제대로 된 미인 보니까 개안하는 것 같아...
-저거 촬영할 때 햇빛이 캘리포니아 뺨치게 쨍쨍했던 거임? 아니면 한호성한테 반사판 100개 달아준건가?
˪그냥 한호성 자체발광 효과 같아요ㅋㅋㅋ
-누가봐도 온동네 사람들 후리고도 남을 얼굴
-오슷 부른 가수라고? 진짜? 저 얼굴에 이 목소리는 사기 아님?
한호성은 클립에 달린 댓글들을 꼼꼼히 읽으며 기뻐했다. 조금 머쓱했지만,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하지 않나. 게다가 댓글이 이렇게나 많이 달렸는데 그 누구도 연기력을 지적하지 않는 점이 가장 기뻤다.
그리 얘기하자 우영찬은 ‘그냥 네 얼굴 감상하느라 연기력 판단할 새가 없었던 거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한호성은 그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후에 드라마로 확인해 보니, 자신은 버스커 연기를 제법 잘 해냈으니까…… 아마도.
“네 노래 나온다.”
“앗.”
때마침 흘러나오는 OST에, 한호성은 리모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데 우영찬이 먼저 리모컨을 낚아챘다. 우영찬 본인의 몸이라서인가, 번개처럼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영찬아, 리모컨 줘.”
“너 볼륨 줄이려 그러지.”
“……응.”
우영찬이 곧장 볼륨을 키웠다. 그 바람에 ‘꽃 우표’가 드넓은 거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건 또 웬 유치한 짓인지, 한호성으로선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왜 그래?”
“너야말로 왜 그래? 좋은 곡은 크게 들어야지.”
“나중에 크게 들어. 나 없는 데서.”
한호성은 남이 제 노래를 듣는다는 이유로 부끄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런 면에서 제법 뻔뻔해서, 누군가 제 노래를 칭찬하면 자연스럽게 받았다. 때론 다른 곡까지 추천하거나, 라이브로 불러 주기도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우영찬 앞에선 그게 되지 않았다.
예전엔 이렇게 부끄럽지 않았는데 왜 이럴까. 한호성은 그런 의문을 삼키며 우영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단은 리모컨을 빼앗는 게 우선이었다.
“어서 줘.”
“싫어, 너 있는 데서 크게 들을 거야.”
우영찬이 리모컨을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씩 웃는 표정으로 보건대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덩치에 걸맞지 않게 은근히 애 같은 구석이 있는 그이다.
“달라니까!”
“뭐 어때. 어차피 요즘 안 흘러나오는 곳이 없던데.”
그 말이 맞기는 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꽃 우표’도 가요 차트에 진입했으니까. 하지만 우영찬의 하는 양을 보자니 약이 올랐다.
“어서 리모컨 주…… 아!”
리모컨을 빼앗고자 팔을 뻗은 순간, 우영찬이 손을 뒤로 뺐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은 몸이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바닥에 처박히진 않았지만, 우영찬 위로 넘어진 게 문제였다. 마치 그의 가슴팍에 뛰어든 듯한 모양새지 않은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 한호성을, 우영찬이 폭 끌어안았다.
“나 안고 싶었어?”
“아니.”
“그럼. 나한테 안기고 싶었어?”
“아니라니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영찬은 포옹한 팔에 힘을 더했다. 나름대로 힘을 조절한 것 같기는 한데, 팔 근육이 어찌나 강한지 숨통이 조일 지경이었다. 한호성은 항복 의사를 표하는 레슬러처럼 우영찬의 팔뚝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너 진짜 왜 이렇게 귀엽냐. 확 잡아먹고 싶게.”
TV를 아예 꺼 버린 우영찬이 리모컨을 휙 던졌다. 그는 제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양손으로 한호성의 뺨을 붙잡고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호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나 그것도 잠시, 한호성은 눈을 감고 키스를 받아들였다.
“…….”
이게 몇 번째 키스더라. 네 번째, 어쩌면 다섯 번째일지도 모른다. 무슨 악수도 아니고, 만났다 하면 혀를 섞기 일쑤였으니까.
이쯤 되면 우영찬만 탓할 게 아니었다. 매번 거절하지 못하는, 혹은 거절하지 않는 자신이야말로 문제다. 오늘만 하더라도 함께 드라마를 보자는 우영찬의 제안에 냉큼 그의 집에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서…….’
솔직하게 떠오른 감상에 가슴이 뜨끔했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그나마 남아 있는 이성이 아릴 지경이었다.
“사귀자, 응?”
키스를 마치고서도 우영찬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한호성의 이마에 이마를 댄 채 조르듯 말했다.
“내가 진짜 잘해 줄게. 안고 다니라면 안고 다니고, 업고 다니라면 업고 다닐게. 아주 그냥 발이 땅에 닿지도 않게 해 줄 테니까.”
“…….”
한호성은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자 우영찬이 살살 꾀어내던 짓을 그만두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단단히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사귀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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