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
“잠깐 얘기 좀 할까.”
밴에서 내리자마자 우영찬에게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하는 말이며 행동이 영락없는 건달이었다. 한호성은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말했다.
“나중에 하자.”
“난 지금 하고 싶은데.”
“아니, 그게…….”
아무 변명이라도 하고자 입을 연 순간, 멀리서 환호성이 울렸다. 저 멀리 무리 지어 서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방방 뛰며 손을 흔들어 댔다. 원래부터 하이파이브를 좋아하는지, 축제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껏 흥분했는데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게 대단했다. 한호성은 활짝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어서 들어가시죠.”
공연 스태프가 대기실로 안내했다. 한호성은 학생들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우영찬이 바짝 따라붙었다.
“나한테만 비밀로 하려고 했다 이거지. 섭섭하게.”
“미안…….”
‘섭섭하다’라는 말 앞에서 모든 변명이 쏙 들어가 버렸다. 한호성은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냥 영찬이한테도 이야기할걸……. 괜히 비밀로 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에 호성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한호성을 보며, 우영찬은 내심 즐거워했다.
내년엔 한호성과 함께 캠퍼스를 누빌 수 있을 터였다. 축제 무대에 서는 게스트가 아닌, 학생 신분으로서. 듣자 하니 오프라인에서 실습하는 수업도 있는 모양이던데 자신도 그에 맞춰 시간표를 짜면 좋을 듯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년 일이고, 지금은 지금의 일이 있었다.
“미안하지?”
“……응.”
짐짓 무게를 잡자, 한호성이 순순히 대답했다. 사실 엄연히 따지자면 미안해할 일은 아닌데 참 착하기도 하다.
우영찬은 한호성의 손등에 슬그머니 제 손등을 부딪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얽어 깍지 꼈다. 긴 손가락이 흠칫했지만, 반항 없이 손길을 받아들였다. 우영찬은 제 욕심껏 한호성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등을 슬슬 쓰다듬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을 괜히 꼬집기도 했다.
김제국의 몸으로 이리하는 게 마뜩잖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육성으로 ‘그럼 네 손가락 빨게 해줘.’라고 종용할 순 없으니까.
“…….”
손과 손 사이에 꿀을 바른 듯 끈적하고 농밀한 스킨십이었다. 욕망이 뚝뚝 묻어나, 우영찬의 원하는 바를 모른 척하려야 할 수 없었다. 한호성은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미안한 거랑 그거는 별개야.”
그러자 우영찬이 엄지손톱을 세워 한호성의 손바닥을 살살 긁어내렸다. 거기서부터 간질간질한 전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한호성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손가락을 빠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까짓 손가락쯤 빨게 해 줘도 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이성이 흐릿해진 한호성은 눈을 꼭 감고서 말했다.
“……알았어.”
그제야 우영찬이 손장난을 멈추었다.
“착하네. 순진하기도 하고.”
“네가 시킨 거잖아.”
“아무튼.”
원하는 바를 얻어 낸 우영찬이 손깍지를 풀었다. 맨살갗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오늘 공연 잘하고, 저녁에 다시 얘기하자.”
“……응. 공연 잘하자.”
한호성은 응원 반 걱정 반으로 말했다.
오늘 세트리스트 중엔 하이파이브의 지난 곡도 있었다. 우영찬이 제논에게 빙의되기 전에 발매한 것이다. 우영찬도 이를 익혀 두긴 했지만, 그리고 다른 무대에서 잘 해낸 적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연습량이 적으니만큼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호성의 걱정은 기우였다. 우영찬을 포함한 하이파이브는 이날,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으므로.
***
뜨거운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한호성은 축제의 열기에 취한 채 밴에 올라탔다. 의자에 앉자마자 노곤한 몸이 흘러내리다시피 했지만, 한편으로는 에너지가 쌩쌩 돌았다. 시켜만 준다면 내리 다섯 곡 정도는 너끈히 연달아 부를 수 있을 성싶었다.
“아, 재밌었다.”
“그러게. 다들 즐거워 보여서 나까지 즐겁기도 하고.”
“부러워? 그럼 이주진 너도 호성 형 따라서 사이버대 입학해, 그럼 대학생 생활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싫어. 난 공부 체질은 절대 아니란 말이야. 형이나 입학하든가.”
“난 공부를 떠나서 학교 체질이 아니다.”
문해일이 딱 잘라 말했다. 동시에 밴이 출발했다.
가는 동안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피곤한 듯, 눈을 붙이거나 차창에 고개를 기대는 둥 쉬는 모양이었다. 한호성도 멍하니 앉아, 조금 전 무대에서의 기억을 되뇌었다.
“어?”
그때, 핸드폰을 하던 이주진이 탄성을 토했다. 그가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또 터졌네?”
“누구?”
“어흥오빠.”
어느 아이돌 얘기일 줄 알았는데 위튜버라니. 그중에서도 허광범이라니, 놀라우면서도 놀랍지가 않았다.
허광범이 어디 한두 번 문제를 일으켰던가. 행인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고 내보내서 비난받은 경우만 해도 수두룩하고, 막말 논란도 주기적으로 터졌다. 그런 걸 생각해 볼 때, 데뷔 직전 허광범을 과감하게 퇴출시킨 장 대표는 참으로 혜안이 있었다.
“이번엔 무슨 짓 했는데?”
“새로 저지른 짓은 아니고, 과거에 잘못한 게 폭로됐나 봐. 근데 꽤 오래전 일이네. 4년 전이니까.”
“아…….”
호성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 4년 전이면 막 연습생 그만뒀을 때 아냐?”
“응. 그 후로 도박했다나 본데…… 알고 있었어, 형은?”
“헉.”
한호성은 헛숨을 들이켰다. 당시에도 워낙 막 나가는 성격이긴 했지만, 설마 도박에까지 빠졌을 줄은 몰랐다.
“아냐, 난 전혀 몰랐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언제였던가, 뜬금없이 연락 온 적이 있었어. 돈 빌려 달라고.”
“가지가지 하네, 진짜.”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도박 때문이었나?”
“아마 그럴걸. 이번에 폭로된 게 그런 내용이거든. 전 여자 친구한테 돈 빌려 달라고, 일하는 가게까지 쫓아가서 무릎 꿇었대.”
“헉.”
한호성은 또다시 헛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된 게 알면 알수록 충격적이었다.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됐대?”
“전 여자 친구분이 빗자루로 때려서 쫓아냈다던데. 그 영상까지 싹 올라왔어, 위튜브에.”
이주진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어흥오빠]전여친 일터 쫓아가서 구질구질하게 구걸하다 쫓겨난 썰 푼다ㅋㅋ’라는 제목의 영상이 떠 있었다.
업로드한 시간은 불과 세 시간 전인데 조회 수가 벌써 4만을 넘었다. 댓글까진 확인하지 않았지만, 분명 반응이 뜨거울 터였다. 나쁜 의미로.
“와……. 그런데 저 채널은 뭐야?”
“몰라, 채널에 올라온 영상이 저거 하나뿐이야. 그냥 어흥오빠 터뜨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은데?”
“왜?”
“글쎄. 근데 허광범이 원한 산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아마 그중 하나 아닐까?”
“…….”
어째서인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허광범을 안쓰럽게 여기는 건 당연히 아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것이니까, 인과응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나마 알고 지낸 사람이 곤경에 처하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주진도 비슷한 마음인지 씁쓸히 중얼거렸다.
“위튜브로 흥한 사람이 위튜브로 망하는구나.”
“……망했다고 할 정도야?”
“음, 확실히 이번 일은 타격 클 것 같아. 댓글 창에서 다들 빈정거리고 욕하고 난리가 났던데. 한마디로 비웃음거리 된 거지. 쉴드 쳐 주는 팬도 있긴 하지만. 그런데 위튜브를 떠나서, 저렇게 개망신당했으니 앞으론 사회생활하기조차 힘들지 않을까?”
“그렇구나…….”
하기야 도박은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엄연한 불법이니만큼 허광범의 전적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것이다. 제아무리 각종 사고를 치고도 뻔뻔하게 잘만 살던 허광범이라도 이번에는 재기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이 채널 주인도 대단하다. 4년이나 된 CCTV 영상을 어떻게 구한 거지? 전 여자 친구 본인인가……? 느낌상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주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한호성은 뒷좌석을 힐끗거렸다.
“그러게…….”
어쩐지 우영찬이 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만으론 이미 확신에 가까웠다.
우영찬에게 캐물어 봐야겠다고, 한호성은 마음먹었다.
***
금일은 우영찬이 숙소에 머물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제논의 몸을 한 상태인 데다, 내일도 스케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호성은 우영찬, 문해일과 함께 숙소에 들어섰다.
“형, 먼저 씻을래?”
문해일의 물음에 호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너 먼저 씻어.”
“그럼 그럴게.”
문해일은 사양치 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 틈을 타 한호성은 우영찬의 손을 잡아끌며 작은 방으로 향했다.
탁, 문을 닫자마자 우영찬이 짙은 미소를 띠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단둘이 있으려 해? 나 지금 내 몸 아니라서 지나치게 수위가 높은 짓은 곤란한데.”
“영찬아, 혹시 너야?”
한호성은 우영찬의 딴소리에 어울려 주지 않았다. 진지하게 묻자, 우영찬이 눈을 휘어 웃었다.
“뭐가.”
“위튜브에 어흥오빠 CCTV 영상 올린 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까 차에서 주진이가 한 이야기 들었잖아.”
“어, 듣긴 했지.”
어째 의뭉스러운 말투였다. 그에 한호성의 의심은 더욱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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