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아무튼, 그래서 나 혼자 가려고. 너는 따라와 봤자 할 것도 없고 심심할 거야.”
“알았다.”
우영찬이 흔쾌히 대답했다. 어떻게든 따라오려고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래도 데려다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이것마저 거절하면 우영찬이 섭섭해할 듯싶었다. 한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부탁할게.”
“좋아. 마저 먹고 가자.”
우영찬이 남은 계란말이를 집었다. 자신이 먹고 싶다는 핑계로 한 계란말이인데, 정작 한호성은 한 점밖에 먹지 못했다.
어쨌거나 본래 의도대로 우영찬이 잘 먹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한호성은 뿌듯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다.
***
“내 몸으로 돌아와서 세 번째로 좋은 게 뭔지 아냐?”
“뭔데?”
“운전할 수 있는 거.”
증명이라도 하듯, 우영찬이 액셀을 밟았다. 차가 소리 없이 질주했다. 출근 차량이 가득하리라 생각했는데, 일찍 출발한 덕분인지 도로가 한산했다. 소소리 엔터테인먼트가 시내 외곽에 자리한 것도 한몫할 터였다.
“그동안 운전 못 해서 답답했나 봐?”
“어. 내가 운전면허가 없으면 모를까, 있는데 못 하는 건 다른 문제라서.”
“하긴, 그렇겠다. 그럼 네 몸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로 좋은 건 뭐야?”
“운동할 수 있는 거.”
우영찬이 음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김제국이 내 몸 차지하는 동안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서 근육이 풀렸어.”
“……그게 풀린 거야?”
한호성은 우영찬의 팔을 슬쩍 훔쳐보았다. 딱히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반소매 사이로 보이는 팔뚝에 근육의 윤곽이 뚜렷했다. 처음 보았을 때도, 지금도 우영찬의 몸은 현역 운동선수처럼 강인해 보이기만 했다.
“어. 지금이야 나아졌지만, 처음 내 몸으로 돌아왔을 땐 정말 심각했어. 도대체 석 달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라도 몸이 뻣뻣하게 녹슨 것 같았다니까.”
아직도 본래의 컨디션을 되찾는 중이라며, 우영찬이 덧붙였다.
“그래, 운동은 중요하지. 스트레칭도.”
“맞아. 그런데 한호성, 내 몸으로 돌아와서 좋은 것 그 첫 번째가 뭔지는 안 궁금하냐?”
한호성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우영찬이 무슨 소리를 할지 대강 감을 잡은 까닭이다.
“맞춰 봐, 한호성.”
“…….”
“맞추면 상품 줄게.”
“상품이 뭔데?”
“그건 비밀.”
“뭐야.”
토달거리면서도, 한호성은 답을 말했다.
“숙소가 아닌 네 집에서 살 수 있는 거?”
“땡. 너 알면서 일부러 틀렸지.”
“…….”
한호성은 다시금 딴청을 부렸다. 차창 밖에 나무가 한 그루, 두 그루…… 의미 없는 숫자 세기를 하는데, 우영찬이 툭 내뱉었다.
“틀렸으니까 벌칙이야.”
“뭐? 그런 게 어딨어.”
“맞추면 상품이니까 틀리면 벌칙. 당연한 거 아니냐?”
“참……. 벌칙이 뭔데?”
“손가락 빨도록 허락해 주기.”
“…….”
키스는 각오했으나 ‘손가락 빨기’는 상상조차 못 했다. 수위는 이편이 낮지만, 변태성은 오히려 높았다. 한호성은 우영찬을 흘겨보며 물었다.
“그래서 정답이 뭔데?”
“너랑 키스할 수 있는 거.”
내심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충격받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아니, 충격이라기보다…….’
파동 같았다. 우영찬이 고백을 툭툭 던질 때마다, 잔잔한 호수 같던 한호성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그의 심장이 얼마나 힘차게 뛰는지 자신에게까지 전해질 지경이었다.
‘어려서 그런가.’
불과 세 살 차이지만 그 추측이 맞는 듯싶었다. 사람은 거절당하거나 실패할수록 움츠러들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젊은이는 늙은이보다 패기가 넘치는 거였다.
우영찬은 나이도 어릴뿐더러, 동년배 중에서도 좌절한 경험이 적었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그런 배경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내가 틀림없이 자기를 좋아하리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던데.’
한호성은 그런 우영찬이 어이없으면서도 내심 부러웠다. 자신은 세탁기를 잘못 돌린 빨랫감처럼 구깃구깃해져서 한 번씩 좍좍 펴 줘야만 하는데, 우영찬은 풀 먹인 옷처럼 빳빳했으니까. 인간적인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한호성.”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아, 아무것도 아냐.”
“혹시 내 생각 중인가?”
우영찬이 짓궂게 물었다. 농담인 듯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정답이었다. 제 발 저린 한호성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렇게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냐. 아무튼 나중에 손가락 빨게 해 줄 거지?”
“그냥 네 손가락 빨아. 열 개나 있잖아.”
어느새 익숙한 길에 접어들었다. 이대로 직진하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착이었다.
한호성은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물었다.
“영찬아, 넌 나 데려다준 다음에 어디 갈 거야? 집으로 돌아가나?”
“아니.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아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우영찬도 우영찬 나름대로 바쁠 터이니 말이다.
이윽고 소소리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우영찬은 그 앞 도로에 잠깐 차를 세웠다.
“데모곡 녹음 잘해.”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한호성은 차에서 내리며 인사했다. 탁, 차 문이 닫힘과 동시에 우영찬의 목소리가 열린 차창 틈새로 흘러나왔다.
“이따 보자.”
그는 한호성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차를 출발했다. 호성은 멀어지는 빨간 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되뇌었다.
“이따가……?”
자신은 우영찬의 집에 갈 예정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영찬도 숙소에 올 예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따가’ 보지 못할 텐데,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무언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지만 한호성은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계획대로 데모곡 녹음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
녹음실은 좁디좁았다. 실제로 평수가 좁기도 하지만, 벽에 두꺼운 흡음 보드를 붙이다 보니 공간이 더 줄어든 탓이다. 그 좁은 곳에서 한호성은 내리 다섯 번을 녹음했다.
“…….”
잠시 쉴 겸 녹음본을 듣던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신선한 공기가 쏟아지듯 들어왔다. 깜짝 놀란 한호성은 고개를 들었다.
“노크했는데 안 들리는 것 같아서.”
그가 말했다. 한호성은 헤드폰을 벗으며 물었다.
“제논…… 이 아니라. 너, 영찬이지?”
“어.”
제논에게 빙의한 우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뜩이나 좁은 연습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우영찬 본인의 몸이면 연습실이 꽉 찼겠지만, 제논은 체구가 작은지라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가야 할 곳 있다며.”
“거긴 이미 다녀왔지. 몸 바꾸러 형 집 다녀온 거거든.”
“와, 진짜…….”
‘나도 김제국의 몸을 최소 석 달은 차지해야 공평하지.’라더라니, 정말 알차게도 활용한다. 한호성은 혀를 내둘렀다.
“난 너무 눈에 띄어서 따라오면 안 된다며. 이젠 괜찮지? 내 몸이 아니니까.”
“제논도 사람들 눈에 띄거든?”
어떤 면에선 우영찬보다도 눈에 띄는 제논이었다. 우영찬은 공인이 아니기라도 하지, 제논은 아이돌이니까. 애초에 자신이 우영찬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게 어디 눈에 띈다는 이유뿐이겠는가.
그걸 모르지도 않을 터면서, 우영찬은 뻔뻔하게 말했다.
“내가 있으면 너도 안 심심하고 좋잖아.”
“그렇지만 네가 심심할 텐데.”
“난 너 녹음하는 거 구경하면 되지.”
“녹음은 끝났어, 이제 메일만 쓰면 돼.”
한호성으로선 녹음보다 메일 쓰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작곡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제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지, 단어를 고르고 또 골라야만 했다.
호성은 노트북을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메일 드렸다고 싫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가 있나. 지나친 걱정 아니야?”
“그래도. 이미 의논 끝난 건을 다시 논의하는 거니까.”
“그 작곡가 성격은 어떤데. 까다로워?”
“아, 그러진 않으셔. 오히려 시원시원하시던데.”
“그럼 괜찮을 거다.”
그 말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때마침 노트북의 부팅이 끝나, 한호성은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한동안 타닥타닥, 타자 소리만 울렸다. 우영찬은 한호성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물었다.
“그런데 너, 그 작곡가와 친해? 어떻게 성격을 알아?”
“딱 한 번 만나 뵀을 뿐이야. 근데…… 나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좀 친해진 것 같긴 해.”
괜히 설레발치는 듯싶어 멋쩍었지만, 자고로 한국인은 밥 한 끼 함께하면 친해진 거라고 했다.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심리적으로 성큼 가까워졌다.
“좋은 분이신 것 같아. 상담도 해 주셨거든.”
“상담?”
“응, 작곡 배우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여쭤봤거든. 그런데 내가 생각도 못 했던 방법을 알려 주시더라고.”
그날, 한호성은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사이버대 실용 음악 작곡과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구미가 당겼다. 커리큘럼도 체계적이고, 궁금한 게 생기면 교수에게 질문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오프라인에서 실습하는 시간도 있으니만큼 독학보다 여러모로 나을 듯싶었다.
“온라인 강의니까 스케줄에 구애받지도 않을 테고 말이지. 조만간 신입생 모집할 텐데 확 원서 접수해 버릴까, 생각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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