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우영찬도 그 사실을 아는지라,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연습생 생활할 때 누구누구가 지나치게 깐깐해서 힘들었다더군.”
“그래?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깐깐하다’는 사람에 따라서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만한 단어다. 그 정도는 신경 쓸 주제도 못 됐다.
한데 우영찬은 먹구름 낀 하늘처럼 음울히 말했다.
“난 별것 아니라서 더 화나는데.”
“왜?”
“고소하기 애매하잖아.”
“어차피 고소 못 해. 아니, 안 할 거야.”
딱 어느 정도 선까지만 입을 놀리는 게 허광범의 특징이었다. 고소야 할 수 있겠지만 혐의가 인정될지는 미지수이고, 한호성은 일이 복잡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나 말이지. 이 일 하면서 절절히 느낀 게 하나 있는데 뭔지 알아?”
“뭔데.”
“‘구설수는 적을수록 좋다’야.”
의도적으로 노이즈 마케팅 하는 그룹도 있다지만, 한호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판국이었다. 다른 문제에 쏟을 에너지 따윈 없었다.
“그리고 허광범 같은 위튜버가 한둘도 아닌데, 뭐. 사실 그 정도면 그래도 온건한 편이야. 전 연습생이라서 이슈될 뿐이지.”
“그 전 연습생이란 부분이 문제 아니냐고. 다른 위튜버가 말하면 거짓이라고 느낄 법한 이야기도, 허광범이 말하면 진짜인 줄 알 거 아니야.”
“그렇지만 달리 어쩌겠어?”
“…….”
“영찬아……, 왜 갑자기 말이 없어.”
한호성은 이제 우영찬이 조용하면 불안했다. 겉보기로만 얌전할 뿐이지, 머릿속으론 황당무계한 짓을 저지를 작정 중일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찬이 은근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
“안 돼.”
“일단 듣고 거절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합법적인 거고…….”
“합법이고 불법이고 간에 안 돼.”
한호성은 무 자르듯 단호히 말했다.
“말했잖아, 네 마음은 고맙지만 도움을 받아들일 순 없다니까.”
푸드 트럭만으로도 고마운 한편 부담스러운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순수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선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보내 주는 사람의 마음부터가 순수하지 않으니 어쩔 도리 없지 않나.
“그리고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의 유명세는 치르는걸. 난 오히려 조금 기뻐.”
“대체 뭐가?”
“허광범이 하이파이브 얘기할 때마다 조회 수 오르는 거. 그만큼 하이파이브의 인지도가 높아졌다는 뜻이잖아.”
“기뻐하는 와중에 찬물 끼얹기 미안하지만, 긍정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마냥 긍정적인 게 아니라, 뭐랄까…….”
한호성은 와인을 홀짝 마셨다. 달고 쌉싸름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최고의 복수는 하이파이브가 보란 듯이 잘 되는 거잖아. 그거면 돼.”
“그래, 네가 그렇다면……. 알았다.”
우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한 기색일지언정 제 뜻은 이해한 듯싶었다.
“이런 거 말고 즐거운 얘기 하자.”
“어떤 얘기.”
“음…… 그냥 사는 얘기? 요즘 뭐 하고 지내?”
“바빠, 요즘.”
“그래?”
호성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심심해.’ 내지는 ‘푹 쉬고 있어.’ 등의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너 요즘 스케줄도 거의 없는 데다 휴학 중이잖아.”
“덕질하다 보면 24시간이 부족해.”
“…….”
“몇 년 동안 쌓인 떡밥이 너무 많아.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닌데 아무튼 바빠.”
그때 띠링, 알림음이 울렸다. 우영찬의 핸드폰이었다.
“잠시만.”
알림을 확인한 우영찬의 낯에 진지한 빛이 스쳤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핸드폰 타자를 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한호성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매물 알림 떴어.”
“매물?”
“어, 네 포스터.”
“…….”
잠시나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염려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한호성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어떤 포스터인데?”
“이거.”
우영찬이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무언가 했더니, 올해 초에 촬영한 컬러 렌즈 광고의 포스터였다. 제품을 구매한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증정한 포스터로 기억한다.
“어? 근데 이건 너한테도 있잖아? 그…… 푸른 수염의 방에서 봤는데.”
“푸른 수염의 방이라니. 한호성의 전당이라고.”
“……아무튼 거기.”
“내가 가진 포스터엔 접힌 자국이 있어. 이 사람이 파는 포스터엔 접힌 자국이 없고.”
“아……. 그래?”
한호성으로선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인가 싶었다. 종이 재질인 포스터 특성상 접힌 자국쯤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인데. 넌 아이돌이 돼서는 왜 이렇게 팬 마음을 모르냐.”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되게 신선하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영찬더러 팬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며 잔소리한 게 바로 자신인데 말이다.
“접힌 자국 때문에 네가 얼굴 찌푸린 것처럼 보여서 신경 쓰였다고.”
“…….”
“이왕이면 접힌 자국 없는 포스터로 걸어 둬야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안주 없이 와인을 마신 탓 같았다. 그럼에도 한호성은 또다시 와인 잔을 기울였다. 슬슬 취해 가는지, 이젠 와인의 도수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한호성.”
“…….”
“한호성!”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호성은, 강하게 불린 제 이름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 불렀어?”
“어, 두 번 불렀다. 설마 벌써 취했냐?”
이전번엔 이렇게 빨리 취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라며 우영찬이 중얼거렸다.
“완전히 취한 건 아니야. 취기가 돌긴 하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을 못 가눠.”
“나 지금 허리 꼿꼿하지 않아?”
“그럼 뭐하냐, 옆으로 기울어졌는데. 너 지금 직선이 아니라 대각선이야.”
“대각선이라니.”
표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큭큭 웃자, 우영찬이 단언했다.
“취했군.”
“만취는 아니라니까.”
“어쨌든 그만 마셔야겠다. 내일도 스케줄 있잖아?”
우영찬이 한호성의 잔을 빼앗았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취한 건 아닌데, 제가 언제부터 스케줄을 신경 썼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한호성은 우영찬의 팔뚝을 툭 건드렸다.
“아이돌 다 됐네, 영찬이.”
“다 너한테 배운 거지.”
“내가 아이돌 하나 만들었어.”
뿌듯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해, 호성이 웃음을 흘렸다. 우영찬은 그의 얼굴을 반히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네가 진짜 취하긴 했구나.”
“그 정도는 아냐.”
“취한 게 아니고서는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아니야, 됐다. 말끝을 흐린 우영찬이 그리 얼버무렸다.
“핸드폰은 삼사일 후에 전해 줄게.”
“……나 안 취했다고. 그렇게 얼렁뚱땅 받을 줄 알아?”
“아, 진짜 안 취했네?”
우영찬이 손을 뻗었다. 무얼 하려고 저러나 가만히 있었더니, 한호성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호성의 머리칼을 제 손가락에 돌돌 감으며 장난쳤다.
“한 잔 더 마실래? 그럼 확실하게 취할 것 같은데.”
“됐거든.”
“혹시 아냐, 취하면 나랑 사귀고 싶어질지도.”
“…….”
“아니면 나랑 뽀뽀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고…….”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차츰 뒤로 움직였다. 우영찬은 한호성의 뒤통수를 감싼 후 서서히 끌어당겼다.
우영찬이 서서히 다가왔다. 아니, 자신이 그에게 기울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힘을 주면 뿌리칠 수 있겠지만 한호성은 그러지 않았다.
‘응, 맞아. 난 취했어. 취한 거야.’
누구인지 모를 이에게 중얼거리며, 한호성은 우영찬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뽀뽀라더니, 입술을 살짝 붙였다 떼는 정도가 아니었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우영찬의 혀가 침입했다.
오늘은 첫 키스 때처럼 무람없지 않았다. 오히려 우영찬은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라르고(Largo) 템포에 맞춰 춤을 추듯, 혀를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응…….”
호성도 덩달아 느릿하게 움직였다. 덕분인지 우영찬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전번에 키스할 땐 도둑질 당하는 것처럼 정신없었는데, 이번엔 모든 감각이 또렷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혀를 움직이는지. 맞닿은 입술 사이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까지도, 다 느낄 수 있었다.
혀를 섞을 때마다 젖은 소리가 흘렀다. 언뜻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호성은 취기에 몸을 맡겼다.
“……하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우영찬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의 위에 올라탄 채다. 이건 지나치게 선을 넘은 듯싶어, 한호성은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우영찬이 손목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속절없이 안기고 말았다.
“아, 잠깐.”
말을 이을 새도 없이 우영찬이 입을 맞춰 왔다. 쪼듯이 입술을 맞추는 것이, ‘이래도 싫다고 할 거야?’라고 응석 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한호성은 우영찬을 밀어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선은 진작 넘었다. 키스하려고 다가오는 우영찬을 밀어내지 않았을 때부터. 그의 집에 왔을 때부터. 아니, 애초에 처음 키스했을 때부터.
몇 개의 선을 단번에 훌쩍 뛰어넘는 것만 같았다. 우영찬과 오늘만 네다섯 번째 입을 맞추며, 한호성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라는 말을 절절히 통감했다. 하지만 그런 잡념은 이내 흐물흐물 흩어지고 말았다. 선 너머 골인 지점에 있는 건 희부옇게 피어나는 쾌감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