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으아, 세상에……. 너무 좋은데 너무 부끄러워. 푸드 트럭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거야? 이게 맞아?”
오죽하면 뻔뻔한 성격인 이주진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한호성은 그럴 엄두도 못 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영찬이가 보낸 것 같은데.’
짝짓기 철의 수컷 새만큼이나 화려한 스타일이 영락없이 우영찬을 연상케 했다. 스스럼없이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언질이라도 해 주지.”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한호성은 그리 얼버무리고 말았다.
“인증 샷 찍어야죠?”
장영수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그에 한호성과 이주진은 푸드 트럭 쪽으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들을 알아본 스태프들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주진 형은 왼쪽으로. 호성 형은 오른쪽으로 두 걸음 정도만 더 갑시다, 그래야 현수막 안 가리니까.”
장영수의 지시에 따라 걸음을 옮기며 호성은 생각했다. 저 현수막을 살짝, 아주 살짝만 가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최소한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별이 떴다!’라는 멘트만이라도 가리고 싶었다.
너무 좋은데 너무 부끄럽다는 이주진의 말이 딱 맞았다. 오묘한 표정의 한호성은 그러나 장영수가 핸드폰을 들자마자 활짝 웃었다.
찰칵, 찰칵, 찰칵.
장영수가 촬영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 모습이 찍혔다. 푸드 트럭 앞에 이어 입간판 옆에서까지 촬영한 후, 장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날이 좋아서 잘 찍힌 것 같아. 나중에 인증 샷 올리면 푸드 트럭 보내 준 팬이 좋아하겠어, 누군진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러게…….”
한호성은 먼 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의 팬이 누군지 모르기는커녕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서 탈이었다.
***
대기하는 동안, 한호성은 세트장 한편에서 촬영을 구경했다.
어느새 세트장의 분위기에 동화된 덕분에 긴장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보다 드라마의 한 장면을 슬쩍 엿보는 게 흥미로웠다.
‘생각보다 발랄한 내용이구나.’
이주진의 대본을 읽어 보긴 했지만, 그건 극 중 일부에 불과했다. 드라마는 한호성이 생각한 것보다 경쾌한 느낌이었다.
‘말장난도 많이 나오고.’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라던데, 로맨틱보다 코미디 쪽에 더 방점이 찍힌 듯싶었다. 이후의 내용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러했다.
‘OST가 이런 분위기에서 삽입되는 건가?’
한호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마냥 아련한 느낌으로 불렀는데, 그래서야 저 장면과 붕 뜰 것 같았다. 물론 드라마에 대해서라면 자신보다야 감독과 작곡가가 더 잘 알 테지만 무언가 석연찮은 감이 있었다.
‘감정을 조금 덜어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한호성은 작곡가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작곡하는 동안 ‘아련함’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떠올렸다고 한다. 늦은 밤,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처럼 말이다.
그 감성은 그대로 유지하되 경쾌한 느낌을 조금 첨가하면 어떨까. 자신은 비록 러브레터를 써 본 경험은 없지만, 그게 비단 떨리는 일만은 아닐 것 같았다.
좋아하는 상대를 생각하노라면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 않을까? 그와 함께한 즐거운 일을 떠올리다 보면 기분이 붕 뜨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데, 컷 사인이 울렸다.
“15분 휴식 후 이동하겠습니다!”
한호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이 드디어 자신이 출연하는 신이다. 암만 대사 한 줄 없는 역할이더라도 카메라에 3초 이상은 잡힐 터였다. 어색해 보이면 안 되는데, 하는 염려가 다시금 밀려들었다.
“앗!”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두드렸다. 안 그래도 긴장 중인 한호성은 화들짝 놀랐다. 허허, 상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미안. 많이 놀랐어요?”
“아, 아닙니다. 감독님.”
그의 얼굴을 확인한 한호성은 얼른 인사를 건넸다. 감독은 흐뭇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어째 겉보기만으론 감독이라기보다 득도한 산악인 같은 인상인 남자였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얘기 들었나? 내가 ‘천사들의 하모니’ 애청자였다고.”
“예, 말씀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저도 평소 감독님 작품 즐겨 보았습니다.”
“흠, 내 작품? 어떤?”
“‘청춘왈츠’와 ‘꼭 묶어 두세요’요. ‘최애’도 재미있게 보았고요.”
“아, 그래요?”
감독이 다시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호성은 마주 웃으며 내심 안도했다. 사실, 방금 이야기한 드라마 중 제대로 시청한 건 하나도 없었다. 드라마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스케줄이 워낙 빡빡했던 탓이다.
‘선의의 거짓말도 잘 해냈으니까 연기도 잘 해낼 수 있겠다.’
의외의 구석에서 자신감을 되찾은 한호성이었다.
“참, 촬영할 때 너무 힘주지 않아도 돼요. 막말로 노래 부르다가 삑사리가 나도 괜찮으니까.”
“정말요?”
“그럼. 어차피 편집할 때 음원 삽입할 건데 뭐.”
“아……!”
듣고 보니 자신이 괜한 걸 물었다 싶었다. 드라마에는 라이브 대신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한 음원이 들어갈 테니 말이다.
“저, 그럼 제 마음대로 불러도 돼요?”
“응. 입 모양만 맞으면 상관없어요.”
“막 락 버전으로 불러도 되나요?”
“어, 그거 재밌겠는데. 정말 해 볼래요?”
“아, 아니에요.”
순간 흥분한 나머지 지껄인 농담일 뿐이다. 어쨌거나 촬영할 때 제 마음대로 불러도 된다니 다행이었다.
“그럼 기대할게요!”
양 엄지를 추켜 올린 감독이 자리를 떠났다.
한호성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확인한 후, 스태프들을 따라 촬영 장소로 이동했다.
“슛.”
촬영을 시작한다는 사인이 떨어졌다.
한호성은 핸드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그는 역할대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아, 옛날 생각나네.’
플레임스타로 갓 데뷔했을 때, 그룹을 알리기 위해 이따금 번화가에서 버스킹하곤 했다. 까마득한 과거였지만 일단 떠올리니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얇은 옷을 입고 열심히 노래하고 춤춘 일까지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런 플레임스타를 보며 감탄보다는 동정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그게 도리어 어린 열정에 불을 붙여, 더 열심히 공연하게 되었더랬다. 멤버들과 함께 격렬히 춤추다 보면 추위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추억이 녹아내렸다. 한호성은 핸드마이크를 꼭 쥐며 노래에 집중했다. 그래도 버스킹해 본 경험 덕분에, 버스커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실제 촬영본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금처럼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지나치게 아련하지 않게.’
작곡가의 의도에 반하는 셈이었으나 한호성은 미팅 때와 다르게 곡을 해석했다. 다만, 섬세한 감성은 충분히 표현하고자 했다. 가사와 멜로디가 듣는 이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괜찮은 것 같은데.’
이 또한 실제 녹음본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호성의 귀엔 나쁘지 않게 들렸다. 아니, 실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연습할 때보다 괜찮은 것 같았다.
한호성은 문득 떠올린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곡을 제멋대로 부르고서 ‘더 괜찮다.’라고 느끼다니, 그런 자신이 건방진 것 같아서였다.
‘괜찮아, 어차피 다른 사람은 내가 무슨 생각 중인지 모를 테니까.’
호성은 이를 상기하며 뻔뻔하게 굴고자 노력했다. 하기야 작사가의 일은 가사를 쓰는 것이고, 작곡가의 일은 곡을 짓는 것이듯 가수의 일은 노래하는 것이다. 자신도 곡을 완성하는 데 나름대로 이바지했으니 그만큼의 권리는 주장해 볼 만했다.
“컷!”
이윽고 컷 사인이 떨어졌다.
마법에서 깨어나듯 뒤늦게 긴장이 밀려들었다. 한호성은 뺨을 붉힌 채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한 후, 후다닥 촬영 장소를 떠났다.
***
“형! 나 촬영하는 거 잘 봤어?”
이주진이 차 문을 열어젖히며 기운차게 외쳤다. 먼저 차에 타 있던 한호성은 그를 맞아 주었다.
“응, 잘하더라.”
“분량 늘어서 너무 좋아! 아까 스태프한테 살짝 들었는데, 원래는 다른 캐릭터가 하나 더 있을 예정이었는데 그게 내 역과 합쳐졌대. 덕분에 분량이 두 배로 늘어났나 봐.”
이주진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Victory를 뜻하는 건지, 숫자 2를 뜻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주진이 뛸 듯이 기뻐하니 자신도 덩달아 기뻤다.
“연기 학원 열심히 다닌 보람이 있네.”
“헤헤, 형도 잘하던데. 옥에 티가 있긴 했지만…….”
“뭐, 뭐가? 나 혹시 뭐 실수했어?”
한호성은 다급히 물었다. 재촬영 없이 끝나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응. 평범한 버스커치곤 노래를 너무 잘하더라고.”
“뭐야…….”
안심한 한호성은 등받이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갖 주접에 단련된 덕분인지, 이주진이 날이 갈수록 능글맞아지는 듯싶었다.
‘물론 능글맞기로는 우영찬을 따라갈 수 없지만.’
운전석의 장영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짜야, 형 잘하긴 했어. 현장 스태프들도 다 감탄했다던데.”
“그래? ……푸드 트럭 덕분에 평을 후하게 준 건 아니고?”
호성은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물었다. 장영수가 큭큭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에이, 설마 푸드 트럭 덕분에 그랬겠어? 다들 맛있게 먹은 것 같긴 하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도 푸드 트럭에서 점심 먹었을 텐데. 아쉽다.”
“그러게.”
그러고 보니, 푸드 트럭 관련하여 우영찬과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전화했다간 통화 내용이 두 사람에게까지 들릴 터였다. 짧은 고민 끝에 한호성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영찬아, 너지?
[우영찬] 뭐가?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답신이 왔다. 한호성은 빠르게 타자 쳤다.
[나] 푸드트럭
[우영찬] ㅎㅎ
[우영찬]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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