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잘할 거면서.”
“잘…… 하도록 해 볼게요.”
“그래요. 방영할 때 봐야겠다, 호성 씨 연기 어떤지.”
제발 시청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다. 하지만 출연 확정까지 된 마당에 그런 책임감 없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한호성은 우는 소리를 우동과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참.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뭐든지 물어봐요. 곡 해석이라거나, 뭐 다른 것도 좋고.”
“저, 그럼 곡 관련한 질문은 아니지만요…….”
예상치 못하게 주어진 질문 찬스에, 한호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께선 작곡 전공이 아니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어떻게 작곡 공부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응, 맞아요. 난 신방과 출신이니까. 그런데 호성 씨, 작곡에 관심 있어요?”
“네.”
프로 작곡가 앞에서 작곡에 관심 있다고 말하기 어쩐지 멋쩍었다. 반면 작곡가는 동료라도 만난 듯 만면에 화색을 띄웠다.
“어머, 웬일이야. 호성 씨가 뭘 좀 아네. 작곡 재밌죠?”
“네. 그런데 어려워요, 독학으로 하다 보니.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실용 음악 학원에 다닐까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스케줄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직업 특성상, 학원에 꾸준히 나가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과외를 받자니 이번엔 어떡해야 좋은 강사를 만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독학은 아무래도 어렵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한 언니가 작곡가여서 그 언니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내가 배우면서 느낀 건데, 체계적으로 배우려면 아예 대학에 가는 것도 좋겠더라고요.”
“그런가요?”
한호성으로선 생각지도 않은 선택지였다. 꾸준히 출석할 자신이 없어 학원 등록조차 망설이는데, 대학은 오죽하겠는가. 한데 이어지는 말을 듣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사이버대도 괜찮아요. 인터넷 강의라면 원하는 시간에 들을 수 있으니까. 궁금한 게 생기면 교수한테 질문할 수 있고, 실습하는 시간도 따로 있고요.”
“정말요?”
“응, 방금 얘기한 그 언니가 지금 한국사이버대 실용 음악 작곡과 출강 중이거든요. 커리큘럼 살짝 봤는데 괜찮더라고요.”
“한번 찾아볼게요. 조언 감사합니다.”
작곡가의 말마따나, 아예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한호성은 ‘한국사이버대 작곡과’를 머릿속에 잘 메모해 두었다.
***
작곡가와의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한호성은 연기 연습에 집중했다. 연기가 노래보다 급한 까닭이었다. 잘 못 하는 분야기도 하거니와, 녹음보다 촬영 일정이 더 이르니 말이다.
벼락치기 하듯 연기 과외까지 받았건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호성의 연기 실력 향상은 지지부진했다.
그리하여 대망의 촬영일. 한호성은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파이브’ 한호성 연기력 논란. 아이돌 낙하산 출연 이대로 괜찮은가…….”
“형,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주진이 어이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기사 제목 예상한 거야.”
“왜 그런 재수 없는 예상을 하고 그래. 어서 퉤 해, 퉤.”
“퉤…….”
“잘할 거야, 형.”
이주진은 한호성이 제 역을 잘 해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영 자신 없는 모양이었다. 이주진이 생각하기에, 이럴 땐 응원도 소용없고 차라리 화제를 돌리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걱정을 잊을 수 있을 터이니.
“호성 형, 그거 봤어? 허광범이 또 영상 올린 거.”
“아, 봤어.”
“정말 너무하지 않아? 우리랑 얼마나 알고 지냈다고 자꾸 입을 터는 거야. 슬슬 에피소드 떨어질 때도 됐는데.”
화제를 돌리고자 꺼낸 이야기인데 말하다 보니 열이 올랐다. 이주진은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우리 얘기 할 거면 차라리 1, 2년 전에 하던가. 그랬으면 소소하게나마 홍보라도 됐지.”
“그러게. 그땐 우리 자컨 조회 수가 어흥오빠 방송 조회 수보다도 적었으니까.”
한호성은 이주진의 말을 받았다.
본명 허광범, 닉네임 ‘어흥오빠’는 한때 소소리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었다. 처음부터 크고 작은 사고를 쳐 모두를 긴장시킨 그는, 급기야 기막힌 짓을 저질렀다. 연습실에 몰래 애인을 데려와 어른의 데이트를 즐기려다 딱 발각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냐고 묻는 장 대표에게 허광범이 한 대꾸가 가관이었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하는 게 로망이어서요. 데뷔하면 데이트하기 힘들 테니 그 전에 많이 해둬야 하잖아요.’
허광범은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한호성을 비롯한 하이파이브 멤버로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인간상. 비단 하이파이브뿐 아니라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허광범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한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세상엔 그런 ‘어흥오빠’의 팬이 많았다.
“안 되겠어, 계속 당하고만 있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우리도 허광범 인성 폭로해 버리자.”
“하지만 팬들이라고 허광범 인성을 모르는 건 아닐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거잖아.”
“……그건 그래.”
다들 너무해, 하며 이주진이 투덜거렸다. 한호성도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은 컨트롤 프릭 루머 한 번에 휘청했는데, 누구는 증거가 명확한 사고를 쳐도 팬이 이탈하지 않는다니. 요지경 세상이었다.
“그냥 반응하지 말자.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제스처를 취하면 그걸 빌미로 더 날뛸걸.”
“형 말이 맞아. 그게 최선이지.”
이주진이 씁쓸해하며 수긍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야외 세트장에 도착했다. 장영수가 주차장을 향해 차를 천천히 몰았다. 그러는 동안 한호성은 차창 밖을 구경했다.
세트장은 가짜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 거주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서일까, 언뜻 평범해 보여도 무언가 이질감이 들었다. 하기야 세트장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가짜’ 같다는 감상도 영 틀린 건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스태프 같은 사람들이 촬영 장비를 들고 걸어 다녔다. 그들을 보자, 자신이 드라마를 촬영하러 왔음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형,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알았어? 나 걱정 중인 거.”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어떻게 몰라.”
이주진이 웃으며 말했다.
“형은 대기 시간이 기니까 그동안 마인드 컨트롤 하고 있어. 아니면 촬영 구경하면서 긴장 푸는 건 어때?”
“그래야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긴장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단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한호성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차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스태프가 인사를 건넸다. 한호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와, 듣긴 했는데 정말 실물이 더 잘생기셨네요.”
“아, 감사합니다.”
“뭘요. 우리야말로 감사하죠, 덕분에 맛있는 점심 먹어서.”
“맛있는 점심이요?”
한호성으로선 영문 모를 소리였다. 이주진을 돌아보자 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막 차에서 내린 장영수도 마찬가지였다.
“어, 모르셨어요? 팬분들이 조공 보내셨는데.”
‘조공’이란, 팬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위해 선물을 주는 행위를 뜻한다. 연예인 개인을 위한 옷이나 신발, 전자기기 등의 선물부터 스태프에게까지 음료를 돌리는 것까지 종류도 다양한데, 이 경우엔 후자 같았다.
상황을 파악한 장영수가 나섰다.
“저희는 받은 연락이 없어서요.”
“서프라이즈 이벤트인가 본데요. 보러 가실래요? 지금도 요리하는 중이거든요.”
스태프가 몸을 돌렸다. 한호성과 이주진, 장영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근데 정말 팬분들이 신경 많이 쓰셨더라고요. 저 그렇게 호화로운 푸드 트럭 처음 봤잖아요.”
“그, 그래요?”
“네, 밥도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요. 그냥 도시락이 아니라 쉐프가 직접 와서 요리해 주더라고요. 스테이크의 굽는 정도까지 취향대로 맞춰 줬다니까요?”
“…….”
팬들이 조공을 보내 준 건 고마운 일인데, 어째서인지 한호성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문제의 조공을 보내 준 이가 ‘팬들’이 아닌 ‘팬’일 것 같아서였다.
“저기예요.”
이윽고 걸음을 멈춘 스태프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한호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헉…….”
커다란 푸드 트럭 앞에 스태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푸드 트럭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푸드 트럭이 아닌 푸드 버스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한데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저 현수막 대체 뭐야!”
이주진이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게, 푸드 트럭에 요란하기 짝이 없는 무지갯빛 현수막이 걸린 까닭이다.
‘호성이와 주진이가 쏩니다!’
‘맛있는 식사 하시고 촬영 힘내세요.’
‘우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줄의 폰트가 가장 큰 걸로 보아 그게 본론임이 분명했다. 이래서야 ‘조공’이라는 말이 아주 틀리지도 않았다. 자신과 이주진을 잘 봐달라는 의미로 스태프진에게 식사를 대접한 것이니 말이다.
그 마음 씀씀이에 감격할 새도 없이, 한호성은 푸드 트럭 옆에 세워둔 입간판을 보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과 이주진의 사진이 유행 지난 스티커 사진처럼 화려한 효과가 적용된 채 인쇄된 것이다. 얼굴만 용케 피해 덕지덕지 붙은 주접 멘트는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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