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우영찬은 대체……. 아니, 나는 대체…….’
한호성은 애써 생각을 끊어 냈다.
괜히 의미 부여 할 필요 없다. 세상에 ‘분위기에 휩쓸렸다.’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우영찬이 태풍처럼 몰아치니까 피할 도리 없이 휩쓸렸을 뿐이다. 그래, 분명 그런 거였다.
“휴.”
호성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켰다. 머리를 비우며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웹 서핑만큼 좋은 건 없기 마련이다. 무심코 프위터에 접속한 한호성은, 가장 먼저 눈에 띈 프윗에 흠칫했다.
사이렌 @warning_redlight
소신발언합니다 나는 젡왼 핞른도 맛있음
|
사이렌 @warning_redlight
왼른을 가르는 기준이 키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물론 젡과 핞은 어떻게 먹든 맛있지만 그러니까 젡핞도 함 드셔보시란 말입니다(지나가는 프친 붙잡고 억지로 퍼먹이기)
˪찌리릿 @lksduhq
이렇게 어느 날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성동애 ~
“악.”
한호성은 핸드폰을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방심한 순간 맞은 화살이라서인지 더 아픈 성싶었다.
어느 날 성큼 다가온 성애. 어째서인지 그게 남 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
잠시 후, 우영찬이 거실로 나왔다. 그는 가장 먼저 한호성부터 확인했다.
“안 갔네.”
“안 가겠다고 했잖아. 나 약속 잘 지켜. ……웬만하면.”
또 하와이 운운할까 봐 다급하게 덧붙이자, 우영찬이 잘했다는 듯 한호성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잘했어. 이제 축하 파티 하자.”
호성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우영찬을 올려다보았다. 축하 파티라니,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가 오갔더랬다.
“이 시간에 파티하려고?”
“말이 파티지, 거창하게 벌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잠시만 기다려.”
우영찬이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한호성은 소파에 앉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럴 듯싶은 이미지는 아닌데, 하여간에 이벤트 따위를 은근히 잘 챙긴다 싶었다.
“우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우영찬이 중앙에 촛불이 꽂힌 케이크를 들고 왔다. 한호성은 케이크를 보며 감탄했다.
“예쁘다…….”
하트 모양에, 붉고 반들거리는 시럽으로 코팅된 케이크였다. 자그마해서 더 앙증맞게 느껴졌다. 음식이라기보다 뮤직비디오의 소품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일단 촛불부터 불까.”
“응.”
우영찬이 한호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호성은 들뜬 눈빛으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사실 일이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축하 파티 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지만 가끔은 이렇게 기분 내는 것도 좋은 듯싶었다. 케이크만 보면 마냥 설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우리의 첫 키스를 축하하며.”
“…….”
그러나 우영찬의 말에, 한호성의 두근거림은 뚝 멈추었다. 호성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우영찬을 흘겨보았다.
“축하하겠다는 게 그거였어? 너 진짜…….”
여기서 우영찬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지면 한층 화끈한 파티가 되지 않을까. 그런 충동이 드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찬이 태연히 말했다.
“어서 촛불 불어. 촛농 떨어지겠다.”
한호성은 어쩔 수 없이 촛불을 불었다. 후, 입김을 불자 연기가 사리사리 올라가다 흩어졌다.
“다음엔 첫 키스 말고 다른 거 축하하자.”
“……어떤 거.”
“사귀기 시작한 날.”
그러면서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것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뜻일 터다. 한호성은 애써 이를 무시하며 말했다.
“안 된다니까……. 영찬아, 생각해 봐. 여태껏 멤버들한테 웬만하면 연애하지 말자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런 내가 가장 먼저 연애 시작하면 어떡해.”
“얌전한 밤비가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간다 싶긴 하겠지.”
“…….”
“그래도 뭐 어떠냐. 안 들키면 되지. 그리고 멤버 눈치 보느라 연애를 포기할 순 없잖아.”
이럴 때마다 한호성은 느끼게 되었다. 열여덟 살에 데뷔한 자신과, 제논에게 빙의하기 전까진 연예계에 대해 전혀 관심 없이 살아온 우영찬 사이엔 크나큰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이 왜 연애할 수 없는지 설명해 봤자 우영찬으로선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걸. 너 하는 짓 보면, 내일 당장 전 국민이 네가 나한테 고백한 거 알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말하고 보니 상당히 현실성이 있어서, 한호성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실제로 근래 들어 제논과 자신을 엮는 사람이 확 늘어났잖은가. 물론 둘이 정말 사귄다고 진지하게 믿는 이는 없겠지만, 그만큼 타인의 눈에도 제논과 자신이 친밀해 보인단 증거이리라.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여기서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괜찮아. 그럴 일은 없어.”
“어떻게 그렇게 단언해?”
“기사 나면 내가 막을 거거든.”
우영찬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그 딴에는 이유가 있는 여유로움이었다.
“김제국이라면 몰라도 우영찬의 사생활을 함부로 기사화할 기자는 없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한호성의 사생활을 함부로 기사화할 기자는 많을 텐데…….”
“네 사생활이 곧 내 사생활일 텐데 뭐.”
일리는 있는데 왜 이리 아니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한호성은 우물우물 입속말했다.
“난 연애 안 할 거라니까…….”
우영찬은 의뭉스레 웃을 뿐이었다.
9. Love me do
‘이제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리자.’
그리 마음을 다잡은 게 무색하게, 우영찬은 더는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호성은 친구 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놀다 갈 수 있었다.
짧은 휴식 끝에서 한호성을 기다리는 건 일이었다. ‘만우절의 러브레터’의 OST, 곡명 ‘꽃 우표’를 전달받은 것이다.
‘노래 좋다.’
악보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가이드 음원까지 들은 후, 한호성은 감탄했다. ‘꽃 우표’는 감성적인 발라드곡이었다. 가사가 곱고, 멜로디도 그에 어울리게 섬세한 느낌이다.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지만 한호성은 벌써 곡에 푹 빠져들었다.
‘분명 대중도 좋아할 거야.’
그러도록 부르는 게 자신의 의무였다.
다행히 녹음일까지는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그동안 한호성은 열심히 연습했다. 드라마에서 몇 번이고 흘러나올 곡이니, 더더욱 잘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덕분일까. 작곡가와의 미팅일, 그는 한호성의 노래를 듣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성 씨. 제가 ‘꽃 우표’ 작곡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가 뭔지 아세요?”
“무엇인가요?”
“아련함.”
작곡가가 손에 든 펜을 휘리릭 돌리며 말했다.
“가사 내용부터가 그렇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는 내용이니까.”
“그렇죠.”
“그래서 뭐랄까. 늦은 밤에 편지를 쓰는데, 그날따라 바람도 달콤하고 흔들리는 시폰 커튼마저 감성적으로 느껴지고. 글자가 예쁘게 써지지 않아 새로운 편지지에 다시 쓰는 과정마저 즐거운, 그런 기분 있잖아요?”
“네.”
비록 겪어 본 일은 아니지만, 상상마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한호성은 작곡가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때 흥얼흥얼 부르는 노래를 상상했거든요. 그 느낌을 잘 살려 주셨네요. 제가 더 말씀드릴 부분은 없는 거 같고……. 본 녹음 때도 이대로 부탁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한호성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자신이 곡을 잘못 해석했으면 어쩌나 가슴을 졸였는데, 좋은 평을 들어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린 작곡가가, 한호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점심이나 같이 할래요? 이 근처에 우동 전문집 있는데. 우동 맛있게 하는 곳이 은근히 흔치 않거든요.”
“네, 우동 좋아요.”
한호성은 흔쾌히 대답했다.
“가서 먹어도 좋지만 그냥 배달시켜요. 아무래도 호성 씨랑 가면 눈에 너무 띌 것 같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한호성은 그냥 웃고 말았다. 난감할 땐 역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게 제일이었다.
자신의 작업실까지 왔으니 점심쯤은 자신이 대접하겠다며, 작곡가가 우동을 주문했다. 메신저로 대화를 나눌 때부터 느꼈지만 참 시원시원한 성격인 듯싶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주문하기가 무섭게 우동 두 그릇이 도착했다. 한호성은 감사 인사를 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냉우동은 처음인데 면발이 더, 뭐랄까…….”
“탱탱하죠?”
“아, 네.”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흐뭇하게 웃은 그가 우동을 후루룩 삼켰다.
“곧 촬영 들어간다면서요? 호성 씨 첫 드라마 데뷔인가?”
“하하, 네. 그런 셈이네요. 그 신 촬영은 다음 주 화요일이에요.”
주인공이 길을 걷다가 버스킹을 보는 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애초 이야기가 오간 대로 한호성은 버스커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어라. 곧이네요? 정작 곡은 녹음하기도 전인데 일정이 왜 그렇게 잡혔지?”
“스케줄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나 봐요.”
“아, 하긴. 등장인물이 많은 신이라서 스케줄 맞추기 어려웠겠네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작곡가가 물었다.
“어때요, 연기할 준비 됐어요?”
“잘 모르겠어요…….”
한호성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자신은 왜 연기만 하면 급격히 뻣뻣해지는지 모르겠다. 똑같이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라도, 무대에서는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