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예열 다 됐다. 고기 올리자!”
“어, 이태 형. 고기 그렇게 한 번에 올리면 안 돼.”
“괜찮지 않을까? 우리 어차피 금방 먹을 텐데.”
목장갑을 끼고 집게를 든 문해일이, 솜씨 좋게 그릴 위로 고기를 올리며 말했다.
“역시 고깃집 아들은 달라.”
이주진이 중얼거렸다. 말마따나, 문해일의 부모님은 체인을 몇 개나 둔 대형 돼지갈빗집을 운영했다. 자연히 그의 고기 굽는 기술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이파이브 선정 고기 먹으러 갈 때 1순위로 데려가야 할 인재, 문해일.”
“상금 받아 오는 사람 있고, 고기 잘 굽는 사람 있고, 고기 잘 먹는 사람 있고. 우리 역할 분담이 환상적인데?”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는 고기를 보며 멤버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 사이서 함께 웃고 떠들다, 한호성은 은근슬쩍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연락이…… 없네.’
우영찬의 집을 나온 후,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한호성이 먼저 ‘나 숙소 도착했어. 넌 잘 지내고 있어?’라고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읽었다는 표시만 뜰 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물세 살씩이나 되는 어른이 속이 상했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구는 게 유치하다 싶다가도, 그의 속을 상하게 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다 보니 미안하기도 했다. 또, 줄곧 붙어 있던 우영찬이 없으니 허전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일이 생겼다니 어쩔 수 없지만…….’
장 대표에게 ‘개인적인 일이 생겨, 며칠간 제논이 활동할 겁니다.’라고 이야기해 두었다는 우영찬이다.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진짜일 것도 같았다. 한호성이 아는 우영찬은 그만두겠다고 대놓고 말할망정 핑계를 둘러대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성 형. 뭐, 뭐 해?”
소리 없이 다가온 제논이 물었다. 그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터라 한호성은 흠칫 놀랐다.
“그냥 시계 보고 있었어.”
“형은 고기 안 먹어?”
“먹을 거야.”
“그, 그럼 이거 먹어.”
제논이 상추쌈을 내밀었다. 한호성은 재차 놀라고 말았다. 그가 누군가에게 상추쌈 따위를 싸 줄 성격이 아닌데 웬일인가 싶었다.
‘우성한 씨네 지하실에서 많이 반성했나……?’
놀라운 점은 또 있었다. 제논이 카메라 앞에선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멤버들끼리 있을 땐 기죽은 기색이었지만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달라졌다. 제논은 먼저 나서서 멤버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대화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 딴엔 제 몫을 다하려고 열심인 듯싶었다. 한호성은 그런 제논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응. 잘 먹을게.”
씩 웃으며 손을 내밀자, 제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먹여 줄게.”
“어……?”
놀라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상추쌈이 쑥 들어왔다. 한호성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먹었다.
제논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양 눈을 휘어 웃었다.
“맛있지?”
“으, 응.”
확실히 맛은 있었다. 상추에 문해일이 환상적으로 구운 두툼한 목살에 쌈장, 마늘, 미나리까지 골고루 올렸으니 맛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다. 다만 한호성으로선 제논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제논이 왜 이렇게 나한테만 친근하게 굴지?’
사실 한호성은, 카메라 앞에선 제논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자신에 대한 ‘컨트롤 프릭’ 의혹 때문이었다.
물론 문제의 의혹은 말끔하게 해결되었지만, 그래도 남의 꼬투리를 잡고자 눈을 번득이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괜히 구실을 던져 줘서 좋을 게 없었다. 다 탄 줄 알았던 장작도 불똥이 튀면 다시 화르륵 타오르기 마련이니까.
“형, 탄산수도 마셔. 이거 레몬 맛이라서 고기랑 잘 어울려.”
그런데 제논은 한호성만 졸졸 쫓아다녔다. 그 바람에 한호성은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긴커녕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처럼 찰싹 붙어 있게 되었다.
“……잘 마실게.”
한호성은 탄산수를 받아 들며 방송용 미소를 지었다. 그게 좋은지, 제논도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강아지 같기도 하고…….’
호성은 탄산수를 홀짝 마시며 제논을 쳐다보았다. 그는 눈매가 아몬드형으로 치켜 올라간 까닭에 팬들 사이에서 ‘아기 고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한호성 자신도 늘 제논을 고양이 상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그것도 주인만 졸졸 쫓아다니는 강아지 말이다.
‘딱히 내가 주인인 건 아니지만.’
탄산이 톡톡 튀는 음료를 삼키며, 한호성은 이틀 전 일을 떠올렸다.
제논이 예고도 없이 숙소에 돌아온 그날 밤. 제논은 작은 방에서 자겠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이 본래 제논의 방이었으니까.
그런데 한호성이 큰 방에서 자려고 하자, 울상이 돼서 말하는 것이었다.
‘호성 형, 나랑 같이 자기 싫어……?’
한호성은 당황했다. 제논과 같은 방을 쓰기 껄끄러운 마음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자는 것보다 큰 방에서 그리하는 게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저, 정말 나 꼴도 보기 싫어서 형 침대 놔두고 다른 침대에서 자려는 거 아니지?’
‘당연하지. 큰 방에서 두 명 자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그럼 내가 문해일과 잘게.’
순간 제논의 눈이 번득인 것처럼 느껴진 건 자신의 착각일까. 어찌 됐든, 제논과 가장 붙여둬선 안 될 인물이 바로 문해일이었다.
‘안 돼. 너 그러다 해일이랑 또 싸우면 어떡해.’
‘거, 걱정되면 형이 그냥 나랑 자면 되잖아. 응……?’
올려다보는 눈빛이 짠하기도 했다. 그에 한호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럴게.’
큰 방에서 잤다간 제논이 이상한 오해를 할 성싶었다. ‘호성 형이 내가 너무너무 싫어서 같은 장소에 있고 싶지도 않나 봐.’ 따위의 오해 말이다.
‘정말이지?’
‘그럼.’
확 밝아지는 제논의 얼굴을 보니, 작은 방에서 잔다고 하길 잘했다 싶었다.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더 익숙한 환경이니까 작은 방에서 자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호성은 이전처럼 제논과 같은 방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큰 사건이 있었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게 이따금 어색하긴 했다. 마치 가상 현실 속 평화로운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고나 할까. 안온한 분위기가 좋기는 한데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지고, 금방이라도 깨질 듯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나도 참, 무슨 불길한 생각을…….’
한호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패닉에 빠져 울고불고한 게 불과 지난주 일인데, 벌써 평화에 질려 하다니. 이건 배가 불렀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우리 랜덤 게임 할까? 땡초 들어간 상추쌈 피하기!”
그때, 이주진이 외쳤다. 그새 상추쌈을 만들기까지 했는지 도마 위에 상추쌈 다섯 개가 주르륵 놓여 있었다.
“좋아.”
“이거 엄청 매운데 다들 자신 있어? 네 개는 평범한 상추쌈이고, 하나엔 땡초가 듬뿍 들어 있거든.”
“5분의 1의 확률인 거잖아? 이 정도면 해 볼 만한데?”
“해일 형은 매운 걸 잘 먹으니까 20%의 확률에 걸려도 괜찮겠지만……. 다들 정말 괜찮겠어?”
이주진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에 한호성이 답했다.
“난 괜찮아.”
“나도 괜찮아, 땡초 상추쌈 하나쯤이야.”
“하나라고 얕보면 후회할걸. 제논, 넌 어때?”
“괜찮아.”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호성으로선 그가 정말 땡초를 먹고도 괜찮을까 염려스러웠지만, 게임은 시작되었다.
“시계 방향으로 가자.”
“그럼 나부터네.”
이주진의 오른쪽 방향에 서 있던 설이태가 상추쌈 하나를 집었다. 그는 한 입 베어 물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맛있어.”
“고기였나 보네. 다음은 해일 형.”
문해일은 상추쌈을 덥석 집더니 한입에 삼켰다. 만일 땡초가 든 것이었더라면 단번에 혀에서 불이라도 났을 만한 과감함이었다. 다행히도 문해일의 상추쌈은 평범했다.
“맛있다. 역시 내가 고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굽지.”
“그런 고기 자부심 아주 좋아. 다음, 제논 차례.”
제논은 남은 상추쌈 세 개를 훑어보더니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을 골랐다. 그는 작은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는 상추쌈을 베어 물었다.
“……고기다.”
“와, 제논도 고기야? 그럼 이제 50%의 확률이네!”
그 말대로였다. 한호성은 침을 꼴깍 삼키며 두 개의 상추쌈을 바라보았다. 이쑤시개로 끄트머리를 고정한 까닭에, 속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둘 다 평범한 상추쌈 같았다.
“난 이걸로 할래.”
한호성은 그냥 아무 상추쌈이나 집었다. 고기가 든 상추쌈을 먹으면 운이 좋은 것이고, 땡초가 든 상추쌈을 먹으면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될 테니 그것도 나름대로 좋았다.
“과연 결과는?”
“두구두구두구…….”
이주진과 문해일이 한껏 호들갑을 피웠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호성은 상추쌈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그러자마자 알싸한 매운맛이 혀를 후려갈겼다. 한호성은 눈을 질끈 감고 상추쌈을 삼켰다. 그 표정만으로도 다들 결과를 알아차렸다.
“으아, 호성 형이 당첨이었구나.”
“형, 눈물 흘리는 거 아니지?”
“아, 안 으어.”
너무 매워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호성은 혀를 살짝 내밀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데도 매운맛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편도 아닌데, 이건 정말 폭탄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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