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봐 봐, 불순하잖아!”
“이상한 짓 하겠다는 게 아니라 키스만 하겠다고! 딱 키스만! 너도 좋다고 했었잖아!”
“내, 내가 언제 좋다고 했는데?”
“동화 속 왕자님처럼 키스해 주겠다며 날 덮쳤을 땐 언제고……!”
“그건, 그건 키스라고 할 수 없지! 애초에 불발에서 그쳤는데. 설령 실행에 옮겼더라도 실험이나 마찬가지잖아?”
“그 실험 왜 지금은 못 하냐고. 기껏 내 몸으로 돌아왔는데. 이젠 김제국 몸뚱이도 아닌데!”
“네 몸으로 돌아왔으니까 안 되는…… 잠깐, 너 설마 그때 그래서 키스하려다 만 거였어? 제논 몸이어서?”
어이가 없어 묻자, 우영찬이 너무나 태연하게 지껄였다.
“당연하지. 네 첫 키스는 내 건데 왜 김제국한테 넘겨주냐.”
“……그런 면이 불순하다는 거야! 키, 키스라니. 난 그냥 너한테 도움 되고 싶어서 수긍한 건데. 속으로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빈정이 상했는지, 우영찬이 입매를 비뚜름히 올렸다.
“키스 생각만 했겠냐? 볼도 빨아 먹고 귀도, 목도…….”
“악! 그만해!”
한호성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달려갔다. 본능적인 경계심이 곤두선 탓이다. 기우가 아니라, 이 집에서 더 지냈다간 정말 우영찬에게 당하게 생겼다. 물론 그가 그렇게까지 나쁜 놈이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어딘지 허기진 듯한 저 눈빛을 보건대 역시 도망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한호성, 어디 가. 지금 당장 키스하겠다는 게 아니라고! 내 옆에 있어!”
한호성은 슈베르트의 마왕에게 쫓기는 아들처럼 후다닥 달렸다. 숨을 곳이 많다는 게 큰 집의 장점 중 하나였다. 한호성은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짐을 챙겼다.
다행히 가져온 게 얼마 없어 금방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한호성은 가방을 들쳐 메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힉!”
그러자마자 호성은 풀쩍 뛰어올랐다. 문 바로 앞에, 우영찬이 팔짱 낀 채 수문장처럼 서 있는 탓이다.
“뭔가 오해했나 본데. 당장 널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니까.”
열기 띤 시선으로 자신을 핥듯이 내려다보는 주제에, 저런 말을 해 봤자 믿기지 않았다.
“당장은 그렇다 치고, 나중엔?”
“그거야 뭐…….”
우영찬의 시선이 한층 끈적해졌다. 이젠 흑심을 숨기려고 들지도 않는다.
이러다간 정말 우영찬이 저를 ‘어쩌게’ 생겼다. 자신은 그와의 썸씽을 원하지 않으니 거절 의사를 밝혀야 했다.
‘……근데 안 먹히잖아?’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재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다.
한호성은 수비수를 따돌리는 공격수처럼, 우영찬 왼편의 공간을 뚫고 달려갔다.
“한호성!”
우영찬이라고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겨 한호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자신을 무력으로라도 막으려는 건가, 한호성이 긴장하던 그때.
“가려면 나 밟고 가!”
우영찬이 대자로 드러누웠다.
한호성은 아연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팔다리가 훌쩍 긴 그인지라, 자연히 차지하는 면적도 넓었다. 조심성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간 실수로 우영찬을 밟게 생겼다.
“영찬아, 내가 널 어떻게 밟아…….”
“그럼 난 너 어떻게 보내냐.”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도 잘 모르지? 좀 진정하고 나중에 다시 대화하자. 영영 절교하자는 게 아니잖아……!”
한호성은 주의를 기울여 움직였다. 드러누운 그의 어깨 부근을 막 지나던 그때, 억센 손아귀가 발목을 확 붙들었다.
“우앗!”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자기가 무슨 물귀신도 아니고, 남의 발목을 잡긴 왜 잡느냔 말이다.
“우영찬, 좀!”
“날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동거하겠다고?”
“내가 널 어떻게 버려, 영찬아…….”
한호성은 그를 짠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널 가진 적도 없는데.”
“…….”
아무래도 대화를 확실히 매듭짓고 가야 할 성싶었다. 한호성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쪼그려 앉았다.
“영찬아. 네가 싫거나 꺼림칙해서가 아니라, 미안해서 가는 거야. 너한테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으니까.”
“그냥 의지하면 되잖아. 난 너한테 해 주고 싶은 거 반의반도 못 했는데, 그걸 왜 신경 쓰냐고.”
“……전에 한 번 말한 적 있지. 내가 타 버린 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고.”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워듣기로, 짐승을 맞닥뜨렸을 땐 눈을 피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 순간 약한 개체로 인식되어 공격당한다나.
우영찬이 딱히 짐승은 아니나, 한호성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때 난 명색이 무대에 서는 사람이었으면서도 늘 관객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어. 한 자리에 가만히 멈춰, 빛나며 나아가는 진짜 스타들을 바라보는 게 내 역할이었거든.”
그래서 당시의 한호성은 자신이 스타로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달이라 칭하는 편이 적확할 터였다. 아니, 자신은 위성도 행성도 아닌 그저 타 버린 별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젠 안 그러니까.”
한데 다 태워 버린 줄 알았던 에너지는 한호성의 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호성은 다시금 예의 에너지를 불태우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별이 되기 위하여.
“그래서 네게 지나치게 의지할 수 없는 거야. 별은 스스로 빛을 내야 하는 거니까. 난 타 버린 별로 남기도 싫고, 남의 빛을 반사하는 위성도 되기 싫어.”
우영찬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흥분을 한풀 가라앉힌 듯, 그는 방금처럼 막무가내로 굴지 않았다.
“……네 뜻은 알겠어. 하지만 내 도움을 전부 거절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꼭 집을 나가야 하나?”
“친구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과 내게 사심을 품은 팬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건 달라.”
우영찬의 상심한 얼굴을 보려니, 한호성으로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마음을 붙들었다.
장 대표의 말마따나, 사람은 받은 게 있으면 상대를 거절하기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아직 우영찬을 거절할 수 있을 때 그의 지원을 돌려줘야만 했다.
“네 호의는 반드시 갚을게. 그동안 고마웠어, 영찬아.”
호성은 진심 어린 인사를 남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현관문을 열었지만, 우영찬은 더는 붙잡지 않았다.
한호성은 우영찬을 뒤로하고 그의 집을 나섰다.
***
우영찬은 잔이 넘치도록 와인을 따랐다. 와인의 내음을 음미하지 않고 들이마시는 일련의 행위엔, 어떠한 우아함도 없었다. 그는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씨발…….”
한호성과 함께 마실 땐 맛이 괜찮았는데, 지금은 쓸데없이 달게 느껴졌다. 며칠 새 와인 맛이 변했을 리도 없는데 참 별일이었다. 진짜 변한 건 한호성과의 관계인데 말이다.
‘나 좋아해 주는 분들 실망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
제 고백에 놀랐을 법한데도, 한호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와인에 젖어 반드르르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랜 경력의 아나운서가, 여느 날과 별다른 것도 없는 뉴스 방송을 마무리하듯이.
“왜 그렇게 침착하냐고……!”
우영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고백을 거절당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우영찬도, 한호성이 단번에 제 고백을 수락하리라곤 생각지 않은 바였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예사로울 일은 아니지 않나.
‘고백을 아주 많이 받아 보셨나 보지.’
한호성이라면 분명 데뷔 전, 후를 통틀어 수많은 사람에게 고백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거절하는 일도 다반사였을 터. 우영찬은 얼굴조차 모르는 그들에 대한 질투심을 불태웠다.
감히 한호성을 탐내다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몰랐던 시절의 한호성을 알고 있다니, 그게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한호성…….”
우영찬은 식탁 위에 올려 둔 포토 카드를 보며 중얼거렸다.
카드 한 장 크기의 사진 속에, 은색 머리칼의 한호성이 생긋 웃고 있었다. 이것은 4집 앨범에 수록된 것으로, 발매 시기가 꽤 예전인 데다 사진이 워낙 잘 나와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포토 카드였다. 그러나 우영찬은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 매물을 찾아내어 프리미엄이 잔뜩 붙은 값을 기꺼이 치르고 포토 카드를 손에 넣었다.
한호성을 손에 넣는 일도 이토록 쉬우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그에게 마음 표현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의 거절할 필요 없다고. 그냥 받아도 된다니까……!”
우영찬은 포토 카드 속 한호성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자신이 뭐 대단한 거라도 해 줬으면 말도 안 한다. 기껏해야 며칠 재워 주고, 옷 한두 벌 빌려준 게 전부 아닌가. 한데 그마저도 부담이라는 듯 선을 긋는 한호성이, 우영찬은 못내 서운했다.
‘그래서 네게 지나치게 의지할 수 없는 거야. 별은 스스로 빛을 내야 하는 거니까. 난 타 버린 별로 남기도 싫고, 남의 빛을 반사하는 위성도 되기 싫어.’
한호성이 남긴 말을 떠올리면 그의 심정도 이해는 되었다. 그렇게 조곤조곤 말하면 더 붙잡지 못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애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왜 너만 태연한 건데.’
자신은 미칠 것만 같은데 한호성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우영찬은 타는 듯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그러다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포토 카드를 빤히 바라보다, 애꿎은 식탁을 내리치길 얼마간.
‘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면, 내가 네 곁으로 가는 수밖에.’
우영찬의 눈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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