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우성한이 한호성에게 사심을 품은 나머지 일거리를 물어다 줬으리라는 장 대표의 추측은 반만 사실이었다. 상대가 우성한이 아닌 우영찬이라는 것만이 다를 뿐이니까.
상황을 파악한 한호성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대단한 제안을 받아 설렜지만, 그게 우영찬의 사심에서 비롯된 거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지 않아도 나 혼자서 잘할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커리어를 쌓고 싶진 않았다. 가뜩이나 대중에게 인정받고픈 욕구가 강한 한호성이었다. 자기 힘이 아닌 우영찬의 힘에 기대 메인 OST를 맡아 봤자,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자존심이 상할 뿐이다.
“거절하죠.”
“그래, 안 그래도 보류해 둔 상태다. 대단한 기회지만 이런 걸 넙죽 삼켰다가는 탈 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장 대표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우 전무가 너한테 스폰 따위를 제안한 적은 없단 말이지?”
“네, 대표님.”
“내 걱정이 기우라서 다행이다. 그래도 호성아, 우 전무 그 양반 꼭 조심해야 한다. 대놓고 스폰 제안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야. 이런 식으로 떡밥 하나둘씩 살살 뿌리다가 흑심 드러내면 어떡하냐. 사람이 말이지, 받은 게 있으면 거절하기가 어려워져. 설탕 발린 말 몇 마디에 아예 협박까지 곁들여지면 그냥 당하게 되는 거야.”
“…….”
“아무리 동생의 몸이라지만 제논을 자택에 데려다 둔 걸 보면 우 전무 그 인간도 보통 또라이가 아니다. 말이 좋아 데려다 둔 거지, 얘기 들어 보니까 사실상 감금이던데. 내가 제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눈 감고는 있지만 양심이 얼마나 찔리는지…….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한호성도 덩달아 양심이 따끔거렸다. 장 대표의 말에 십분 공감하는데, 그가 눈을 부릅뜨고 경고했다.
“너도 남자고 그쪽도 남자라고 안심하지 말고. 돈 많은 놈들이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후, 그냥 말을 말아야지.”
입에 담기도 싫다는 듯, 장 대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나 자신을 염려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한호성이 생각하기에도, 장 대표의 말이 일리 있었다.
우영찬이 자신에게 흑심을 품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의 선의는 분명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제삼자는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가 있었다. 당장 한호성 자신만 하더라도, 어느 아이돌이 재벌 4세와 교제하며 물질적 지원을 받은 데다 예의 기업에서 협찬한 드라마의 메인 OST까지 맡았다면,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터였다.
“꼭 조심할게요, 대표님. 염려 마세요.”
한호성은 결연히 말했다. 원래도 우영찬의 고백을 거절할 셈이었지만, 이젠 정말 기를 쓰고 거절해야 할 듯싶었다.
“그래. 너는 똑 부러지는 성미니 괜찮을 거다.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나한테 얘기하고.”
“네.”
“그럼 이만 들어가 봐라. 쉬는 날에 푹 쉬어 둬야지.”
호성은 장 대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을 나서며, 그는 장 대표의 조언을 복기했다.
‘대놓고 스폰 제안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야.’
이는 지금의 자신이 꼭 명심해야 할 조언이었다.
***
주차장으로 나가기 전, 한호성은 문해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형. 왜?
“해일아, 넌 당분간 숙소에서 지내는 거지?”
-응. 이사할 집 구할 때까진 그러려고.
“저……. 혹시 나도 같이 지내도 될까?”
-형, 그게 무슨 소리야!
문해일의 목소리 톤이 확 높아졌다.
-당연히 되지! 그럼 오늘부터 숙소로 돌아오는 거야?
“어? 으응.”
사실 언제부터 숙소로 돌아갈지는 미처 생각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오늘 돌아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아싸. 당분간 우리끼리만 지내게 되겠네? 신난다!
“그렇게 좋아?”
-응, 솔직히 우리 숙소가 다섯 명이 지내기엔 좀 좁긴 했잖아. 곰팡이 없고 물 안 새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싶긴 하지만……. 그래도 형이랑 둘이 지내기엔 딱 좋을 것 같아.
목소리에서 신난 기색이 느껴졌다. 마치 소풍 가기 하루 전날의 초등학생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문해일이 본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그간 숙소 생활 하느라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많은 듯싶었다.
-아! 형. 아예 우리 둘이 같이 사는 건 어때?
“어……. 한번 생각해 볼게. 숙소에서 다시 얘기하자.”
-그래.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 문해일이 ‘오늘은 고기 구워 먹어야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성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유난히 눈에 띄는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잡아끄는 게 딱 차 주인과 어울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한호성은 차에 타며 대답했다.
“얘기가 좀 길어졌어.”
“무슨 얘기 했는데?”
“그냥 이것저것…….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너랑 할 얘기 있어.”
“뭔데.”
한호성은 룸미러를 힐긋 보았다. 수갑을 차고 고개를 떨군 제논과, 우락부락한 덩치의 경호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겉보기만 슈퍼 카지 실상 호송차와 다를 바도 없었다.
“……지금 얘기하긴 좀 그렇고. 너희 집에 가서 얘기하자.”
“흠, 그래. 알았어.”
우영찬이 핸들을 돌렸다. 방향은 우성한의 자택이었다.
잠시 그곳에 들러 제논을 내려 준 후, 우영찬은 지체 없이 액셀을 밟았다. 한호성은 뒤를 흘긋거렸다. 경호원에게 붙들린 채 우성한의 자택에 들어가는 제논이 꼭, 감옥에 들어가는 죄수 같아 보였다. 엄연히 따지자면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 둘뿐인데.”
우영찬이 전방을 응시하며,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아직은 할 수 없는 말인가?”
“어…… 응. 집에서 얘기할게.”
“무슨 말을 하려고.”
우영찬이 목을 울려 웃었다. 그는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면 기분이 상할지도…….’
그러니까 우영찬이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땐 말할 수 없는 거였다.
한호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무심코 주먹 쥐었다 폈다. 이 옷은 우영찬에게 빌린 것이었다. 남의 옷을 함부로 구길 순 없었다.
‘내가 도움받은 게 정말 많긴 하구나.’
깨달음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크게는 제논의 대타 역할부터 작게는 생필품, 옷에 이르기까지. 돌이켜 보면 우영찬은 짝에게 구애하는 새처럼 굴었다. 그걸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영찬아.”
너, 대체 날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거절하는 마당에 차마 물을 수 없어, 한호성은 운을 떼고도 입을 다물었다.
“왜?”
“너 운전 잘한다.”
“그렇지?”
우영찬이 씩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차가 잘 깔린 도로를 흔들림 없이 질주했다.
***
집에 들어오자마자 우영찬이 물었다.
“한다는 얘기가 뭐야.”
“……영찬아. 지금까지 오갈 데 없는 나 너희 집에서 지내게 해 줘서 고마워.”
“그게 무슨 전래 동화 속 콩쥐 같은 말이냐. 며칠이나 여기서 지냈다고.”
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아차린 우영찬이 표정을 굳혔다. 제논이 아닌 우영찬 본래의 얼굴로 그러니 조금 겁이 났다. 하지만 한호성은 꿋꿋하게 말했다.
“나 이제 숙소로 돌아가려고.”
“안 돼.”
“왜?”
“기자들 쫓아와서 민원 들어왔다며.”
“이젠 괜찮아.”
“언제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집 앞까지 들이닥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전국, 아니 전 세계에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 그렇게 보안이 허술한 집에 살면 어떡하냐?”
“내가 언제 전 세계에 얼굴이 알려졌다고…….”
이 타이밍에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한호성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우영찬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절대 안 돼. 게다가 너, 숙소에 가면 혼자 지내야 하잖아. 혼자 있으면 더 울적해지지 않겠어?”
“아, 그거라면 괜찮아. 해일이랑 같이 지낼 거거든.”
“……문해일?”
우영찬의 눈빛에 숫제 번개가 스쳤다. 그는 강하게 반대했다.
“안 돼. 다른 놈도 아니고 문해일은……!”
“해일이가 왜? 걔 청소도 엄청 꼼꼼히 하는데.”
“그놈은 불순해!”
한호성은 짭조름한 눈빛으로 우영찬을 응시했다.
“미안한데, 너도 만만찮게 불순해.”
“내가? 내가 왜. 내가 언제 너 괴롭히거나 뭐 강요한 적 있었냐?”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가 너 좋아하는 게 불순한 거야?”
한호성은 말문이 막혔다. 우영찬의 고백을 거절하려던 거지, 그 마음 자체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었다. 한데 의도치 않게 우영찬에게 상처를 준 듯싶어 미안했다.
“영찬아, 미…….”
“난 지금도 키스하고 싶은 거 꾹 참고 있는데!”
“…….”
우영찬의 외침이 조심스러운 사과를 삼켰다. 그에 한호성은 우영찬에 대한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그래, 잘 가다 종종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니까 불순하게 느껴지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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