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참, 그랬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우영찬이 재학 중인 학교가 궁금했지만 너무나 개인적인 사항이었다. 그래서 기껏 운을 떼고도 우물쭈물하자, 우영찬이 눈치 빠르게 답했다.
“한국대.”
“아……! 그렇구나.”
“다들 내가 잔디 깔고 입학한 줄 알지만.”
우영찬이 비웃듯 말했다
“시대가 어느 땐데 잔디 깔고 입학하냐?”
“하하, 그러게.”
“건물 정도는 올려 줘야지.”
“…….”
“농담이야. 평범하게 원서 넣어서 합격했다.”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 우영찬이 얄미워, 한호성은 눈을 흘겼다.
“너 때문에 오늘 하루만 몇 번을 놀라나 모르겠어. 심장 철렁하게.”
“나 때문에 심장이 뛰었어? 그거 괜찮네.”
“어?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우영찬은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생생 퀴즈쇼’에서 멋지게 우승을 차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호성, 저녁은?”
“먹었어.”
“몇 시에.”
“다섯 시 반 즈음.”
“이르게 먹었네. 배고프지 않아?”
“아냐, 괜찮아.”
타고나길 식사량이 적은 한호성이었다. 한데도 우영찬은 재차 물었다.
“가볍게라도 먹는 편이 낫지 않겠어?”
“정말 괜찮아.”
“그럼 내가 야식 먹으면. 같이 안 먹어 줄 거야?”
“……그건 먹을게.”
우영찬이 한호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씻고 옷 갈아입고 올게. 기다리고 있어.”
어째 어린 동생을 챙겨 주는 듯한 말투였다. 아까는 형, 형 잘도 불러 댔으면서 말이다. 그 간극에 혀를 내두르며 한호성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게 없네.’
느지막이 일어나 내내 멍하게 보낸 까닭이었다. 내내 TV를 보긴 했는데, ‘생생 퀴즈쇼’를 제외하곤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흐리멍덩한 하루에 선명한 거라곤 우영찬과의 통화가 전부였다.
그래도 슬슬 머리가 맑아졌다. 남들은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에 정신이 돌아오다니 참 얄궂었다.
‘프위터 모니터링이나 할까.’
평소엔 자투리 시간마다 가볍게 하던 일인데, 지금은 용기가 필요했다. 모니터링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지마는 몹쓸 궁금증이 들었다.
‘잠깐이면 돼. 잠깐, 아주 잠깐만 보는 거야.’
한호성은 자신을 달래며 프위터에 들어갔다.
“어.”
그러자마자 실시간 프위터 순위에서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에서 트렌드 중’
제논 5,985 프윗
생생퀴즈 3,578 프윗
패기 1,324 프윗
.
.
.
“……무슨 일이지?”
예전 같았더라면 대중의 관심에 설렜을 법도 하지만, 이젠 자신 혹은 멤버들의 이름이 화제에 오르면 겁부터 났다. 한호성은 마음을 다잡으며 ‘제논’을 검색했다.
최쿵야 @oiyheagj
ㅋㅋㅋ식당에 틀어져 있길래 밥먹으면서 별생각없이 보다가 와 패기 지린다 싶었는데 실프까지 가있었던ㅋㅋㅋㅋㅋ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다 역시
기린 @kimm_giraffe
제논 쇼맨십 오진다ㄷㄷㄷ 근데 왜 그 쇼맨십을 하필 생생퀴즈쇼에서 발휘하는겅미?
나의작고검은아기고영 @jaenon_the_kitty
나 진짜 나름 오랫동안 덕질했다구 자부하는데 아직도 제논을 다 몰랐다는 게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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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작고검은아기고영 @jaenon_the_kitty
울 아기고양이 취미가 독서였구나? 은근히 박학다식했구나?? 패기 넘치는 성격이었구나??? 그걸 이제야 안 나의 미지근함에 신물이 난다T.T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싶은..!
구독하는 잡덕 @jappppaj
아무생각없이 생생퀴즈 보다가 시험범위 문제 나와서 비명지른 사람(손바닥 이모티콘) 근데 제논 패기도 그렇고 대단하다,, 그냥 제논이 나 대신 시험 봐도 될 것 가튼디?
불합리 @firerationality
근데 저 패기 넘치는 친구 리더랑 친한가?
˪오리둥절 @52dungjeol
패기넘치는 친구=제논 리더=한호성이요ㅋㅋㅋ 그러게요 조금 관심 있는 그룹이었는데 둘이 이정도로 친한줄은 저도 오늘 첨알았네요
˪불합리 @firerationality
형형 하는 게 귀엽더라고요ㅋㅋㅋㅋㅋ
˪오리둥절 @52dungjeol
맞아요~~ 제논이 3살 연하거든요 평소엔 호성이 워낙 동안이라 티가 안 나는데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동생미가 있어요ㅋㅋㅋ
그새 우영찬이 ‘생생 퀴즈쇼’에서 저지른 간 큰 짓이 소문난 모양이었다. 방송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실시간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이 떠들어 댔지만, 특별히 나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제논’의 상식과 패기가 대단하다는 이야기 중이고, 하이파이브 멤버끼리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말도 종종 보였다.
‘그래서 나한테 전화한 거구나……!’
한호성은 비로소 깨달았다. 우영찬이 단순한 패기에서가 아니라, 다분히 전략적인 의도에서 자신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을.
미처 걷히지 않은 머릿속 안개가 완전히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돌이켜 보니, 자신이 이걸 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와 친해 보이려고 한 거였어.’
우영찬의 의도는 완벽히 먹혀들었다. 소문이 퍼질수록 과장이 붙어, 어느덧 제논과 한호성이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슈비두바 @tbqlenqk13
전화찬스를 전화데이트로 착각하는 사람이 어딨어요ㅋㅋ (여깄음)
ENVY @IenvyYou_1
MC의 의도: 전화 찬스 쓰세요
제논이 이해한 것: 형아랑 전화할 찬스~♡
캐솔린 @zothffls
(하이파이브 이모티콘) 캠핑 가려나 보다!!! 상금 받아서 멤버들이랑 바비큐 먹겠다고 말하는 제논 너무 귀여워ㅠ 갔다 와서 꼭 사진 올려줬으면ㅎㅎㅎ
카레베어 @yello_curry_bear
이녀석들 호시탐탐 전화할 기회만 노렸나본데ㅋㅋㅋㅋㅋ
맥아시럽 @malt_syrup
핞젡 뽕 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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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시럽 @malt_syrup
그런 의미로 핞젡 폰ㅅ하는거 보고싶다 타래로 잇겠음
우정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아예 제논과 자신의 연애를 상상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한호성은 그런 반응도 기꺼웠다. 그만큼 제논과 자신이 친밀해 보인다는 게 아닌가. 이로써 컨트롤 프릭 의혹은 더욱 힘을 잃을 터였다.
“…….”
분에 넘치게 좋은 선물을 받으면 기쁜 걸 넘어 어안이 벙벙하듯, 지금이 그런 기분이었다. 멍하니 스크롤을 내리던 그때. 등 뒤에서 부름이 들려왔다.
“한호성.”
“으, 응?”
“뭐 하고 있었길래 내가 오는 줄도 모르냐.”
“그냥 프위터 하고 있었어.”
“프위터? 너 또 이상한 글 보고 있었던 거 아니지.”
대번에 얼굴을 굳힌 우영찬이 한호성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어차피 거리낄 게 없었기에, 한호성은 순순히 핸드폰을 내어 줬다.
“내가 언제 이상한 글을 봤다고 그래.”
“‘핞은 고요한 숙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젡의 빈자리가 컸다. 그를 그리워하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 반가운 목소리가 외쳤다. 형. 겨우 그것뿐이었음에도 젡에게 길든 핞의 중심은 뜨겁게’…….”
“뭐, 뭘 읽는 거야!”
“이게 이상한 글이 아니야?”
우영찬이 핸드폰 화면을 보이며 말했다. 과연, 우영찬이 방금 읽은 내용이 그대로 쓰여 있었다. 심지어 뒷부분은 수위가 훨씬 높았다.
“우연히 발견한 거야.”
“이런 취향이 있는지 몰랐네.”
우영찬이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농담이라는 건 알아도 민망해, 한호성은 토라진 듯 투덜거렸다.
“아니라니까…….”
“걱정 마, 네가 어떤 취향이든 난 다 이해하니까. 됐으니까 야식 먹자. 혹시 와인 좋아해?”
“와인? 싫어하지는 않는데…… 사실 잘은 몰라, 마셔 본 적이 얼마 없어서.”
“그럼 일단 한 모금만 마셔 봐. 입맛에 잘 맞으면 더 마시고, 안 맞으면 억지로 마실 필요 없고.”
우영찬이 와인 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한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
노란빛을 띤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려 잔을 채웠다. 그 옆엔 치즈가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야식이라고 하기에 밥 내지는 빵 종류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 가벼운 느낌이었다.
“건배할까.”
그의 제안에, 한호성은 잔을 들며 말했다.
“우영찬의 우승을 축하하며.”
우영찬은 슬며시 웃으며 한호성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짠, 맑은 소리가 울렸다.
호성은 와인 잔을 기울였다. 상큼한 향이 흥취를 돋웠다. 과연, 시원한 풍미가 가득한 맛이었다. 생소하지만 맛있어서,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도 얼마든지 즐겁게 마실 수 있었다.
“아까 응원할 때 ‘영차영차’라고 한 거. 일부러였지? 내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그럴 순 없으니까.”
“아…… 으응. 알아차렸구나.”
“너 얼굴 살짝 빨개졌다. 벌써 취한 건 아닐 테고, 설마 부끄럼 타는 거야?”
“아니, 그게.”
딱 들켰다. ‘영차영차’라고 부른 의도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한호성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 웬만한 호텔 레스토랑 못지않은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본 풍경이 오늘따라 찬란해 보였다.
“특정한 사람한테만 사인을 보낸 셈이라 좀 그렇잖아.”
“그럼 안 되는 건가?”
“아무래도……. 너 외에 다른 시청자를 따돌린 거니까.”
“너한테 따지려는 건 아니지만, 그건 과도한 배려인 것 같은데. 어차피 사람들은 네가 무슨 생각으로 ‘영차영차’라고 했는지 영원히 모를 테고.”
“그것도 그렇긴 해.”
한호성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잘 세공한 흑요석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까 영찬아, 오늘은 왜 몸을 바꾼 거야? 혹시 내일 어디 가?”
“그런 건 아니고.”
우영찬이 잔을 빙그르 돌렸다. 왜인지 말을 아끼는 기색이라, 한호성은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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