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스피드 퀴즈가 끝났다. 결과는 11점 만점. 덕분에 탈락자 54명이 모두 부활하게 되었다.
한껏 신난 탈락자들이 환호했다. MC도 덩달아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파죽지세의 기세! 정말 대단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두 분껜 전화 찬스가 주어지고요. 남은 퀴즈에서도 활약하시길 기대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겸손한 설이태와 달리, 우영찬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기대해 주십시오.’
어쩌면 저렇게 자신감이 넘칠까. 한호성은 무기력한 중에도 감탄했다.
그보다 더 대단한 건, 우영찬의 태도가 허세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라면 정말 남은 퀴즈도 모조리 맞힐 것만 같았다.
한호성의 기대는 현실이 되었다. 점점 어려워지는 문제에 탈락자가 속출했지만, 우영찬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그는 최후의 10인이 되더니 최후의 5인이 되고, 마침내 최후의 1인이 되었다.
‘대단합니다! 벌써 46번째 문제를 앞두고 있는데요. 오늘 오랜만에 새로운 우승자가 탄생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제논 씨. 우승할 자신 있습니까?’
‘예.’
‘저도 제논 씨의 우승을 응원합니다. 아직 전화 찬스가 남아 있다는 점 잊지 마시고요. 그럼 46번째 문제 드리겠습니다.’
MC가 문제를 읊었다. 우영찬은 당연하다는 듯이 정답을 외쳤다. 제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의 즉답이었다.
한호성은 서서히 ‘생생 퀴즈쇼’에 빠져들었다. 우영찬이 거침없이 문제를 해치우는 걸 지켜보는 쾌감이 있었다.
‘선물 시장의 급등락이 현물 시장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 이것이 발동됩니다. 이것을 무어라 할까요? 1번 사이드카. 2번 변동성 완화 장치. 3번 서킷 브레이커. 4번 숏 스퀴즈. ……예, 제논 씨. 1번을 누르셨네요. 과연 정답은?’
딩동-. 알림음과 동시에 초록색 조명이 우영찬을 비췄다.
‘정답입니다!’
오오, 탈락자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47번째 정답이었다. 이 정도면 운 좋게 찍어서 맞춘 게 아니라 실력이라는 뜻이다.
제논이 똑똑한 이미지는 아닌 만큼 더더욱 놀라웠다. MC도 비슷한 생각인지, 우영찬에게 질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답을 누르셨는데요. 왜 1번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셨죠? 혹시 찍으신 건가요?’
‘앞서 질문하신 바대로, 사이드카는 선물 시장의 급등락이 현물 시장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 발휘되는 것입니다. 증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요소죠. 그런 면에선 3번 서킷 브레이커도 개념이 비슷하긴 합니다. 하지만 서킷 브레이커는 주가 지수의 상하 변동폭이 10%를 넘는 경우, 거래를 중단시키는 제도를 뜻하니 정답이 아닙니다.’
‘문제를 완벽히 이해하고 푼 것이었군요. 다양한 분야에 상식을 갖추신 듯해 놀랍습니다. 시청자 여러분을 위해, 이런 상식을 어떻게 쌓으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평소 독서를 즐기시나 봅니다. 하지만 책을 읽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건 어려운 일일 텐데요.’
‘책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저는 그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합니다.’
우영찬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아는 문제만 나오는군요.’
정작 우영찬은 여유로웠으나, 지켜보는 한호성이 다 조마조마했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도 좋지만 저러다 당장 다음 문제를 틀리면 무슨 망신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염려가 무색하게, 우영찬은 다음번 문제도 가볍게 맞혔다. 48, 49번째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50번 문제가 남았다. 딱 한 문제만 더 맞히면 우영찬은 오늘의 우승자가 된다. 상금 삼백만 원을 받는 건 덤이었다.
한호성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생생 퀴즈쇼’를 시청했다. 우영찬의 실력도 대단하거니와, 설령 모르는 문제가 나오더라도 아직 전화 찬스가 남아 있으니 괜찮았다.
‘대망의 50번 문제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입니다. 준비되셨지요?’
‘예.’
‘온도와 압력이 일정할 시 모든 기체는 같은 부피 속에 동일한 수의 분자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과학자가 발표한 법칙으로, 당시엔 가설로 취급되었으나 이후 증명이 이루어져 이 과학자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는데요. 이 법칙을 무어라 할까요?’
똑딱똑딱똑딱,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우영찬은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의 입매가 묘한 선을 그렸다.
‘제논 씨에겐 아직 전화 찬스가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쓰겠습니다, 전화 찬스.’
한호성은 양손을 꽉 쥐었다. 설마 마지막 문제에서 막힐 줄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 이를테면 우영찬의 친형인 우성한과 머리를 모으면 답을 알아낼 수 있을 터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 예정이신가요?’
우영찬은 말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 순간, 드넓은 거실에 ‘Night Swimming’이 울려 퍼졌다.
‘설마.’
식겁한 한호성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 팔걸이에 올려 둔 핸드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아쉽게도 오늘 함께하지 못한, 우리 하이파이브의 리더. 호성 형에게 전화했습니다.’
우영찬이 뻔뻔하게 지껄였다. 한호성은 TV 속 우영찬 한 번, 핸드폰을 한 번 돌아봤다. 그러는 중에도 똑딱똑딱똑딱, 시간이 계속 흐르는 중이다.
“어, 어떡하지.”
전화를 받기 부담스러웠다. 문제의 답을 모르는 데다, 간접적인 형식으로라도 대중 앞에 나서기엔 시기상조 같아서였다.
하지만 전화 찬스는 딱 한 번이었다. 통화를 거절하면 아쉬운 기회가 영영 날아갈 터다.
결국, 한호성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뭐 하고 있었어? 난 지금 ‘생생 퀴즈쇼’ 촬영 중인데.
“알고 있어. 방송 보는 중이거든.”
호성은 그리 대답하자마자 후회했다. 행여나 제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처럼 비칠까 싶어서였다.
-아, 그렇구나! 그럼 형, 나 지금 최후의 1인인 거 알겠네?
“물론이지.”
-꼭 우승해서 상금 타갈게. 우리 같이 고기 파티 하자. 아예 캠핑 가서 바비큐 구워 먹는 것도 재밌겠다.
반면 우영찬은 과하게 발랄했다. 대체 그가 언제부터 자신을 ‘형’이라고 불렀던가. 한호성으로선 그의 변화를 따라잡기 버거웠다.
“캠핑 좋지. 저, 그런데 제논. 나 저 문제 정답 모르는데…….”
-그럼 형, 나 응원해 줘. 호성 형 응원 들으면 답이 생각날 것 같아.
“……화이팅!”
-에이. 그게 다야?
“우, 우리 제논 잘한다. 최고야. 아자아자, 영차영차, 화이팅!”
한호성은 애써 힘찬 목소리를 꾸며 냈다. 이곳엔 카메라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표정을 관리할 여력까지는 도무지 없었으니까.
우영찬이 눈을 접으며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크게 잡혔다. 마치 첫 데이트 약속을 잡은 소년처럼 기쁨에 겨운 얼굴이었다.
-고마워, 호성 형! 덕분에 에너지 충전된다. 더 얘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응, 어서 들어가.”
전화가 끊어졌다. 우영찬은 상쾌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정답은 아보가드로 법칙입니다.’
한호성과 전화할 때와 달리 차분한 톤이었다. 그 변화에 놀랄 새도 없이, 팡파르 효과음이 울렸다.
‘정답! 아보가드로 법칙. 역시 제논 씨로군요.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이기셨어요. 우승 축하합니다!’
스튜디오에 종이 꽃가루가 하늘하늘 흩날렸다. 그제야 한호성은 한숨을 돌렸다. 어째 퀴즈 쇼에서 활약한 건 우영찬인데, 지치긴 자신이 더한 것 같았다. 막상 그는 대관식 치르는 황제처럼 손까지 흔들며 우승을 만끽하는 중인데 말이다.
‘여태껏 수많은 분이 전화 찬스를 쓰셨지만, 정답을 알면서도 전화 찬스를 쓰신 분은 제논 씨가 처음입니다. 처음부터 답을 알고 계셨던 거지요?’
‘아뇨. 호성 형 응원 덕분에 생각난 건데요.’
우영찬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MC가 ‘3,000,000원’이라 쓰인 커다란 패널을 가져다 우영찬에게 안겨 주었다. 우영찬은 패널을 보란 듯이 흔들며 외쳤다.
‘호성 혀엉! 나 우승했어. 약속대로 같이 바비큐 파티 하러 캠핑 가기야.’
그 옆에서 이주진과 설이태, 문해일이 환호했다. 덕분에 상당히 화목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팀원끼리 사이가 끈끈한 줄 알 터였다.
‘아니, 이 정도면 실제로 사이가 끈끈한 건가?’
우영찬과 다른 멤버들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과는 꽤 끈끈한 듯싶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괜히 열이 올라, 한호성은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
자정이 가까운 시각, 우영찬은 개선장군처럼 귀가했다. 자기 몸인 상태라 더 당당해 보이는 그였다. 아무래도 우성한의 자택에 들렀다 온 모양이었다.
“봤지? 나 이긴 거.”
“어, 다 봤어. 너 재간 부리는 거. 따지려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대체 왜 그런 거야? 전화 찬스 말이야.”
“재밌잖아. 이편이 더 극적이고.”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극적으로 해서 뭐 하려고…….”
“시청률도 잘 나왔다던데.”
우영찬 덕분에 재밌고 심장 쫄깃했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게 과감했던 게 아닌가 싶었지만, 한호성은 잔소리를 꾹 눌러 두었다.
“아무튼 잘했어. 축하해. 너 정말 잘 맞히더라. 사이드카던가? 그것도 또박또박 잘 설명하고.”
“그 정도야 당연하지. 이래 봐도 경영학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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