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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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대표는 한호성을 만나자마자 위로를 쏟아부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그래도 잘 해결돼서 다행이다, 이번 일은 액땜이 분명하니 앞으로는 더 잘될 것이다 등등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붕 뜬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장 대표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뗐다.
“당분간 쉬는 게 좋지 않겠냐, 호성아?”
“…….”
“그동안 너무 달려만 왔잖아. 이참에 마음 좀 내려놓고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한호성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예정된 스케줄 중 상당수가 취소되었음을.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표님. 혹시 저, 스케줄 많이 잘렸나요?”
“아아니, 꼭 그래서가 아니라. 큼, 청춘특급 행사랑 오렌지 라디오 게스트 건은 취소되긴 했어. 그런데 스케줄 잡힌 데까지만 하고, 새로 제안 들어오는 건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안 돼요.”
한호성은 즉답했다.
자신이 언제부터 섭외 제안을 거절했던가. 일단 제안이 들어오면, 가능한 한에선 다 받아야 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너도 좀 쉬어야지. 이젠 일 가려 받을 짬도 찼고. 또…….”
장 대표가 한호성의 눈치를 슬쩍 보며 덧붙였다.
“루머야 잘 해명했지만 당분간 조심하는 편이 낫지 싶어서.”
말이 조심이지, 근신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이에 상심했음에도 한호성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예전 같았더라면 끝끝내 고집부렸을 터다. 불러 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고,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활동해야 하지 않겠냐고 의지를 불태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맥이 탁 풀리는 것이,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호성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자신이 자신답지 않게 구는 게 어떠한 불행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논리적인 근거는 없지만 괜히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럼 스케줄 정리한 다음에 알려 줄게. 이번 기회에 푹 쉬고, 그 뭐시기냐.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힐링도 좀 하고 그러자. 그리고 제논한테 출연 제의가 들어왔는데…….”
장 대표가 우영찬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지금 누구냐?”
“우영찬입니다만.”
“아, 역시. 눈빛이 왠지 그렇더라니. 아무튼 어떡할 거냐?”
“어떤 촬영입니까?”
“‘생생 퀴즈쇼.’ 제논 단독 출연은 아니고, 문해일이랑 설이태, 이주진도 출연 제의받았다.”
“아아.”
우영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TV를 거의 시청하지 않는 그지만, ‘생생 퀴즈쇼’는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장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일요일 저녁에 ‘생생 퀴즈쇼’를 시청하지 않으면 한 주가 마무리되지 않은 것 같다는 사람도 많을 정도였다.
“하죠.”
“어? 정말?”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어른이 놀이터’ 때처럼 체력적으로 힘들지도 않고, 망가질 필요도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워낙 시청률이 좋은 프로그램이니만큼 하이파이브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다.
“하지만 제논은…….”
“당분간은 내가 제논입니다.”
“그놈 어디 있는지만이라도 알려 주라, 좀.”
그에 한호성이 대신 대답했다.
“영찬이 형네 집에 있어요.”
“……우영찬이 형이라면, 강문 전자 우성한 전무?”
장 대표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는 무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랩을 하듯 빠르게 중얼거렸다.
“나, 난 아무것도 모른다. 제논은 제논이다. 내 눈앞에 있는 이놈은 제논이고, 고로 제논으로서 활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예, 현명하시네요.”
우영찬이 빙글빙글 웃었다. 장 대표는 전말을 알면서도 현실 도피를 선택했나 보다. 정확히는, 진실을 살짝 덮어둠으로써 꺼림칙함을 떨치려는 거였다. 약삭빠르지만 괜찮은 처세였다.
“후. 어쨌거나 ‘생생 퀴즈쇼’에 출연하겠다는 거지?”
“예.”
“이번 주 일요일 촬영이다. 너도 알겠지만 생방송이고. 며칠 안 남았지만, 예상 문제 뽑아 줄 테니까 남는 시간마다 달달 외워라.”
“그러죠. 할 이야기는 이게 전부입니까?”
“어어, 더 전달할 사항은 없긴 한데…….”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자, 한호성.”
왠지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떠는 장 대표를 뒤로하고, 우영찬은 한호성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장 대표는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우영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으나, 그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우영찬은 옆자리의 한호성을 살폈다.
한호성은 화초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언뜻 차분해 보이지만 사실 힘이 없는 거였다. 스캔들도 잘 해결되었는데 그는 컨디션이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점점 풀이 죽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힘이 없어, 한호성.”
“그러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한호성이 시무룩이 대답했다. 우영찬은 그를 끌어안고 마구 토닥이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내가 볼 땐 너, 이번 스캔들로 오래 고민해서 그래.”
“내가? 사건 터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일주일이 긴 시간은 아니잖아.”
“한 고민에만 골몰하기엔 긴 시간이지. 딴짓이라도 해서 생각을 돌리는 편이 낫지 않겠냐.”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한호성이 시선을 살짝 떨군 채 중얼거렸다.
“그런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취미 활동은 어때.”
“내 취미…… 음, 노래 부르기?”
“노래 부르는 게 나쁜 취미는 아니지만, 네 경우엔 오롯한 취미라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은데. 다른 건 없어?”
“……요리?”
억지로 짜낸 대답 같았다. 실제로 한호성이 요리를 제법 잘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문해일과 함께 숙소 내 요리를 도맡는 까닭이지, 요리 자체가 즐거워서 하는 건 아니지 않나.
“흠.”
무얼 해야 한호성의 기분이 풀릴까. 고민하던 그때, 우영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 왔어?”
“어, 형이다. 잠깐 전화 좀 받을게.”
“응.”
우영찬은 전화를 받자마자 퉁명스러운 말투로 돌변했다.
“왜. 혹시 김제국이 난동이라도 부렸나?”
-아니.
“그럼.”
-가족 모임은 어떻게 할 거냐.
우성한의 물음에, 우영찬은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당장 내일이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의 생신이었다. 두 분께선 운명처럼 생신이 같아, 매해 생신마다 성대한 잔치를 벌이곤 하셨다. 그러던 게 언젠가부터 전통으로 굳어져, 반드시 참석해야만 하는 가족 모임이 되었다.
“……아, 맞다.”
-잊은 건 아니겠지.
“기억하고는 있었어. 그게 내일인 줄 몰랐을 뿐이지.”
우영찬의 뻔뻔한 대꾸에도, 우성한은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올해는 간소하게 치르신다더군. 참석할 건가.
“어, 그래야지.”
예의 스캔들 때문에 ‘제논’도 스케줄이 조정된 바였다. 덕분에 이번 주 일요일까지는 여유로웠다. 가족 모임에 얼굴을 비칠 시간쯤은 있었다.
“내일 오후에 내 몸으로 돌아갈게.”
-그래.
통화는 그로써 끝이었다. 우영찬은 핸드폰을 도로 내렸다.
“저, 영찬아. 내일 어디 가는 거야?”
본의 아니게 통화 내용을 엿들은 한호성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우영찬은 흔쾌히 답해 주었다.
“친가 댁.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이셔서. 두 분이 생신이 같으시거든.”
“그럼 정말 중요한 날이네.”
“응. 우리 집에선 추석보다 중요한 날이야. 안 그래도 귀국한 후 본가에 한 번도 안 갔으니까, 이번 기회에 부모님도 뵈려고.”
“그렇구나. 잘 생각했어.”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차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엔진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아, 쓸쓸하리만치 고요했다.
우영찬은 한호성을 유심히, 그러나 시선이 느껴지진 않을 정도로 은근히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침울해 보였다.
저런 상태의 한호성을 홀로 두고 가자니 영 내키지 않았다. 물론 그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아니며, 우영찬 자신보다 세 살 많은 어른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금방 돌아올 거야. 내일 오후에 내 몸으로 돌아가고, 모레 오전에 김제국 몸으로 바꾸면 되니까.”
“으응.”
한호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우영찬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호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에 닿은 후에야 이성이 돌아왔다. 자신이 웬 무례를 저질렀나 싶었지만, 한호성은 우영찬의 손을 떨쳐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
얌전히 자신의 손길을 받는 한호성을 보려니 기분이 괜히 이상했다. 우영찬은 한호성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손가락을 간질여서인지, 가슴까지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
‘올해는 간소하게 한다더니.’
우영찬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새벽 두 시 이십 분, 꽤 늦은 시각이었다. 성대한 잔치가 밤늦게서야 끝난 까닭이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우영찬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한호성은 이미 잠들었을 테니 자신도 씻고 잘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집엔 인기척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새어 나온 희미한 빛이 복도에 길게 늘어진 것이다. 우영찬은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불 켜진 다이닝 룸에, 한호성이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태블릿 PC로 무언가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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