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딩동-.
집을 반쯤 돌아본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집주인인 우영찬이 현관문을 여는 동안, 한호성은 벽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남자 둘이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내 식당에서 주문했다더니 그쪽 직원인 듯싶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한호성은 쭈뼛쭈뼛 걸음을 옮겼다.
“뭐 해? 어서 앉아.”
한호성은 우영찬의 재촉에 떠밀려 식탁 앞에 앉았다. 우영찬이 마주 앉으며 말했다.
“먹자.”
“…….”
호성은 아연한 기분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말한 백반은 밥과 국에 반찬 한두 가지였다. 한데 이건 임금님의 수라상을 통째로 옮겨 온 것만 같았다.
“이건 12첩 반상보다 더한 것 같은데…….”
“입맛에 안 맞을 것 같아?”
“아, 아니야. 엄청 맛있어 보여.”
“그럼 다행이고. 많이 먹어.”
“응, 잘 먹을게.”
한호성은 젓가락을 들었다.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아 무엇부터 집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일단 가까이에 놓인 콩나물무침부터 먹고자 젓가락질을 하는데, 우영찬이 뚝배기를 슥 밀어 주었다.
“갈비 먹어. 힘이 없을 땐 든든하게 먹어야지.”
“……고마워.”
호성은 갈빗살을 집어 밥그릇으로 가져갔다. 식욕이 없다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 갈비도 쌀밥도 맛있었다. 한호성은 때아닌 미식을 즐기며 생각했다.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아.’
자고 일어났더니 낯선 장소라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쉬고 있어. 난 잠깐 외출할게.’라고 우영찬이 보내 둔 메시지 덕분에 그의 집임을 깨달았지만, 미지의 세상에 떨어진 듯한 기분은 여전했다.
영화에 나올 법한 멋진 집. 커다란 창밖으로 펼쳐진 장관과, 한순간에 우호적으로 바뀐 대중의 반응.
심지어 우영찬마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신기할 정도로 다정하단 말이지…….’
물론 우영찬은 원래도 다정한 편이었다. 말을 세게 하는 경향이 있지만, 본디 성품은 행동에 드러나는 법 아니던가. 그가 하이파이브를 위해 한 행동을 보면, 그 누구도 우영찬더러 몰인정하다고 할 수 없을 터였다.
한데 오늘은 그 이상이었다. 단순히 호의를 베푸는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
“왜?”
시선을 느낀 우영찬이 물었다. 한호성은 황급히 고개를 떨궜다.
“너무 맛있어서.”
“그러냐. 혹시 부족하면 얘기하고.”
“아, 아니야.”
호성은 숟가락질을 하며 생각했다. 우영찬이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이유는, 역시…….
‘……팬이라서인가?’
그것밖에 답이 없을 듯싶었다. 사실 처음엔 자신을 위로하려고 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팬이 아니고서는 이 모든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구나…….’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들었다. 따뜻하고 맛있는 것이 배 속을 채우고 있었다. 한호성은 마지막 한 숟갈까지 꼭꼭 씹어 삼켰다.
***
식사를 마친 후, 한호성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번엔 부재중 연락을 받기 위함이었다.
“애들한테 전화가 와 있어. 그것도 서너 통씩.”
“누구. 하이파이브?”
“응. 엄청 걱정 중이겠다. 내가 자느라 연락을 못 해서…….”
한호성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마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형!
“응, 주진아.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아냐 아냐 아냐. 잘 지내고 있지?
“그럼. 넌 좀 어때?”
-나 지금 집이야.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 봐서 좋네. 앗, 잠깐만. ……아, 엄마. 뭘 바꿔 달라 그래. 응, 호성 형 맞긴 하는데. 아니, 형도 잘 지내고 있다잖아.
멀찍이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미안.
“아니야. 어머니께서 곁에 계시나 봐?”
-응.
한호성은 인정 많으신 이주진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자신을 얼마나 잘 챙겨 주셨는지 모른다.
“어머니께 내 안부 전해 드려.”
-그럴게. 참, 우리 스케줄은 웬만해선 그대로 갈 것 같더라. 이미 취소해 버린 거 외엔 진행할 예정이래.
“다행이다. 나도 확인해 볼게.”
-응! 또 연락하고.
통화가 끝났다. 한호성은 곧바로 설이태에게 전화했다.
-어, 형. 입장문 새로 올린 거 봤어?
“응. 반응 좋아서 너무 다행이야.”
-그러게. 누구누구가 그렇게 난리 친 보람이 없지 않아서…….
“어? 방금 뭐라고 했어?”
설이태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져서 잘 듣지 못했다. 한호성이 되묻자, 그의 목소리가 도로 커졌다.
-아무것도 아냐. 사실 형이랑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일단 나중에 하자. 나 지금 본가 들어가는 중이거든.
“그래, 그러자. 잘 지내다 와.”
-응. 형도.
전화에 집중한 터라, 한호성은 옆자리의 남자가 무진 불만스러운 표정이라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멤버들과 통화할 생각뿐이었다.
“해일아.”
-형! 왜 전화도 안 받고 그래. 걱정되게.
“미안. 잠깐 자느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우영찬이 한호성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야. 너네 형 자느라 못 받은 거거든.”
-뭐야. 너 제논, 아니, 우영찬이냐? 네가 왜 거깄어!
“내 집에 내가 있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네 집? 잠깐만, 그럼 호성 형도 네 집에 있는 거야? 형 좀 바꿔 봐. 형, 호성 형!
형, 형 부르는 소리가 징그럽기도 했다. 우영찬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한호성 잘 있고, 늦었으니까 나중에 연락해라. 끊는다.”
-야! 연락은 내가 아니라 형이 한 거고, 나는……!
우영찬은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넘겨주자, 한호성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영찬아, 왜 그래? 해일이가 걱정할 텐데…….”
“단톡방 있잖아. 알아서 소식 주고받겠지.”
“그래도……. 참, 대표님께도 연락드려야 하는데.”
“연락할 사람이 아직도 남았냐?”
“응. 친구도 있고.”
인간관계가 좁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넓은 한호성이었다. 우영찬은 애써 마땅찮음을 감추며 물었다.
“친구 누구.”
“말해도 넌 모를걸.”
“노원?”
“어떻게 알았어? ……아, 내가 친구가 얼마 없어서 그런가?”
“그냥 찍었어. 그런데 한호성, 그냥 다음에 전화하는 게 낫지 않겠냐. 지금은 시간도 늦었고.”
우영찬은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코 유치한 질투 따위가 아닌, 그럴듯한 조언으로 느껴지도록.
“그것도 그러네.”
다행히 우영찬의 의도는 먹혀들었다. 그가 한호성을 독차지했음에 내심 뿌듯해할 때였다.
“그런데 영찬아. 제논은 어떻게 됐어?”
한호성이 우영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우영찬으로선 달갑지 않은 화제였다. 그러나 어차피 한 번은 이야기해야 할 문제였다.
“내 몸에 있다. 형 집에 가둬 뒀고.”
“가, 가뒀다고?”
“어.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잖아.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것도 그렇지만…… 그래도 제논의 인권이…….”
한호성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선이 어지러이 흔들리는 게, 그만큼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이내 한호성이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제논을 만나 봐야겠어.”
“왜.”
“대화하고 싶어서.”
“한호성. 너, 지금까지 김제국한테 대화 시도해서 잘 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냐?”
“……아니.”
호성이 잦아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궁금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말이야. 왜 네 몸을 빼앗았는지, 왜 돌아온 후 우리랑 말 한마디도 안 했는지.”
“날 질투해서 내 몸을 뺏은 거겠지. 말을 안 한 건 현실 부정 때문이고. 이미 아는 사실 아니냐.”
“추측일 뿐이니까. 난 제논의 진짜 생각이 알고 싶어.”
“……흠.”
우영찬은 김제국 자체엔 궁금한 게 없었다. 그러나 예의 주술에 부작용은 없는지, 놈이 다른 주술도 할 수 있는지 따위는 알아봐야 할 성싶었다.
“알았다. 그럼 내일 점심 먹은 다음에 갈까? 그놈 얼굴 보면 입맛 떨어질 테니까.”
“따지고 보면 네 얼굴 아니야……? 아무튼 난 아무 때나 좋아. 어차피 내일모레까진 스케줄도 없고.”
“좋아.”
우영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호성은 언제가 됐든 김제국을 만나려 들 테니, 이번 기회에 자신이 동행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
그날 밤, 한호성은 우영찬과 같은 침대에 누웠다.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는데도 우영찬은 막무가내였다. 숙소에서도 같은 방을 썼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는 말에, 한호성은 설득당하고 말았다.
낯설지만 편안한 침대에서 푹 자고 일어나니 오전 열한 시였다. 퍼뜩 옆을 돌아보자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한호성은 허둥거리며 침실을 나섰다.
“잘 잤어?”
우영찬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마주 인사하려다 말고, 호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아, 미안. 스타일이 귀여워서.”
우영찬은 편안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검은색 티셔츠와, 짙은 회색 바지 자체론 이상할 게 없었다. 다만 티셔츠는 줄줄 흘러내려 어깨선이 팔뚝에 가 있고, 바짓단을 둘둘 걷어 올린 게 문제였다.
“어쩔 수 없어. 이 몸은 작고 말라빠졌잖아.”
“제논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하긴, 너 진짜 크더라. 모델 해도 되겠던데. 아, 모델 하기엔 지나치게 근육질인가?”
“또 엔터사 사장 같은 소리를 하네. 일단 아침, 아니 점심부터 먹자. 순두부찌개 좋아하지?”
“응. 어떻게 알았어?”
“두 달 넘게 같이 살았는데 어떻게 모르겠냐. 차려 놨으니까 먹자.”
한호성은 우영찬을 따라 식탁 앞에 앉았다. 과연 순두부찌개를 중심으로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우영찬이 말하길, 조금 전에 일하시는 분이 다녀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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