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휴.”
외가 모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외가 친척 모두가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초중고, 대학교라는 장소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건 똑같았다.
직업뿐만 아니라 성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실하며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한호성은 외가 모임이 불편했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 그리고 몇 년째 가망 없는 일에만 매달리는 자신. 그 차이를 느낄 때마다 자괴감이 밀려든 까닭이었다.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한호성을 한심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그래도 올해 들어선 자신을 보는 눈빛이 상당히 달라졌다. 한호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팔순을 맞이하신 할머니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음이 기뻤다.
‘할머니께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여깄었어?”
방에 들어온 이는 한혜성이었다. 한호성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동생에게 어색하게 물었다.
“혹시 나 찾았어?”
“아니. 그냥 쉬려고 왔는데 형이 있길래.”
“아…… 그렇구나. 그, 요즘은 좀 어때. 잘 지내고 있지?”
“어. 형도 잘 지내는 것 같더라.”
한호성이 외가의 이단아라면, 한혜성은 외가 친척 중에서도 모범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그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 결과 한혜성은 스물셋이란 나이에 벌써 박사 신분이었다.
“요즘도 취미가 공부야?”
“취미는 무슨.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지. 그러는 형은…….”
한혜성이 호성을 흘긋 곁눈질하며 말했다.
“요즘도 아이돌 하는지는 안 물어봐도 알 것 같고. 어쨌거나 요즘은 이상한 소문 따윈 안 나서 다행이다.”
“…….”
“앞으로도 잘되길 바랄게.”
그 말을 끝으로 한혜성이 방을 나섰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한호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혜성의 말은 덕담이라기보다 은근한 경고였다. 또 스캔들을 일으켜 자신까지 휘말리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퍽 매몰찬 태도지만 한호성은 동생을 이해했다. 과거 자신이 전국민적 조롱거리가 되었을 때, 한혜성까지 학교 내에서 따돌림당한 까닭이었다.
“걱정 마. 이젠 그럴 일 없을 테니까.”
한호성은 듣는 이가 없음에도 중얼거렸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무심코 핸드폰을 꺼낸 한호성은 발신인 명을 보고 조금 놀랐다.
‘우성한 씨’
우영찬의 형이 웬일로 자신에게 전화했을까. 그것도 이 늦은 시각에 말이다. 궁금해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호성 씨. 김제국이 돌아왔습니다.
***
한호성은 할머니와 함께 식사하자마자 외갓집을 나섰다.
실은 간밤, 우성한에게 연락받자마자 제논을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거니와 할머니께 제대로 인사드리기 전이라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우성한의 말에 따르면 제논이 자신을 만날 준비가 안 된 듯싶었다.
‘본래대로 돌아오자마자 눈물을 흘리더군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건 여전합니다. 한호성 씨와의 통화를 권유했으나 그것조차 무시했습니다.’
우성한의 말을 떠올린 한호성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논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리라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그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싶었다.
‘어쨌든…… 일단은 제논을 만나야겠지.’
한호성은 큰길가에 서서 장 대표를 기다렸다. 미리 연락해 둔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차 한 대가 나타났다. 한호성은 조수석에 타며 인사했다.
“대표님, 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부르니까 오긴 했다만 대체 무슨 일이냐? 아침부터 어딜 가야 한다고?”
“제논 찾으러요.”
“제논 그놈 외박했냐? 도대체가 걔는…….”
장 대표가 차를 출발시키며 투덜거렸다. 한호성은 차분하게 말했다.
“대표님. 믿기 어려운 일이란 건 알지만 이제 믿으셔야 해요.”
“응? 갑자기 뭘 믿으란 거냐?”
“영찬이 말이 맞아요. 걔 정말 강문 그룹 4세 우영찬이고, 제논과 몸이 바뀌었던 거예요. 그런데 어제 원래대로 돌아갔고요.”
“…….”
“우리 지금 진짜 제논 만나러 가는 거예요.”
순간, 차가 미끄러지듯 휘청거렸다. 뒤차가 경고 조로 클랙슨을 울렸다. 장 대표는 뒤늦게 핸들을 바로잡았다.
“……너까지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호성아.”
“하필 운전할 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대표님도 제논을 보면 믿을 수밖에 없으실 거예요. 그리고…… 대표님도 사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우영찬과 제논은 다르다는 걸요.”
장 대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 괴괴한 적막이 감돌았다.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만이 떠들어 댈 뿐이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목적지는, 다름 아닌 우성한의 자택이었다.
***
장 대표의 편견은 조금씩 금이 가더니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첫째로 강문 전자의 우 전무를 보았고, 둘째로 그마저 우영찬과 김제국의 몸이 바뀌었었다고 증언했으며, 셋째로 제논을 만난 까닭이었다.
이 드넓은 저택에서 구석에 처박힌 채 몸을 옹송그린 그는, 장 대표가 아는 제논이 맞았다.
모든 증거가 한호성의 주장을 탄탄히 뒷받침해 주었다. 결국엔 장 대표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게 곧 완벽히 받아들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장 대표는 온몸에 힘이 풀린 나머지 휘청거리며 저택을 나섰다. 한호성이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갈 땐 제가 운전할게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일단 타세요. 제논, 너도 타고.”
한호성은 넋 나간 듯 멍한 두 사람을 차에 밀어 넣었다.
그 길로 숙소에 돌아가자, 멤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대표님?”
“제논 넌 어젯밤에 어디 갔냐? 설마 외박했다가 대표님한테 걸린 거야?”
또다시 설명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호성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게. 얘가 진짜 제논이야. 지난 석 달간 우리와 함께했던 사람은 우영찬이고.”
“…….”
표정을 보아하니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장 대표 다음은 멤버들이라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번 고비는 비교적 수월히 넘길 수 있었다. 장 대표가 도운 덕분이었다.
“호성이 말대로다. 나도 이런 소리를 하는 내가 미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사실이야. 우영찬의 친형까지 증언해 줬으니까.”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각자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한호성도 그 나름대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떡해야 해?”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주진일지도, 문해일일지도 혹은 설이태일지도 모른다. 하이파이브라는 이름의 한배를 탄 사이니만큼 함께 위기에 처했으니, 누가 망연자실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문득 한호성은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 우영찬이 제논에게 빙의했을 때도 이러했다. 잘 나아가던 배에 구멍이 뚫린 느낌. 혹은, 잘 닦인 도로를 질주 중인 스포츠카의 액셀이 망가진 듯한 기분.
그러나 그때도 위기를 잘 넘겼으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터였다.
“괜찮아.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야.”
한호성은 멤버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여태까지 그래 왔듯 잘할 수 있어.”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못 할 일이란 없다. 한호성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힘이 합쳐지지 않았다.
본래도 협조적이지 않았던 제논은 더더욱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마음을 탁 터놓고 대화하면 좋을 텐데, 그러긴커녕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장 대표가 어르고 달래다 못해 계약서까지 들먹였으나 소용없었다. 제논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이주진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옆의 설이태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비활동기였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곡 발매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이러다니…….”
“……차라리 우영찬이 나아.”
문해일이 주먹을 말아 쥐며 말했다.
“걘 자기 일이 아닌데도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했어. 그런데 저놈은 뭐야. 회피도 정도가 있지, 차라리 탈퇴하든가. 자기 일을 내팽개치면 어떡하냐? 아이돌 활동은 곧 팀 활동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
“어떻게 굴러온 돌보다 박힌 돌이 못할 수가 있냐고!”
한호성도 내심 문해일과 같은 의견이었다.
제논이 안쓰러운 마음은 여전하지만, 한호성도 사람인지라 지칠 수밖에 없었다. 제논이 보인 무책임한 태도가 실망스럽기도 했다. ‘차라리 우영찬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문드문 들 정도였다.
‘영찬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자신의 몸을 되찾았으니 일상을 만끽하고 있을 터다. 연락 한 통 없는 게 조금 서운했으나 그렇다고 먼저 연락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이쪽 사정을 전하자니 답답한 일뿐이어서였다.
“제논은 당분간 활동 그만두는 거지.”
“응. 대표님이 내일쯤 공지 띄울 거라고 말씀하셨어. 제논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서 활동 중단한다고.”
딱히 핑계도 아니었다. 한호성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난 이제 제논 데리고 병원 다녀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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